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세상은 (11)
[기만자, 거기서 머물러 있는다고 내가 당해 줄 것 같니?]
마몬은 용암에 뒤덮인 땅을 보며 손에 마기를 모았다.
[안 피하면 나야 좋고.]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쏘았다. 응집되고, 반발하며 마그마보다 더한 열기를 품은 직선상의 빛에 용암이 꿰뚫리며 퍼엉 터졌다.
[들켰네.]
역시나. 마몬은 멀쩡히 살아 튀어나온 메피스토를 보며 손을 휘저었다. 바닥에 내리깔린 용암이 곳곳에서 솟아올랐다. 마치 동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꼴을 뒤집어 둔 것 같다.
꽈릉! 용암으로 인해 제한된 허공 사이사이로 낙뢰가 내리꽂혔다. 남은 진주는 이제 마흔 남짓. 이것도 아껴 가며 써야 한다.
서걱!
그렇지만 메피스토펠레스만 할까?
[역시 가진 게 많을수록 편하다니까.]
마기량이 전부는 아니나, 승패를 좌우하는 데 제법 큰 역할을 할 수는 있다. 마몬은 그것 하나만큼은 명확히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지점에 흡족스러워하며 용암을 조작했다.
솟아오르던 용암 기둥으로부터 암석 창이 튀어나오고 화산탄이 쏟아지며 메피스토에게 또다시 마기 소모를 강요했다.
그러자 메피스토펠레스가 입술을 삐뚜름하게 휘었다.
[그래? 내가 보기엔 자본만 많지, 투자 실력은 형편없어서 익절은커녕 손절조차 못 하고 초기 자금만 까먹는 사람 같은데.]
마기조차 두르지 않은 검이 형태만 바꾸어 그 모든 것을 베었다. 난잡하되 역동적인 궤적이 그의 주변을 전부 갈아 버렸다.
누가 인간 출신 아니랄까 봐, 도구 쓰는 솜씨 하난 제법이었다.
마몬은 마기 소모를 강요하니, 마기 없이 도구로만 상황을 타개하는 놈을 보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출렁이던 용암으로부터 수십 개의 가시가 튀어나오며 메피스토펠레스를 노렸다.
콱, 콰가각.
있던 건물로부터 재빨리 빠져나온 이가 수 미터로 불었던 검을 줄이고 그대로 내던졌다.
[물어.]
날아오는 과정에서 형태를 바꾼 라텔이 검은 개처럼 내달리며 마몬의 본신을 노렸다. 당해 줄 이유 없었다.
그는 뒤편의 용암으로 마탑을 덮어 가리고, 그 속에서 진을 만들며 본체는 용암 속으로 숨겼다.
딱! 라텔의 이가 맞물리며 그가 있던 허공을 씹었다.
[이제 보니 기니피그는 너 같은데.]
[내가 그렇게 귀엽니?]
[그딴 게 귀여운지는 둘째 치고, 설마 그런 의미겠어. 겁이 많단 소리지. 은신처를 마련해야만 살 수 있는 꼴이 딱 그 짝이잖아.]
동시에 용암 속으로 손이 불쑥 쳐들어왔다. 산양 뼈 속 새빨간 눈은 언제나처럼 비웃음만 가득하다.
[약하고, 겁많고, 멍청한 마몬.]
마몬은 용암으로 기어이 손을 넣은 이를 향해 가시와 열기와 압도적인 질량 승부를 시작했다. 거리가 제대로 벌어지지 않아 죽을 수도 있으나, 위기는 때론 기회가 되기도 했다.
[너라고 다른 줄 안다면 유감인데, 메피스토.]
촤악! 용암에서 솟아오른 가시들이 메피스토펠레스의 온몸을 꿰뚫고 그 자리를 용암이 덮었다.
하나 이게 끝일 리 없다. 그 메피스토가 이렇게 순순히 당해 줄 리 없다. 마몬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그는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콰앙!
