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세상은 (9)
인퀴지터는 자신의 목을 밟고 있는 악마를 보며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했던 장막은 이미 부서져 버렸다.
도시를 향해 날아가는 악마를 막기 위한 것도, 아마 뺀질이일 협력자를 돕기 위한 것도.
전부.
“커억.”
목숨이 지금 붙어 있는 건, 도리어 장막이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에 쓰던 힘이 돌아온 덕택에 목이 부러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뭐, 그마저도 곧 끝날 성싶지만.
“신, 이시여.”
이대로 그녀는 죽을까. 아무도 구하지 못한 채 죽어 버릴까.
“부디…….”
하나 그래도 좋다. 누군가는, 누군가는 그녀의 발악에 목숨을 부지했을지도 모르니까.
“자비를…….”
그러니 이제 바라는 건 약간의 행운이다. 그녀로 인해 부지한 목숨들이 다시 스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행운.
그들이 재정비하여 악마에게 다시 대적할 수 있도록 해 줄 시간이…….
[안 돼!]
그러다 빛줄기 하나가 시야 한쪽을 가린 순간, 그것이 무엇과 충돌하여 거대하게 대지를 뒤흔든 순간. 목을 짓누르던 힘이 약해지며, 그녀의 신성력에 튕겨 나갔다.
외부 변수로 인해 상대 쪽에서 힘을 거둔 형태인 만큼 튕겨 나가 주었다에 맞을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풀려난 건 풀려난 것이다. 그녀는 그 즉시 부족한 숨을 보충하며 끝없이 기침했다. 안타깝게도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스락.
대신 귀 한편을 간지럽히는 소리 하나가 추가되었다. 암석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였다. 쿵. 어쩌면 심장이 추락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쿵.
쿵.
박동 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질 때마다 마기가 강해졌다.
인퀴지터의 눈꺼풀이 부릅 말려 올라갔다. 거대한 마기가 소용돌이치듯 모여들며 악마기사가 구속되어 있던 자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망할 잡것들은 대체 뭘 한 거야!]
쿵.
그건 마치 폭풍과 같다. 눈에 보이는 마기의 기류가 한 점으로 집중되며 뭉치는 모양새는, 가히 지상의 폭풍이었다.
[빌어먹을……!]
그러나 그것에 손 쓸 자가 있는가?
쿵.
없다. 그녀도, 하다못해 그녀를 죽이려 들었던 악마조차도 그 흐름 앞에선 무력하게 대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쿵.
하나의 칼날처럼 날 선 마기는 그 자체로 무기였고, 바닥에 들러붙어 늪처럼 고이는 힘은 명백한 경고였다.
쿵.
갈수록 커지는 박동 소리가 마치 군대의 발 구름 소리처럼, 혹은 사기 진작을 위해 두드리는 북처럼 울려 퍼졌다.
질서 정연하고 엄격하게 절제된, 그러나 경천동지할 열기를 품은 소리였다.
쿠웅!
그리고 그 소리가 기어이 끝을 맺었을 때. 촤악! 들리지 않는 소리와 함께 마기의 구덩이에서 손이 올라왔다.
으드드득.
마기에 덧칠된 것처럼 까만 오른손이 대지를 짚으며 이어진 몸뚱이를 끌어 올렸다. 지하에 매장된 시체가 몸을 일으키듯, 호수에 잠겨 죽을 자가 마지막 발버둥을 치듯, 그러한 형태로.
[아, 드디어.]
산양의 머리뼈를 쓴 자가 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렸다.
[제대로 힘 한번 써 보겠구나.]
인퀴지터의 정신이 기억하는 장면도 딱 거기까지였다.
숨을 괴롭히는 열기가 사라진 것이 유일한 위안이 된 채로,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 * *
우드드득. 우득.
메피스토펠레스는 온몸을 뒤덮은 마기로 엉망이 된 육신을 움직여 보았다.
피부에 눌어붙은 옷자락이 피부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눌어붙지 않은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형태가 옷자락일 뿐이지, 인간으로 따지자면 손톱쯤 될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들. 없애고 새로이 만드는 건 문제도 아니다.
