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의미가 있을까 (1)
찰박. 그 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결국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피고름이 군화 안쪽에 층을 이룰 만큼 고인 걸 외면하는 건 무리였다.
하면 오늘의 행군은 여기까진가.
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적당한 바위를 찾았다. 다행히 근처에 하나 있었다. 바람막이 겸 의자 대용으로 쓸 만했다.
쓰윽.
그 뒤에는 바위에 등을 붙이고 군화를 벗었다. 부족한 양말 대신 발에 두른 붕대는 붉고 누렇게 척척해진 상태다.
그렇지만 이걸 가지고 기함할 필요는 없다. 군화를 신고 다니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기 때문이다.
여정 중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니지 않았다면 더 빨리 겪었을 일이기도 했다. 아무렴, 직접 걷는 시간을 그렇게 줄였음에도 티눈이나 피부 습진은 결국 생기던걸.
해서 나는 침착하게 붕대를 풀었다. 드러난 발은 표피와 진피가 울룩불룩 벗겨져 있고 전체적으로 퉁퉁 부어 기묘하게 변형된 상태다.
곳곳에 진 피고름 딱지나 이미 찢어져 피를 줄줄 흘리는 상처까지 포함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정상적인 상태의 발은 아니다.
사르륵.
하나 아까 말했다시피, 이건 그저 예정된, 그러니까 언젠간 찾아왔을 일에 불과하다.
이렇게 심한 형태는 처음일지언정 당황할 것까진 없다. 나는 붕대가 새것처럼 변하길 기다리며 발에 연고를 쓱쓱 발랐다.
꿈틀.
그 과정에서 열감은 있으나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 발이 내 뜻을 따라 몇 번 움직였다.
대충 신경에 문제 생겼나 안 생겼나 확인해 본 거였는데… 자색반도 안 보이겠다, 잘 움직이겠다. 아직 피부 괴사 같은 건 생각 안 해도 될 듯하다.
그리고 그거면 아직 충분하겠지. 나는 봉와직염으로 입원했다던 야구 선수를 떠올리다가, 그냥 눈감고 넘겼다.
이렇게 가벼이 넘겨도 되는 질환이 아니란 사실은 애써 넘겼다. 내 입장에선 추적자에게 잡혀 죽나 동반된 합병증(패혈증 같은 것)으로 죽나 그게 그거였다.
대신 모든 처치를 끝낸 후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더 이상 못 걸을 듯하니, 숨이라도 돌릴 요량이었다. 요 며칠 도망친다는 사실에만 집착했지, 내가 어딜 가는지는 확인 안 한 것도 사실이고.
“…아.”
다만 그래.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분홍색과 아이올라이트의 남색, 이글거리는 금빛, 남색을 띠는 듯하면서도 무채색에 가까운 잿빛 구름으로 자신을 장식한 하늘이 보일 줄 알았더라면 나는 좀 더 빨리 고개를 들었을 거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네.”
어지간한 화가보다도 과감한 색상 선택이 자연의 위대함을 알린다.
나는 그것을 두고 새삼스럽게 감동하며 시야를 조금 더 넓게 잡았다. 저 멀리 날아가는 수십 마리의 그림자새 떼와, 금빛의 지평선에 대비되는 새까만 산등성이가 추가로 눈에 들어왔다.
하늘과 참 비교되는 검정이었다.
솔직히 간극이 너무 심해서 좀, 연출을 위한 무대장치 같기도 하고.
“…….”
그렇지만 그 미묘한 어색함은 별로 중요한 게 못 된다. 나는 그림으로조차 남기지 못할 광경을 기억에 박아 두며 조용히 이 순간을 즐겼다.
잠이 부족해 멍한 머리가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끼욕 꾝꾝꾝꾝.
하나 그 멍함이 혼몽함으로 변하려던 찰나, 새 울음소리가 나를 깨웠다. 추적자인가? 지난 며칠에 거쳐 자리 잡은 강박이 논리적 사고를 거치지 않고 생각을 뱉었다. 당연하지만 아니었다.
곤두선 신경이 다시 가라앉았다.
“하.”
나는 내가 과민해졌다는 걸 인지한─누군들 이런 상황이면 아니 그렇겠느냐만─채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미뤄 둔 골칫거리들은 겨우 주어진 여유 시간을 마구 침범하는 중이다.
그러나 사유할 겨를도 없다며 도망에만 집중한 것도 사실이고, 지금 떠오르는 고민들이 미래를 위해선 결국 궁리해야 할 문제인 것도 맞는지라.
