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괴로움으로 가득해 (3)
마이스터는 타박상으로 부은 다리를 절뚝이며 생각했다.
“악마 새끼들, 정말 시원하게도 말아먹었네.”
말로만 들었을 땐 긴가민가했는데, 직접 보니 확실히 체감이 된다. 도시의 절반과 해안가 일대가 삭제됐다는 문장이 말이다.
“마탑까지 갈 것도 없겠어.”
아니, 이쯤 되면 마탑이 있던 자리를 찾는 것도 문제다. 암,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엔 단서가 될 만한 거리와 건물이 하나도 남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이 일을 모르는 사람에게 저기 광경만 잘라 보여 주거든 도시가 있던 자리란 것도 몰라볼 것이다. 거의 뭐 암석 사막이다.
“마법 재료를 찾는 건 포기해야겠고…….”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마이스터는 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하나 쥐어 탁탁 던졌다 잡기를 반복했다. 툭. 그의 다리는 뚝 끊긴 길목 끝자락에 닿는다.
“칼로 치즈 단면을 썰어도 이렇게 매끄럽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는 잘려 나가지 않은 부분과 잘려 나간 부분의 경계를 자세히 관찰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건지는 몰라도, 몇 미터짜리 벼랑이 생겨 버렸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끊긴 부분의 단면이 너무도 매끄러워, 뭘 잡고 내려갈 수도 없다는 건 좀 문제였지만 말이다.
“흠.”
그렇다고 뛰어내리기엔 다리 부러지기 딱 좋은─심지어 현재 그의 다리는 완전히 멀쩡한 상태도 아니었다─높이다. 만에 하나 부상 없이 착지한다고 한들 다시 올라올 때도 문제고.
해서 마이스터는 내려가는 대신 위에 쪼그려 앉았다. 툭.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이 땅에 엎어졌다.
“해안가 쪽이 좀 더 깊게 파였나. 꼴을 보니까 바다에 잠긴 부분도 좀 날아간 것 같은데…….”
거리감이 좀 있으나, 층이 진 게 안 보이진 않는다. 그는 해안가 쪽이 훨씬 더 깊게 파인 것을 기억해 두며 나름 호재라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게, 그가 기억하던 성벽의 마지막은 머맨들로 득시글하지 않았던가. 더불어 그 거대한 거북이… 인 척하는 뱀인지 뭔지 싶은 놈도 있었고.
그에 반해 지금은 깨끗하기 그지없다. 놈들이 이것에 휩쓸려 죽었을 확률이 농후하단 의미다.
하다못해 놈들─거북이는 확실하게 불길에 물려 죽었단 증언이 있으니 더는 고려할 필요 없고 머맨만 생각했을 때─이 불을 피해 바다로 몸을 던졌더라도 마찬가지다.
증언에 따르면 공격은 몇 초 만에 이뤄졌다 하니, 최소한 절반쯤은 죽었을 거라고 본다. 그리고 절반이나 죽었다면 머맨들도 뒷수습하느라 그들을 공격할 생각은 추호도 못 할 테고.
호재라면 호재가 맞다.
“도시가 이 꼬라지가 됐는데도 다시 상륙을 시도하지 않는 걸 보면, 절반 수준이 아니라 떼거리로 죽었을지도 모르고……?”
한데 해안가 쪽에서 무언가 빛이 반짝거리는 게 보인다. 모래가 반사한 빛이라기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과한 빛무리였다.
“뭐야.”
설마 머맨인가? 그는 할아버지한테서 뺏어 온 확대경을 다급히 눈 쪽으로 가져갔다.
“…유리?”
다행히 반짝거리는 것은 머맨의 비늘이 아닌 듯했다. 정체가 의외인 건 매한가지였지만.
“진짜 유린가?”
그는 확대경을 조절해 가며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그렇지만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파편들은 아무리 관찰해도 유리로밖에 안 보였다.
유리가 얼마나 힘들게 만들어지는지 아는 자의 목소리가 얼떨떨해졌다.
“…장난 아니군. 유리가 거의 뭐 양산돼 버렸는데.”
도시를 날린 주범이 불을 다뤘다더니만, 어지간히도 고열인가 보다. 마이스터의 손이 스스로의 뒤통수를 긁었다.
“금속 제련할 때 유용하겠네.”
놀라움에 대한 감상은 그게 다였다.
