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세상은 (5)
「…그들은 당신이 책임져야 할 자들이 아니에요.」
흐느끼는 목소리가 내게 빌었다.
「그러니 부디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이 이 이상 봉사할 이유는 없어요. 제발요…….」
그래, 그건 비는 거였다. 간절하게, 제발 외면해 달라고 호소하는 거였다.
오롯이 내가 쉬기만을 바라서, 내가 더는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서.
하지만…….
* * *
촤악!
[꺄아아아악!]
거북이 위, 등껍질.
맨손과 한정된 면적, 쉴 새 없이 요동치는 땅이라는 불리함을 감당하기 어려워, 부득이하게 등딱지로 전장을 옮긴 투사는 숨을 한 번 골랐다.
내딛는 걸음마다 쌓여 있는 사체들은 오롯이 그녀의 두 손으로만 만들어 낸 것들이다.
“후우.”
부르튼 입술에서 더운 숨이 뱉어졌다. 짤랑. 한쪽에 걸린 귀고리는 거칠게 진자 운동을 하며 금속 특유의 소리를 흘린다.
그르륵!
와중에 전장을 바꾸며 새로이 추가된 적이 등 뒤에서 덤벼들었다. 온갖 벌레와 해삼, 말미잘, 조개 같은 것들이 악마화 되며 만들어진 놈들이다.
퍼억!
물론 그중 대부분은 강하게 때리면 내장을 게워 내며 죽어 주었기에 큰 신경을 쓸 필욘 없었다.
[이리 와. 이리 와!!]
도도도도도.
오히려 신경 써야 할 건 이쪽. 원래부터 있던 세이렌과 갯강구, 게를 닮은 악마다.
첫 번째는 본래부터 악마였던 것으로 위험성은 말할 필요도 없고, 두 번째는 손바닥만 한 벌레들이 온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 먹는 게 고역이었다. 세 번째는 너무 딱딱한 데다가 주변에 솟은 바위와 구분이 안 된다는 게 문제였고.
하므로 그녀는 상처를 아예 안 입기를 목적하기보다 내줄 건 내줘 가며 적의 수를 줄이는 데 목표를 두었다.
출혈이 심하면 더 오래 싸우지 못한다는 상식은 내다 버렸다. 상식선의 싸움은 노르다 전사들의 전공이 아니다.
콰악!
필요한 만큼만 피한 그녀의 팔뚝에 손톱자국이 새겨지고, 돌을 쥔 그녀의 손이 세이렌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머리통 안에 뇌가 있다는 건 인간과 비슷한 악마가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이런 틈을 놓쳐선 안 된다. 그녀는 세이렌의 품에 성큼 더 다가갔다.
그로 하여금 다른 개체의 공격이 차단되고, 그녀의 손가락이 세이렌의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입 양쪽으로 엄지를 걸쳐 넣은 채 머리통을 붙잡은 손이 아귀에 힘을 주고 양옆으로 당겼다.
[아아아아악!!]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 세이렌의 머리 가죽이 그대로 찢겼다. 그곳에서 튀어나온 피는 어느 광전사의 몸을 또 한 번 덧칠한다.
퍼억!
이어 그녀는 타고난 신력으로 반쯤 죽다시피 한 세이렌을 붙잡고 휘둘렀다.
땅바닥을 긁다시피 훑은 날개가 변질된 갯강구를 쓸어 내고, 몸통은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던 다른 개체를 덮쳤다. 두 마리의 세이렌이 사이좋게 추락했다.
“이거밖에 안 되는 거냐, 새대가리들!!”
하나 그래도 적은 여전히 많았고, 그녀는 더 많은 피를 필요로 했다.
그녀는 우악스럽게 제 몸을 타고 올라오는 갯강구들을 쓸어 낸 후, 다시 올라올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그대로 지면에서 점프했다.
드르륵.
그리고 막 착지하려던 차, 바위인 척하던 게가 트득 일어나 집게를 쩍 벌려 왔다.
집게의 크기만 해도 인간을 쥐긴 충분한 덩치라, 그녀는 그것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잘못 잡히면 허리가 동강 나기 좋다.
탁!
해서 그녀는 가벼운 발돋움으로 집게를 밟고 다시 뛰어올랐다. 집게가 반 박자 늦게 닫혔다. 쿵. 그녀의 몸은 감히 그녀를 잡으려 했던 게딱지 위에 내려앉는다.
콰드드득!
맨손이라는 페널티가 있는 이상 갑각을 뚫고 공격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적을 그대로 보내 줘야만 하나? 그것도 아니다.