콰드득.
상처도 마찬가지다. 익어서 터졌던 안구는 시신경부터 시작해 근육, 공막, 유리체, 수정체, 홍채, 각막 순서로 자라나며 기존의 안구였던 잔재를 밀어냈다. 눈물 대신 바깥으로 빠져나온 편린이 그대로 허공에 녹아들듯 소멸했다.
와드득.
부러진 다리 역시 원형으로 돌아가고자 천천히 돌아갔다. 그 과정 속에서 바싹 구워져 쪼그라들었던 근육은 전부 녹아 버린다. 사르륵. 텅 빈 자리를 자라난 근육이 뒤덮었다. 피부도, 내장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육신이 근육의 수축으로 곱아들었던 몸을 폈다. 재생되는 과정에서 몇 번 개편된 몸은 메피스토펠레스가 본래 쓰던 육신과 제법 유사하다.
…완벽히 동일하진 않아서, 여전히 불편함은 산재해 있지만.
하나 이 이상 바꾸자니 나중에 되돌릴 때가 문제다. 그가 몸을 완전히 지배한 상태라면 모를까, 대여에 가까운 지금 상황에선 여기까지가 바꿀 수 있는 한계선이다.
아쉬움에 혀를 찬 그는 보다 가늘어진 체형으로 삐뚤게 섰다.
달깍. 얼굴을 뒤덮고 있는 그의 상징, 산양의 머리뼈가 살짝 덜걱거렸다. 엉망이 된 옷가지들은 신체가 재생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로 그의 온몸을 휘감은 상태다.
기억도 안 나는 고향의 흔적이 그의 육신 대부분을 검은색으로 덮었다.
[이것 참, 고마워라.]
이제 완전히 준비가 되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나른한 목소리로, 손짓으로 옷소매를 다듬었다.
[손 놓고 봐준 덕분에 편하게 회복했네.]
어차피 옷으로 인해 잘 보이지도 않는 손목, 까만 장갑을 당겨 더 많이 가리는 꼴은 우습다기보다 도발에 가깝다. 혹시라도 상대가 욱해서 덤벼 주길 바라는 도발.
[…네가 아스모데우스를 어떻게 죽였는지 아는데, 내가 거리를 주는 짓을 할 리가.]
하나 판데모니엄은, 마몬은 넘어오지 않았다. 현명하다면 현명하고, 영악하다면 영악한 판단이었다. 수복되는 틈을 노려 기습해 왔다면, 단숨에 그 머리를 잘라 버렸을 텐데.
하지만 이미 실패한 일이다. 마몬이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넘어올 리도 없고.
[똑똑하네.]
해서 메피스토는 깔끔히 제 욕망을 단념하고, 다른 주제를 들었다. 마몬을 비웃어 줄 패는 아직도 있었다.
미지근한 미소가 산양 뼈에 미쳐 가려지지 않은 하관 위로 떠올랐다.
[별개로 참, 세상도 살고 볼 일이지 않아? 인간이 도움 될 때가 다 있고. 저게 아니었으면 봉인을 깨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텐데.]
인간이 뭘 알고 한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덕에 결계 깰 힘도 아끼고 마몬에게 공격당할 일도 피한 것이 맞다.
아무렴, 저 빛이 단번에 봉인을 깨 주지 않았다면 그가 어찌 이리 쉽게 풀려났겠는가? 마몬은 그가 봉인을 깨려는 걸 못 알아차릴 만큼의 머저리가 아니고, 그걸 내버려 둘 바보는 더더욱 아닌데!
[안 그래?]
[망할… 네가 깨어나지 않을 거라 희망한 내가 머저리였지.]
[글쎄. 그걸 단순히 머저리로 요약할 수는 있나?]
