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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16화 (216/389)

216화 세상은 (1)

판데모니엄은 올라가는 신호탄을 보며 거미 다리처럼 가는 손가락을 딱딱 부딪쳤다.

분노가 언제 깨어날지 몰라 초조한 까닭이다.

[망할 분노…….]

물론 지금의 그도 약하지는 않다.

아무렴 귀한 것을 제물로 바치면 강해지는 거야 모든 악마의 공통점이라지만, 그의 경우 그 효율이 남과 비교할 바가 못 되지 않던가. 억만금이나 되는 재물을 쏟아부은 지금은 더욱 그렇다.

작금의 그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

그뿐인가? 그가 사용한 왕의 인장은 이 일대를 마역화한 것도 모자라 그들의 고향과 연결하는 문까지 만들었으니.

그건 이신의 영향력이 차단되어, 본신의 힘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게 됐단 이야기다. 어지간하면 그가 눈치 볼 이유는 없다, 어지간하면.

[억만금을 쏟아부어도 두려운 건 너와 왕뿐이구나.]

하나 완벽한 컨디션에 강화된 힘까지, 그 모든 걸 쥐더라도 분노만큼은 두렵다. 분노의 그릇도 제법이었지만, 그것이 퇴장하고 나올 분노야말로 제일 두렵단 말이다.

[제길.]

그는 곧 깨어날 분노와 그것이 내보일 힘을 가늠하며 손가락을 몇 번 더 튀겼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녀석이 어인 일로 미동도 보이지 않아서 더욱 조마조마했다.

지금쯤이면 분노가 주도권을 다시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인가?

[성질 더럽긴!]

애간장 태우는 덴 아주 선수지! 그는 주먹을 꽉 쥐면서도 결코 다가갈 생각은 않았다.

확인하려고 다가간 상황에서 분노가 깨어나면 크나큰 낭패가 될 텐데, 그런 도박은 별달리 하고 싶지 않은 탓이다.

아무렴, 사탄도 분노에겐 내주지 않는 게 거리인데, 그가 뭐라고 내주겠는가?

멋모르고 근접했단 이유로 한 번에 목이 잘린 악마가 몇이며, 식탐이 살해당한 결정적인 원인이 뭔지 아는 그가 감히 거리를 내주겠어.

[만마전주님, 저거 어떻게 하죠? 뭐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여 그는 접근할 생각을 완전히 버렸고, 몇 분째 이어진 침묵에 만마전의 관리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신호탄 하나에 질겁하는 꼴이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인간들이 저걸 본다고 해서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닥쳐.]

[옙.]

아… 그러고 보니 원래 이런 놈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똑똑한 녀석들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만마전을 탐내서 다소 귀찮았으니까.

해서 이곳에 오기 전엔 일부러 호구 같은 녀석을 찾아 관리인 삼았는데… 이제 보니 이게 잘한 선택인가 싶다.

[그리고…….]

뭐어… 몇백 년 만에 만마전을 열었음에도 배신하지 않고 얌전히 명령을 따라 준 점에선 나름 흡족스럽다.

판데모니엄은 그것만은 높게 사며 다음 명령을 고민했다.

[거기 너, 저거 들어.]

[알겠습니다.]

이번 지령 대상은 대기 중이던 다른 잡악마 중 하나다.

[저 시켜도 되는데…….]

[닥치랬을 텐데.]

[읍.]

말 잘 듣되 멍청한 악마가 얼마나 귀한데. 판데모니엄은 그의 큰 뜻을 모르고 꿍얼거리는 관리자를 용암으로 후려쳤다.

다른 용암은 분노가 깨어나도 언제든 대응할 수 있게 사위에 포진한 상태다.

[어디로 옮길까요?]

그사이, 잡악마가 냉큼 분노의 그릇을 쥐고 일어섰다.

아직 죽지 않은 몸뚱이는 힘없이 낭창낭창 휘둘리고 있다. 반항조차 없는 게 정말 제대로 기절을 한 모양이었다.

[기다려.]