간발의 차로 둥근 폭발이 일었다. 온몸을 미끼로 내던졌던 메피스토펠레스의 몸뚱이 주변은 검은 불꽃이 종이 태우듯 마그마를 갉아 먹어 사멸시키고 있다.
사르르륵.
그 속에서 꽃처럼 피어난 진홍색 화마 또한 벚꽃 잎 흩뿌리듯 불티를 마구 뿌렸다. 사르르르 흩어진 불티들이 제게 닿는 모든 것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글쎄, 과연 그럴까?]
퍽! 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마몬의 본체를 뒤흔들었다. 본체에게로 돌아간 줄 알았던 라텔이 뒤에서 암약하다가 그대로 심장에 내리꽂힌 탓이었다.
간교한. 제가 전투에 경험이 없다는 걸 백분 활용한 수에 마몬은 혀를 찼다. 덥썩. 이 와중에 온몸에 구멍이 뚫리고 일부는 잡아 뜯긴 듯 사라지기까지 한 메피스토의 몸뚱이가 라텔을 붙잡았다.
아직 라텔은 마몬의 본체를 관통한 상태였다.
위험해.
마몬은 그 순간 빠르게 도주를 감행했다. 무엇을 내줘도 좋으니 목숨만은 지켜 내고자 한 선택이었다.
서걱!
찰나간, 세상이 순백색으로 물들었다. 모든 게 소멸한 자리에 남는 건 부채꼴로 파인 땅과 반쯤 송장이 되어 서 있는 메피스토펠레스다.
[봐, 도망가는 건 항상 너잖아, 마몬.]
그러나 메피스토는 그 꼴로도 잘만 이야기했다. 그럴 만했다.
메피스토의 본질은 분노이고, 그가 다루는 힘은 화염이다. 그리고 불꽃은… 불씨와 땔감만 있다면 언제든 몸집을 부풀릴 수 있다.
악마들이라면 대부분 재생에 가까운 회복력을 지니고 있으나, 메피스토펠레스는 본질로 인해 그 속도와 범위가 압도적이란 말이다.
가끔, 그가 기만하는 것이 같은 악마가 아니라 죽음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겁쟁이.]
와드드득.
사라진 왼뺨과 오른손을 여유롭게 만들어 내며 메피스토가 속삭였다. 그에 팔을 바쳐 가며 간신히 몸을 뺀 마몬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어쩔 수 없잖아. 난 너처럼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걸?]
하나 그것도 곧내 풀렸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싸워야지 뭐 어쩌겠어. 그냥 당해 줄 수는 없잖아.]
저 멀리 서 있던 마탑이 녹아내리며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많이 낭비된 마기가 다시 차올랐다.
[안 그래?]
마몬에게 여유가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반면, 그걸 고스란히 느낀 메피스토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한참 싸우던 상대가 어디서 마기를 쑥 보충해 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물.]
어쨌거나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메피스토는 상황의 변형에 신경질을 내기보다 차분히 파악에 나섰다.
경우의 수는 몇 개였으나 유력한 건 그중 하나였다. ‘제물 바치기’다.
[왜, 부럽니?]
[하.]
언제 제물을 바쳤을까… 뭐 사방에 놈의 마기가 가득한 이상, 숨기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앞으로다.
상대는 다시 마기를 채웠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이제 마기 하나가 아쉬울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그라도 오래 버티기 힘들다.
무언가 계책이 필요하다.
[원한다면 너도 해. 내가 그걸 손 놓고 보지는 않겠지만.]
똑같이 제물 바치기를 할까? 그러나 제물로 바칠 만한 것이 뭐가 있다고?
세상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물질들은 참으로 흔하여 제물의 가치가 없다. 바쳐 봤자 돌려받는 힘보다, 바치는 과정에서 들 마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런, 기만과 농간의 이름 물려줘도 되겠네.]
[어머, 줄 거야? 그럼 감사히 받고.]
