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이런 생에도 (8)
“그보다, 더 따지고 싶으면 안쪽 가서 해. 말 막아 주는 도구도 남발하면 수상하단 말이야.”
아크메이지가 자신의 친구를 열성적으로 찾는 사이, 마이스터는 주변의 구경꾼들을 두고 힐끗 눈치를 주었다. 몇 없는 인원이지만 그들 전부가 마법사란 것은 좀 문제였다.
마법사들의 머리는 너무 좋아서, 그들이 알리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려질 위험이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큰 소리가 나야 자연스러운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의 품 안쪽에는 말소리를 흡수해 주는 도구가 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데스브링거가 아차 했다.
“…안으로 들어가죠.”
“뭔지 모르겠는데. 나도 가야 하나?”
“투사 나리도 가능하면 오시, 엑. 언제 오셨답니까?!”
“아까 장인과 같이 왔다만.”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같이 듣게.”
아크메이지도 베르세르크의 존재를 지금에서야 눈치채, 살짝 뜨끔한 상태였으나 말은 그렇게 했다. 아무렴 이미 와 있는 사람을 보내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녀도 일행인데.
“이놈은 어떻게 하나?”
“그건…….”
버리죠. 그건 데스브링거의 의견이었다.
데려가야 해. 그건 의외로 마이스터의 의사였다.
“저 새끼, 아까 그 만남을 목격한 이단심문관이잖아. 입단속이 좀 필요하지 않겠어?”
“…입단속이 필요하다 여기는 사람이 상대의 대가리를 칩니까? 저거 깨어난 다음 분명 화낼 텐데.”
“그럼, 거기서 그 대화를 더 이어 나가는 게 옳았을까? 감정적으로 욱한 사람에게 똑같이 감정적으로 대해 봐야 대화가 이어질 리 없잖아. 이럴 때는 주먹이 답이라고.”
“차라리 곱씹다 보니 빡쳐서 쳤다고 해 주십쇼. 시발, 이딴 인간이 대명장이네.”
…일단 안에 데려가서 간호하자. 아크메이지는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신전에 보내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고, 상대가 깨어났을 때 하고 싶은 말도 있던 까닭이다.
물론… 그 전에 주변 구경꾼들부터 단도리 해야겠지만.
“베르세르크, 안쪽으로 이 사람 좀 눕혀 주고 돌봐 주게. 나는 그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변명이라도 해야겠구만…….”
“저도 같이 해요.”
“자네는 안에… 아니다. 같이 가세나.”
마이스터가 내보인 성질머리를 두고 잠시 고민하던 아크메이지는 끝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구경꾼들이 마법사고 마이스터와 안면이 있을 걸 고려하면 외려 설득이 편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어쩌면 안면이 있기에 악화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방금 있었던 일은…….”
“됐어. 성질머리 못 이겨서 친 거겠지.”
“잘 쳤습니다.”
운 좋게도 전자의 경우가 맞았다. 다들 마이스터의 성질을 너무 잘 알아서, 혹은 신전이 싫어서 적당히 뭉개고 넘어가 줄 의향을 내비친 것이다.
물론 그들의 기반이 되는 태도는 진실이 무엇이든 마이스터랑은 엮이기─찍힌다 쪽에 가까울지도─싫다에 가까워 보인다.
“자네, 정말 어떤 삶을 살아온 건가?”
“얕보고 깔보는 놈들에게 물리 마법의 위대함을 좀.”
그럴 만했다. 아크메이지는 머리의 지끈거림을 포기했다. 설득이 쉬우면 좋은 거겠지. 해탈이라고 해도 무방할 포기였다.
“그래서 정말 왜 부르신 거죠? 시간 낭비는 별로 안 좋아해서.”
“그, 하. 일단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자네 조부가 자네가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해서일세.”
“아…….”
그래도 조손간의 우애는 짙은가 보지.
