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48화 (248/389)

248화 의미가 있을까 (2)

[그만, 그만 설명해. 네가 저놈을 얼마나 좋아하는진 알겠으니까.]

[이이이잉.]

[얜 진짜 누굴 닮아서 이렇게 실없는 거야?]

강맹한 빗줄기가 계속해서 내 몸을 때리는 시간.

나를 향한 산군의 찬양에 목소리의 주인은 질색을 하며 그만두도록 명령했다. 그 목소리의 기저에는 여전히 나를 향한 불호가 깔려 있다.

하나 그 감정이 내게 어떻게 와닿는지와는 별개로 만류 자체는 나도 찬성하는 바였다. 아무렴 산군의 찬사는 나에게도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아 지가 왜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한데 저 목소리의 주인은 정말 누구지? 산군이 높여 부르는 걸 보면 최소한 급이 낮은 존재는 아닐 것 같은데…….

나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의 거리감을 토대로 상대의 위치를 재어 보았다. 그리 멀 것 같진 않았다. 대충 어둠이 상대의 베일이 돼 주었더라도 어렴풋이 목격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됐다. 너만 저 녀석을 좋게 본 것도 아니고.]

그러나 정작 눈에 들어오는 건 산군의 미끄러운 몸체뿐이다. 그 외에 보이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알쏭달쏭한 일이었다.

[불안한 점이 없진 않지만… 일단 넘어가지, 뭐.]

아. 아니면, 혹시 이 존재도 산군처럼 허공에 녹아드는 것이 가능한 건가……?

나는 그런 가정을 하며 내가 놓친 대화에 다시 집중했다.

일단 넘어가겠다. 나를 거북하게 여김에도 용인키로 한 말이 뇌에서 두어 번 곱씹어졌다. 내 기분이 어찌 됐든 간에 나쁜 결론은 아니었다.

[암요, 암요. 기사님은 진짜 믿어도 된다 아입니까.]

[저게 뭘 했는지를 알면 그 말 못 할 텐데 말이지.]

[예?]

[됐어. 이미 넘어가기로 한 문제니까.]

다만 말을 조금 더 들어 보거든, 뭔가… 상대가 나를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잘 아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나란 존재를 기존에 인지한 적 있는 듯한……?

“…날 아나?”

나는 차가우면서도 더운 숨을 뱉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저런 목소리의 소유자와 언제 엮였던가 하는 헤아림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반경 내에는 없다. 그는 내가 모르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나를 알고 있는가?

…혹시 진짜 악마기사와 인연이 닿았던 존재인가?

[날 기억 못 하나 본데… 하긴. 그때와 지금의 내 꼬락서니가 많이 다르긴 하지.]

미약한 기대감에 나는 무심코 물었고, 돌아온 답은 그 마음을 좀 더 부풀려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확정은 아니지만─을 마주한 가슴은 방망이질을 치듯 빠르게… 아니다. 도리어 평소보다 느리게 쿵쿵대고 있다.

[오잉. 두 분 만나신 적 있으십니까?]

[어.]

[대체 언제요?]

[얼마 안 됐어. 며칠 전 네가 호구같이 굴어 준 거기, 거기 있던 도시가 실시간으로 망해 가던 때에 마주쳤던 거니까.]

[…으잉?]

그러나 이어진 말의 무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베뮈르헨이지 않나 싶었으니. 순식간에 깨져 버린 소망을 두고 나는 뱃가죽이 헛헛해지는 느낌만 얻었다. 긴장했던 근육이 늘어지며 서늘하게 식어 갔다.

[저 녀석 덕분에 내 반쪽도 악행을 멈추게 됐고, 꼭두각시 신세던 몸뚱이도 해방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홀라당 들고 가 버릴 줄은 몰랐는데… 아, 그래. 마침 잘됐다. 너 혹시 내 예전 몸 돌려줄 의향 있어?]

하나 그 공허함에 사로잡히기도 잠시. 나는 상대의 말에 의문을 품고 말았다.