결국 저 멀리서 포를 쏜 인간의 공이 지대하다. 비록 그 인간은 지금쯤 자신이 뭘 풀어 버렸는지 몰라 덜덜 떨고 있는 모양이지만, 아무튼! 목숨 한 번 정도는 건지게 해 줄까 싶을 정도로 인간이 정말 큰일을 해냈단 말이다.
[얕보지 않는다, 방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똑같이 방만하게 구는 모지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은데.]
물론 이렇게 말해도 그가 인간 따위의 불안을 종식시켜 주진 않을 것이다. 암, 공격 범위에 넣지는 않는다. 그 정도 배려면 풀어 준 보답 겸 마몬에게 엿 먹여 준 보상으론 충분할 것 아닌가.
그 이후는 그 알 바 아니다. 인명, 생명은 그가 중시하는 가치가 아니었다.
「약속을 준수해.」
…그렇지만 이번만은 신경을 써 줘야겠다. 빌어먹을.
[…지금껏 인간 하나 못 이겨서 갇혀 있던 네놈에게 듣고 싶진 않은데?]
와중에 들어오는 마몬의 도발은 기분 좋던 메피스토를 더욱 나락으로 처박았다.
자신의 역린을 정확히 저격한 마몬의 말에 그는 입술을 더욱 뒤틀었다. 그의 머리에 굽이굽이 길게 뻗은 뿔은 작은 움직임에도 크게 허공을 휘젓는다.
[오히려 나야말로 의외다 싶어. 난 너라면 도망갈 줄 알았거든.]
[그것 참 이상한 소리네. 내가 왜 널 두고 도망쳐?]
[당연히, 그게 너한테 이득이잖아. 네게 맞는 그릇이 아무리 적다지만… 그게 나한테 먹힐 위협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릇이 깨진다고 해서 내가 너한테서 못 도망갈 정도로 무능하진 않은데.]
그릇이 깨진다고 해서 그의 영혼마저 죽는 건 아니다. 깨지는 즉시 도망가면 얼마든지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그릇이 깨질 때의 타격이 그에게도 오긴 하기 때문에, 도망친 후에도 한 백 년쯤은 영혼을 추스르는 데 써야겠지만 말이다.
[오, 보통이라면 그렇겠지. 메피스토. 하지만 지금 내 뒤를 봐주고 있는 게 누군지 알잖아. 그분이 이번 기회를 놓칠까?]
그래. 그건 분명 문제긴 하다. 차라리 그릇이 깨지기 전 그가 먼저 버리고 도망친다면 영혼 상태에서 사로잡힐 위험도, 그 후에 백 년쯤 추슬러야 할 일도 없겠지. 그릇이야 그 상태로 다시 찾아 헤매면 그만일 테고.
하지만…….
[맞아. 놓치지 않겠지. 그런데 애초에 그 기회, 받을 일은 있을까?]
그건 선택지에 없다. 메피스토는 그것을 티 내지 않으며 입꼬리만 부러 올렸다.
[죽는 건 네놈일 텐데!]
산양 머리뼈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산양 뼈의 안와에서 붉은빛이 뜨였다. 마몬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는 건 어때? 네가 인간에게 다시 주도권을 빼앗길 것도 아닌 이상, 우리끼리 싸울 이유는 더 없잖아. 이신만 좋은 꼴인데.]
[하, 겁먹었어?]
[그래. 난 솔직히 너랑 부딪치고 싶지 않거든. 네가 무력한 상황이라면 몰라, 제대로 부활한 지금은 좀… 나만 손해잖아.]
[약해지는 순간 배신하겠다는 말을 낯짝 두껍게 돌려 말하네.]
[원래 우리가 다 그렇지, 뭐.]
[사탄은 안 좋아할 텐데.]
[설마. 그분도 네가 다시 돌아온다면 반겨 줄 거야. 비록 네가 그릇 간수를 제대로 못해서 우리 쪽이 본 피해가 제법 크긴 하지만… 그래 봤자 네가 제대로 힘쓰면 복구될 것들이잖아. 도시 몇 개만 날려 줘도 그분은 지난 과오를 전부 잊어 주실걸?]
