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괴로움으로 가득해 (8)
청산호는 악마기사라 불리는 존재가 몸을 휙 돌리는 걸 보았다. 철썩. 동시에 그에게만 보이는 무언가도 물결쳤다. 맑디맑은 밤하늘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해수면이 겹쳐졌다.
“대화할 생각이 생겼나 보지.”
청산호는 호위가 깔아 준 겉옷 위에 앉아, 챙겨 온 담요를 돌돌 말아 등 받침으로 두었다. 지지대란 느낌은 실상 별로 없으나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읏차.”
다만 그렇게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몸은 제법 고역이라. 그는 숨을 잠시 몰아쉬었다. 철컹. 그사이 상대의 몸은 철창에 거의 바짝 붙은 상태다.
반쪽의 잿빛을 가진 청년 위로 시들어 가는 들꽃이 언뜻 비쳤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알리듯 짙은 이질감을 품은 채로.
“방금… 뭐라고…….”
“뭐라고 했긴.”
청산호는 그걸 가만 관찰하며 품속의 물건을 꺼냈다. 범위를 설정하면, 범위 내의 소리를 흡수하여 범위 안에만 울려 퍼지도록 하는 아이템이었다.
즉, 범위 바깥에 속하는 병사들과 기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다. 만일을 대비한 준비였다.
“다른 세계에서 온 귀한 영혼이라 했지. 이런 대우를 받아선 안 될 무고한 사람이기도 하고.”
하면 더는 신경 쓸 것이 없다.
청산호는 그것을 바닥에 내버려 두며 호흡을 조심히 이어 나갔다. 단 한 명의 낙루가 고여 만들어진 대양이 그의 가쁜 숨을 대신 삼켜 주었다. 그의 시야에서만 보이고 존재하는 바다였다.
“내가 본 것이 틀렸나?”
“…….”
지상에 있음에도 바다에 잠긴 기분이란 참으로 오묘하지.
함에도 그것이 거북하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청산호는 입을 빠끔거리며 혼란해하는 상대를 두고 손을 들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흐르는 슬픔은 참으로 짭짤하고 썼다.
“그대는 이곳의 영혼이었나?”
하나 동시에 포근하기도 편안하기도 했다.
태어나고자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배 속의 바다가 따스하듯이, 슬퍼하는 자를 감싸 안아 주는 품이 곰살궂듯이. 살갗을 감싸는 모든 것이 그저 자애로웠던 탓이다.
“…아니.”
하니 걱정하려야 할 수 없고, 상상하려야 상상할 수 없다.
“아니야.”
타인을 위해 흘린 눈물로 대해를 이룬 사람이 이제 와서 분노 따위에 휩쓸릴 리 없었다.
“난 이곳 사람이 아니야…….”
악마기사라 불리던 이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바다가 한층 더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그랬군.”
그걸 보며 청산호 또한 한탄했다.
설마설마하던 건 본인이나, 동시에 그렇기에 부정의 답을 바라는 마음 하나쯤은 있었던 까닭이다. 저이가 진정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면, 그가 이 땅에서 이런 고초를 당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을 테니까.
“역시 그랬어.”
하지만 결국 밝혀진 진실은 그러하다. 그것이 청산호의 가슴을 깔끄럽게 했다. 그가 이 자리에 선 이유가 또 한 번의 희생을 부탁하고자 함이기에 껄끄러움의 강도는 더했다.
청산호의 입이 우묵하게 파였다.
“나는,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닌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떤 애도의 경우 침묵을 지키되 온기를 나누는 것으로 이뤄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해서 청산호는 서럽게 우는 청년의 말을 경청한 채 가만 자리를 지켰다.
들꽃이, 약간의 식물학적 지식을 더한다면 별꽃임을 알 수 있을 흔한 야화가 시든 꽃잎 사이로 끝없이 수루했다. 평범하고, 또 평범했어야 할 사람의 영루였다.
“아흑…….”
“쯧.”
본래라면 이런 일을 당할 일 없던, 참으로 평범한 사람의 설움.
“다 울었나? 다 울었으면 내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자 하는데.”
“…….”
하나 이런 상대에게 그는 또다시 잔인한 부탁을 해야 한다.
“…살겠다고 해 주게. 반드시 살겠다고.”
보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이 세상을 위해서.
…아마도 당신을 위해서.
청산호의 입안이 가시가 돋은 양 거북해졌다.
“…왜요?”
“그건…….”
“왜?”
“…….”
차라리 내상이 도져서 앓아눕는 게 덜 아프겠군.