숙소로 돌아가던 길, 조부의 이야기가 나오자 마이스터의 자색 눈이 조금 짙어졌다. 붉은 테의 안경을 따라 흔들리는 안경 줄은 수십 개의 산호를 깎고 마법식을 새겨 알알이 엮은 것이다.
“이단 혐의 때문에 보러도 못 가니 걱정깨나 되나 보더군.”
마력 없는 착용자를 고려해 저것들 스스로가 동력원이 되도록 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아크메이지는 새삼 청산호의 애정을 느끼며 침묵하는 이를 보았다. 상대도 그간 할 말이 많았던 듯 말을 쉬이 잇지 못했다.
“알면 머리란 걸 좀 쓰면서 살라고 전해 주실래요? 다 늙은 영감탱이는 뒷생각 안 하며 움직여도 세상이 봐주는 줄 아나? 도울 거면 좀 티 안 나게 돕던가. 나이 처먹고 실력 퇴화한 거면 어서 은퇴나 하라고 해요. 손자가 부양할 테니까.”
제발 쉬이 잇지 못해 줬으면 좋겠다.
아크메이지는 삐죽거리는 마이스터를 두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청산호, 나는 모르겠네. 요즘 젊은이들은 독하게 말하면서 은근히 걱정해 주는 게 유행인가? 근데 그럴 거면 그냥 상냥하게 말하면 안 되는 겐가?
“드디어 오셨습니까?”
와중에 열린 숙소의 문 사이로는 옹기종기 앉은 두 사람이 보였다. 다니엘 이단심문관은 아직 안 깨어났는지 베르세르크 뒤편에 고이 누워 있다.
“…얼굴에 흰 천은 왜 덮어 놨는가?”
“숨 확인하기 어려워서요. 깨어날 때 확인하기도 편하고.”
그런 의도가 아닐 것 같은데. 절대 아닐 것 같은데.
그냥 바로 납관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흰 천을 덮어 둔 것 같은데.
아크메이지는 또다시 눈동자를 떨었다가, 그만 포기했다. 늙은 가슴은 충분히 고생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전부 넘기고 싶었다.
“그래서 저를 부른 나머지 구실은?”
“그… 혹시라도 악마기사가 떠난 이유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싶어서일세.”
그러나 그녀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아크메이지는 없는 기력 있는 기력 짜내어 그녀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내들었다.
“참고로 자네가 신전에서 증언한 말은 전부 들었네. 함에도 지금 묻는 건… 자네가 이단으로 몰릴까 숨긴 것이 혹시라도 있는가 싶어서 질문하는 걸세.”
또한 그녀는 빠르게 덧붙였다.
“밀고는 걱정할 필요 없네.”
혹시라도 상대가 이것을 신전의 함정이라 오해할까 싶어서였다.
“밀고하는 순간 우리도 엮여 갈 게 꽤 많아서 말일세.”
그도 그럴 게, 그들은 하필이면 용사를 주축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오해받아서 얻을 정보도 못 얻으면 끝장이다.
“음.”
그러자 마이스터의 눈동자가 이쪽저쪽으로 굴러갔다. 보다 정확히는 데스브링거와 베르세르크의 내심을 살펴보는 모양새였다.
“참고로 저들은 이렇게 될 걸 몰랐네. 나도 상황이 이리 펴질 줄 몰랐으니. 다만… 저들도 걱정할 필욘 없을 걸세. 그렇지 않나? 난 자네들도 이 사항을 제법 궁금해했을 거라 생각했네만.”
미리 말한 적은 없지만, 같은 의견이고 또 같은 것을 궁금해할 거라 믿는다. 데스브링거는 악마기사의 무고함을 가장 신봉할 사람이고 베르세르크는… 베르세르크는 이 대화에 관심이 없더래도 신전에 말 흘릴 사람은 최소한 아니니까.
“저야 이런 대화는 환영이긴 합니다만…….”
역시나 데스브링거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세르크도 자리를 박차지 않는 걸 보면 궁금은 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 샐 걱정은 덜어라.”라고 한마디만 내놓았다. 그건 그녀의 행보와 맞물려 제법 신뢰감이 있었다.