그러나 마몬은 겁난다고 거래를 포기할 정도로 무능한 장사치가 아닌지라. 메피스토는 태연히 제시해 오는 복귀 제의를 두고 키득 웃었다.
검디검어 무저갱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는 가로 동공이 안구 대신 떠오른 붉은빛 한가운데 요사스럽게 자리 잡았다.
[그렇겠지. 그놈이라면 그렇겠지.]
불길하다. 마몬이 침착하게 뒤로 물러서고, 메피스토펠레스의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요동치기 시작했다. 끓어오르는 마기가 사방에 바람을 일으켰다.
[그런데 어쩌지? 나는 사탄 엿 먹이는 게 취미인 사람인데?]
명백한 적대의 표시. 마몬은 어쩔 수 없이 맞춰 힘을 끌어올렸다.
[…정말 배신할 셈이야?]
그러면서도 끝까지 협상을 시도해 보는 태도는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극도로 챙기는 인색답다. 비록 단어 선택은 틀려먹었지만.
[푸, 푸하하핫! 배신? 내가? 배신??]
메피스토펠레스는 정말 상상도 못 한 단어 선택에 더없이 과장되도록, 그리고 우악스럽게 웃음을 토해 냈다.
[이건 배신이 아니야! 애초에 나와 그것이 한편이었던 적이 없는데 이게 왜 배신이 되겠어!?]
그 과정에서 휘저어지는 손은 마디마디가 길어 손바닥보다 손가락이 좀 더 길다. 차르륵. 그 위로 모여든 마기가 마치 손가락 보호구처럼, 손톱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안 그래? 사탄! 말해 봐, 너도 여기 있잖아!]
기어이 벌주를…….
[오, 지옥의 왕이시여. 열받으셨습니까? 내가 이렇게 까부는 게 싫으십니까? 그럼 어서 계약을 깨트려! 당장이라도 내 육신을 공격해 보라고! 내가 스페어 그릇 따위 버리고 본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게!!]
…….
[원래 몸으로, 다시 한번 붙어 보자고!!]
광기 어린 외침이 사탄을 비웃었다.
하나 그런 명백한 비아냥을 두고 반발할 자는 이 땅에 없다. 스스로를 쐐기 삼은 까닭에 저 중간 땅에 갇혀 떠드는 것만 가능한 사탄도, 그의 바로 앞에 존재하는 마몬조차도 그랬다.
그들은 하다못해 메피스토가 반쯤 충동적으로, 반쯤은 계산적으로 떠드는 말에조차 욱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성질머리를 자유로이 터트리던 분노가 가장하던 포악함을 때려치우고 빙긋 웃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겁쟁이.]
차분한 조소에 마몬의 등 뒤에선 새까만 기류가 형성되었다.
죽여라, 지옥의 모든 금을 가지고 싶다면.
[그걸론 부족할 것 같은데, 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죠. 저도 죽을 판이니.]
그러자 마몬의 마기가 좀 더 불어났다. 아마 사탄이 무언가 추가로 조치한 것일 테다. 예상했다면 예상한 결과였다.
[좋아. 이 정도면 분노 너라도 쉽진 않겠지.]
[글쎄. 내기할까?]
그렇지만 그게 자신에게 큰 문제가 되나? 그건 아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입꼬리를 뒤틀며 제 마기를 정렬하고, 부풀리고, 정돈했다.
이 일대가 일시적으로 마역화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악마였고, 사탄에겐 열불 뻗칠 일이나 마역화가 가져오는 이점은 그 주변의 모든 악마가 다 누릴 수 있었다.
뭐, 그래 봤자 영혼뿐이고 그레트헨이 기존에 쓴 힘도 있는 데다가 그릇 회복에도 적잖이 힘을 소모했으니 본연의 힘이라고 해 봐야 1/5쯤 되면 다행이겠지만…….
[난 네가 뒈지는 것에 걸 건데……!]
그게 그를 만만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기어이 검은 불이 폭발적으로 사방을 향해 뻗어 나갔다. 제 주인이 바라지 않은 한 꺼지지 않는, 세상 모든 걸 갉아먹는 불이었다.
