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의미가 있을까 (3)
[그… 내가 말은 안 얹으려 그랬는데.]
물컹물컹하고 축축한… 선홍색의 무언가가 온몸을 감싸는 꿈을 꾸었다.
[정말 이게 최선이냐……?]
중간중간 딱딱한 무언가도 만져졌는데, 그것이 고르게 일렬로 나 있어 꼭 난간인가 했다.
[그, 입으로 물고 가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있지 않았을까?]
아… 그렇지. 그 꿈에선 수시로 비바람이 몰아쳤다. 강도가 어찌 그리 센지, 뚫려 있는 양옆으로 계속해서 비가 들이쳤다. 심지어는 천장에서조차 그랬다.
물론 천장에서 떨어지는 비는 어째 점성도 있고 물방울의 크기도 굉장히 커서 이게 정말 비가 맞나 싶기도 했는데… 꿈결에 기분 탓이겠거니 넘겼다.
[난 모르겠다…….]
아무튼 참 요상한 꿈이었다. 별로 다시 꾸고 싶진 않지만.
* * *
“……!”
그리고 낯선 천장이다. 아니다. 동굴 천장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힘준 눈을 살살 풀어내며 안구를 데굴 굴렸다. 옆으로 돌아간 홍채가 주변 광경을 조심스럽게 가져왔다. 기울어진 세계에선 경이로운 자연이 다정한 색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진짜 아름다운데.
나는 그리 감탄하며 눈을 깜빡였다. 가운데 천장이 뚫린 거대한 동굴과 그 안으로 드리워지는 햇살, 그 빛을 먹고 자란 온갖 초목, 초목들 사이사이로 흐르는 투명한 샘물…….
다시 한번 말하지만 탄복하지 않고는 못 배길 풍경이었다.
“늪의 경치가 마음에 드십니까?”
하나 경관이 아무리 가려할지라도 상황 파악을 먼저 했어야 하는 건데.
나는 그것을 깜빡했고, 덕분에 불쑥 건네진 물음을 두고 입술을 꾹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이곳에서 깨어났고, 지금 말 거는 이는 대체 누군가? 그는 나의 정체를 알고 도왔나 모르고 도왔나? 뒤늦은 물음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내 머리통을 마구 두들기는 중이다.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그 과정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검을 집으려는 시도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행위는 실패했다. 상대가 나를 제지한 것도 제지한 것이지만 결정적으론 몸이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겹겹이 쌓인 천 위로 미세하게 들렸던 몸이 철푸덕 얹어졌다.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았습니다.”
천근만근이란 단어가 멀리 있지 않네. 나는 그따위 생각과 함께 잇새로 앓는 소리를 흘렸다.
컨셉에 맞지 않아? 그것도 뭐 정도껏 아파야 가능한 거지, 이건 내가 지금껏 겪어 본 근육통 중 제일이다. 온몸이 떨리고, 무겁고, 사지에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정신 차린 것도 놀라운 일이지 않나 싶다. 추위를 느낄 수 없는─템빨로 느끼지 않게 된?─몸이 오한에 질려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내가, 내가 왜 이곳에 있지?”
그나마 다행인 건, 도로 눕는 과정에서 살펴본 상대의 얼굴이 영 낯익단 점이라. 나는 세르항의 제사장(으로 기억하는 인물)을 향해 가쁜 숨으로 물었다.
가져온 물그릇에 막 마른 천을 담그던 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기억이 없으신가 보군요. 산군께서 당신을 데려오셨습니다.”
그녀는 천이 물에 충분히 적셔졌다 싶을 즈음 도로 꺼내 쭉 짜냈다. 손이 여럿이라서 그런가 물수건을 만드는 사이 다른 손으론 컵에 물을 따르는 것이 제법 효율적으로 보인다.
“…언제?”
“이곳에 처음 도착하신 게 이레 전 일입니다.”
뭐? 이레? 내가 일주일을 꼬박 앓아누웠다 이거야?
“그 전에 잠시… 물 좀 드시지요.”
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무언가 더 묻고 싶었으나, 상대가 한발 빨랐다.
그녀는 내 피부에 맺힌 땀들을 닦아 주는 한편,─그제서야 내가 상의탈의 중임을 깨달았다. 화낼 기력도 없고 그러기도 싫어서 아직 눈치 못 챈 척 넘겼지만─ 방금 물을 따랐던 컵을 내 입가로 가져왔다.
“진통 효과가 있는 열매와 열을 내려 주는 약재로 우린 차입니다.”
내가 그걸 거부할 수도 있다 생각한 것인지, 효능에 대한 약한 해설은 덤이었다. 어차피 이쪽은 거부할 힘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바짝 마른 입을 열어 조금씩 들어오는 물을 받아 마셨다.
