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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34화 (234/389)

234화 괴로움으로 가득해 (7)

“내기라니… 네가 악마랑 한…….”

마이스터는 창살에 기댔던 몸을 떼고, 악마기사를 돌아보았다. 이놈이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구나 짜증내던 이성은 말을 잇던 도중에 생각을 고쳐먹는다.

그가 지금까지 봐 온 악마기사는 흔하디흔한 머저리 1이 아니라, 나름 말이 통하는 일반인 1이었다.

그런데 일반인 1이 갑자가 머저리 1로 다운그레이드됐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예컨대 지능이 떨어진 게 아니라 정말 기억이 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마이스터는 할아버지에게 전해 들은 말을 떠올렸다. 『신호탄을 쏘던 순간까지.』 그것이 이면의 사정을 생략한 한마디가 아니라면 결국 그 자체로 진실이 된다.

즉, 악마기사는 신호탄을 쏜 후 여기서 다시 깨어나기까지의 기억이 없다.

…악마와 내기한 기억도, 하다못해 자신이 마지막에 뱉은 경고도 떠올리지 못한다.

마이스터의 골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듣기로, 네 몸에 들어 있던 악마는 모종의 내기로 인해 우리들을 죽이기는커녕 피해 하나 입히지 못했다고 했어. 나를 포함한 모든 인물은 그 내기가 너와 악마 사이에서 오간 것이라 판단하고 있고.”

그렇지만 할 말은 해야지.

그는 서둘러 악마기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제법 놀랐는지, 마이스터와 마찬가지로 몸을 살짝 돌린 이가 입술을 작게 열었다가 닫았다.

“…내기 내용은, 말하던가?”

별개로 기억이 없어서 의뭉 떨었던 것이지, 진짜 지능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보다.

마이스터는 ‘그것이 진짜냐.’라든가, ‘그런 기억 없다.’ 같은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악마기사를 보며 나름 흡족해졌다. 그나마 말이 통하던 놈이 머저리가 됐다면 대략 한 시간쯤은 안타까웠을 것이다. 다행이다.

“우리가 너를 죽이려 들면 본인이 다시 나올 거라던데.”

“그것이 진실이라면, 말하지 않는 게 이득이었을 터다.”

“동의해. 하지만 저 조건을 말해 주는 것조차 내기 조건이라고 떠든 게 문제지. 만약 저게 가식이라면 다행이지만, 진실이라면 우린 대응 가능한 인력 없이 대악마를 상대해야 했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악마기사가 멀쩡히 깨어난 것은 참 천운이었다. 악마기사의 입장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입장에서도.

“더불어 네가 확실히 준비를 하란 전언도 남겼으니, 이쪽으로선 서두르다 망치기보단 믿어 보는 쪽을 선택했을 수밖에.”

“…내가 전언을 남겼다고.”

“그래.”

예상은 했지만 전언을 남긴 것도 기억하지 못하나.

마이스터는 머리카락과 밤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이를 두고 또 한 번 제 앞머리를 털었다. 담배가 당겼다.

“…그건 겨우 얻은 그릇을 잃고 싶지 않다고 했어. 아마 그 때문에 내기가 시작된 거겠지. 문제는 내기를 타협 보는 과정인데, 달리 가늠되는 건?”

“…….”

그렇지만 불이 없다. 언제나 그게 문제였다. 이 세상에서 불은 아직도 귀했다. 사람을 태우거나 괴롭히지 않되, 사람을 돕는 불은 이다지도.

“거기, 멈춰!”

그사이, 악마기사를 경계하기라도 하듯 좀 떨어져 서 있던 기사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흐트러져 있던 기강을 빠르게 다잡으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그들의 온 신경이 향한 곳은 어정쩡하게 다가오던 누군가다.

입은 차림새나 서 있는 모양새나 아무리 봐도 모험가 이하인 사람이 화들짝 놀라 멈춰 섰다.

“여긴 접근 금지 구역이다!”

멈춰 섰다면 이 이상 날 세울 일 없다.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병사 하나가 나섰다.

“그…….”

그러자 상대의 눈이 데구루룩 굴렀다.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가 괜히 경계했나 싶을 정도였다. 병사들처럼 날 세우지도 않았던 마이스터마저 괜히 맥이 풀렸다.

“그, 저, 아예 안 되는 겁니까?”

와중에 상대는 비굴할 정도로 납작 엎드린 목소리를 내었다. 무언가 강대한 각오를 품고 온 건 아닌 듯했다. 짧은 잿빛 머리칼을 어떻게든 그러모아 묶은 꽁지가 고갯짓을 따라 살살 움직였다.

“용건이 있다면 먼저 신원을 밝혀라.”

“모, 모험가입니다. 이번에 지원 온.”

“패.”

“여기 있습니다.”

모양새는 아무리 봐도 싸움 경험이 없는 일반인인데, 모험가 패는 또 가지고 있다. 마이스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를 관찰했다.