[죽어! 망할 분노!]
검은 불은 용암마저 살라 먹는다. 그것을 알기에 마몬은 바로 뒷걸음질 쳤다.
펑, 퍼엉! 사방에서 폭발하는 용암은 분노의 그릇이나 용사를 상대할 때조차 보이지 않았던 힘이다.
레비아탄의 눈물을 바쳐 불러낸 번개가 끝없이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어디가, 마몬. 나랑 놀아야지. 응?]
그렇지만 메피스토가 제 근처에 나선으로 불을 피워 낸 순간, 그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마기의 격류가 제 주인을 보호하고, 적의 공격을 불살랐다.
화악!
그리고, 그 공간 한가운데 위치한 자가 새하얀 머리칼을 나부끼며 검을 뽑았다.
계약에 당해 육체를 빼앗기기 전 시절, 제 갈비뼈를 손수 뽑아 직접 제련하고 영혼에 각인시켜 만들었던 검이다.
어떤 그릇에 들어가도 소환할 수 있고, 어떤 형태로도 불러낼 수 있으며, 어떠한 힘도 다 담아 낼 수 있는 검. 라텔Ratel.
정작 그 대신 이걸 써 온 그레트헨은 이것을 한낱 검으로만 써먹었지만… 이것의 진면목은 단단하고 부러지지 않는 것에 있지 않다.
[라텔도 너랑 놀고 싶다잖아.]
인간을 속이기 위해 투헨더의 형상을 취했던 검, 라텔이 녹아 흙 속으로 스며들더니 다시 솟아올랐다.
스르륵. 인간의 형상을 띠기만 했을 조형물이 그의 옆에 섰다. 정교하게 그와 합을 맞춰 줄 인형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놀아 줘야지!!]
[칫!]
악명 높은 검의 등장에 마몬이 혀를 찼다.
[그럼……!]
「그 전에, 약속 먼저 이행해. 용사를 살리라고. 저쪽에 있는 인간 둘도.」
[…암요, 암요. 분부대로 해야죠.]
그러나 메피스토펠리스라고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완벽했다고 생각한 자유가 제한되는 순간 이를 지르물었다.
하나 그렇다고 ‘약속’을 어길 수도 없다. 약속을 어기는 순간 겨우 얻은 기회마저 날아갈 테니.
[저놈을 죽이기 위해서, 저깟 인간 하나 못 살려 줄까!]
그의 지시에 라텔이, 그의 분신이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표적은 쓰러져 방치되어 있는 용사다.
[아, 이왕 구하러 간 김에 대가를 받아 오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녀석을 막으려 드는 잡악마들은 그것이 손톱을 세우자마자 잘게 조각나 버렸다. 자아가 없어 그가 일일이 지정해야 하긴 하지만, 이럴 땐 그럭저럭 쓸 만하다.
[너!]
[하핫, 좋겠어 마몬?! 살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늘어났으니!]
잡것들을 전부 처리한 분신은 용사를 업고 저편으로 날아갔다. 아마 기절해 있을 인간 둘까지 챙겨서 인간들이 있는 곳까지 다녀올 것이다.
그가 날뛸 수 있는 조건에는 ‘저 셋의 모가지가 붙어 있을 것’도 있으니까.
[하, 너야말로. 용사에게 빌붙는다고 네 봉인이 풀릴 것 같아?! 멍청하긴! 넌 네놈을 삶아 먹을 사냥꾼에게 아양 떠는 개새끼밖에 안 돼!]
그 모양새에 마몬이 그의 행위를 비웃으며 한쪽에 대기시켜 놨던 용암 거인을 움직였다.
특별한 능력이 없되 오롯이 거대한 체급과 무거운 질량만을 무기 삼는 것이 손을 휘둘렀다.
[맞아,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그렇지만 적어도 네놈은 죽일 수 있잖아. 안 그래?!]