반쪽의 악행? 꼭두각시 신세던 몸뚱이의 해방? 그걸 들고 날라?

아니, 그 모든 걸 제치고 예전 몸이란 건 대체……?

나는 그가 한 말을 두고 둔해진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 보았다.

아무렴 내가 기억하는 베뮈르헨에서의 일은 용암악마와 대적한 사건 그리고 기상했더니 처형될 상황이었던 것, 이 두 가지에 불과했다. 더불어 그 두 개는 상대가 묘사한 그림과 연결된 건덕지가 전혀 없었… 아. 설마?

“기억에 없다.”

[돌려주기 싫다?]

나는 속눈썹에 계속 맺히는 빗물을 떨어트리며 말을 덧붙였다.

“말뜻 그대로의 의미다.”

그런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불친절하고 퉁명스러운 컨셉을 너무 오래 연기해서인가. 추가한 말조차도 청자에게 깊은 해석을 요구하는 단답이었던 까닭이다.

아무래도 집에 돌아가면 소통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

[…그건 네 안에 마기의 핵이 존재하는 것과 관련 있는 문제려나?]

그나마 희소식이랄 게 있다면 그건 상대의 눈치가 제법이란 점이라.

‘그건 내가 한 게 아니다.’라는 부연 설명을 붙이기도 전에 상대는 말뜻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질문을 돌려주었다. 나는 젖은 속눈썹을 털어 내기 위해 또다시 눈을 깜빡였다.

“…그래.”

[그럼 내 힘은 못 돌려받겠군.]

“…힘을 빼앗겼나?”

[내 입장에선 대강 비슷하지. 승리자가 마땅한 전리품을 챙겨갔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딱히 할 말이 없지만.]

그보다 상대 정체는 정말 뭘까. 이야기만 들으면 악마가 나 대신 육신을 지배하고 있을 순간에 몸뚱이나 힘을 강탈당한 것 같은데…….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육신을 빼앗겨서일까? 근데 몸을 빼앗기고도 살아 있을 수 있나? 아니면 옛 몸이라 했으니 새 몸이 따로 있다거나?

한데 그 이전에 악마가 힘을 손수 강탈할 정도면 얼마나 강했던 거지? 그런 힘을 가지고도 목격된 바가 없는 건?

악마는 강탈한 것을 어디로 빼돌린 거야?

[돌려받을 수 없다면 됐어.]

들으면 들을수록 쌓이기만 하는 의문이 내 머리를 헝클였다. 약간의 한숨과 체념을 담은 문장이 귓속을 파고든 건 그다음 일이었다. 두두두두. 일그러진 빗소리 사이로 뭉근하게 퍼진 말은 정확히 세 번 곱씹고 나서야 이해가 갔다.

“…쉽게 포기하는군.”

[이미 잃어버린 것에 집착해 봐야 추할 뿐이니까. 잃어버린 과정에 내 탓이 없는 것도 아니고.]

놀랍게도 그는 힘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에 큰 유감이 없어 보였다. 의외였다. 나를 불쾌하게 여기는 만큼 이 또한 기분 나빠하리라 생각했건만.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자.]

[이잉. 얘기 끝나셨십니까?]

[응. 왜, 할 말 남았어?]

[하고 싶은 말이야 쪼매 있지요?]

물론 같은 육신을 쓴다는 이유로 내게 책임을 떠밀지 않은 건 감사한 일이다. 만약 상대가 그런 억지를 부렸다면 나는 제법 힘들었을 것이다.

[기사님이 와 여기 계시는지랑, 어디 가시는지. 일행들은 왜 다 버리고 다니시는지 뭐 그런 거……?]

[묻고 싶은 것도 참 많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나 혼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히히.]

각설하고, 저 존재는 내게 더 이상 볼일이 없는 건가. 나는 아직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나는 대화에서 물러서려는 상대를 잡으려다가, 산군의 존재를 의식하고 한발 물러났다.