악마기사와의 대화가 흐지부지 끊긴 상태라 가능한 일이었다.

뭐, 마음 같아선 저런 풋내기를 관찰하기보다는 아까의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만… 그건 악마기사가 준비 안 된 듯하니까.

“접근한 이유는?”

“그, 전달할 물건이 있어서…….”

“누구에게?”

“저기, 저분께…….”

별개로 모험가가 악마기사에게 줄 물건이라. 마이스터는 모험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찾았다. 손에 큼직한 것을 들고 있어, 전달 물품을 추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지… 가죽에 동여매어진 상태라 그 안의 내용물을 알아볼 수 없을 뿐이지.

“…아.”

더불어 뒤편에서 자그마한 탄식이 들려왔다. 악마기사의 것이었는데, 부정적인 의미로 느껴지진 않았다. 보다 정확히는, 저 모험가가 가져온 물건을 아는 눈치다.

“중요한 건가?”

“…어쩌면.”

해서 속삭이듯 물어보니, 부정은 아닌 답이 돌아왔다. 그거면 됐다.

“수감자를 상대로 불확실한 물건은 불가하─”

“아, 내가 시킨 게 왔나 보네.”

마이스터는 과장되게 입을 열었다. 암, 악마기사도 모르는 것이라면 구태여 전달해 줄 이유가 없으나─위험한 물건일지도 모르니까─아는 물건이라면 응당 전해 줘야지 않겠는가.

그건 악마기사가 사람인 이상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다. 죄도 아닌 죄로 박탈당해선 안 되는 자격.

“직업 정신 한번 투철하네요. 나중에 줬어도 됐는데.”

하므로 마이스터는 막아서려는 병사들을 제치고 모험가에게 다가갔다. 모험가는 조금 당황한 눈치나, 이내 기민하게 얼굴 표정을 달리했다.

“급한 것이라 들어서… 하루 종일 찾느라 늦어진 만큼 최대한 빨리 전해 드려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아, 눈치가 빨라서 모험가 일을 하는 건가 보군. 마이스터는 기민한 점에는 추가 점수를 주며 물건을 받아들였다.

물론 병사들은 무어라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마저도 마이스터가 세르게이를 노려보고, 세르게이가 눈을 데굴 굴리다 병사에게 눈총 주는 것으로 해결됐지만 말이다.

“마이스터님, 대화는…….”

“조금만 더 하면 끝나요. 내가 여기 그렇게 오래 있었다고 생각은 안 하는데?”

마이스터는 모험가를 향해 가라는 손짓을 한 후 몸을 다시 창살 쪽으로 옮겼다. 악마기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 멀리 피워 둔 횃불대가 어렴풋이 띄운 상대의 얼굴 윤곽은 강파르기 짝이 없다.

“…너.”

“자.”

마이스터는 쇠창살에 최대한 달라붙어, 그가 악마기사에게 무언가 건네는 것을 병사들이 못 보도록 했다. 창살 사이가 팔 하나 오갈 너비는 되어서 참 다행이었다.

“…….”

다만 이제 상대가 문제였다. 그렇게까지 해 줬음에도 주저하며 손 뻗기를 머뭇거린 것이다.

어둠 속에 녹아든 채, 갸냘픈 빛에만 겨우 드러난 인물선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움직임에 따라 칠흑 속으로 푹 꺼지기도, 주홍빛을 미끄러트리기도 하는 손끝은 마치 유성을 담은 밤하늘 같다.

“안 받아?”

하나 유성은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비참하던 시절 그에게 희망이 되어 주었던 것은 오직 작은 창문 새로 보이는 별이었고, 유성은 그런 별이 지상으로 떨어지는 걸 뜻하지 않나.

그러니 싫다. 마이스터는 일부러 상대를 재촉했다. 기어이 주저하던 이가 손을 뻗어 주었다.

“안에 넣을 만한 건 없겠지?”

당연하지만 포장용 가죽까지 넘겨주진 않았다. 자신의 것이라고 병사들에게 둘러댄 이상, 이따 돌아갈 때 보여 줄 건 필요했다.

“…….”

안쪽 내용물─종이 뭉치 같았다─을 챙겨 간 악마기사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가져가라.”

그러곤 포장용 가죽 안에 담을 만한 무언가를 내밀었다. 별의별 물건이 다 있었다. 손수건에, 머리쓰개에, 몇몇 지역의 특산품이나 공예품도 있고. 어쩌다 챙겼는지 모를 것들이었다.

다만 그쯤 되니 마이스터는 기가 차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새삼 깨달았지만, 악마기사가 저곳에 갇혀 있는 건 오롯이 스스로 그러길 바라서다.

쇠창살도, 병사들의 경계 때문도, 탈출할 여력이 없어서도 아니라, 순전히 그가 그러길 허락했기 때문에.

“…고맙다.”

또한 대화를 허가하는 것도 여기까지인가 보다. 마이스터는 저 감사 인사가 어떤 것에 대한 화답인가 고민한 채, 뒤도는 이를 따라 본인도 몸을 돌렸다.