“뭐, 그래요. 다들 같은 의견이라니 상관은 없는데… 별개로 다들 정보 공유 없이 따로 조사했어요?”
하나 그런 아크메이지의 믿음이 무색하게, 마이스터가 시큰둥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정보 공유 없이. 어딘가 가슴 찔릴 말과 함께였다.
“정보를 나눌 시간이 없었긴 했네만… 문제 있나?”
“문제까진 아니고.”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태도를 보면 문제인 것 같다. 아크메이지는 몸을 뒤로 기울이는 마이스터를 보며 눈을 껌뻑였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절 부른 거였다면 저놈한테 마저 들으세요. 제가 할 말은 저놈한테 다 했으니까.”
“아, 이미 둘이서 이야기를 나눴었나?”
다행히 이어진 설명은 그녀를 일깨우고 또 안도케 했다. 뭔가 했더니 그녀가 자리를 만들기도 전에 저 둘은 이미 대화를 했던 모양이었다.
“놀랍군…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을 줄이야.”
“그럼 저는 가 봐도 되나요? 입막음이야 저놈이 알아서 할 것 같은데.”
“지금 남 패 놓고 가는 겁니까? 장난해요?”
“왜?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상태로 계속 언쟁했다면 너만 손해였을 텐데.”
“아니…….”
한데 마이스터는 어쩌다 악마기사가 참지 않게 된 이유를 알게 된 걸까. 아크메이지는 참가자만 바뀌어 다시 일어나려는 말다툼 사이에 살짝 끼어들었다.
“자네는 어떻게 안 건가? 악마기사가 참지 않게 된 원인을?”
“예?”
서로 가진 퍼즐이 달라, 그 간극으로 인한 혼란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악마기사가 기억이 없는 상태란 말인가?”
“제 추측입니다요. 확실한 건 저 얌체만 알고 있겠죠.”
마이스터는 아크메이지가 전달해 준 할아버지의 말을 두고 잠시 궁구했다. 누가 대현자의 말 아니랄까 봐 교묘하게 모호한 것이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았다.
“자격.”
특히 걸리는 건 그 단어였다. 도덕 문제가 아니라 자격을 논하는 말이라니? 조부가 앞서 나열한 건 아무리 보아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저격한 문장 같은데. 그게 윤리를 논하는 게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성주와 대주교조차도 코웃음 치며 넘기는 그의 할아버지가 자격을 운운할 정도면 상대가 가진 무게는 얼마나 깊고 무거운 것이고?
“살아오면서 할아버지가 자격을 이유로 빼는 걸 본 적이 없어.”
그의 조부는 그런 추상적인 것을 핑계로 대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되면 된다, 안 되면 안 된다. 그것을 판가름하는 것은 오직 그의 입장과 여건뿐. 감히 자격이란 단어로 변명하려 든 적은 없단 말이다.
“…나도 같은 입장이긴 하네. 최근의 청산호야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과거 내가 봐 온 친우도 자격을 입에 담는 사람은 아니었어.”
함에도 그는 자격을 담았다. 그건 결국 그것밖에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없어서일 것이다.
마이스터는 그것에 집중했다.
“이거 좀 자존심 상하는데.”
그 감옥에서 자신을 꺼내 줬을 때도 변덕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도와줘 놓곤 자격을 운운해? 대체 악마기사가 무엇을 가지고 있기에?
이건 좀 궁금하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아주 많이.
“가, 갑자기 왜요.”
“할아버지가 나한테 시비 털었잖아.”
“대체 어디서요?”
이렇게 모호하게 말해 놓고 입 다물 걸 고려하면 그게 시비지, 뭐가 시빈가? 마법사란 종자들이 이렇게 가려진 것에 환장한다는 걸 모를 사람도 아닌데.
“이런 시비는 받아 줘야지.”