나는 결국 내 뒤에 붙었을지도 모를 꼬리에 대해 궁구하기 시작했다. 시작 논제는 역시 그들이 정말 나를 쫓았을까, 쫓는다면 그건 아직도 진행 중일까 따위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간다면, 그다음 질문은 아마도 추적자들의 내용물쯤이 될 것이다. 예컨대 내 자취를 더듬어 찾아오는 건 용사 일행일까, 아니면 교단에서 손수 뽑은 인력들일까. 뭐 그런 것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당연했다. 나는 지금껏 추적자들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말을 타고 쫓아오면 내가 불리할 수도 있단 판단하에, 첫날 필사적으로 달린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뿐인가? 그걸로도 불안하다 싶어 마력에 의존한 채 밤을 지새워 가며 달린 게 꼬박 나흘이다. 이 정도면 그래도 안전하지 않을까 싶어 거르던 식사와 잠을 조금씩 곁들이기 시작한 게 또 나흘 전의 일이고.
이 정도면 그들이 나를 따랐어도 중도에 놓쳤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그쪽에서 처음부터 추적을 포기했다면 뭐, 그건 그거대로 감사한 일이고 말이다. 도망치며 한 고생이 무의미해지는 것보다는 내 안전이 보장되는 게 더 중요한 거니까.
“그래도 또 모르지…….”
물론 이렇다고 해서 마음을 완벽히 놓지는 않았다. 나는 도주에 재능이나 경험이 있는─그러니까 내 흔적을 완벽히 지울 수 있는─사람이 아니고, 전문 추격꾼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모르는 사람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마법. 이 세상엔 마법이란 게 있으니까.
긴장은 조금 풀어도 되겠지만, 완전히 풀어선 안 될 것이다.
나는 뒤쪽으로 짚은 팔에 상체를 기댄 채 눈꺼풀을 느릿느릿 깜빡였다. 점점 짙어지는 하늘은 슬슬 밝은 별 몇 개를 새롭게 띄우는 중이다.
“…춥다.”
사르르륵. 주위에 솟아오른 들풀이 바람에 강맹히 흔들렸다.
툭.
“……!”
머리카락 사이, 얄팍하게 드러났을 뿐인 귀에 미세한 두드림이 닿아 왔다. 반사적으로 뜬 시야엔 감으나 뜨나 비슷한 어둠만이 들어온다. 아무래도 밤… 인 듯했다.
근데 아까까지만 해도 하늘에 붉은 기가 남아 있지 않았나……? 눈 감았다 뜬 사이에 새까매졌을 리는 없… 는… 데…….
어렴풋이 떠올린 가설은 졸음기로 인해 계속 늘어지는 구석이 있다. 나는 깨야 하는데 깨야 하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한편, 몰려오는 수마에 눈꺼풀을 살금 내렸다. 피곤했다.
투둑.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옷자락에서도 약간의 둔탁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졸려도 외면할 수 있는 수준은 벗어난 셈이다.
결국 내 눈꺼풀이 완전히 올라가고, 고개가 들렸다. 툭. 타이밍 좋게도 굵은 빗방울 하나가 콧잔등을 때렸다.
“염병…….”
북동쪽 저편에 까만 구름이 있기는 했지만, 그게 설마 비구름─그것도 이쪽으로 오는─이었을 줄이야. 데스브링거가 있었다면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을, 안타까운 일이다.
“…….”
아니지. 그걸 안타까운 일이라고 해선 안 되겠지.
그를 버리기로 한 건 내 선택이고, 그와 계속 함께할 수 없는 것도 그가, 혹은 내가 자초한 업보니까.
그래, 이건 정말 정당한 결과니까.
“…비 피할 곳이 있으려나.”
나는 여드레 동안 쌓인 피로로부터 정신을 일깨우고자 일부러 소리 내서 말했다.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밤샘으로 인한 고단함은 오직 잠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법이다.
해서 나는 몽롱함을 내버려 둔 채 벗어 두었던 군화나 다시 신었다. 뻑뻑한 눈가나 떨리는 손이 몇 번 헛손질을 했으나, 새 붕대가 둘러진 발은 기어이 군화에 구겨 들어갔다.
짜릿한 통증 대신 둔감한 열감이 다리를 통해 올라왔다.
투둑, 투둑.
와중에 빗줄기는 점점 늘어나고, 강해진 바람은 온몸을 강타했다. 평야 지대라서 그런가, 바람이 유독 거센 기분이었다. 펄럭펄럭. 검푸른 공기 사이로 세 갈래의 코트 자락이 팔락였다.
