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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18화 (218/389)

218화 세상은 (3)

「더, 더 자도 괜찮아요. 더는 당신께서 나설 필요 없으니까… 이젠 쉬어도 돼요.」

아니! 일어나! 네놈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았어! 그러니 당장 일어나서……!

* * *

…그래도 넘어가면 안 된다.

[안 와? 이대로 물러가는 거야? 용사면서?]

인퀴지터는 뜨거운 두 눈을 강하게 감았다가 도로 떴다. 자극에 습윤해진 안구가 시야를 아주 조금 뿌옇게 만들었다.

[네가 죽여야 할 대악마가 이곳에 있는데.]

맞는 말이다. 그래도 넘어가면 안 된다. 대악마가 그녀를 대놓고 기다리는 이상, 저곳은 함정일 가능성이 너무 컸다.

[아, 용사가 아니라 겁쟁이였나. 실망이네.]

…하지만 저곳에 가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저 악마를 잡지 않는다면 베르세르크가 저 괴수 앞에 혼자 남은 이유가 없어지는데. 그녀가 사람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악마기사가 홀로 이곳에 향했던 이유가…….

아. 악마기사.

인퀴지터는 어느 순간 숙여졌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악마기사의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저 거대한 마기의 흐름 속에서 그의 것이 느껴질 리 없다.

그러나, 그러나…….

싸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건 무슨 의미인가? 이미 싸울 수도 없을 만큼 다쳤다는 뜻인가? 그도 아니면… 그분이, 그분이…….

“아니야!”

그분이 죽었을 리 없다. 그 사람이 죽었을 리 없었다. 그냥, 그냥 좀 심하게 부상을 입어서 몸을 피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 사람이 죽었을 리…….

정말로?

죽어야 할 순간이 오면 발악조차 하지 않고 죽어 줄 것 같은 누군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손 뻗을 기회조차 한 번 주지 않는, 참으로 냉정한 사람의 뒷모습이.

『늦지 말아라. 운명은 너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인퀴지터의 입술이 이에 짓이겨졌다.

꽝. 철갑에 둘러싸인 손이 본인의 이마를 후려친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메이스를 차마 놓지 못해, 든 채로 본인 이마를 때린 이가 눈을 단단히 떴다.

[글쎄. 네가 부정해 봤자 지금의 넌 충분히 겁쟁이처럼 보이는데.]

그사이, 그녀의 부정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자가 비아냥거렸다. 알 바 아니었다.

인퀴지터의 녹색 눈이 흩날리는 불티를 품어 금빛처럼 반짝였다.

“마음껏 지껄여라, 악마!”

악마기사가 죽었든 죽지 않았든, 적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임은 확실하다. 또한 지금의 그녀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전무하다는 것도 그렇다.

인퀴지터는 어렵사리 그 현실들을 인정했다. 그녀는 당장 악마기사를 구할 수 없다.

“나는 네 혀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인정한 현실에 절망까지 했느냐면, 그러진 않았다.

인정한 현실이 그렇다면, 그녀는 더욱 멈춰 서선 안 됐다. 그녀의 뒤는 지켜야 할 사람들로 한가득했다.

이 순간을 만들기 위해 희생한 자들이 그녀의 발밑에 가득해, 결코 물러설 수 없단 말이다.

콰앙!

하므로 그녀는 가장 먼저 방패로 근처의 미믹을 타격했다. 상위 개체─대악마─가 지시를 따로 해서인가. 녀석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해서 공격하긴 편했다.

날로 미믹의 목숨을 딴 그녀의 손이 다시 방어 자세를 갖췄다.

“올 거면 네놈이 와라!”

연이어 날아가던 가고일이 그녀가 만든 신성력 막에 얻어맏고 추락했다.

콰직! 메이스에 얻어맞은 머리가 터져 나갔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자연히 축 늘어져 죽음을 맞이한다.

“단, 한 놈도 지나게 하지 않을 테니!”

[하. 그렇게 나오는가.]

대악마가 낄낄 웃었다. 그렇지만 인퀴지터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우선시해야 할 의무는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을 버는 것이지, 대악마와 싸우는 게 아니었다. 대악마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움직인다면 모를까, 한자리에 가만히 있다면 구태여 싸울 필요가 없다.

쾅!

오히려 그녀가 싸워야 할 건 다른 것들이다.

인퀴지터는 그녀를 지나쳐 가는 많은 악마를 요격하며 한 개체라도 줄이고자 노력했다. 여기서 새어 나가는 악마가 줄어들수록 사람들의 피해는 눈에 띄게 줄 것이므로 당연했다.

[내가 직접 움직이도록 한 값, 톡톡히 받아 내도록 하지!]

퍼엉!

그리고 그에 맞춰 대악마가 기어이 움직였다.

용암거인이 거대한 손으로 건물을 부수고, 길거리에 쇳물과도 같은 것들이 들이찼다.

[네 죽음으로 말이야!]

또한 그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것은 얼굴 없는 악마라.

베르세르크가 알려 주길, 탐욕과 인색의 좌 판데모니엄.

