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이런 생에도 (9)
“그럴 리가 없습니다요.”
“어째서?”
“그게 전부 연기라면… 그건…….”
베르세르크의 질문에 데스브링거가 가장 먼저 반박에 나섰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도리어 말하기가 힘든지, 그의 말은 몇 번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다른 거 다 제치고 그게 다 연기라면, 그런 연기를 해서 얻을 게 뭔데요? 타락한 용을 해치우고, 악마의 계략에 의해 멸망할 뻔한 한 지방을 구원하고, 타락한 비류호와 대악마 하나를 죽인 것 이상의 노림수가 존재할 수는 있습니까?”
방치했다면 타락한 용이 바다를 썩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일대 사람들은 죄 죽었을 테지.
자크라티도 마찬가지다. 방관했다면 그곳은 악마들의 섬이 됐을 것이다.
비류호도, 비류호를 노리다가 엮이게 된 모비 딕도 그렇다. 나리가 없었다면 타락한 짐승도, 대악마 중 하나도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들의 생존이 그것들의 죽음보다 악마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것은 자명한 일이고 말이다.
함에도 나리는 그 모든 것을 손수 해결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제가 멍청해서 그런가, 저는 그것들을 희생해 가면서 얻을 만한 게 안 보입니다만?”
신전의 신뢰. 그딴 거 얻을 수 있었으면 나리가 지금 이따위 대접을 받고 있을까?
용사의 신뢰. 용사의 신뢰는 얻었지만 그래서 그거 어디다 쓸 건데? 나중에 배신하려고? 죽일 능력이 이미 되는 상황인데?
주민들의 신뢰. 사람들의 지지를 바란다기엔 성질머리부터가 글렀다. 말 한마디로 환심을 사는 수준이 뭐야, 적대감만 사는 인성이잖은가. 저걸로 대중의 지지를 어떻게 받겠다고.
“나리와 사탄이 진정 한통속이라면, 이 모든 걸 지켜만 본 사탄은 뭐 머저리라도 된답니까?”
“사탄과 한편이 아닐 수도 있지. 실제로 그것이 자기자신을 사탄의 명령을 들을 필요 없는 존재라 증언하지 않았나?”
“악마의 말을 믿으십니까?”
“믿지 않는다. 그러나 무조건 불신하지도 않는다.”
베르세르크가 바닥에서 손을 뗐는지 허리를 쭉 폈다. 흐으. 누군가의 숨소리가 천막 내부에 울려 퍼졌다.
“정보를 다루는 너라면 잘 알 텐데? 백 마디의 거짓으로 구성된 이야기보다 99마디의 진실과 한 마디의 거짓을 섞어 만든 이야기가 훨씬 그럴싸하다는 것을.”
“…그 말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겁니까?”
“진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실제로 그것을 사실이라 가정했을 때, 악마기사의 행보가 악마 측의 이익과 불일치한 것도 해명되지 않나?”
데스브링거가 그 숨소리에 집중하기도 전, 베르세르크는 서늘한 금안으로 장내를 응시했다.
“더구나 악마기사가 기억을 잃은 게 진실이라면, 그는 어쩌다 그리 된 거지? 가족을 잃은 순간조차 잊지 않은 사람이 어지간한 사건을 겪었다고 제 기억을 내다 버릴 것 같진 않은데.”
그녀는 실로 악마기사를 의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르세르크가, 악마기사를.
생각지도 못한 이의 불신에 데스브링거는 숨이 막히는 심정이 되었다.
“가능한 말 안 얹고 싶었는데 말이지.”
다행히 데스브링거를 대신해 새로운 싸움꾼이 링 위에 올랐다. 붉은 안경테가 길쭉한 손가락에 들리더니, 옷자락에 쓱쓱 닦였다.
“그럴 땐 보통 반대로 사고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믿고 싶은 것과 믿어야 하는 건 별개라 본다만.”