그나마 금이나 보석처럼 명확하게, 대중적인 가치를 부여받은 것들은 제물로 바쳤을 때 꽤 보장된 대가를 돌려주지만…….
과연 마몬이 이 도시에 금을 남겨 두었을까?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양의 금을?
그럴 리 없다.
메피스토는 빠르게 금은보화를 포기했다.
[못 줄 것도 없지… 네가 마땅한 대가를 치른다면.]
[하하, 그럼. 물론이지. 네 그릇을 박살 내는 것 정도면 충분한 대가가 아니겠어?]
그렇지만 제물 바치기가 편한 건 사실인데…….
메피스토펠레스의 붉은 눈이 더욱 붉게 번쩍였다.
‘저 뱀을 바칠까?’
그의 시선이 바닷가에서 꿈쩍도 않는 거북이에 닿았다. 거북이의 등딱지 속에 숨어 있던 뱀은 빼앗긴 것을 찾아 해안가 주변을 모조리 부수고 있다.
공양 이전에 목을 치는 데만도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바칠까?’
다음으로는 인간들이 꾸역꾸역 대피하여 모인 도시 구석이다. 수천 개의 기척이 바퀴벌레처럼 떼를 지은 게 불쾌하면서도 제법 솔깃했다.
생물을 바치는 건 무생물을 바치는 것보다 절차가 복잡하지만… 해서 사전 준비가 없는 지금, 마몬과 싸우는 지금 바치긴 어려울 거라 생각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그 값은 톡톡히 할 거다. 어쩌면 제압하는 데도 힘이 들 뱀 새끼보다 나을지 모른다.
마몬을 잡는 데 쓸 마기가 그렇게까지 많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뭐야, 인간 편을 드는 게 아니었어?]
다만 메피스토의 시선이 인간 쪽에 닿아 있자, 오히려 마몬이 당황했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면 효과적이란 건 그도 알지마는, 용사를 살린 메피스토가 인간을 써먹을까 고민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굉장히 불쾌한 오해네. 내가 왜 인간 편을 들어?]
[그럼 나랑은 왜 싸우는 건데??]
[네가 날 열받게 했잖아.]
…미친놈. 진짜 미친놈!
마몬은 배신이 아니라 부정하던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을 드디어 이해했다.
저놈은 이신에게 붙은 것도 아니고, 인간을 긍휼히 여긴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냥 지옥에서 그러했든 지 X대로 구는 것뿐이었다. 사탄이 약속했던 권리 그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뿐이었다고!
그러니 당연히 배신이 아니지!
[넌, 정말……!]
실로 어이없지만 됐다. 배신이든 열받게 해서 죽이려든 것이든, 제 목이 나가리 될 상황이라는 건 동일하지 않나.
오히려 안도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메피스토가 인간 따위를 위해 그와 싸우는 것보다는 제 성질머리를 못 이겨서 죽이려 드는 게 훨배 어울렸으므로.
[됐어, 죽어!]
각설하고, 마몬은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끌어올렸다.
목표는 날파리로 여기며 방치해 둔 인간들이다. 만에 하나 저것들을 먹고 메피스토가 힘을 회복해선 안 되니, 당연한 표적이었다.
대피의 끝물이던 인간들에게로 용암이 해일처럼 몰려가기 시작했다.
「약속을 어길 셈이야?」
한편, 메피스토펠레스 또한 그 나름의 형태로 귀찮아졌다. 마몬과 대화한 직후, 잠자코 물러나 있던 것이 약속을 들먹이며 그의 목을 옥죄어 온 것이다.
‘나는 약속대로 인간 넷을 구했을 텐데?’
「민간인을 제물 삼으려 했잖아! 나아가 그들을 위험에 빠트리기까지 했어!」
‘약속한 인간들만 안 죽으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빨간 머리, 녹색 머리, 투톤 머리, 백금 머리. 전부 구했다.