“대관절 사고 결과가 왜 그렇게 튀는지를 전혀 이해 못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적당히 알고 넘어가려 했지만, 좀 더 조사해 봐야겠다. 이건 진리의 탐구자로서 절대 넘어갈 수 없었다.
“법사 나리는 이해하십니까요?”
“대충은……?”
“염병.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서 이해 못 하는 거였나.”
“걱정 말게. 저게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네.”
도독도독.
마이스터는 손가락으로 제 무릎을 두드리며 사고의 주제를 전환했다. 정말 궁금한 건 상대의 격이지만, 그걸 알아챌 능력이나 단서가 지금은 없으니 다른 것에서 우선 정보를 캐낼 요량이었다.
“아직도 안 왔지?”
예컨대 이런 것.
“뭘요?”
“이번에 산 정보.”
“아직이죠?”
“쯧.”
그는 조부가 두 번째로 내준 단서, ‘참지 않기로 했다’에 눈길을 주었다. 이 인원 가운데 유일하게 악마기사가 잃어버린 기억의 범위를 가늠하고 있는지라 그 눈길은 더욱 집요하고 매서웠다.
“내기.”
“예?”
일단 기억이 사라진 동기. 그게 내기 때문이라면 어떨까.
그는 악마기사가 탈출하기 전 밤, 대화를 나누며 떠올렸던 가정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악마기사가 기억을 잃은 사유로 지목될 만한 건 솔직히 그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봐요, 혼자 중얼거리지 말라고요. 아니, 중얼거릴 거면 전부 말하든가, 중요한 건 싹 빼놓고 말하네.”
그렇지만 기억상실의 원인이 내기라면, 그가 행적 좀 돌아보는 걸로 ‘참지 않겠다’란 결과가 나온 건 왜인가? 휘발된 기억은 당시의 감정마저 가져갔을 테니, 줄글 몇 자 본다고 과격한 반응이 바로 나오진 않을 텐데.
자신이 모르는 과거를 앎으로써 기억이 되돌아왔다는 가설도 답안지 같진 않다. 내기의 대가로 바쳐진 것이 이렇게나 쉽게 돌아올 것 같진 않으므로.
그러니 결국 무언가가 있다.
무언가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의 조부가 자격을 운운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
기억 없는 악마기사가 더는 참지 않아도 되게 한 것이.
“악마기사의 행적을 알면 뭔가 답이 나오려나…….”
“우리도 좀 압시다, 네?”
“아크메이지님 두고 왜 나한테 채근해?”
“댁이 가진 정보가 더 많거든요?”
정작 아크메이지는 마이스터에게 말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건만, 왜 지능도 부족한 녀석이 난리지. 자기 머리론 안 될 걸 아니까 기대는 건가? 심보 고약하군.
마이스터는 자신이 입 다문 건 쏙 빼놓고 데스브링거의 인성을 논했다. 남들이 보면 도긴개긴이랄 건 그의 뇌리에 없었다.
“그래서, 악마기사가 기억이 없다는 거냐?”
그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이가 심드렁히 발언했다. 누워 있는 이단심문관을 가리는 형태로 앉아 있는 그녀는 천막에 기댈 수 없다는 사실이 퍽 유감인 모양이다. 팔로 땅을 짚어 몸을 지탱하고 있다. 보기엔 그러했다. 가려진 손이 정말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이의 의견은 그러하다는군.”
“기억이 없는 이유는 모르고?”
“들은 게 없으니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그럼 기억이 없는 게 아니라, 없는 척을 한 건?”
“예……?”
“악마기사가 괜한 근거로 탈출할 사람이 아니란 건 너희도, 나도 알고 있는 바다. 그래서 이번 탈출에는 그만한 사유가 걸려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상황이고.”
“…그게 왜요?”
“그만한 곡절이 없다면?”
하나 그런 느른한 모습과 달리 건네는 말은 뾰족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봐 온 모든 것이 거짓이 맞고, 단순히 살기 위해 떠난 거라면 그땐 어쩔 건가?”
그럴 리 없다며 한사코 부정하고 애써 외면해 온 것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