다만 진정 놀라운 건 그릇이 혼절했는데도 그 속에 있을 분노가 준동하지 않는 것이라.

정신을 잃는다는 건 주도권을 잃는다는 것과 비슷하다. 하니 분노가 아무리 억눌려 있어도 억압자가 사라진 이상 이쯤이면 깨어날 만한데…….

[분노를 담을 그릇쯤 되면 그 영혼도 이 정돈 돼야 하는 건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체내의 악마를 억누르는 데 쓰지 않고서야 이 상황이 연출될 리 없다.

처음으로 인간의 영혼에 감탄이 나왔다. 농담으로 운운했던 영혼 박제용 보석이 갑자기 그리워질 정도로.

[이걸 어쩐다…….]

동시에 고민도 되었다.

지금까진, 분노가 주도권을 잡을 것 같다 싶으면 그냥 죽여 버릴 심산이었던 까닭이다.

[뒤에 무언가를 남겨 두었다가 뒤통수 맞는 건 달리 취향이 아닌데.]

그러나 기절한 상황에서도 분노가 힘 하나 못 쓰는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죽이기 아깝다.

[무슨 문제라도……?]

[넌 혀를 잘라야만 닥칠 거니?]

[…….]

아무렴, 그릇이 죽으면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은 어찌 되겠는가? 엎질러진다, 사라진다, 날아가 버린다.

그릇에 억눌려 있던 입장이라면 더 그렇다. 저 안에 있을 분노의 영혼은 숙주가 죽는 즉시 그릇을 탈출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의 손아귀를 유유히 벗어나 세상을 떠돌겠지.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을 찾기 위해.

반면 그릇을 죽이지 않고 산 채로 먹으면 분노의 영혼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힘도 전부 얻을 수 있다.

녀석의 강함을 강탈할 수 있다.

[깨어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어서 곤란해…….]

문제는 시간이다.

그는 적어도 용사를 잡을 때까진 흡수를 미뤄 둘 예정─상극의 힘이 아닐지언정 남의 힘을 공짜로 먹는 게 쉬운 일일 리 없잖은가. 지금 먹으면 용사와의 싸움이 어려워진다─이고, 그때까지 분노가 깨어나지 않을 확률은 솔직히…….

아니, 어쩌면 이미 깨어난 상태일지도 모르지.

판데모니엄은 분노의 또 다른 별명을 떠올렸다.

한때 그것을 부르던 이름은 기만과 농간.

먹이사슬 최하위의, 고블린만도 못하던 존재가 오롯이 사기만으로 음욕을 죽여 버린 것을 찬사하는 칭호였다.

더불어 그 일은 ‘분노’의 시작점이기도 했으니.

지옥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을 두고도 경각심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건 그 작자가 멍청한 것일 테다.

촤악.

그리고 판데모니엄은 결코 그런 존재가 되기 싫었다.

그는 손짓으로 잡악마를 치운 후, 용암을 분노의 그릇에게 끼얹었다.

흘러내린 마그마가 그것의 옷자락과 살갗을 녹이고 이내 가시 형태로 변해 근육과 뼈마저 뚫었다.

분노가 깨어난 상태로 기회를 엿보고 있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는 단순히 사지를 꿰뚫는 형태가 아니라, 봉인술식 형태로 꿰었으니까. 그것도 왕이 분노의 육신을 봉인할 때의 것과 동일한 형태로.

[정말 아닌가?]

이걸 못 참으면 그건 ‘분노’가 아닌데.

그는 힘을 얻음에 따라 기만과 농간보다는 분노란 본질에 더 가까워진 악마를 떠올리며 옷자락 끄트머리를 살살 훑었다.

[…뭐, 좋아.]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진정 그릇의 영혼이 일궈 낸 상황이든, 분노의 기만이든 둘 다 대처할 수만 있다면 살려 둬도 상관없겠지.

[이런 도박, 장사치로서 참을 수 없지.]

분노를 사살하기 위해 준비했던 모든 힘이 형태를 바꾸었다.