그녀는 세이렌의 연한 입안을 공략했듯, 솟아오른 눈알을 붙잡아 그대로 뽑아 버렸다.
게 악마가 고통에 겨워 하며 집게를 마구 움직였으나 그런다고 이미 뽑힌 눈알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최소한의 볼일을 다 본 그녀의 몸이 다른 적에게로 향했다. 그녀를 노리고 해삼 괴물이 무언가를 토해 냈다. 샛노란 액체에는 살짝 닿기만 해도 살점이 이글이글 녹아든다.
그러나 그 정도는 피할 수 있다. 곡예 하듯 몸을 뒤튼 그녀의 몸이 토사물을 피해 착지하고, 그 자리에서 솟아오르는 맛조개에게 발을 휘둘렀다.
얇은 껍질이 부서지고 맛조개의 통통한 내용물이 몸을 세로로 나누며 이빨을 세웠다.
두 갈래로 나뉜 맛조개의 몸뚱이가 촉수처럼 그녀가 있는 자리에 박혀 들었다.
[나와 같이 가자, 나랑 같이 가!]
그때 날개를 접은 세이렌이 급강하하며 그녀에게로 날아들었다. 물론 바윗덩이나 다름없는 등딱지에 처박히긴 싫은지, 충돌 직전 쫙 펼쳐진 날개가 참으로 거대했다.
“하!”
그러나 그렇게 잘도 낙하하면 뭐 하나? 그것의 발톱은 그녀를 낚지 못했는데.
땅을 박찬 그녀의 몸이 세이렌의 어깨를 넘어 등에 안착했다. 우득. 억센 손아귀가 세이렌의 팔이자 날개를 붙잡았다.
[으갸아아아악!!]
우드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기어이 관절이 꺾였다. 콱! 거기에 발길질까지 더해지면 뼈가 살갗을 뚫고 튀어나오는 건 일도 아니다.
세이렌의 날개를 부러트린 그녀는 쓰러진 세이렌을 밟은 상태에서 머리통을 완전히 짓이겼다.
사사사삭.
파도치는 소리와 비슷한 음색이 귀를 긁었다. 몰려온 갯강구들이 검은 물결처럼 덮쳐 오는 소리다.
재빨리 몸을 빼내도 몇 마리는 기어코 그녀의 몸에 달라붙고 만다.
마기침식으로 인해 흉터처럼 솟은 검은 핏줄 새로 갯강구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어 피를 빨아 먹었다.
콰직!
간지럽지도 않았다. 갯강구의 이빨이 피부에 박혀 있든 말든 터프하게 뜯어낸 이가 벌레를 바닥에 던지고 그대로 짓밟았다.
갯강구의 내장이 터지고 그녀의 살갗에서도 피가 터졌다.
“더 덤벼!”
[가지 마…….]
[가면 안 돼…….]
그쯤 되니 뒤로 물러나 몸을 사리는 건 도리어 악마들─생각할 지성이 있는 개체에 한해─쪽이었다.
자신의 피든 타인의 피든 온몸을 피로 적셔 가며 싸우는, 그러는 것으로 본인의 용맹을 증명하는 자, 베르세르크.
그 이름에 걸맞은 광기에 악마조차 질려 버린 것이다.
많이 난폭할지언정 사고할 이성조차 삭제되진 않은 게 악마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
그러나 그런 광경이야말로 그녀가 노렸던 것이고, 그녀의 이름이 요구하는 것이다.
전투란 자고로 적의 사기를 꺾는 순간 반쯤 먹고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겁쟁이들!”
대신 악마들이 우습기는 했다. 암, 혼자인 그녀는 이다지도 괄괄하게 날뛰고 있는데 쪽수론 압도적인 본인들이 겁 먹고 물러나면 어쩌란 건가?
그녀가 17살 때 치렀던 부족 간의 분쟁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다. 그때도 혼자서 오십의 전사를 죽여야 했지만, 적어도 그 오십 명은 무서워 몸을 사리진 않았다! 그 오십 명이 다 죽고 난 후 부족민들이 겁에 질려 벌벌 떨었지!
콰앙!
그때 뱀이 이끌던 거북의 몸뚱어리가 대지에 완전히 올라탄 후 걸음을 멈췄다. 그것의 머리가 치솟을 적이면 바다로부턴 거친 파도가 밀려온다.
쏴아아아!
있을 수 없는 형태로 고지를 타고 올라온 물이 수로고 뭐고 이 주변의 땅을 죄다 뒤덮어 버렸다.
캬아아악!
그르륵.