“믿고 싶은 것만 생각하는 건 멍청한 행위가 맞지만, 생각하기 싫어서 그 다른 가능성을 외면하는 건 머저리 짓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러면서 그는 툭 내던졌다. “악마기사가 기억을 잃은 건 맞아요. 그리고 그 범위가 제법 광범위한 것도.” 그건 그토록 데스브링거가 그토록 바랐던 확언이다.
“말 안 해 준다면서요.”
“상황이 달라졌잖아. 아까의 나는 이 이상 이 일에 개입할 의향이 없었지만… 지금은 좀 더 알고 싶어졌거든. 그러면 당신들에게 협조해야지.”
데스브링거가 조금 어이없어했으나, 마이스터는 개의치 않아 했다. 남의 이해라는 기대는 버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기억상실의 원인이 바로 악마라서요.”
그는 그가 생각한 가설을 풀어 설명했다.
오랫동안 악마기사와 함께한 그들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마이스터를 두고 누군가는 입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중요한 건 그들의 심정이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단 것이다. 복수로 모든 걸 불태웠던 한 사람의 인생 앞에서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다.
“아까 당신이 물었던가요? 악마기사 속 악마가 사탄과 다른 뜻을 품었을 수도 있으니 악마기사를 악마라 의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표현은 다르지만, 요약하자면 그렇게 되겠지.”
그사이, 마이스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베르세르크가 긍정했다.
“일단 앞의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예요. 악마기사 속 악마… 아, 길게 말하기 짜증나니 분노라고 하죠. 그놈의 분노가 생존을 위해서든 다른 목적이 있어서든 사탄과 뜻이 불일치하는 건 거의 확실해 보였거든.”
일단 분노가 사탄의 충실한 부하가 아니란 건 명백하다. 악마기사와의 내기 때문에서든 뭐든 최소한 그놈은 사탄의 충성보다 자신을 우선시하는 모습─대악마랑 치고받고 하는 것부터가 그렇잖나?─을 보였으니까.
“하지만 악마기사와 분노의 뜻이 일치하지도 않을걸요? 애초에 둘의 마음이 합치했다면…….”
“진즉 우리를 다 죽였을 거란 말을 근거로 들고 싶은 건가? 그러나 그것에 다른 원인이 있다면?”
“그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긴 하죠.”
본래 힘을 완전히 끌어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거나… 사실 원래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특정 순간에, 어떤 조건을 갖춰야만 그렇게 강해진다거나…….
그래서 악마가 악마기사를 가장한 채 사람의 적의를 피하려는 걸 수도 있긴 하다. 그런 가설도 있을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가능성이 크다곤 당신도 생각 안 할 텐데요.”
앞서 데스브링거가 말한 ‘이득이 없다’도 이유가 되고 ‘도박성이 너무 짙다’는 것도 명분이 될 수 있다. 암, 악마로서 사냥당하는 걸 면하기 위해 스스로 처형을 자처하는 건 너무 심한 도박수지 않나?
“거기에 다른 원인을 끌고 오더라도 마찬가지예요. 그것에도 또 다른 경위가 필요하니까.”
뭐, 그 도박수도 필사즉생 필생즉사, 뭐 그런 구절을 끌고 와 어떻게든 설명한다 치자. 하나 악마가 힘을 완전히 끌어내지 못한 건 또 어떻게 설명할 셈인가?
결국 어떤 구실을 끌고 와도 이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하는 셈이다. 악마가 악마답게 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있다는 문제.
“그러니 악마기사는 분노의 억제제가 맞아요. 그것만은 확실해요. 뭐, 최악의 경우 그가 악마에게 휘말린 가엾은 영혼이 아니라 악마가 보다 완벽한 연기를 위해 제어조차 하지 않는 분신일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랬다면 할아버지가 못 알아봤을 리 없죠.”
“장난해요? 분신?”
“네 할아버지가 묻고 넘어간 거라면?”
졸지에 악마의 분신으로 취급받을 뻔한 악마기사를 두고 데스브링거가 발끈하려던 차. 베르세르크가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되물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자가 오해받고 있는 사람의 손자란 건 아무래도 좋다는 눈치였다.