청산호는 서럽게 젖어 반질거리는 얼굴을 두고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혓바닥이 제멋대로 굴었다며 말을 철회하고 싶었다.
“그대가… 그대가 지금 죽는다면 악마가 대신 튀어나올 가능성이 크니까.”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이 슬픔의 바다가 품고 있는 것은 저 소박한 영혼뿐이 아니었다.
“참고로 이건 악마가 한 말을 토대로 하는 제의가 아니야. 내가… 직접 목도한 진실만을 보고 하는 이야기지.”
청산호는 시선을 내려 바다가 숨기고 있는 것들을 관찰했다.
현실의 대지를 지우거든 보이는 바다의 깊은 곳에는 하나의 실에서 갈라져 나와 거미줄처럼 퍼진 그물과 그 그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새까만 사슬 뭉치가 남아 있다. 이 육신에 깃들어 있는 또 하나의 영혼이다.
“그대는 악마를 막고 있는 누름돌이다. 아직까진 절대적이고, 아마도 오랫동안 유지될.”
또한 영혼으로 빚어낸 사슬의 중심에는 대해에 잠겨 있음에도 꺼지지 않은, 언제든 이 바다를 뛰쳐나가 지상을 모조리 불살라 버릴 불꽃이 있으니.
세상 모든 원망과 증오, 미움, 혐의를 장작 삼아 타오르는 불꽃의 정체는 추측할 것도 없다. 저것이 악마다.
한 존재가 제 영혼을 담보 삼아 계약의 사슬로 묶었음에도 제어가 안 돼, 또 한 명을 데려오게 만든 저것이야말로 분노의 대악마일 거란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대가 죽지 않길 바라. 그대가 억누르고 있는 악마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우린 또다시 끔찍한 것을 보게 될 테니까.”
저런 게 모든 억압을 벗어던지고 세상에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야말로 끔찍한 것을 보는 걸 넘어 멸망에 이르진 않을까.
청산호는 그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이 몰염치한 부탁도 결국 거기서 시작된 것이었다.
감수하기엔 몰락의 미래가 너무 빤히 보인다.
“…그래서, 그래서 죽지 말라고 제게 부탁하는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제게?”
한데 그의 말에 상대는 그저 섧게 웃었다.
“그것도 모두가 제 죽음을 바라는 처지에서?”
…이해 안 갈 일은 아니었다. 비록 그가 싸우는 모습을 청산호는 직접 목격한 적이 없지마는, 주변인들의 증언이나 돌아가던 상황을 떠올리거든 절대 쉬운 싸움이었을 리 없잖은가.
더구나 시련을 딛고 일어난 후도 문제다. 힘겨운 전투를 치렀는데 찬사는커녕 죄인 취급에, 주변인들은 처형을 운운하고 있다. 누군들 억울할 것이다.
“…사람들의 선택을 이해합니다. 그러니 원망하지도 않을 거예요. 인간이란 무릇 그런 동물이니까, 어차피 기대도 안 했으니까 바라지도 않을 거라고요.”
하지만 억울함조차 삼킨 채 인간을 향한 실망을 드러내는 건…….
“그렇다고 살아서 그들의 눈초리를 감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는, 나는 충분히 견뎠어요. 난, 난 정말로…….”
청산호는 인간에게 기대를 품지 않고서도 이렇게나 사랑할 수 있는 게 진정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인지, 또한 그런 사랑으로도 더는 버틸 수 없을 만큼 지쳐 버린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함이 옳은지 재고해 보았다.
하나 답은 알 수 없다. 그가 볼 수 있는 건 세상의 본질일 뿐, 미래는 추측의 영역이었다.
“…주변의 모든 인간이 그대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게 괴로운 거라면, 그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렇기에, 청산호는 마른침을 삼켜 가며 말을 이었다.
이게 옳은가? 글쎄. 하지만 대의를 떠나 이렇게 빛나는 영혼이 홀로 스러지는 걸 내버려 두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겠지.
“그대의 허락 없이 선언하기엔 너무 중대한 사항이라 지금껏 입 다물고 있었을 뿐, 그들을 설득할 만한 패는 가지고 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영혼 하나가 계약으로 1차 구속구가 되고, 누름돌로 또 한 명까지 데려오며 악마가 풀려날 여지는 거의 없게 되었다.
즉, 악마가 날뛸 게 걱정되니 악마기사를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은 완전히 반박할 수 있단 거다.
“물론 그들의 적개심을 완전히 없애진 못해. 아마 누그러트리는 수준만이 되겠지. 최악의 경우에는… 생존만 보장될 뿐, 괄시하는 시선은 그대로일지도 모르고.”