【아오리, 천둥뱀께서는 어떠십니까?】
【방금 깨어나셨습니다. 상태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최소한 안정권에는 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한 5분 정도, 아기처럼 홀짝홀짝 물을 받아 마시고, 헐벗은 채로 상체 구석구석을 닦임당했을까. 모르는 얼굴이 다가왔다.
물론 본 적 있는데 그냥 내가 못 알아본 걸 수도 있긴 하다. 전신이 돌덩이처럼 묵직·딱딱해서 그런가.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명징해지기는커녕 도리어 흐려지기만 하는 상황이거든.
【천운이군요. 어제까지만 해도 맥이 안 잡혀서 걱정했는데…….】
【평범한 분은 아니시니까요.】
그렇지만 이대로 자면 분명 문제가 생기겠지… 건강적인 뭐 그런 게 아니라, 다른쪽 안위 같은 게…….
나는 계속 내려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막아 내며 까슬한 혀로 이 안쪽을 쓸었다. 감기로 혀가 말랐을 때처럼 껄끄러운 쓴맛이 느껴졌다. 목구멍을 촉촉히 적실 만큼의 물을 마셨는데도 그랬다. 진짜 몸 상태가 안 좋긴 안 좋나 보다.
【일단은 제가 계속 간호하겠습니다. 가벼운 식사거리만 대신 가져다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지요. 곧 가져오겠습니다.】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정신을 붙이고 있는 동안, 두 사람 간의 대화가 끝이 났다. 세르항의 제사장이 내 곁으로 돌아와 다시 땀을 닦아 주기 시작했단 소리다.
미적지근한 물수건이 다가올 때마다 오한으로 살갗이 떨렸다.
“…내가.”
하나 그 추위 따위에 질 순 없지.
나는 탁해진 목소리를 어떻게든 끄집어냈다. 목구멍을 힘겹게 쥐어짜 낸 결과가 가문 대지만큼 쩍쩍 갈라진 소리란 건 다소 안타까운 일이나, 지금은 감안해야 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또 누가 알고 있지?”
그보다 아까 마신 약물은 효과가 언제 도는 걸까. 그거라도 좀 들면 몸이 더 나아질 것 같은데.
“심려치 마시지요. 천둥뱀께서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오직 늪의 제사장들과 대족장께만 전해졌습니다.”
“…어째서?”
“산군께서 비밀로 할 것을 하명하셨습니다.”
음… 그건 좀 다행인 이야기네. 대삼림과 교류를 시작한 바깥 사람들이 내 존재를 전해 들은 건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하니 근심 말고 쉬시지요. 천둥뱀께서, 혹은 산군께서 추가로 지시를 내리시지 않는 한 저희의 입은 영원히 닫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이런 말까지 해 주니 내 마음이 좀 더 놓인다. 완전히 놓이는 건 아니고, 아주 조금.
“나는, 쫓기고 있다.”
“…그러시군요.”
그도 그럴 게… 이들도 진실을 알면 태도가 바뀔 수 있지 않나. 만약 바뀌지 않고 계속해서 날 도우려 한다면─그럴 리는 없겠지만─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날 숨겨 주고 도와준 걸 바깥 사람들이 알면 대삼림 전체에 화가 미칠 테니까.
“날 보호하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렇습니까?”
그렇지만.
“교단이 알면 분명…….”
“검은천둥뱀이시여, 먼저 저희는 외지인이 믿는 신을 숭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존숭하는 것은 오직 산군과 자연뿐이며, 그분의 의지가 우리 모두의 의지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검은뱀이시여, 당신은 칼로 어린 생명을 보호하시고 폭력으로 박해받는 것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나는 더운 숨을 뱉었다. 색색거리는 숨에서조차 느껴지는 열기는 신체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심할 것이다. 춥고, 그러면서도 덥고, 그렇게 아프다.
“남들이 그것들로 하여금 피와 죽음만을 가져올 때, 오직 당신만이 삶과 생명을 돌려주셨단 말입니다.”
그렇게 서럽다.
갈 곳도 없고 마음 둘 곳도 없는데 아프기까지 했으므로, 그저 서러웠다.
“그런 당신을 알기에, 우리는 억지가 아닌 진심으로, 시늉 대신 실행으로 그분의 뜻을 즐거이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의지와 저희의 의지가 더는 구분되지 못할 만큼, 아주 기껍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달았다.
“하니 그 뒷말은 부디 삼켜 두십시오. 대족장께서 들으시면 슬퍼하실 겁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뻔히 아는데, 그럼에도 이곳에 더 있어도 되겠냐고 묻고 싶어질 만큼.