그 뒤에 죽는 건, 글쎄. 그것들은 충분히 저 용암의 파랑을 피할 힘이 있다. 그런데도 피하지 않아 죽는다면 그건 그네들 탓 아닌가?
한데 왜 그게 그의 잘못이 되지? 어째서? 그는 이미 마땅한 값을 치렀는데. 그레트헨을 고생시키기 싫다는 계약자의 의지에 따라 사냥개가 되는 꼴마저 감수했는데 왜!
그런데도 대체 왜 그의 잘못이 되느냔 말이야!
거슬림이 분노가 되고, 분노는 고스란히 연료가 되어 그의 불꽃을 더욱 거세게 태웠다.
인간을 공격하려던 마몬의 빈틈을 불꽃이 그대로 찔러 들어갔다.
「…그분에겐 무고한 자들이 죽어 나가는 걸 방치할 거냐 뭐냐 한 주제에!」
그 순간에도 머릿속에선 계약자가 쩌렁쩌렁 고함을 지른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걸 믿었어, 애송이?’
악마에게 신의를 찾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한때 기만이라 불렸던 그가 대상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너!」
‘귀찮게 굴지 마. 이미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내가 인간 따위를 정말 위해 줄 리 없잖아.’
그레트헨이 붙잡고 있던 주도권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야, 상대의 성정에 맞는 거짓쯤은 얼마든지 입에 담을 수 있다.
아무렴, 정당한 계약으로 서로를 속박할 것도 아니고 단순히 몇 마디 해서 그릇을 차지할 수만 있다는데 왜 못 하겠는가?
얻고 난 뒤엔 오롯이 그의 세상인데. 얻기만 하면 말뿐인 약속 따위 모조리 무시해도 되는데!
하므로 그레첸이든 계약자든 이득을 위해서라면 맞춰 주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지금까진 그랬다.
「…그래, 네놈이 그럼 그렇지.」
뻔뻔함을 숨기지 않자, 계약자가 목소리에 경멸을 담았다.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계약자를 경시하는 건 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너는 멋대로 굴 수 없어.」
그러나 이럴 땐 정말 짜증난다. 메피스토의 눈살이 와락 일그러졌다. 매 순간, 모든 걸 대상으로 쌓이는 분노가 더욱 불붙었다.
콰앙! 마몬과의 부딪침으로 인해 폭발이 일었다.
「약속을 지켜.」
‘나는 약속을 지켰어!’
「지켜. 죽기 싫다면.」
빌어먹을! 인간 따위를 왜! 왜 그가 지켜야 하는가! 그의 인생에 저만큼 무가치하고, 하등 의미도 없으며, 도움조차 되지 않는 것들도 없을 텐데 그가 저걸 왜 지켜야 하느냐고!
‘저딴 것들을 지킨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하다못해 제물로 바칠 용도로 삼는다 해도 그렇다. 저걸 지키는 데 쓸 힘이나, 저것들을 제물로─마몬의 견제를 방해를 뚫고─바쳐서 얻을 힘이나 그게 그거란 말이다.
결국 이득이 없다! 그가 얻을 이득이!
그런데도 왜 그가 움직여야 하지? 저것들이 약해서 죽는 건 결국 저것들 탓인데, 왜 그가 희생을 자처해야만 해!
「지켜.」
그러나 선택지는 없었다. 강요된 행동과 지켜봐야만 하는 죽음. 그중 메피스토펠레스가 선택할 건 자명했다.
‘좋아. 백번 양보해서 지킨다 치자.’
생존. 살기 위해서라면 몸을 낮추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어떻게 지켜야 하는데? 설마 고집 부린다고 다 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다만 억지는 받지 않겠다.
암, 마몬을 죽이는 것만 해도 어떤 희생이든 감수해야 할 판인데 여기서 저 많은 인간을 지키라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타협을 보자, 어린 것아. 일방적인 손해만 요구하면 내가 섭섭해지니까.’