마이스터의 성질을 아는 아크메이지와 데스브링거가 괜히 긴장했다.
“악마가 날뛰면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 위험성을 알고 그냥 보내 줬다는 가능성은 없나?”
“없진 않죠.”
그러나 그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마이스터는 쿨하게 인정했다. 마치 자신도 생각해 본 문제라는 양.
“뭘 그렇게 보세요?”
“…화낼 줄 알았네.”
“당연히 품을 만한 의문을 두고 제가 화를 왜 내요? 의심스러운 상황을 의심하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그, 그런가?”
아무렴 근육 덩어리가 말한 것처럼 할아버지가 모두를 살리고자 필요악을 자처했다는 의문은 앞뒤 아귀도 맞고 제법 그럴싸한 의심이다.
반론이야 할 수 있지만, 의문 자체는 그가 들어도 심히 타당하단 말이다. 그러니 이해할 수 있다. 화도 안 나고.
“제가 지금 신전 꼬라지를 싫어하는 건, 단지 의심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행동이나 증거랍시고 내미는 것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멍청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렇군…….”
반면 신전에서 지금 내거는 의심은 어떻지? 예전부터 그의 할아버지가 이단이었고 그래서 이번에 악마를 풀어 줬다는 쪽이다. 그게 말이 되나? 청산호가 진정 이단이었다면 이번 사태가 이따위로 흘러갔을 리 없는데!
결국 생각 없는 새끼들이 냅다 무지성으로 지르기만 한 게 이 의심이다. 화가 안 나는 게 더 이상했다.
“반지성 재판이 얼마나 끔찍하고 어리석은 일인데 신전 새끼들은 그걸 몰라서 항상 저 지랄을─”
“그만, 그만. 자네가 어디서 화내는지는 알겠네. 그래서 베르세르크의 의심은 맞는 것인가?”
“아크메이지님도 아시지 않나요? 그게 맞을 리가 없잖아요.”
마이스터는 세상 사람들이 왜 이렇게 빡대가리인가 하는 고민을 심도 있게 하며 손을 휘저었다.
“사람 안 죽이는 걸 대가로 보내 준 거라면, 할아버지가 악마기사를 비호할 리 없잖아요.”
“…비호하고 있다고요?”
“그럼 타깃팅 실수라는 변명이 비호지, 뭐야?”
청산호는 악마기사에게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행했다란 변명을 할 수도 있었다. 수면 마법의 시간이 다하여 경비병이 깨어나 신고할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악마기사가 떠나는 대로 자신이 마법을 쏘아 올려 신호를 줄 수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청산호의 머리면 수면 마법을 쓸 것도 없이, 탈출을 저지하는 척 보내 주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아무의 의심도 사지 않고, 둘만의 암묵적인 거래로써 상황을 종료했을 수도 있을 거란 말이다.
함에도 청산호는 의심 살 걸 각오해 가며 악마기사를 도왔고, 마이스터 입장에선 그건 나름의 증거였다. 청산호가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 주고자 했던 무결함의 증거.
“그건 결국 남의 판단에 모든 걸 거는 행위다.”
“불쾌하네요. 본질을 보는 사람의 판단을 참고하는 게 남에게 판단을 떠맡기는 행위라니. 너무 과한 넘겨짚기 아닌가? 그럴 거면 세상에서 감정사란 직업은 없어져야 할 텐데?”
베르세르크의 작은 반론은 마이스터의 표독한 말 한마디에 다시 꺾였다. 베르세르크가 눈매를 좁혔다.
“이제 됐습니다.”
“……?”
“이제 됐나?”
“나머진 제가 묻겠습니다.”
“잠깐, 투사 나리!”
그러다 잠깐. 베르세르크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일어섰다. 베르세르크만 믿고 상대를 제대로 주시 안 했던 데스브링거가 퍼드득 뛰어오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깨어나는지 아닌지 봐 주신다면서요!”
“봐 준다고 했지 말해 준다곤 안 했다만.”
데스브링거의 믿음은 배신당했다.
스르륵.