사소한 문제점은, 그래. 이것을 고하거든 신전에선 아마 계약을 걸고넘어질 확률이 있다는 것이라.
누름돌 역할의 영혼이 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만큼, 계약자란 핑계로 탄압하는 건 무리라 생각하지만… 혹시 또 모른다. 신전이 융통성 없던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므로.
“함부로 말하지 않고 그대가 깨어나길 기다린 것도 그 때문이니까.”
그러나 그게 무서워 포기하기엔 아까운 기회라 생각한다. 그가 마냥 모두를 위해서 버틸 것을 요구하려는 게 아니기에 더 그렇다.
“대신…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약속해 줄 수 있다. 그대가 살아 견뎌 주기로 한다면, 그동안 나는 그대를 그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보내는 데 온 힘을 다하겠노라고.”
“……!”
이이가 버텨만 준다면, 그는 이 영혼의 귀환을 위해 온 노력을 다할 것이다.
“…돌려, 보내 준다고요? 저를? 집에……?”
“확답하진 않겠어. 나는 마법사니까.”
그를 위해 쓸 만한 것도 있다. 아무렴 최근 개발한 마법 중에 부정을, 마기를 여과 및 정화하여 마력으로 뽑아내는 게 있지 않던가.
“그렇지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만은 할 수 있다.”
물론 그게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을 거다. 그 마법을 이 육신에 적용해 봤자 벌어지는 일은 악마의 무력화 정도─무력화 자체도 성공할지 미지수고─일 것이므로.
더불어 만에 하나 악마가 무력화되도 문제다. 악마의 무력화는 이 육신을 뒷감당 걱정 없이 죽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거지, 이 영혼의 귀환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대를 이 세상에 끌고 온 두 존재의 계약을 뚫고, 그대가 몸 성히 귀향할 수 있도록 내 이름과 명예 전부를 걸고 협조하겠단 이야기야.”
더구나 이것엔 약간의 위험성도 따랐다. 암, 악마가 무력화되면 그 악마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계약은 어떻게 되겠나?
지속되면 본전이지만 파기되면 도박이다. 계약이 파기됐을 때 그 계약에 속박된 이 영혼이 돌아갈지, 혹은 이 세상에 묶일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악마가 무력화를 넘어 사망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청산호는 누구보다 힘써 온 이 영혼을 가지고 도박할 생각은 없었다.
“반드시라고 확답해 주지 못하는 건 사과하지. 그러나 노력하겠다는 말은 절대 빈말이─”
하지만 시간을 준다면, 그에게 보다 안전한 방법을 강구할 시간을 준다면. 그는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할 것이다.
“…잠깐. 두 존재? 계약?”
어떻게든 그럴 생각이었다.
“…역시 계약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나?”
청산호는 잠깐 숨을 들이켠 후, 소박한 들꽃에 내걸린 고리를 보았다. 고리에 연결된 실은 사슬 더미를 가리는 데 쓰인 그물과 이어지는 것이다.
즉, 이 영혼이 바다를 떠나지 못하도록 억압한다. 정작 해수 속에서 방황하는 건 막지도 않을 거면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하니 참으로 잔인한 계약 아닌가. 아무리 악마를 가두고자 함이었다지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채 이용하기만 한 것은.
“자네의 육신에는 악마만 존재하는 게 아니야. 악마와 악마를 계약하여 악마를 억압하고 있는 영혼 그리고 자네까지 총…….”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산호는 말을 잇던 도중,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다물었다.
「말하면 안 돼……!」
투둑. 봉인된 불꽃을 가리던 그물 일부가 튿어졌다. 악마의 불꽃을 가두고 있던 사슬은 금방이라도 풀려날 것처럼 요동치는 중이다. 잘그락잘그락. 불꽃이 사슬 사이로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아.”
무언가 잘못됐다. 청산호는 그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트드득. 평범하되 비범하고, 이타적이되 이기적일 줄 아는 자는 이미 편린 일부를 알아 버렸다.
트드득. 그물이 좀 더 뜯겨 나갔다. 사슬이, 계약의 사슬이 보다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었구나.”
동시에 악마기사의 육신으로부터 마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까!” 멀리 떨어져 있던 기사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챌 수준으로.
“이곳에, 있었어.”
“…이봐.”
“이곳에… 있었는데도…….”
다행히 그물은 완전히 뜯겨 나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껏 가려져 있던 계약이 바깥으로 보이기 시작한 게 과연 좋은 신호일까?
청산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당한 영혼을 응시했다. 어쩌면 그건… 그 무지는…….
“대현자님!”