그를 통해 살판이 난 건 머맨들이었다.
바닷물을 타고 들어온 머맨들은 사방에 산성액을 뿌려 쓸데없는 구조물들을 녹여 버렸고, 사람들의 시체를 모아 잘게 잘랐다.
이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 대부분이 용맹하게 싸웠던 병사 내지 모험가의 것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모욕이었다.
죽은 자의 몸뚱이 따위 눈 아래 묻히면 누가 알겠냐는 마인드의 그녀조차 눈썹을 휠 정도로 말이다.
퉤에에엣!
심지어 그것들은 훼손한 시신을 한데 모아 탑을 쌓았다. 한 곳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여러 곳에서!
저것들을 족쳐야 하나. 사후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그녀지만, 저건 명예도 존중도 최소한의 도리조차 없는 것 같은데.
그녀의 머릿속에 약간의 고민이 진행되었다.
난 찬성해.
누군가는 찬성했다.
쿠웅!
“─?!”
하지만 끝없이 전진할 것만 같던 거북이도 주저앉음에 따라, 그녀의 충동은 실행될 수 없었다.
콰드득. 온갖 해초와 산호초로 인해 가려져 있던 등껍질 사이사이 구멍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전부 배가 잔뜩 부른 머맨이었다.
“……!”
그리고 그 머맨은 그대로 시체 더미에 다가가 꼬리를 박아 넣었다. 꼬리가 꿀렁거리는 것이 아무리 봐도 알을 낳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역겹게도, 저 망할 것들의 목표에는 비단 인간들을 몰아내는 것뿐 아니라 이 땅에 자신들의 둥지를 만드는 것도 있었단 말이다.
그것도 치열하게 싸운 적의 시체에!
“…악마란!”
그렇지만 그것을 두고 봐야만 하는가? 그녀는 마기침식으로 인해 슬슬 이지가 어지러워지는 걸 느끼면서도 자신의 표적만큼은 명확하게 분별해 냈다.
죽인다.
알을 까려 드는 저것들 전부를 죽인다.
충혈되어 벌게진 눈이 취한 것처럼 어질어질한 정신 사이로 목표물을 정확히 고정했다.
노리는 것은 이미 밖으로 나온 것들이 아닌, 아직 구멍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 즉, 아직 거북이 등딱지 안에 숨어 있을 망할 것들이다.
썩고 부패한 짐승의 껍질 안으로 그녀의 몸이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이곳이 우리의 무덤이 될까.
“영광이지!”
우리의 시체도 저들의 둥지가 되는 거야?
“하!”
썩은 살과 고인 피가 그녀의 발목을 적셨다.
“내 몸에서 태어날 악마보다, 내가 죽일 것이 더 많을 거다!”
그녀는 돌을 쥐었다.
* * *
글쎄. 저 녀석이 그리 아끼는 용사가 죽어 가는데도 과연 개입할 이유가 없나? 너도 그렇게 생각해, 그레트헨?
「너!!」
용사와 무고한 시민들과 아무튼 많은 작자들이 이 순간에도 죽어 가고 있는데.
「그 입 당장 다물─」
넌 정말 가만히 있을 수 있어?
* * *
스스로를 활활 태우는 기분이 언제 또 있었던가.
저 서쪽 바다에서 용을 잡을 때? 악마기사가 그녀의 앞에서 폭주했을 때? 아니면 성벽을 보호할 때 혹은 저 구름 위 상공까지 디딜 발판을 만들 때.
그도 아니면 지금.
그녀는 악마들을 막기 위해 금빛 장막을 기어이 만들었다. 그것이 엄청난 무리임을 알고는 있으나, 그래도 좋았다.
다른 사람들은 목숨을 거는데 가장 많은 책무를 가진 그녀가 걸지 않는 건 부당했다.
[맙소사, 나를 두고 감히 다른 걸 신경 쓰는 거니? 그런 거야!?]
깔깔 웃는 소리와 함께 천둥이 요란하게 쳤다. 쾅, 콰앙! 뒤편에선 그림책으로만 봤던 화산이 실시간으로 터지며 화산탄을 지상에 내리꽂았다.
용린갑옷의 보호를 뚫고 들어온 열기는 참으로 지극하여 숨 쉬는 것조차 공을 들여야 한다.
폐 안쪽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어려, 어리다고!]
그러던 찰나, 용암거인이 그대로 팔을 내리꽂았다. 팔 하나가 없는 거인은 남은 팔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콰앙!
그래도 달리기라면 모비 딕을 사냥할 때 참 열심히 단련했다.