“…프레드릭 안 데려오길 잘했지.”
데려왔다면 이럴 때 제대로 못 돌봐 줬을 거다. 사실 오늘뿐 아니라 지난 여드레 내내.
그럴 바에야 그곳에 두고 온 건 역시 현명한 선택이다. 나는 과거의 내 선택을 칭찬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새에 눈 뜨기 힘들 정도로 거세진 빗줄기가 손에 막힌 채 옷깃 아래로 흘러 들어갔다. 몸이 약간 으슬거렸다.
하나 이대로 움직이는 게 가만히 앉아 비 맞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나는 천근만근의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
푸욱. 다만 그것에 운이 따라 주지 않은 건 딱히 내 잘못이 아니었다.
“하.”
나는 욕할 기력도 없이 진흙에 빠진 발을 빼냈다. 지금 온 비 때문에 질척이게 된 건 아니고, 원래 물기가 많은 지대 같은데… 뻘도 아니고 왜 이렇게 질척이는지 모르겠다.
나는 군화에 질펀히 묻어난 흙을 탈탈 털었다.
스윽.
일단 이 앞으로 계속 가면 안 되겠지. 나는 뒤로 물러나 돌아갈 길을 찾았다. 보이는 게 없어서 그러지 못한 건, 역시 내 잘못이 아니다.
“…등잔 꺼내도 안 걸리려나.”
나는 혼곤한 이성으로 등잔을 꺼낼지 말지 치열하게 고뇌했다.
이것이 추적자에게 어떤 빌미를 줄지 모르는 건 아니나, 밤과 비의 조합은 시계에 최악이었으므로 달리 수가 없었다. 이대론 추적자에게 잡히기 전에 비 맞다 죽을 것 같다.
“제발 안 걸려라.”
그래도 이 정도 빗줄기면 등불의 빛이 덜 퍼지겠지. 나는 결국 그런 약소한 소망과 함께 허리춤에 마법등불을 걸었다.
등불의 범위가 넓지 못하여 볼 수 있는 구간은 여전히 한정적이었으나, 아까보단 나았다. 최소한 발밑을 보지 못해 뻘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쏴아아아.
굵은 장대비 소리만이 가득한 밤의 적막이 길을 서늘하게 적셨다.
“…….”
이대로 걷기만 하면 정신 건강에 안 좋을 성싶은데.
나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확신하며 시간을 보낼 만한 것을 찾았다. 다행히 그럴 만한 주제가 몇 개 있긴 했다.
대충… 내가 잠들기 전 미처 해결하지 못한 고민 같은 거. 그러니까 추적자 문제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의 골칫거리 말이다.
그리고 그중 전자는 이미 끝났다. 사유하다가 잠든 건 맞는데, 솔직히 거기서 더 잇더라도 달리 해결법이 나올 주제는 아닌 까닭이다.
그에 반해 후자는… 슬슬 하지 않으면 곤란할 주제가 맞다. 그간 추적으로 인해 정신없었다는 변명조차 겸연쩍을 정도─굳이 합리화를 해야 한다면, 나흘 지새운 정신으로 짠 계획이 얼마나 정상적이겠어? 따위는 댈 수 있겠지만─로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사나.”
나는 고요를 깨고자 굳이 굳이 말소리를 내 가며 앞으로의 일을 궁구했다. 하나 그게 오히려 나를 막막하게 했다. 당장 보기에 너무 답 없는 문제여서 더 그랬다.
“하.”
추적당할 여지를 덜기 위해 지난 여드레간 마을이나 도시 같은 건 결코 들르지 않았지만. 근처에 가기는커녕 마을의 실루엣이 보인다 싶으면 냅다 피해 버렸지만.
과연 이 행위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여전히 불 하나 제대로 못 피우고 야생에서 식량 채집하는 기술도 부족한 마당에 대체 언제까지?
…적확한 시기를 가늠할 수는 없겠으나, 기어이 도시에 들러야 할 때가 곧 올 것이다. 생존은 둘째 치고서라도 내가 도망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목표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암, 이 몸뚱이를 자세히 탐구하는 데에 타인의 협조─그들이 쌓아 올린 지식이든 이 몸뚱이의 과거를 알고 있을 사람의 기억이든─가 필요하지 않을 리 있겠나? 반드시, 반드시 요구되겠지. 도시에… 마을에 있을 누군가가.
“…….”
하지만 내 처지를 돌이켜 보거든, 이것엔 큰 문제가 선행된다.