“그만!”
청산호는 기사의 부름은 일단 제쳐 두고 철창 안으로 손을 뻗었다. 상대가 가까이 와서 참 다행이었다. 어깨에 손을 얹을 수 있었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울컥 솟아오른 핏물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밭은기침을 내뱉은 후, 짓씹듯 속삭였다.
“내가 말실수를 했어. 이건, 방금 그 말은…….”
“당신의 말을 따른다면.”
그러나 그 말은 잘렸다. 밤보다도 짙은 불꽃을 옷깃에 붙인 자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과연 집에 갈 수 있겠습니까?”
주르륵. 어느새 말라붙었던 뺨 위로 붉은 액체가 흘렀다.
“그건─”
“당신은 저를 두고 누름돌이라 했죠. 제가 빠지면 악마가 날뛸 거라고.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저를 집에 보내 줄 것 같습니까? 지금도 저란 사람은 불쌍하지만, 악마가 위험하니 처형하는 게 옳다 말하는 사람들이?”
“…….”
“또 그런 모든 장애물을 뚫고 당신의 불확실한 연구가 성공하려면, 저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인내하면 됩니까?”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대현자님, 물러나십시오!”
“…저는 그러기 싫습니다.”
뒤쪽에서 상황을 눈치챈 기사가 그를 불렀다. 그러나 청산호는 그 기사의 외침에 답할 수 없었다.
“저는 그러기 싫어요.”
“잭, 너는 종을─!”
서걱!
감옥의 창살이 잘려 나감과 동시에 근처를 음울하게 밝히던 횃불대가 잘려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간이로 제작한 종도 마찬가지였다. 얇은 금속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무슨……!” 병사와 기사가 당혹을 드러냈다.
“남의 사정에 휘둘리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해.”
그사이 청산호는 상대가 갑작스레 일어나는 바람에 밀쳐 나동그라진 몸으로 기침했다. 그러자 상대가 움찔거리더니 그에게 손을 뻗었다.
피가 목구멍을 막지 않도록 등을 세워 주는 손길이 제법 부드러웠다.
“당신의 선의에는 감사합니다. 하나 부디 이해해 주시길.”
속삭이듯 작게 뇌까려지는 목소리도 비슷했다. 청산호는 피를 토하며 자신을 지지해 준 이를 붙잡았다. 상대가 저를 해하지 않으리란 것이 너무나도 선명해, 무심코 한 행위였다.
“전 할 만큼 했고, 이젠 가고 싶어요.”
또한 그렇기에. 상대가 그를 결코 해할 사람이 아니기에, 그는 다시 손을 놓았다.
“…그래. 그렇겠지.”
기실 대현자로서의 청산호는 지금 악마기사를 보내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부분의 세력이 그를 향해 날을 세우는 지금, 그가 멋대로 이탈까지 했다간 적으로 확정할 확률이 높은 까닭이다.
그뿐인가? 그가 품은 악마나 그가 가진 가치나, 저 청년이 가 버린 후 악마만이 남았을 때의 상황이나. 그를 붙잡아야 할 이유는 너무도 많다. 제안에 동하도록 설유하든, 저 청년의 여린 마음에 호소하든 대현자로서는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단 말이다.
“그걸 내가 막아선 안 되겠지.”
하지만,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청산호는 어떨까.
이유도 모른 채 끌려와 온갖 고초를 겪은 사람이 더는 남의 사정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이제 자기 자신을 위해 집에 갈 방도를 찾겠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과연 막을 수 있어?
그처럼 불확실한 방법 대신, 모두가 막아설 상황을 예상한 대신 보다 확실한 방법을 찾아 떠나겠다는데 그걸 정말로 막을 수 있겠느냐고.
“청산호 대현ㅈ─!”
딱.
“크허헉.”
“……!?”
아니, 그럴 수 없다.
“사람들이─”
“쿨럭!”
다른 걸 다 떠나, 손자를 살려 준 은인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당신.”
“…수면, 마법을 쓴 반동이니까. 쿨럭. 걱정할 필요 없다… 죽을 정돈 아니야. 저들도 죽은 게 아니라… 그냥 잠들었을 뿐이고.”
죽을 것 같긴 하지만, 죽진 않을 거다.
그는 기사와 병사가 곯아떨어진 걸 확인한 뒤─망할, 호위까지 범위에 넣어 버렸군─숨을 길게 뱉었다. 피가 호흡을 조금 방해하여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왜… 피를 토하면서까지 마법을…….”
그래도 사람들이 동요할 것을 대비해 악마기사의 감옥을 변경에 마련한 것 하나만큼은 다행이다 싶다. 여력이 부족하여 경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다.