아무리 생존이 중요하다고 해도, 너무 낮추기만 하면 이용만 당한다. 메피스토는 그것을 알기에 화를 참고 이죽였다.
계약자가 한동안 침묵했다. 콰앙! 그동안 메피스토와 마몬 사이에선 또 한 번 폭발이 인다.
「…제물 공양이라면 이미 준비된 게 있잖아.」
‘하, 이곳에 제물이 어디 있다고─’
이 새끼가 지금 날 놀리나. 그렇게 생각하던 메피스토펠레스의 몸이 덜컥 멈췄다.
제물은 있었다. 확실히, 있었다.
「다 쓰진 마.」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은 아니고, 그레트헨 때문에 마련해 둔 거긴 하지만… 어쨌든 써먹을 수 있는 장치가 하나 있었단 말이다.
하핫, 하하하핫! 메피스토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인간이란 참으로 어리석어.]
[……?]
하지만 비웃음도 정도껏 했다. 어리석은 계약자는 달리 말하면 그의 이득을 증대화한다.
[네 헌신과 희생을 알아줄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뭔…….]
메피스토펠레스는 마몬과 한 번 더 부딪친 후, 그 반동을 이용해 멀리 물러났다.
거리를 좁히려던 지금까지와 다른 행위에 마몬이 경계심을 품었다.
[왜, 인간을 제물로 바치려고?]
[아니. 아,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있고?]
메피스토펠레스의 부정을 마몬은 결코 믿지 않았다. 인간을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면, 굳이 휩쓸릴 위험을 감수해 가며 파도처럼 몰려가는 용암 앞에 설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해 봐, 메피스토.]
하지만 마몬은 그 행동을 부득불 막으려 들지 않았다. 그가 일으킨 용암을 전부 태우려면 아무리 메피스토라도 마기 소모가 극심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어쩌면 다 태우지도 못한 채 마기만 모조리 낭비할 수도 있고.
[네 발악, 즐겁게 지켜봐 줄 테니까.]
하다못해 저걸 다 불태운다고 쳐도 그다음은? 생물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선 영혼을 묶을 속박과 신체의 가치를 잃지 않도록 보존하는 마법 등이 준비되어야 한다.
진을 새기는 거야 불을 이용하면 어렵진 않겠지만… 마몬이 그것까지 손 놓고 볼 리가 있나.
결국 마기는 마기대로 소모하고 제물은 제물대로 못 바치게 될 테니, 그에겐 그저 이득이다.
그는 가늠 안 되는 의도를 경계하면서도 다소 여유롭게 메피스토가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후회할 텐데. 메피스토가 뇌까린 말만 아니었어도, 끝까지 그런 태도를 고수했을 것이다.
[오래된 마법이여.]
[……?!]
마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극한 법칙이여.]
[너……!]
제물도 없이 저 마법을 쓴다고? 아니, 그 이전에 마법진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는데?
어떻게?
[우주의 천칭이여.]
즐겁게 지켜봐 주겠다던 말이 무색하게, 마몬은 당장 달려들었다. 그의 오랜 직감이 절대로 여지를 주지 말라고 했기에 그 행동은 더욱 빨랐다.
[마땅한 대가를.]
하나 그 속도가 너무도 빨랐다. 제물 바치기엔 분명 몇 가지 단계가 있는데, 메피스토는 그걸 모조리 생략해 버린 탓이다.
미리 다 준비해 둔 것처럼, 예전에 사용했던 것을 재사용하는 것처럼, 맺은 계약을 이행하는 것처럼!
잠깐, 재사용? 계약?
마몬이 무언가를 깨닫기도 전, 옛 규칙이 화답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손 위에 천수의 일부를 대가로 받아 온 힘이 피어났다.
라텔. 흑백이 뒤섞인 검이 휘둘러진 순간, 격동하던 세상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고요의 한가운데서 그 어떤 것도 꺼트리지 못했던, 세상을 향한 화火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