그의 몸이 슬 일어섰다.
“마이스터님! 아직 머셨습니까!?”
“아뇨, 끝났어요.”
볼 건 다 봤으니, 이제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위해 일할 차례다.
“공방 거리의 징발은 거의 마무리된 상태입니다. 챙길 것이 있으시면 어서 챙기시기 바랍니다.”
“그러죠.”
마이스터는 본인의 공방을 포함해, 공방 거리가 아슬아슬하게나마 증발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꼭 공방 주인의 입장에서만 그리 여기는 게 아니다. 난민이 된 시민들을 고려해도 같은 판단이다.
아무렴 장비가 있는 장인은 없는 장인보다 더 많은 것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 뭐든 부족한 이 상황에선 그 차이가 몇의 목숨을 살릴 것이다.
덜그럭.
그런 의미에서 그는 톱이나 망치, 조각칼, 자 따위를 우선해 가방에 담았다. 상황상 제련보다 목공이 더 많이 쓰일 걸 고려한 선택이었다.
“마이스터님, 금속 조각과 불쏘시갯거리를 챙겨도 되겠습니까?”
“먼저 보여 주세요.”
가져가는 거야 상관은 없지만, 물에 닿으면 폭발하는 금속 등도 있는지라 점검은 한번 해야 한다.
마이스터는 병사들이 상자째로 끌고 오는 것들을 슬쩍 확인했다. 역시나 위험한 소재가 몇 개 섞여 들어간 게 있었다.
“책들도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어요.”
책, 그러니까 종이만큼 불쏘시갯거리로 좋은 것도 없긴 하지. 많이… 비싸긴 하지만.
그러나 책은 다시 살 수라도 있지, 사람 목숨은 다시 못 산다. 그는 다신 구할 수 없는 책만 몇 개 빼놓고 그들이 옮길 수 있도록 허가를 내려 주었다.
팔락. 처음 보는 표지가 그의 눈에 밟힌 건 책을 두 상자째 보냈을 때였다.
그는 ⌈꺾인 뿔⌋이라고 적힌 책을 집어 내용을 확인했다. 뒤늦게 이것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게 아직도 있었네.”
몇 년 전, 술집에서 종종 마주치는 공상가─인데 집안에 돈이 많아 한량처럼 살아도 되는─가 얼마 전 경험을 토대로 쓴 글이라며 선물한 책이었다.
책을 읽는 계층은 기껏해야 귀족이나 마법사뿐이고, 자긴 마법사들과 연이 없으니 대신 홍보해 달란 말도 덧붙였었지, 아마.
그 머저리는 살아남았을지 모르겠군. 마이스터는 불쏘시갯거리로 내줄 책의 대열에 그것을 올렸다.
“이것도 옮깁니까?”
“네.”
한데, 그러던 차 그의 마음 언저리가 까슬해졌다. 별 이유는 없었다. 잿빛 머리. 글에서 스쳐 지나간 단어가 누군가를 연상시킨 바람에 그랬다.
“악마… 인가.”
그는 자신이 기절한 후 벌어졌다던 모든 일─할아버지에게 전해 들은─을 곱씹었다.
방금 떠올린 소설의 결말까지 더해지니 기분은 더욱 더러웠다.
“쯧.”
꺾인 뿔의 내용은 요약하면 보답받지 못하는 이야기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 자신의 저주를 숨긴 채 사람 사이에 섞여 든 주인공이, 저주 숨기는 걸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구하지만… 보답은커녕 자신을 악마로 오인한 사람들에게 끝내 내쫓기고 마는 이야기란 말이다.
“담배 말리네.”
한데 그가 보기에 지금 상황도 그 글과 썩 다르지 않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던 꺾인 뿔과 통제가 불가능해 보이는 그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앎에도 그렇다.
솔직히 좀 기분 더럽다.
“아, 불도 없는데.”
담배 피우고 싶다.
* * *
“우엑.”
“헉, 대현자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 신경 끄도록.”
파도치는 청산호는 한 주먹쯤 되는 양의 피를 게워 냈다. 성주의 부탁─모험가의 동태를 봐 달라던─을 들어준 후 제자리로 복귀한 직후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내상이 도진 모양이군.”