그녀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손을 피해 다리 근육이 찢어질 것처럼 뛰었다. 폐가 목구멍 바로 아래에 있나 싶을 즈음 그녀의 발이 간신히 손의 범위를 피했다.
철퍽!
그 대가로 발에 짓이겨진 용암이 사방으로 튀었다. 신성력을 머금은 갑옷은 당장의 열기를 거뜬히 막아 주었으나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까앙!
더구나 절묘한 틈을 타고 찔러 오는 공격까지. 그녀는 대방패로 그것을 어떻게든 막아 냈다.
서걱! 서걱, 석! 팔이 3쌍이라 그런가, 쉬는 템포 없이 3연속 공격이 이어졌다.
신성력을 투입해야 할 곳이 많아 방패에는 덜 담았더니 오는 힘이 제법 묵직했다.
“……!”
그러나 적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바닥이 불룩 솟아오르며 인퀴지터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뒤에는 화산탄이, 앞에는 팔이 여러 개란 이점을 이용해 쉴 새 없이 들이칠 수 있는 악마가 있다.
인퀴지터는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콰앙!
면은 꼭 넙데데한 것만 있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구 형태로 사방의 것을 밀어내는 건, 악마기사뿐 아니라 그녀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선이 오밀조밀 모인 구조라 본의 아니게 주변을 갈아 버리는 마력에 비하면 신성력은 말 그대로 밀어내는 수준에 불과하더라도.
“흡!”
그러나 그런 사실쯤은 일찌감치 알아냈다. 또한 구 형태로 기운을 방출해 적을 밀쳐 내는 것과 그러는 동안 제 몸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선례라면 악마기사가 무수히 남겨 주었다.
하여 인퀴지터는 착실히 그녀가 학습한 것을 따라 행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기운과 별도로 방패를 휘두른 것이다.
강인한 마기 덕에 한 발자국 밀려났을 뿐인 악마가 방패에 서걱 소리 나도록 당했다.
방패의 좁은 면이 닿는 면이 되도록 휘두른 인퀴지터에 의해, 살이 찍히다 못해 파인 것이다.
[제법이네?]
그러나 적도 그렇게 만만하진 않았다. 그 잠깐 사이에 팔을 움직여 방패를 잡아 낸 이가 손가락을 그녀에게로 뻗어 왔다.
댕댕댕. 인퀴지터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콰앙!
“……!”
간발의 차로 굴러 피했다. 인퀴지터는 자신의 머리통을 꿰뚫을 뻔했던 섬광을 떠올리며 저릿거리는 몸을 움직였다.
그 잠깐 새에 벼락이 그녀에게 왔다 갔다는 흔적이다.
신성력을 대충 덧발라 둔 자리는 구르던 당시 갑옷 새로 침투해 온 용암에 인해 자글자글 익어 간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설퍼.]
인퀴지터는 신경과 근육 정도만 회복한 후, 살갗의 화상은 내버려 둔 채 일어섰다.
푸욱.
“……!”
허벅지가 솟아오른 가시들에 관통되었다.
“이익!”
살이 뚫리고 근육이 익어 가는 고통은 이루 말할 게 아니다.
하나 신께서 가호하사, 인퀴지터는 세상에서 가장 작열통에 익숙한 자 중 하나였다. 이 정도쯤은 버틸 수 있다.
그녀는 억지로 발을 떼어 나아갔다. 신성력에 닿으면 용암이 제거된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악마의 가시가 자라나는 속도는, 그녀가 가시를 제거하고 살을 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금방 추월당했다.
콰르르륵!
그렇게 하나의 시련을 이겨 냈을까. 이번엔 가시 공이 대각선 앞에서 맹렬하게 굴러왔다.
쾅!
대형 방패에 가시 공이 부딪히며 마찰을 일으켰다. 푸욱! 망할 가시는 그녀가 걷는 자리마다 올라온다. 철퍽철퍽. 용암에서 솟아오른 인간 형태의 인형은 덤이었다.
사방이 적 그 자체다.
퍼억!
그중 인퀴지터가 가장 먼저 노린 건 용암인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뒤틀어 뒤쪽의 용암인을 후려쳤다. 메이스에 머리가 터진 용암인이 그대로 흩어졌다.
마기의 핵을 제거했으니 또 만드는 게 아니면 안 일어날 거다.
연이어 강한 힘으로 가시 공을 제거한 후, 가시를 제거한 채 또 한 번 움직였다.
악마기사는 이것을 대체 어떻게 상대했을까. 그에겐 방패도, 용암을 정화할 힘도 없었을 텐데. 어렴풋이 애먹었을 그가 생각나 서러워졌다.