산군이라면 내가 조금 이상하게 군다 해서 내 머리를 터트리려 들진 않겠지만… 혹시 또 몰라서였다. 용사 일행처럼 빡빡하게 연기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최소한의 컨셉은 지키는 게 나을 것이다.

[하믄 기사님, 기사님은 왜 이곳에…….]

정말이지, 주홍글씨가 따로 없다니까. 컨셉 때문에 하고 싶은 것도 매번 막히고, 쉽게 갈 일도 돌아가야 하고…….

[기사님?]

응? 아, 그래. 산군이 말하고 있었지.

나는 잡생각에 너무 빠져들었나 반성하며─이상하지. 나는 분명 그렇게 몰두하지 않았는데─집중의 대상을 바꾸었다. 뻑뻑한 눈으로 보는 흰 뱀은 윤곽선이 다소 흐린 감이 있다.

“듣고 있다.”

[어어. 예에. 그래서 이곳엔 어찌 오셨답니까? 지야 대삼림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카지만 기사님은 북쪽으로 가셔야 하는 거 아입니까?]

그래도 목소리는 아직 들린다. 나는 뭉개진 소리를 몇 번 되새긴 끝에 문장을 온전히 이해했다.

“그건.”

그런데 말이야.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산군이 내 컨셉을 아주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악마사냥에 미친 놈이란 건 대충 알 텐데.

그냥 베뮈르헨에서 탈주했다는 사실 자체를 덮어 버려? 베뮈르헨 사태를 아는 존재가 옆에 붙어 있는데 그게 되나?

“그건…….”

…그래도 아예 얼버무리는 게 그래도 낫겠지. 그다음에 바로 작별을 고해 버리면 이상함을 느끼더라도 뭐라 할 순 없을 테니까.

[고건?]

그러니까.

“…….”

나는 비가 오는데도 요상하게 말라붙은 목구멍을 움직였다. 그런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야는 그 잠깐 새에 더 흐려져, 산군이 두 개로 보일 지경이다.

[…기사님?]

…잠깐. 사물이, 아니 사물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상이 두 개로 분열되어 보이는 건 정상이 아니지 않나?

[어?]

나는 산군이 두 개로 나뉜 것도 모자라, 세계가 기우뚱 기울어지는 걸 보며 의문을 품었다. 세상이 왜 돌지? 세상이 돌면 안 되는데. 진짜 뭐야? 세상이 어째서… 아.

혹시 문제 있는 건 나인가?

[아이고오! 기사님 죽는다!!]

나는 웅웅 울리는 산군의 목소리를 두고 눈꺼풀을 사르륵 닫았다.

오늘따라 이명이 유난하다 싶었더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네.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 * *

[이, 이를 우짭니까!!]

산군은 쓰러지는 이를 간신히 붙잡은 후, 혼비백산하여 외쳤다.

와중에 상대를 보호하고자 휘감아 둔 꼬리는 상대의 차갑고 또 뜨거운 체온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그가 익히 아는 인간들의 온도가 아니었다.

[이, 이러다 죽으시는 거 아입니까!]

그에게 발이 있었다면 지금쯤 동동 구르며 대지를 초토화해 놨겠지. 하지만 산군은 발이 없고, 있는 꼬리도 상대를 감싸는 데 써 버린 상태다. 그는 그런 이유에서 주위를 아주 얌전히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죽었어?]

[조상님!!]

[아니네.]

하지만 그런 산군과 달리, 육귀는 혀를 끌끌 찼다. 그대로 죽어 버렸으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려나. 냉정한 사고는 덤이었다.

[왜 그렇게 유난이야? 고작 인간 하나, 그것도 악마를 품은 인간이 쓰러졌을 뿐인데.]

그렇지만 이 생각이 과연 냉정하기만 할까?

육귀는 산군의 몸뚱이를 엉금엉금 기어, 쓰러진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섰다. 하얗게 질리다 못해 푸른 기까지 도는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예에? 악마요?]

[역시 모르고 있었구나.]

그러나 그것을 두고 안쓰러움보다는 공포감이 먼저 든다. 어쩔 수 없다. 겉보기에는 마기만 좀 담고 있는 듯한 저것은 실상 대악마를 품은 그릇이었다.