그는 한 손으로는 달려오는 마법사들을 제지하고, 다른 손으로는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자동 세탁 마법이 걸린 있는 옷이라 다행이었다. 옷소매에 흥건히 묻어난 피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앞으론 움직이지 마십시오.”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애당초 절대 안정이라던 치료사의 조언이 있은 직후, 발로 뛰어다니며 상황을 해결할 생각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한 상태였다. 이번이야 성주가 대현자의 보증이 필요하다고 당부해서 불가피하게 걸음했던 거지.
“하여간 의심들은 많아서…….”
그러나 그들이 진정 자신과 같은 시야를 가졌다면 이런 일도 불필요했을 것이다. 청산호는 악마가 간사한 조롱과 함께 퇴장한 순간을 떠올리며 혀를 끌끌 찼다.
“대현자님께서 긴장을 풀어도 되는 이유를 명확히 풀어 주셨다면 신전 측이나 마법사들이나 더는 불안해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나는 뭐 말하기 싫어서 말 안 하는 줄 아나? 너희가 내 입장이었으면 똑같았을 것을.”
“그게 문제죠. 본질을 보는 건 청산호 님뿐이라는 게.”
청산호 본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대로 두기만 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는 걸.
다만 이런 식의 직관은 마법사들이 좋아하는 논리나 이성과는 거리가 꽤 있는지라.
확실한 논리를 꺼내라면 꺼내지 못할 것도 없지만, 문제는 그쪽엔 약간의… 사정이 있다. 그가 그의 판단만으로는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좀 심각한 골칫거리가.
“저야 대현자님을 오래 모셨으니 당신께서 괜한 말 할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신전의 사제들은 아니잖습니까. 아까 전에 보고 오니까 그 내기란 것이 일종의 계약인 건 아니냐는 의심도 하던데.”
“…그런가.”
“마법사들도 비슷합니다. 대현자님께서 이렇게 말씀 아끼시는 걸 보면 정말 계약인 거 아니냐고 대화하던 게 보이던데요.”
“심각한 수준으로?”
“음… 아직 강경하게 나갈 수준까진 아닌 듯합니다. 하지만 인내심이 다해 가는 건 분명해요. 그러니까, 설득까진 아니더라도 참고 기다릴 이유 하나 정도는 슬슬 줘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요.”
그렇지만 저 말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가 보기에도 증명 좋아하는 마법사들이 증거 없이 끝까지 참을 리 없고, 신관들도 마땅한 핑곗거리 없이 끝까지 감내할 리 없는 까닭이다.
아무렴 마법사들에겐 논리가, 신전은 악마를 향한 적개심이 그들의 최우선이니 말이다.
“안다.”
하니 결국 기도할 뿐이다. 부디 저들의 인내심이 끝나기 전에, 그가 저 빛나는 영혼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도록 되기만을.
“그보다 내 할 일은?”
별개로 힘겹게 운신해야만 하는 일은 이제 끝이다. 그는 간이 의자에 기대, 움직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치료사의 움직이지 말란 말이 엉덩이만 붙이고 있으면 된단 의미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걸 지켜보던 호위 겸 잡무담당이 불퉁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목숨 줄 하난 질겨서 그 난리 통에도 다시 만나게 된 호위다.
“누가 그걸 모르나? 상황이 개판이니까 감수하는 거지.”
“치료사가 보면 뒷목 잡겠네요. 그쪽 딴에는 없는 시간 내 가며 진단해 준 걸 텐데.”
“꼬우면 본인이 몸 두 개로 분열하라지. 나도 일 맡길 사람이 있었으면 진즉 맡기고 쉬었어.”
“하긴…….”
그러나 호위의 걱정이 무색하게 청산호는 일을 강행했다. 호위도 상황을 잘 알기에 볼멘소리는 더는 하지 않았다.
“그보다 각성제 있나?”
애시당초, 내상을 입은 상태로 일하고 있는 마법사가 청산호 하나뿐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 마당에 우두머리라고 휴식을 누릴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들이 지난 밤 내내 우선순위로 보호받은 건 결국 이런 순간에 중히 쓰일 걸 알아서다. 그 사실을 아는 만큼 멋대로 태만할 수는 없다.
“하나 드릴까요?”
“그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청산호는 각성제를 받아 입에 넣었다. 작고 검은 열매와 빨갛고 하얀 각과의 추출물로 만든 각성제는 감미로운 씁쓸함이 입안에 맴돌도록 한다.
“각성제 몇 개 남았지?”
“아까 병사들한테 좀 나눠 줘서… 오십 덩이쯤요?”