경비들까지 처리한 지금, 이 정도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그대처럼 고결한 영혼을 붙잡을 수는 없으니까.”
“이런 도움은 굳이 주지 않으셔도 충분히……!”
한데 이 와중에도 이 청년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건가? 사람이 이렇게까지 상냥할 필요가 있긴 한가.
“충분하지 않아.”
하긴, 이런 사람이니까 악마를 누르기 위한 패로 데려와진 거겠지.
“이 세상이 그대에게 받은 걸 고려하면, 이깟 호의는 보답조차 되지 못할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악마가 말했던가? 그의 헌신이나 희생은 외면될 것이라고?
“그럼에도… 오늘 이후로 많은 이들이 그대를 손가락질하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대의 진심을 짓밟고, 그대의 노력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릴 거야.”
그래. 그건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진실을 모르고 알려 들지도 않는 자들은 이제 그를 마음껏 비난하고 적대시할 테니.
“하지만… 파도치는 청산호의 이름으로서 선언하건대. 그대는 용사에 비견되는 영웅이고, 어쩌면 용사보다 더한 구원자다.”
그러나 그만은 진정한 진실을 직시할 것이다.
“적어도 나만큼은 그걸 평생 잊지 않을 거다.”
이 땅에서 누가 희생했는지, 누가 이토록 노력했는지, 누가 이다지도 자신과 관계없는 이들을 위해 선의를 베풀었는지… 그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대의 헌신에, 감사를.”
“…아.”
“…자네가 내 손자와 친구가 되어 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놈이 악마기사를 유독 신경 썼던가. 그래. 이런 사람쯤 되면 그 인성 터진 손자 놈도 신경 쓸 만하다.
“…저 같은 건 친구로 삼아서 좋을 게 없을 텐데요.”
“틀렸다. 그대가 아까우면 아깝지. 내 손자지만, 그놈은 능력 외엔 볼 게 없으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영혼에 홀리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이 문제일 테니까.
“…뭐 됐어. 이제 그만 가 보도록. 시간을 너무 끌어서 좋을 것 없으니까. 수면 마법은… 하. 오래가지 않아.”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건가……? 정말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도…….”
“하지만, 당신이 아니었다면 전 끝까지 이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 이렇게나 고결한 비조를 두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그러니 감사할 수밖에요.”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어진 자를 보고 심금이 울리지 않는다면.
“…저 꼭 집에 돌아가겠습니다.”
자신의 노고를 치하받지 못한 채, 오직 한 사람의 이해만을 얻었을 뿐임에도 활짝 웃을 수 있는 사람을 두고 머리가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그 사람의 문제일 거라고.
“그래, 꼭 가라.”
“…네.”
청산호는 이 와중에도 자신이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돕는 이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죽을 상처도 아니고, 시간도 없을 거라 했음에도 끝까지 친절을 베풀기는.
“썩 가 버리래도.”
“안 그래도 지금 갈 거였어요.”
“거짓말하기는… 아, 그래. 혹시 내가 그대를 변호해도 되겠나?”
그렇지만 덕분에 하늘 보기는 편하다. 청산호는 보드라운 담요가 제 아래에, 위에 덮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변호라면…….”
“앞서 말했던 것 중 일부를… 다른 이들에게 말해도 되겠냐는 의미야. 모두에게는 말고, 자네의 처우를 결정할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만.”
“…….”
활짝 피어난 별꽃이 바닷물을 뚫고 하늘로, 저 하늘로 별을 쏘아 올리는 것이 보였다.
꽃이, 별이 바다 위 하늘에 떠올랐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어째서?”
“…글쎄요. 그보다 진짜 가겠습니다.”
별꽃이 떠나가는 자리 자리에 맞추어 마치 강처럼 도도하게, 촘촘하게, 수수하게.
“아아.”
야화가 그러하듯 더없이 질기게, 그렇게 피어났다.
비바람을 뚫고 꽃잎을 펼친 수천, 수만의 별꽃이 밤을 은은하게 밝혔다.
“…현실에서조차 보지 못할 빛의 향연을, 나는 사람에게서 보는구나.”
가로되 저 영혼이 자아낸 낙루의 바다에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일 것이오, 바다가 위로 쏘아 올린 별꽃 개개의 명칭은 정이라.
“이렇게 보낼 사람이 아니거늘…….”
그는 사랑의 품에서, 다정의 아래에서 작게 눈물 흘렸다.
“길라잡이 별의 축복이 함께하길.”
길을 찾는 자들을 가호하는 별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