[저 안에 든 건 대악마야.]

[예에에에에???]

대악마 따위가 어쩌다 인간의 육신에 기생하게 됐는진 모르겠다. 인간을 온전히 밀어내기는커녕 되레 인간이 주도하고 있는 이유 또한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죽이는 건 어때?]

[조, 조상님?]

그가 아는 건 오직 하나. 저 대악마가 깨어났을 때 내보일 힘이다.

[안 그래도 강한 악마가 내 반쪽과 몸뚱이마저 삼켰어. 나와 흑사가 가지고 있던 힘 전반을 독차지했다고.]

…일단, 저것이 나선 덕분에 타락한 흑사가 더 큰 행패를 부리지 못하고 죽었음을 안다. 악마들의 둥지가 되어 더럽혀지던 그의 몸뚱이 또한 저것의 불이 아니었다면 사방에 민폐란 민폐는 다 끼쳤을 것이다.

그러니, 그러므로. 그는 저것에게 약간은 신세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상이나 가니? 태곳적 짐승의 힘 하나를 고스란히 삼킨 대악마가 어디까지 강해질지?]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것에게 진정 감사를 표해야 할까?

필사적으로 인간의 몸에 달라붙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제 껍데기와 함께 불타 버렸을지도 모르는 노릇인데? 흑사의 배신으로 흑사에게 다 빼앗긴 상태였을지언정 본래 그의 것이던 힘도 송두리째 뜯겼는데?

예컨대, 이런 거다.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영구한 장애를 입었지만, 그 대가로 전쟁에는 끌려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인간은 자신의 다리를 부러트린 사고에 감사해야 할까, 아닐까.

[서쪽의 용이, 그리고 네 녀석이 이 인간을 좋게 본 건 알겠어.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답은 ‘아니다’일 것이다.

[더구나 저 인간… 아마 죽기 싫어서 여기까지 도망쳐 온 걸 텐데…….]

[뭐, 예? 죽기 싫어서 도망 왔다고요?]

[그 천막에 있을 때, 인간들이 저 인간을 두고 처형한다 뭐다 말하는 걸 들었어. 그리고 저 인간은 야밤에 말없이 사라졌고. 그럼 당연히 죽기 싫어서 도망친 거 아니야?]

[보통은 글킨 한데…….]

하므로 육귀는 산군을 종용했다. 저것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 뻔했다거나 타락했지만 그래도 제 반쪽이었던 것을 죽였다는 사감 따위에 의거한 종용은 결코 아니었다. 이것이 이 세상에 보다 좋을 것이라는 확신에 의한 것이지.

[…안 그러면 안 됩니까?]

그렇지만 그 모든 걸 들은 산군은 우물쭈물거리며 조용히 제 의견을 피력했으니.

[…너무 지 욕심입니까?]

안 된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거면 또 몰라. 쫑알쫑알대던 애가 갑자기 풀이 죽어 소심하게 중얼거리자 육귀는 말문이 턱 막혔다.

[욕심… 이긴 하지…….]

[역시 그렇심까… 그치만 지는 그카기 싫은데…….]

[…….]

아니, 이놈은 평소엔 그렇게 눈치를 안 보다가 왜 이럴 때만……!

육귀는 아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으나, 그를 두고 끝끝내 뭐라 하진 않았다. 저것을 죽이고자 하는 건 그이나 정작 그걸 행해야 하는 건─그리고 육귀의 이후 삶을 챙겨 줘야 할 존재도─산군이었던 탓이다.

[난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라.]

뭐어. 저 인간이 살아서 피해 볼 건 솔직히 그들보단 인간들이니까 방관해도 상관은 없겠지. 육귀는 그런 약은 계산 끝에 결국 허락을 내렸다.

추욱 늘어졌던 산군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러믄 어서 집으로 갑시다! 태풍도 오고 있고, 기사님 치료도 어서 해야카니까!]

다시 길을 갈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