내가 곧 수배될 처지─확실하진 않으나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 첫 번째 문제요, 두 번째이자 첫 번째보다 심한 장애물은 내가 마기 보유자란 것이다.
다른 말로는 신전의 눈을 피할 수가 없다. 내가 기를 써 가며 도시와 마을을 돌아간 이유기도 했다.
“상상만 해도 벌써 엿같네…….”
과민한 반응이라기엔 지금까지의 일이 있다. 예를 들어 마을에 들어가기만 하면 신전에서 눈을 부라리고 지켜보던 광경이나, 마기를 품고 있다는 이유로 십 리 바깥에서도 나를 찾아내던─주로 용사가 그랬지만─그림 같은 거.
그러다 보니 이어지는 상상도 부정적이게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조용히 좌절했다.
“시발…….”
근데 이거 진짜 어떻게 하지. 조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기는커녕 자칫하면 신고만 엄청나게 당할 각인데.
거기에 만에 하나, 정보를 거머쥔 자들이 나를 죽여야 할 존재로 판단하고 영원히 침묵이라도 지키면? 그땐 진짜 어떻게 진실을 알아내야 하지? 이쯤 되면 추적자가 붙을 건 문제도 아닌데?
나는 최악의 가능성을 미리 재어 봤다가 괜히 숨 막히는 느낌만 체험해 보았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답답함이 좀 더 깊어졌다.
“결국 마기가 문제인가…….”
그렇지만 막막하단 이유로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길이 아주, 매우, 굉장히 고단해질 테니까.
“젠장.”
아니 근데 시발, 진짜 어떻게 해결하냐고.
나는 한국인의 종특인 아니시에이팅을 차곡차곡 발언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잠을 못 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답이 없는 문제라서 그런지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냥 접시에 코 박고 죽는 게 제일 편할 것 같다.
“하다못해 마음 편히 머물 곳이라도 있으면…….”
하나 이런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니고 이런 고민을 마음 편히 할 장소나 상담해 줄 상대가 내겐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왜 집도 절도 없이 도망치는 사람들이 그리도 힘겨워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걸 직접 겪고 싶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스스스슥.
“……?”
한데 척척한 걸음을 꾸준히 잇던 그때, 스산한 바람 소리가 내 귓가를 스쳤다. 지금껏 불어온 비바람 소리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바람이 풀잎을 흔드는 걸 넘어서, 좀 더 미끄럽고 빠른 것이 움직이는 듯한…….
“…….”
평원을 돌아다니는 짐승에는 뭐가 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 널리 퍼진 기감에는 아직 걸리는 게 없다. 없다. 없나?
[왐마야. 진짜 기사님이네.]
순식간에 나타난 기척에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을 뻔했다. 그걸 온전히 행하지 않은 건 순전히 목소리의 정체를 빠르게 파악한 덕이었다.
검집에 걸려, 간신히 휘둘러지는 꼴을 면한 칼날이 덜그럭거렸다.
[…지 뒈질 뻔했십니까?]
“…뭐냐.”
너만 놀란 줄 알아? 나도 놀랐거든?
나는 그런 마음을 꾹꾹 누르며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뭐야, 너?]
모르는 목소리가 끼어든 건 다음 순간이었다. 목소리 밑에 은은히 깔린 경멸과 혐오가 내 손가락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저거랑 아는 사이야?]
저거. 나는 새로운 목소리의 주인이 고른 단어에 입술을 한 번 달싹였다. 흘린 소리는 딱히 없으나 나도 모를 무언가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건 분명했다.
[예에.]
[…설명해 봐.]
하지만… 화내기는 좀 그렇다. 들려오는 목소리의 방식으로 보아 이 존재도 산군과 비슷한 종─태곳적 짐승이라거나 그만한 격의 무언가라거나─이 아닐까 싶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라면 나를 불쾌히 여기는 것도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일단 나, 마기를 품은 건 사실이니까.
[어어. 그게 말이죠…….]
그사이 산군은 목소리의 주인에게 나와의 인연을 설명했다. 대삼림에서의 일, 내가 비류호를 죽이고 그의 심장을 건네준 일 등. 굵직한 걸 뽑으면 그렇고 내가 울외를 사 준 소소한 일도 종종 곁들였다. 저건 왜 말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완전 좋은 분입니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 이건 제법 괜찮은 기분이다.
나는 붕붕 휘둘러지는 산군의 꼬리와 설명하는 내내 느껴진 호의를 두고 눈꼬리를 희미하게 풀었다.
정말,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