그러나 고작 용암 인형에게 당하면 한때 지옥을 울렸던 그의 이름이 아깝지 않겠는가.
메피스토는 마몬의 말을 상큼하게 무시한 채로 마기를 이용해 일시적으로 검을 빚어냈다.
서걱!
그리고 휘둘렀다. 마기가 순간적으로 늘어나며 채찍처럼 용암 인형을 갈라 냈다.
조금의 낭비도 없이, 극한으로 압축된 칼날은 참으로 예리하여 용암인형에는 흉터조차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조종하던 중추신경은 분명 잘렸다. 반 박자 늦게 양옆에서 생겨난 검격 또한 그랬다. 그것들은 따지자면 ‘핵’이라 부를 수도 있는 것들을 정확히 베어 냈다.
퍼엉!
거대한 용암을 지탱하던 마기가 잘려 나간 순간, 그것은 그대로 폭발하며 사방으로 용암을 튀겼다. 나머지는 아래로 녹아내려 건물들을 녹이고 뒤덮는다.
콰앙!
와중에 메피스토펠리스의 팔은 앞으로 향했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쏘아진 거대한 불의 기둥이 마몬의 육신을 노렸다.
[빌어먹을!]
첨벙!
용암에 빠지는 것으로 빠르게 이동해 피한 자가 욕설을 짓삼켰다.
퍼엉!
불기둥이 닿은 자리에는 반 박자 늦게 폭발이 일며 용암을 죄 태우고 있다. 땅덩이에 눌어붙은 흑염이 잔불처럼 타닥타닥 튀었다.
[섬뜩하긴!]
마몬은 그 꼬라지를 보며 짜증난 듯한 웃음을 뇌까렸다. 용암에서 막 솟아난 그의 몸 주변에는 싸움 초기, 메피스토가 사방으로 퍼트렸던 불꽃이 있다.
[터져라.]
주인의 명령에 불꽃이 둥그러니 부풀며 그대로 터지려 들었다.
[같잖은 수를……!]
마몬은 그 진행 형태에 당황하는 대신, 더한 마기를 담아낸 용암으로 그것을 덮어 버렸다.
그런 다음 벌어진 거리를 이용해 더 많은 힘을 끌어올렸다. 화산탄보다는 유성에 가까운 돌덩이가 메피스토를 향해 날아가고 모든 용암으로부터 가시가 빼곡히 솟아났다.
[그래, 더럽게 싸워 보자고! 메피스토!]
어차피 마기는 충분했다. 그는 내친김에 메피스토가 가는 걸음걸음 대지에 용암을 퍼트렸다.
분화된 용암이 사방을 붉게 물들이고, 추가로 새어 나오는 가스와 잿더미가 마치 멸망한 세계처럼 그림을 바꾸었다.
[들고 있는 패는 내가 더 많으니까!]
그에, 검은 불벽을 만들어 공격을 막던 메피스토의 눈살이 살풋 찌푸려졌다.
가진 마기의 양. 본래 상황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확실히 그가 현저히 밀리는 까닭이다.
[그래, 그건 좀 짜증나네…….]
하지만 뭐 어떤가.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의 패배를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차이로 하여금 자신의 분노를 더욱, 더더욱 키웠다.
사탄을 향한 분노. 그 망할 것에게 진 대가로 빼앗긴 육신. 하염없이 그릇만을 찾아 헤매야 하는 처지. 인간 주제에 주도권을 쉽사리 내주지 않아, 결국 계약까지 해야 했던 작금의 상황. 아무리 계약의 조건이라지만 분노와는 너무도 거리 먼 또 다른 영혼. 약속이 끝나는 즉시 반환해야 하는 몸뚱이.
그가 화낼 거리는 이다지도 많았다.
[정말로 화가 날 정도로.]
분노를 연료 삼은 검은 불이 더욱 기세를 키우며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화르륵. 그 사이로 피어오르는 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붉은 진홍이다.
[지워 버려 주마.]
마침 맡은 바 소임을 다한 검이 그의 손에 돌아오고, 그 검이 그대로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