언젠가는 제거해야만 하는 악의 축 하나가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불의 기운을 머금은 암석 덩어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위협적이라 전부 막아 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신이시여.”

그러나 악마기사도, 베르세르크도 제치고 선택한 순간이 바로 작금이다. 그런 마당에 못 한다는 말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미천한 당신의 종이 비나이다.”

인퀴지터는 이곳까지 오며 품었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내던졌다.

“제가 딛는 땅이 당신의 땅이고, 제가 뻗는 손이 당신의 손이 되기를.”

반드시 한다. 해낸다.

“그리하여 이 땅의 모든 악이 사멸하기를! 감히 기원합니다!”

그녀를 중심으로 밀물처럼 퍼져 나간 신성력이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

“하니 저와 함께하소서!!”

지상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어린 청년의 눈물마저 증발시켜 버릴 태양이.

* * *

「닥쳐, 버러지. 그분은 이미 할 만큼 했어.」

애새끼가─! 네가 저지르는 게 무슨 짓인지 알고는 있는 거냐!

* * *

“저쪽으로 꺾어! 공방에서 챙겨 가야 할 게 있어!”

데스브링거는 이 급한 와중에도 당당히 요구하는 이를 보며 화가 치밀었다.

“지금 댁 연구가 중요한 줄 아십니까?!”

“당연히 중요하지!”

미친놈! 재수 없는 놈!

부족함 없이 자라 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온 귀-족 나리의 외침에 괜히 뒷목이 뻐근해졌다. 상대가 도시 단위로 귀하게 대접하는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확 그냥 말에서 떨어트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가져가려는 건 연구 자료가 아니라 다른 거거든!?”

“뭔진 몰라도 그냥 좀 두고 가요!”

“네가 뭘 안다고……!”

“X발, 당신 연구가 얼마나 가치 있는진 몰라도, 사람들 대피시킬 시간 벌기 위해 죽을 자리로 간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사람들인진 안다고!”

아무렴, 지금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고자 사지로 떠난 이가 몇 명인가.

그리고 그중 가장 위험한 곳으로 떠난, 남은 자들은 전부 그의 동료들이다. 악마기사, 베르세르크, 하다못해 샌님까지.

전부 각자의 사지로 떠났단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번 시간을 제 사심 채우겠다고 쓰려 해?

상황 파악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이 망할 새끼를 지금이라도 낙마시킬까. 데스브링거의 머릿속이 다시금 위험한 충동으로 차올랐다.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물 정화해 주는 물건은 꼭 가져가야겠다 싶어서 이러는 거지! 츠베르크 언덕 근처 강은 수질이 안 좋아서 그대로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그러나 그 욕심은 결국 제압될 수밖에 없었다. 사적인 욕심으로 물건을 챙기는 거라면 몰라, 대피한 이후의 사람들을 위한 물건이라면 충분히 시간 쓸 가치가 있었으니까.

“희생해 가며 구한 사람들, 배앓이로 뒈지게 만드는 것보단 낫잖아!”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든가요, 망할 새끼야! 위치 말해요!”

“옆으로 꺾어! 그리고 말할 시간 주지 않은 건 네놈이거든?! 덜떨어진 머리 자랑하지 마!”

데스브링거는 마이스터에게 욕설이 섞인 말을 마구 쏟아 내고, 또 들으며 말 머리를 돌렸다.

다행히 대피 경로에 공방 거리가 있어서 많이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여기!”

급한 나머지 말이 제대로 멈추지도 않았는데 뛰어내린 마이스터가 공방 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순간 반응하듯 알아서 켜진 불이 공방 내부를 밝혔다.

“제길, 미리 정리 좀 해 둘걸……!”

정말 온갖 물건으로 더럽기 짝이 없었다.

말을 문 앞에 묶어 두고 공방 안쪽으로 슬쩍 들어간 데스브링거가 얼굴을 구겼다. 이거, 원하던 물건을 찾을 수는 있을지 의문이다.

툭.

그때, 마이스터가 안으로 급히 들어갈 때 무심코 치고 간 것이 기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슬아슬하게 책상에 걸쳐져 있던 것이 무게를 못 이겨 결국 넘어가고 만 모양이다.

“나 참, 5분 안에 못 찾으면 그냥 가는 겁니다.”

“위치는 기억하고 있어. 치울 게 많아서 그런 거지……!”

아, 기억력 뛰어나서 참 좋으시겠네. 데스브링거는 도와줄 게 있나 하며 마이스터를 따라 안쪽으로 움직였다. 탁. 동시에 책상으로부터 떨어진 것도 주워다 위에 올려 주었다.

우응. 약한 진동과 함께 반짝반짝 빛나는 물건은 참 요상하기 짝이 없었다. 이딴 걸 어디다 쓴다고.

“도와줄 거 있습니까요?”

“이거 옆으로 치워. 하얀 박스 안에 있는 게 지금 필요한 거야.”

물건을 얼마나 쌓아 둔 거야. 데스브링거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이스터가 말해 준 대로 움직였다. 건장한 성인 남성 둘이 붙어서인가, 수십 개의 상자는 순식간에 복도로 치워지고 원하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처럼 그렇게 크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제 나가…….”