“촉매 대신 각성제만 가지고 나왔군, 다들.”
“억울하네요. 각성제는 원래 다들 기본으로 들고 다니는 거 아시잖아요.”
그건 그렇다. 연구하다 보면 각성제가 급하게 필요한 순간이 있고, 매번 그걸 사 오긴 귀찮은 법이니까.
심지어 각성제를 판매하는 마법사는 판매 시간을 정해 두고 파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기술은 독점하고 있어서 달리 구할 곳도 없었고.
해서 베뮈르헨의 마법사들은 품속에 각성제 서너 개씩은 품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고, 심하면 수십 덩이씩 들고 다니기도 했다.
뭐, 후자쯤 되면 그건 각성 효과보단 간식 용도에 더 가깝지 않나 싶긴 한데…….
각설하고, 이 순간만큼은 각성제가 많아서 나쁠 게 없다.
일반인들이라면 몰라 마법사나 기사, 병사 같은 고급 인력들은 잠을 재울 시간조차도 아까운 게 바로 작금이니까.
“연락 준비는?”
“마법진은 준비했지만, 촉매가 부족합니다. 이대로 시도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쯧.”
청산호는 마법사들의 보고에 혀를 찼다.
치료 마법이 가능하답시고 통신 마법에 능한 마법사까지 병동에 보내 버리는 건 역시 악수였나. 하지만 병동 상황이 적당히 열악해야지.
“벽 형성은, 어떻게 돼 가지?”
“바람 부는 방향은 일단 거의 막았습니다.”
“좋아. 그럼 사람들 사이에 중간중간 기둥을 세우는 쪽으로 가닥을 바꿔 잡지. 천막을 세울 수 있도록 간격 잡는 것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사방위 전부 흙벽을 세워서 사람들을 보호하고 싶으나… 그러기엔 하늘의 구름이 심상치 않다. 어쩌면 비가 올지도 모른다.
“최소한 천막은 친 뒤에 와 줬으면 좋겠군.”
사람들이 비 피할 곳을 마련한 뒤에 와 준다면야 빗물을 받아다 식수로 쓸 수 있게 될 거다. 하나 그 전에 온다면 아마 사망자가 늘어나는 꼴이겠지.
“흠. 그러고 보니 서쪽으로 대피한 사람들도 수습해야 한댔는데…….”
구조에 유용한 인력이 마법사다 보니, 성주가 전령을 보내면서까지 보낼 사람을 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니 그쪽도 최대한 빨리 인원을 선정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제, 뺄 인원이 별로 없다는 거지만.
“산 넘어 산이군.”
마력 회복을 위한 로테이션을 돌려 가며 최대한 갈아 먹고 있는데도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데, 여기서 대체 누굴 빼야 하는 거지?
그는 가용 가능한 사람 명단을 떠올리며 빠르게 계산했다.
“아, 왔다!”
촉매 좀 찾아오라고 보내온 무리가 돌아온 건 그쯤이었다.
“늦었다.”
“영감탱, 지금 내 등에 바리바리 들린 거 안 보여요?”
“흠.”
그중 한 명인 손자가 한동안 쓰지 않던 단어를 써 가며 신경질을 냈다.
도구 없인 마법을 못 써서 밖으로 돌려도 인력 낭비가 아닌데, 마법사긴 해서 촉매를 알아볼 능력은 있다. 거기에 체력도 좋다 보니─다리에 부상을 입긴 했지만, 걸을 수 있다면 된 거 아닌가? 치료사도 단순 타박상이랬고─도시 수색꾼으로는 딱이다 싶어 보냈던 건데… 그게 좀 짜증났던 모양이다.
다만 거기서 조금 옛날 생각이 났다. ‘처음 만났을 때도 저렇게 싸가지가 없었지.’ 설사 다소 이상한 추억 회상일지라도.
“뭐가 그리 짜증난 거냐.”
“…그냥, 좀 거지 같아서요.”
“모은 설비가 사라진 게 그렇게 아까우냐?”
“……? 뭐라는 거예요. 살려고 쓴 건데 그게 왜 아까워.”
“그럼?”
그는 애잔함을 털어 내며 수긍했다. 하긴, 저 녀석이 그런 걸 아까워할 리 없지.
무엇을 희생하든, 살아만 있다면 되찾을 기회가 올 수 있다는 걸 가장 잘 아는 녀석인데.