쾅, 쾅, 쾅!
그러나 남의 그릇에 신경 쓰기엔 그녀의 그릇도 충분히 역경과 고난으로 가득하다. 인퀴지터는 쏟아지는 공격에 버티고자 어떻게든 노력했다.
민첩하게 싸우는 편이 아니라서 그런가, 신성력으로 대부분을 정화하고 막아 내고 회복하는 식이었다.
[정말 비루하구나.]
문제는 그래. 그녀가 가용 가능한 신성력 중 2/3가량의 힘을 저 장막에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라.
인퀴지터는 순식간에 궁지로 내몰렸다.
[그렇게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 하고 끙끙대서야 뭘 할 수는 있겠어? 신의 힘이 무한할 리도 없고, 네가 한 번에 동원한 가능한 힘에도 한계가 있을 텐데.]
부정할 수 없다.
신의 힘을 많이 쓰면 쓸수록 그녀가 견딜 수 있는 신성력의 양이 늘어나고는 있으나, 아직까진 어느 쪽으로도 무한하지 않았다.
그녀라는 그릇이 한 번에 채울 수 있는 신성력의 양도 제한되어 있고, 그릇이 비워질 때마다 보충해 줄 힘의 양도 언젠가는 끝이 날 거란─보다 정확히는 그녀라는 그릇이 깨져 버리는 식으로─말이다.
그런 마당에 장막 유지하겠답시고 동원 가능한 힘을 1/3로 줄였으니…….
사실상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다고 봐야 했다. 1/3 따위의 힘으론 대악마를 죽이긴커녕 버티는 게 고작일 확률이 크므로.
“네 말이 맞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게 쓰이고자 내려진 육신이고 영혼, 그렇게 쓰면 뭐 어떤가?
“하나 그게 내 사명이다.”
[너는 효율이란 걸 모르는구나. 저따위 인간보다 귀한 것이 너임을.]
“그런 이야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저들은 희생을 각오한 자도 아니요, 내게 자신들이 시간을 벌 테니 당신의 일을 하라 말한 자도 아니다.”
더 많은 자를 구하면 된다. 사람의 목숨은 가치를 잴 수 없으니, 눈에 보이는 숫자라도 헤아려 결정을 짓자.
신전의 누군가는 말했고, 그녀는 그것이 ‘효율적’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리고 내가 읽은 경전에선, 그런 자들을 버리지 말라 했다.”
신은 그것을 ‘옳다’고 말한 적 없다. 그녀도 그것이 ‘옳은 일이다’라고 여긴 적 없다.
하면, 그렇게 신과 그녀의 의견이 일치했다면, 즐겁게 따르는 것이 그녀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또한 누가 그랬는가? 내게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
“난 네놈을 이긴다. 네놈을 반드시 멸할 것이다! 그게 내 할 일이다!”
퍼억! 다가오던 또 하나의 용암인이 죽고 가시 공과 화염탄이 산산조각 났다.
용암에 데고 벼락에 튀겨진 온몸은 당할 때마다 거스러미를 떨어트리며 새살을 돋운다.
“난 네놈을 이긴다. 네놈을 반드시 멸할 것이다! 그게 내 할 일이다!”
[…하!]
까맣던 몸이 다시금 순백색으로 빛났다.
“이단심문관의 권리로, 지금부터 이단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겠다!”
그에 맞춰 사그라드는 듯했던 신성력이 조금은 더 부풀어 올랐다. 그마저도 상황을 반전시키기엔 한없이 부족하겠지만.
[그래. 뭐, 네가 멍청하게 굴면 굴수록 나야 이득이니 상관할 문제는 아니지.]
더불어 인퀴지터가 상대하는 자는 자신이 근접전으로 상처를 입자마자 전투를 다시 원거리로 돌려 버릴 만큼 체면을 챙기지 않는 악마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기도 할까?]
“……?!”
[내용은 간단해. 네가 저 장막을 거두는 순간, 네 동료가 죽는 거야!]
판데모니엄의 뒤에서 용암이 솟아오르더니, 곧장 깨끗이 흘러 내려갔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이제 계란 같은 둥근 고치다.
[아주 즐겁겠지!]
쩌적. 고치가 깨지며 암석에 온몸이 둘러싸여 속박된 자를 내보였다.
그리도 궁금해했던 악마기사의 행방을 알게 된 인퀴지터의 눈이 크게 홉뜨였다.
* * *
…그래.
난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 * *
파삭.
누군가의 손가락이 아무도 모르게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