* * *
“…사흘 후 떠나겠다. 내가 이곳에 머물러서 좋을 게 없다.”
* * *
육귀는 제게 주어진 자리에 가만히 누워, 태풍이 지나간 낮의 한가함을 즐겼다. 본래 산군 혼자서 썼다던 동굴은 참으로 널찍하고 고요하여 여유를 누리기 딱 좋다.
【존귀한 분이시여, 혹 부족한 게 있으십니까?】
[없어.]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후손을 대대로 공경해 온 인간들이라 그런가, 시중을 담당한 인간들은 참 눈치가 좋았다.
기분 좋은 적막을 깨지 않는 선에서만 필요한 것을 물어보거나, 그의 주위를 청소해 주고 물건을 교체해 주는 것이다.
그들이 적당한 양지에 마련해 준 침대─인간들이 보기엔 새 둥지처럼 보이겠지만─도 마음에 든다. 너비를 넉넉히 두어 반은 햇살이 들고 반은 천장에 가려지는 것이 언제든 원하는 대로 편히 잘 수 있다.
예컨대 비가 오면 그늘에서 자고, 지금처럼 햇살이 좋으면 볕 드는 반경에 나와 낮잠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육귀는 등딱지에서 느껴지는 햇살의 온기를 두고 기분 좋게 골골거렸다.
【시키실 게 생기거든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그래.]
이렇게 말하지만 과연 부를 일이 있을까? 그가 남 부려 먹길 싫어하는 성향이라서 이리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일 자체가 없을 것만 같다.
당장 식사만 해도 시간에 맞춰 따박따박 주어지고, 간식 같은 것도 주변에 미리 가져다 둔 상태니까.
심지어 그냥 가져다 둔 것도 아니다. 그가 안 먹고 내버려 두는 바람에 상태가 안 좋아진다 싶으면 바로 교체해 둔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시킬 일이 생길지나 의문이다.
“…흐으.”
…정말로 의문이다.
육귀는 이 동굴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노려보았다. 그건 그가 있는 동굴의 한쪽 구석, 그의 둥지보다 낮은 지대에 위치한 작은 침상이다. 보다 정확히는 그 침상을 쓰는 인간 하나.
[흐음.]
그는 일주일이 흘렀음에도─물론 그중 절반은 비 맞으며 이동하는 데 쓰였지만─숨소리가 영 좋지 않은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아프면 아프다고 할 것이지, 말없이 혼자 끙끙 앓는 모습이 이해가 안 갔다. 제대로 아물지 않은 몸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미련하기 짝이 없다.
[저러다 죽을 텐데…….]
아까 전 밝힌, 사흘 후에 떠나겠다던 의사 표명도 좀 우습다.
저 인간은 사흘 뒤면 제 몸이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는 건가? 불어 터진 발도 이제 겨우 붓기가 빠진 상황이고 열은 아직 그대로인데?
인간의 신체는 잘 모르지만, 저게 사흘 만에 나을 형편이 아니란 건 알겠다. 결국 인간의 고집이다. 어리석다.
『교단이 알면 분명…….』
정말로, 멍청하다.
[조상니임, 지 왔십니다.]
[그래.]
이상하지. 그는 저 인간이 죽기 싫어서 도망쳤다고, 그러니 그 도시에서 봤던 인간처럼 자신만 아는 군상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는 길에 산딸기 쪼매 줏었는데 좀 드시겠십니까? 달달하니 맛있습니다.]
이곳의 인간이 자신을 밀고할 걸 걱정해 떠나려는 걸까, 라고 생각하기엔 뭔가 이상하다. 산군이 그를 비호하는 이상 이 인간들은 저 인간을 절대로 적대하지 못할 테니.
함에도, 그 사실을 전해 들었음에도. 저 인간은 여전히 떠나려고 한다. 그건 왜인가? 시중을 들던 제사장이 ‘삼켜 두라’고 한 뒷말은 무엇이고?
[…됐고 저 인간이나 어떻게 해 봐라.]
[와요? 무슨 문제 있었십니까?]
[사흘 뒤에 간단다.]
[예에???]
[뭐, 나야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아이고, 이 기사님이.]
…뭐, 그 답이 무엇이든 별로 그의 알 바는 아니겠지만.
아무렴, 저것은 그래 봤자 악마를 담은 그릇에 불과한 걸.
[안 되겠십니다. 찰싹 붙어서 못 가게 붙잡든가 해야지.]
[힘내라.]
그런 연유로 육귀는 산군이 뭐라 하든 대충 흘려듣기로 결정을 내렸다. 미래란 결코 확신해선 안 되는 것임을 아직 잘 모를 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