한데 볼일 다 봤다는 듯 발길을 돌리던 마이스터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저거 왜 빛나?”

“뭐요.”

“저거! 마력 배터리!”

마이스터가 가리킨 건 방금 데스브링거가 주워 올린 ‘이딴 거’였다.

* * *

「저 말은 듣지 마세요. 더 주무세요. 다시 깨어날 때면 그때는…….」

* * *

“사람들이 끝없이 밀려오는군.”

“베뮈르헨은 대도시니까요.”

마법사란 이유로 가장 안전한 곳에서 마법을 펼치고, 대피할 때마저도 우선순위로 배려받아 일찌감치 몸을 피했을까.

도로 돌아가고 싶어도 현실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대피를 돕는 것도 돕는 것이지만, 마법사 특유의 볼품없는 신체 능력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런 몸뚱이로는 가 봤자 개죽음만 당할 것이다. 아크메이지는 착잡한 마음으로 젊은 이들이 남아 있을 땅을 바라보았다.

꾸준히 이어지는 대피 행렬은 마치 물결처럼 보인다.

“밀지 마세요! 밀지 마세요! 차분히 나갑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얌전히 명령을 따라 준다는 것이다.

그녀는 군이 움직이지 못할 때를 대비해 민간 치안대까지 조직해 둔 성주의 혜안에 감탄하며 마법을 다시 확인했다.

성문을 기점으로 만든 보호 결계는 만약을 위한 것이었다.

“물이 찬다…….”

“다들 퍼져! 머맨이 오는 걸 대비해!”

그러다 수로가 더 빨리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좀 더 급박해진 건 덤이었다.

합류하는 병사들을 재배치하랴, 형식 없이 마구 몰려오는 주민들 안내하랴, 부상자들을 신전에 인도하고 폭동 및 습격을 대비하는 것도 전부 그들의 몫인 마당에 일거리가 하나 더 추가됐으니 어쩔 수 없다.

“마음 같아선 결계라도 하나 더 만들어 주고 싶건만…….”

안타까운 마음과 현실은 별개다. 그녀의 마력은 이미 결계를 치는 데 다 쓰였고, 회복되는 것 또한 만일의 사태에 쓰일 것이다.

그녀는 지금 나설 수 없었다. 아크메이지는 또 한 번 무력감에 고개를 숙였다.

“살아 있었군.”

그때 누군가가 부축을 받는 상태로 절뚝이며 다가왔다. 파도치는 청산호였다.

깜짝 놀란 아크메이지가 어린 마법사를 도와 청산호를 주변 의자에 앉혔다. “수고했다. 가 봐라.” 황송한 얼굴의 마법사가 꾸벅 인사한 뒤 도도도 돌아갔다.

“자네, 벌써 움직여도 되는 건가?”

“그럴 리가.”

…그래, 괜찮을 리가 없지. 머리도 깨지고 마법의 반동으로 내상도 크게 입은 상태인데.

당장 죽을 상처가 아니면 반려하는 신전의 태도─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지금 집중 치료 하는 이들은 이보다 더 심했다─덕에 받은 치료도 고작 응급처치 수준이다. 눈 뜨고 걸을 수 있다는 게 기적이다.

“그럼 좀 쉴 것이지…….”

“그게 되면 여기 안 왔어.”

“…….”

“네가 데리고 다니던 애들은?”

“저곳에서 싸우고 있네.”

“하긴, 그렇겠지. 멍청한 질문이었어.”

하나 그 심정이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다. 듣기론 청산호의 손자도 아직 저곳에 남아 있다 했으니 말이다.

아끼는 이들을 사지에 두고 와 버린 두 노인이 손가락을 꿈찔거리며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끼아아아악!

그때 엄청난 비명 소리가 대피 행렬을 강타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진정하고 계속 나가십시오! 빨리 나가려다가 더 늦게 나가게 될 수 있으니 침착하게!”

병사들이 다급하게 동요하는 시민들을 다독이고, 일부는 후방으로 달려 나갔다.

“우리도 가지.”

“괜찮겠나?”

“…내 손자 놈이 오는 건 보고 눈 감으려고.”

“죽는단 소리처럼 들리니 눈 감는다는 말은 금지일세.”

“그건 오해하는 사람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닐 텐데.”

그들도 그 대열에 합세했다. 병사들이 우려했으나 대현자 두 사람의 의견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안타깝게도 없었다.

캬아아악!

“으아아아악!”

“살려 줘!”

“피하세요! 이리 나와!”

“전원, 거창!”

그리고 그렇게 절뚝이며 도달한 곳에는 피범벅이 된 하피 한 마리와 무력하게 당하고 있는 시민들이 가득했으니.

“악마가…….”

그들은 이를 악물었다.

“더 온다.”

젊은이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악마들의 발톱은 사람들에게 닿았다.

“…이젠 끝이야.”

시민 한 명의 외침이 유달리 선명하게 귀로 박혀 들어왔다.

* * *

「당신이 본래 있어야 할 곳이 당신을 반겨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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