250화 의미가 있을까 (4)
약속된 사흘째가 되었으나, 몸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근육통은 좀 덜해졌지만 열이 도통 내려가질 않았다.
“흐.”
하나 움직일 수는 있다. 그래, 이제 침상을 벗어날 수는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나는 대삼림을 나서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기사님, 혹시 가십니까?]
“때가 되었을…….”
[진짜 가신다고요?]
그러나 그 시도는 시작부터 막혔다. 동굴에 똬리를 틀고 있던 산군이 갑자기 고개를 들이민 탓이다.
[우리가 으-뜨케 기사님 목숨을 붙여 놨는데, 이걸 진짜 홀랑 가 버리신다고요!?]
산군의 기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구우우우 하는 본래의 소리에 나에게만 들리는 말소리가 섞여 동굴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명조차 압도하는 울림에 내 입이 살금 벌어졌다.
[아이고, 아이고오. 기사님 살린다고 지가 약초도 재배하고 열매도 손수 키웠는데! 그렇게 간호했는데에에. 어떻게 기사님이 이대로 가 버린다고 하실 수가!! 어떻게 기사님이이!!]
…와중에 말 내용은 왜 그러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은혜도 모르고 염치도 없는 호로새끼 같잖아!
[기사님이 이런 분인 줄 지가 알았나. 아이고아이고.]
나는 꼬리로 제 얼굴을 닦으며 꺼이꺼이 우는 산군의 모습에 어이가 나갔다.
이, 이게 그렇게 울 일이야……? 객관적으로 이번 사건의 겉면만 보면 내가 후안무치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안면몰수한 뻔뻔한 후레자식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건의 아랫면을 따져 보면 납득 못 할 수준은 아니잖아! 아랫면이 더 중요한 사건인 것도 맞고!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천둥뱀이시여, 이게 어찌 된 영문입니까?”
상상치도 못한 산군의 행태에 내 얼이 좀 나갔을까. 그 때문에 잠에서 깬 제사장들이 달려오는 것도, 그들이 나를 발견하고 둘러싸는 것도 막지 못했다.
발목이 단단히 잡혀 버렸다.
“…놔라.”
아니이이, 이 사람들아! 내가 진짜 당신들 싫어서가 아니라 당신들 생각해서 이러는 건데 왜 그래!
이러다 나 숨겨 준 거 들키면 댁들만 고생이라니까? 이제 외부와 교류 시작한 마당이니 더 곤란해질 거라니까?
당신들, 어? 아무리 신앙이 달라도 그렇지 신전과 적대적 관계가 되는 게 안 무서워? 문제가 되면 다시 쇄국해 버리면 그만이다, 뭐 그렇게 여기는 거냐고!
“나는 저주를 품은 주제에 내 목적을 위해 대의를 저버린 자다.”
나는 그래도 좀 쉬었다고 팽팽히 돌아가는─사흘 전에 비하면 팽팽인 거지, 평상시보단 못할 거다─머리로 말을 골랐다.
떠나야 한다. 지난 삼 일간, 날 보호하려는 이들의 태도가 진심임을 알아 버렸기에 이 욕구는 더욱 강렬했다. 나는 나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도리어 피해를 입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너희가 보호해 줘야 할 대상이 아니다.”
욕심내다가 이곳을 망치는 것으로 지난 며칠간 얻은 온기를 잃고 싶지 않다.
[기사님…….]
“저희는 당신을 보호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 내 말이 모두를 짓누르기 전,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제사장들을 두 무리로 갈랐다. 그 사이로 보이는 건 오래 마주하진 않았으나 인상 깊게 박혀 있는 한 소년이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커진 키와 길어진 팔다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저 당신께서 쉴 수 있는 요람이 되고자 할 뿐.”
“…필요 없다.”
“아니요, 보금자리가 필요 없는 생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너의 의견일 뿐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이가 동의할 의견이겠지요.”
헤어진 지 그렇게 오래 안 됐을 텐데… 아이는 정말 빨리 크는구나. 나는 5cm는 족히 자란 듯한 아이, 아니 대족장을 두고 묘하게 떨떠름해졌다. 보통… 이렇게까지 빨리 자라나……?
“혹 주제 넘은 발언이었을까요? 하지만 대삼림의 은인이시여, 이 숲이 당신께 진 빚을 고려한다면 이 욕심은 필연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대족장이 원래 이쪽 말을 할 줄 알았나?
“…내가 이 숲에서 행했던 일은 오직 나 개인의 의지로 수행한 것이니, 너희가 갚아야 할 빚은 없다.”