얻은 단서는 몇 없지만, 이제 돌아가서 고민할 시간이었다.

* * *

“고맙다면 살 생각이나 해. 모두를 위한 희생이니 뭐니 하는 개죽음이 난 제일 싫으니까.”

나는 마이스터의 말을 듣고 쓰게 웃었다.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 이걸 과연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 말할 수 있나?

단순히 힘에 겨워 쉬고자 하는 욕심을 희생으로 포장해도 되나.

“…….”

대부분의 사람이 나를 죽이려 드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모두를 위해 발버둥 친 것이 후회되진 않는다. 애초에 그것은 모두를 위한 노력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걸 지켜보기 힘든 내 성정을 알고 한 행위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또한 나를 처형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원망스럽지도 않다. 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강대한 무언가를 두고 겁을 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던가?

옛 사람들이 자연재해를 신격화하거나 악마의 짓이라며 두려워한 것처럼. 그것의 원리를 찾기보다 누군가가 나쁜 짓을 해서 하늘의 진노를 산 거라 원망하기를 우선하는 것처럼.

인간은 본래 그러한 동물이니까.

“이봐.”

하지만.

하지만…….

“나갈 생각은 하지 마라.”

날것의 악의와 배타적인 태도가 이해되고 또 납득되어도 감정적으로 힘들어지고 마는 순간은 있다.

인간이란 동물이 원래 그렇다는 걸 알아도, 이런 상황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으론 받아들이지 못하는 때가 한 번쯤은 온단 말이다.

“걱정 마라.”

그렇다고 내 고생을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억울하노라 토로하고 싶진 않다. 내가 한 행위를 두고 그러지 말걸, 이라며 후회하고 싶지도 않다.

암, 그걸 인정하게 되면 내가 지금껏 노력한 모든 행위는 뭐가 되겠는가? 나의 최선은? 현재를 임하고자 했던 내 발버둥은?

“나갈 생각 없다.”

내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게 돌아가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참는다.

하나 쏟아지는 부정적 감정들까지 인내하기엔 내 상황이 영 좋지 않은지라. 그거까지 견뎌 내고 싶지도 않다. 애초에 그럴 체력조차 없다. 내가 고생한 걸 알아 달라 하고 싶지도 않지만, 욕 듣고 화내거나 웃어넘기거나 하며 반응하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

그래, 저들의 적대감을 견딘 채 살아가는 게 힘겨울 정도로.

“하.”

해서 나는 작은 숨을 내뱉으며 한쪽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기댔다. 내 손엔 두 달 전 부탁한 ‘악마기사’의 정보가 있으나 읽을 의향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알아내고 해석해서 추론하는 일조차 귀찮았다.

이대로 가면 죽을 확률이 농후하다는 것 또한 내 무기력에 손을 더했다. 어차피 죽어 무의미해질 거라면, 귀찮게 머리 쓰기 싫다.

쉬고 싶다.

나는 무릎에 머리를 묻은 채 눈을 감았다.

부모님이,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

.

.

“엇, 대현자님.”

“수고가 많군.”

…하나 세상은 나를 쉬게 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겉잠 속에서 등 뒤가 다시 소란스러워지는 걸 느꼈다. 밤이 늦었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어찌 오셨는지…….”

“성주의 부탁으로 상태를 확인하러 왔네.”

심지어 말소리로 보아 방문자는 대현자인 듯하다. 목소리로 보아 아크메이지는 아니고, 다른 사람 같지만.

그러나 내가 그를 꼭 응대해 줘야 할까? 이 고요와 적막이 가져오는 알량한 평온을 구태여 내가 깨야 할까.

나는 깨어난 이래, 무언가를 먹지도 못해서 헛헛한 뱃가죽을 두고 몸을 좀 더 웅크렸다. 굶주림이 한계를 넘으며 허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기분은 의외로 썩 편안하다. 그러니까,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제한 안에서.

“자는 것 같진 않고, 말 걸어도 되나?”

“자지 않는 건 어떻게 아십니까?”

“나를 봤으니까 알지.”

“…뒤돌고 있는데요?”

“자네가 보는 세상엔 그렇겠지.”

하지만 상대는 쉬이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오가는 두 개의 목소리를 들으며 약하게 숨을 뱉었다.

그래도 상대하기 싫다.

“흠. 일단 넌 물러나 있어라.”

“예?”

“단둘이 대화해야 하니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든 먼저 돌아가든 떨어지란 소리다.”

“…예, 뭐. 그런 거라면야. 저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갈 때 신호 주십시오.”

…상대하기 싫다.

“드디어 둘만 대화할 상황이 되었군. 휴식을 방해한 것은 사과하지. 누가 들으면 곤란할 이야기를 할 거라.”

정말 상대하기 싫은데.

“그래, 그래서 정말 나랑 대화 안 할 건가?”

정말로─

“다른 세계에서 온, 귀한 영혼이여.”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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