“그럼 뭐 때문에 그렇게 성이 난 거냐.”
“…도시를 구한 주제에 정작 본인은 죽게 생긴 놈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뭐─ 푸흡, 풉, 커흡.”
한데 지금 뭐라고?
정말 예상치도 못한 답변에, 파도치는 청산호는 그대로 사레가 들렸다.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깜짝 놀라 무언가를 떨어트리거나 하는 실수를 남발했다.
“…네가? 남을 걱정한다고?”
“코뼈 박살 나고 싶어요? 여기에 되물을 여지가 뭐가 있다고?”
“네 인성을 돌아보면 답이 나올 텐데.”
“사람 빡치게 하네.”
손자의 표정이 진심으로 열받은 사람의 것이 되었다. 해서 청산호는 그쯤 해 두기로 했다.
손자와 싸우면 지는 건 그였다. 어떤 의미로든 간에 말이다.
“뭐, 그래.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지 않느냐.”
“알아요. 알아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잖아요.”
그사이 손자가 들고 있던 가방과 짐들을 바닥에 내려 두었다.
공방에서 최대한 긁어 온 듯한 촉매들이 가방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톱이나 조각칼 같은 도구들도 함께였다.
“오오, 촉매다!”
“죄다 하급이네… 혹시 이게 다야?”
“몰라요. 하지만 공방 거리의 건물에선 이게 다였어요.”
“마탑은……?”
한데 그 와중에 누군가가 마탑에 대해 질문했다. 남쪽 성문을 사수하던 당시 기절해 버려서, 마탑이 날아가던 걸 보지 못한 마법사였다.
“건물이 존재했던 흔적도 없던데요. 알면서 왜 물어요?”
“…뭐?”
하지만 손자는 그걸 몰랐다. 사실 알았더라도 신경 안 썼을 거다.
가차 없는 발언에 일부 마법사들이 입을 쩍 벌리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하나같이 연구가 막바지에 이르러, 조금만 더 노력하면 결과가 나왔을 자들이었다.
“…하나도?”
“하나도.”
그렇지만 연구실과 연구 과정에 작성한 모든 것들이 날아가 버린 지금, 그들이 그 연구들을 과연 완성시킬 수 있을까. 청산호는 아마 아니라고 봤다.
털썩.
뒷목 잡고 기절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각성제로도 미처 가리지 못한 피로가 삽시간에 몰려온 정신적 충격과 어울리며 정신을 끊어 버린 결과물이었다.
“보낼 인력이 더 줄었군.”
그러나 그들의 심적 충격은 알 바 아니고.
청산호는 냉정하게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줄었다는 것에만 아쉬움을 표했다.
사라진 마탑에 대한 아쉬움? 그것도 없지는 않았다. 마탑 내에 비축해 둔 온갖 재료들이나 장비들을 전부 합산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나올 텐데, 그게 모조리 증발해 버린 셈이니 말이다.
하나 이미 사라진 걸 아쉬워해 봐야 그게 돌아오진 않는다. 청산호는 마기 정화식이 완성된 후에야 마탑이 날아간 것에 차라리 감사하기로 했다.
“그보다 너, 이제 뭐 할 거냐.”
“여과기 만들어야죠.”
난민이 돼 버린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이야 참으로 많지만, 깨끗한 물보다 우선되는 건 드물다. 그걸 꼬집은 손자의 말에 청산호는 적당히 납득했다.
“왜요?”
“서쪽 성문 쪽으로 구조 인력 요청이 왔는데 보낼 사람이 없어서.”
“제가 가 봐야 의미 없을 텐데 그냥 남을래요.”
“그래라.”
그럼 누굴 보낸담. 청산호의 얼굴이 더욱 구부러졌다.
“대현자님! 키르헨른과 연락이 이어졌습니다!”
“뭐라나?”
“지원군을 보내는 것은 물론, 되르푸마인, 뒤반치히, 슈부르켄, 베르가르트에도 연락을 보내도록 하겠답니다!”
다만 그런 와중에 들려온 지원군 소식은 그의 심기를 조금이나마 낫게 해 주었다.
지원군이 오기까지야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곤 생각하나, 없는 것보단 백번 낫다.
“신께서 베뮈르헨을 완전히 버리진 않았나 보군.”
구름 사이로 햇빛이 쨍하니 사람들 위에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