“그렇습니까?”
혹시 그때 일 이후로 이쪽 말을 배운 건가. 그치만 말솜씨가 너무 유창하지 않아? 그 기간이 그렇게 긴 것도 아니었는데.
물론 그때 이미 이쪽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직접 소통했을 테니까… 정말 헤어지고 나서 새로 배운 건가?
“저희는 천둥뱀께 보은코자 당신의 요청에 따라 외부에 편지하고 사람들을 들였건만, 정작 우리가 보은코자 했던 은혜는 없었던 것이군요.”
문득, 대족장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대족장의 언어 실력에 감탄하느라 정신 팔렸던 나는, 그제야 미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잠깐, 이거, 설마?
“그렇다면 이건 천둥뱀께서 이 숲에 진 빚이라 보아도 되겠습니까?”
…이거 사기야!
“그건 억지…….”
“위대하신 검은천둥뱀께서 졸렬한 자들처럼 말을 번복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
“…….”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그래, 얘 대족장이었지. 산군이 막 뽑아서 데려다 둔 거긴 하지만, 그래도 대족장이었지……! 어리긴 해도 대족장의 임무를 훌륭히 소화하고 있는 애였지……!
“누우십시오.”
나는 뒤에서 헤벌레 웃고 있는 산군과 빙그레 미소 짓는 제사장들과 해사하게 협박하는 대족장을 보며 허망해졌다.
아니, 나는 끝까지 감정적 설득 할 줄 알았는데… 이걸, 이걸 중간 꼬투리로…….
“…사흘 뒤에는 떠날 것이다.”
“그건 그때 가서 이야기할까요?”
나는 영악하고 개구지게 웃는 소년을 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열이 다 내려가지도 않은 상태라 더는 머리 굴리며 말 잇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천둥뱀이시여, 거짓말은 포기하십시오.”
“……?”
“진정 개인의 목적을 위해 대의를 저버리셨다면, 저희 같은 유용한 패는 진즉에 쓰려 하셨을 것 아닙니까.”
어쩌면… 그냥 아이가 하는 도발에 더 열이 오른 걸 수도 있고.
* * *
본인이 한 말은 지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건지 뭔지. 사흘 뒤에 또 도망치려 든 인간을 보며 육귀는 지느러미를 한 번 움직였다. 산군이랑 대족장이 미리 대기 타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도주에 성공했을 것이다.
“너 또……!”
“이 숲이 천둥뱀을 위하여 움직인 값이면 그래도 족히 한 달은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억지 부리지 마라.”
“역시 더는 안 통합니까?”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다. 대족장은 기사의 도주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을 것을 예상했고, 그에 대해 미리 준비했다. 그것이 인간의 발목을 또 한 번 잡았다. 산군이 도망 못 치게 할 거라며 기사를 제 몸으로 꽁꽁 감싼 건 덤이었다.
“그보다 이것 좀 드셔 보십시오. 이 시기에만 나는 과일인데…….”
[히히, 이번 년은 지가 힘을 좀 썼어가 좀 더 맛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일 안 하나?”
“늪의 제사장들이 많이들 도와주어, 근래는 한가합니다.”
[기사님 잡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다 안 캅니까. 차피 자질구레한 건 저 띨빡이들로도 충분합니다.]
그 다다음 날도 비슷했다. 비록 기사는 환장할 것 같다는 얼굴이었지만 늪의 권력자 둘이 엉겨 붙어 있으니 도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결국 인간은 발의 상처가 모두 사라지고, 열이 전부 내릴 때까지 늪에서 휴식을 취했다. 보다 정확히는, 산군이나 대족장이 마음을 놓는 그 순간까지.
[…가냐?]
이젠 갈 마음을 완전히 접었나 했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 보네. 육귀는 그런 잡념을 뒤로 넘기며 인간을 힐끗 보았다.
야밤을 틈타 옷을 차려입는 인간은 서늘하니 날 선 기도만 풀풀 풍기고 있다. 이십 일 가까이를 끙끙 앓았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형상이다.
“충분히 머물렀다.”
그렇지만 저 무뚝뚝한 겉면과 달리 속내는 물러 터졌거나, 영악하거나 둘 중 하나에 불과하다.
육귀는 강력하게 밀어붙이면 이곳을 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을 존재를 두고 눈을 게슴츠레 접었다.
[왜 몰래 떠나지?]