한편, 다니엘은 제 얼굴 위에 얹어져 있다가 상체를 일으킬 때 떨어진 흰 천을 옆으로 치웠다. 깨어난 직후, 소리 지르지 못하도록 베르세르크가 한동안 입가를 눌렀던지라 그의 입 근처에는 약간의 손바닥 자국이 있다.
그래도 그것이 불쾌하진 않다. 그녀가 움직이는 걸 막아 준 덕분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간 대화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또한 그 대화를 들었기에 그는…….
“악마기사가 잃은 기억의 범위를 아십니까?”
그는…….
“나한테 물은 건가요?”
“예.”
“내가 그걸 왜 답해 줘야 하는데요?”
“말하셔야 할 겁니다.”
“협박?”
“글쎄요.”
다니엘은 뜨거워지려는 눈가를 내리눌렀다.
강제로 가졌던 침묵의 시간 동안 스쳐 지나간 온갖 생각이 그의 뇌리를 툭툭 건드렸다. 대개 인정하기 싫은 것들이다.
“저는 검은 불꽃을 다루는 악마에게 부모님을 잃었고, 이번 사태로 하여금 악마기사가 검은 불꽃의 악마를 품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함에도, 인정하고 싶은 것들 또한 있다.
“알려 주십시오. 제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슈츠가, 그의 어린 사촌 동생이 믿는 사람을 믿고 싶은 마음 같은 것.
“그는 제 부모를 죽여 놓고 제게 모르쇠 한 겁니까?”
혹은 기만당하지 않았다는 답을 듣고 싶은 마음 같은 것.
“혹은 정말 몰라서 몰랐다고 했던 겁니까?”
그것이 조금의 위안도 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몰라요, 그건. 내가 그 양반에게 구구절절 모든 걸 들은 것도 아니고.”
“…….”
“하지만… 아마 모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그렇지만…….
“그렇군요.”
그렇지만 주어진 여지 하나가 그를 인내할 수 있게 했다.
그거면 됐다.
“그랬어요.”
다니엘은 허탈하게 뇌까렸다. 길 잃은 원망이 진득한 공허가 되어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울고 싶었다. 혹은 소리를 지르고 싶거나. 혹은, 혹은.
“결국 진실은 그 사람만 알고 있는 거군요.”
“뭐, 그렇겠죠.”
다만 확실한 것은, 다니엘에게 그 남자를 만나야 할 이유가 생겼단 것이었다.
“입 다물겠습니다.”
“……?”
“제가 이것을 교단에 알리지 않길 바라실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해 드리겠단 겁니다.”
“…그래 주면 우리야 고맙겠네만,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이유라…….”
다니엘은 이 대화를 보고했을 때 어떻게 될지 고민해 보았다.
대현자 둘, 대명장 하나, 특별한 지위는 없으나 대리자의 동료인 것을 고려해 평범할 리 없는 인물 둘이 엮여 있으니 처형까진 못 가더라도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겠지. 대리자 본인도 이 대화엔 참가하지 않았으나 그분도 약간 애먹게 될 것이다. 같이 다니던 인물 전원이 악마와 내통한 셈이 될 테니까.
“누군가를 믿는 마음이 잘못됐다고 여기기 싫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진정 악마와 내통했나? 대현자 청산호라면 모를까, 이들은 그저 그 사람이 도망간 이유를 찾고자 할 뿐인데?
다니엘은 그들의 대화를 되새겼다. 그들은, 그저 믿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그 사내에게 마지막까지 기대를 걸려는 지금처럼.
“그러니… 악마기사의 진정한 정체가 어찌 되었든 이 일을 보고할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조건은 달아야겠다. 다니엘은 바싹 마르는 목구멍을 마지막으로 쥐어짰다.
“대신, 저도 같이 가게 해 주십시오. 이 믿음의 결과가 어찌 될지 제 눈으로 봐야만 하겠습니다.”
* * *
[…잠깐.]
그리고 거대한 뱀이 소리 없이 기던 어느 대지.
[저게 왜 여기 있어?]
[예……?]
빗속을 홀로 걷던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