나갈 능력이 됨에도 나가지 않은 점에서, 육귀는 그가 이곳을 이용하려 드는 건가 싶었다. 다른 말로는, 자신이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음을 확신했으니 작정하고 엉덩이 붙이려 하는 거라고.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 가설은 깨졌다. 협력자의 신뢰도를 확인했다면 계속 눌러앉아야 함이 마땅한데, 그는 또다시 떠나가는 걸 택했다. 단순히 건강을 되찾아서라고 치부하기엔 어딘가 미심쩍은 선택이었다.
[몸이 나았으니까 간다, 라고 하면 저들도 아쉬워할지언정 붙잡진 않을 거야.]
왜냐면, 방금 말한 그대로의 이유가 있었으니까.
“안다.”
하나 기사는 몰라서 이렇게 구는 것이 아니었다. 군화에 발을 집어넣고, 베스트와 코트를 차례로 걸친 이가 오른손을 건틀릿에 집어넣었다.
[그럼 왜 쥐새끼처럼 몰래 가지?]
절그럭.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쇠판과 쇠판이 부딪치며 각자만의 소리를 흘렸다.
“내게 관심이 있었나?”
[…보통의 범주를 벗어난 부분에 대해서는.]
육귀의 답변에 기사는 입술 끄트머리를 내렸다. 한 손으로 들어 올린 대검은 등 뒤에 안착해 적당히 고정이 된다.
“…네가 내 물음에 대답한다면, 나도 그 물음에 응하겠다.”
[거래라. 재밌네.]
다른 이들이 깨어날 걸 대비해 저쪽도 그리 오랜 시간은 투자하지 않겠지만…….
[좋아, 하자.]
육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간이 몰래 도망치는 이유도 제법 궁금했거니와, 도망치는 순간에조차 묻고 싶어 하는 건 또 뭔지 알고 싶었다.
“질문.”
[쥐새끼처럼 몰래 가는 이유.]
“…내가 찾으려는 것을 저들이 안다면, 다시 나를 붙잡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좋아. 그쪽 질문은?]
“마기를 가리는 방법.”
그게 생각보다 예상 외인 게 좀 문제였지만.
[용기가 가상하네. 비록 지금의 내가 너를 용납하고 있긴 하지만, 마기를 지닌 것에 우호적인 입장도 아닌데. 아니면 널 죽일 수 없는 내 상황을 믿고 묻는 걸까?]
“그건 거래를 위한 질문인가?”
육귀는 상대의 말에 숨을 푹 뱉었다.
하긴, 저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간 무리를 따돌린 상황─본인 말로는─이지. 이곳을 나서면 또 걸릴 위험이 있으니, 저런 질문을 하는 것도 대충 납득은 되는 것 같다.
[아니니까 답할 필욘 없어. 그리고 네 질문에 대한 답은…….]
별개로 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 줄까, 아니면 모르쇠 굴까. 육귀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냥 아는 만큼 대답해 주기로 마음 먹었다. 어차피 그의 지식에 담긴 것 중 저 인간이 쓸 만한 건 없었다.
[봉인이 제일 흔하지? 물론 봉인을 하려면 그만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또 관련 지식이 있는 자들에게 발각될 수 있는 위험이 있지만.]
“…봉인 이외의 방법은?”
[그건 ‘질문’이지?]
“물어볼 게 있나?”
[네 목적. 인간들로부터 도망쳐 나오고, 얘네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찾으려 하는 것.]
한편, 그의 질문에 기사는 한동안 침묵했다. 마치 이것을 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한 번의 질문 기회와 이번 대답 자체가 가지는 무게를 재어 보는 것 같았다.
“…집으로.”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
승리한 건 전자였다.
예상을 엇나가도 단단히 엇나간 답이라,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서도.
[너무 짧은데.]
“…맹세해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이게 맹세까지 할 일인가…….]
그렇지만 기존의 답조차 의아한 마당에 저런 요구까지 더해지니, 얼만큼 깊은 사정이 있는 건가 하는 호기심이 든다. 더불어 맹세라고 해 봤자 딱히 구속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약속에 불과하지.
해서 육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말뿐인 약속, 해 봤자 손해는 아니라는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난 원래 이 몸의 영혼이 아니다. 이 몸의 원주인이 악마와 계약하는 바람에 끌려온 거지.”
뭐, 만약 그런 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면 절대 연관되지 않으려 했을 텐데.
육귀는 인간의 사정이 무엇이든 그의 알 바가 아닐 거라며 빈둥거리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뭐, 사정이 뭐든 알 바가 아니야? 젠장! 완전 알 바잖아!!
그는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 멱을 따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