목표는 단 하나, 봉인이었다.

용사를 죽인 후, 분노를 흡수할 순간이 올 때까지 이것을 가둬 버릴 봉인!

[누가 이기나 보자고!]

* * *

「정말, 정말 미안해요… 그동안 정말로 미안했어요……. 그러니, 그러니 이제 보내 줄게요. 지금까지 힘내 줘서 고마워요.」

* * *

“가라. 거북이는 느리기라도 하지, 저쪽 대악마는 속도가 빠르다. 저기가 더 시급할 거다.”

“……!”

악마기사를 도우러 갈 수 없다. 그 사실에 인퀴지터가 비참함을 느끼려던 무렵, 베르세르크가 한마디 했다.

인퀴지터의 죄책감을 덜어 주되, 가능하다는 가정하에선 가장 좋은 해결법이었다.

“혼자서 가능하시겠습니까?”

“모른다.”

그래, 저게 가능하단 가정하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베르세르크가 진정 저것을 홀로 막을 수 있을까? 저 거대한 괴수를, 악마기사처럼 거대한 마력을 지니지도 않은 그녀가 어떻게…….

“힘을 아껴라.”

“……!”

인퀴지터는 반사적으로 다가오는 공격을 막으려다가, 베르세르크의 손에 들려 성벽 바깥으로 내려졌다.

마이스터는 반대쪽 옆구리에 붙잡힌 채다.

“……!”

인퀴지터는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다. 해서 그녀는 손쉽게 베르세르크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쿵. 묵직한 충격과 함께, 성벽과 좀 떨어진 땅에 그들이 내려앉았다.

“이게 무슨……!”

그러나 이걸 처음 겪는 어느 누군가는 달랐다. 예민한 대명장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몸을 바짝 굳히며 본인의 심기를 표현했다.

쿵, 쿠르르릉.

그러나 그다음으로 성벽 일부가 부서졌을 때, 그는 몸에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아무렴, 베르세르크가 그들을 잡고 뛰어내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거북이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어쩌면 거북이의 모가지와 성벽 사이에 깔려서 피와 살점만 남긴 채 뭉개졌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렇지만 사냥할 거다.”

“…가능론 참 멋있네.”

하여 마이스터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로 나름의 감사를 전했다. 말투가 그러할 뿐, 진심 어린 칭찬인 점에서 아무튼 감사였다.

본인의 연구 때문에 남의 무모한 도전도 긍정적으로 보는 자가 서둘러 앞으로 뛰었다.

“됐고, 가라. 여긴 내가 맡겠다.”

“…죄송합니다.”

“미안해하지 마라. 가장 힘든 건 네가 될 테니까.”

한편, 고민하던 인퀴지터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베르세르크가 저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가 문제일 뿐, 저쪽도 상대는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달리 선택지도 없었다.

누군가는 가서 시간을 벌어야 했다.

…비록 이게 맞는지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이곳입니다!”

앞서 도망갔던 마법사와 기사가 근처에 서서 그들을 향해 외쳤다. 그들의 옆에는 말 다섯 마리가 대기 중이다.

끼아악! 거기까지 날아간 세이렌이 기사의 창날에 얻어맞아 바닥으로 추락했다.

“신의 축복이 당신과 함께하시길.”

“가라.”

떠날 방법이 마련된 이상, 걱정은 오롯이 남겨질 베르세르크만을 향해도 된다.

인퀴지터는 마이스터를 따라 뛰며 슬쩍 몸을 돌렸다. 그들을 내려 준 베르세르크는 도로 성벽을 향해 몸을 돌린 상태다.

쿵! 벽을 뚫고자 함인지, 거대 거북이 성벽에 계속 몸을 비볐다.

“그,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반드시 퇴각하십시오!”

“…….”

이게 맞나? 인퀴지터는 한 번 부딪칠 때마다 쩍쩍 금이 가는 벽과, 대답 없이 창을 치켜드는 베르세르크의 뒷모습을 보며 걸음을 망설였다.

악마기사를 홀로 보낼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약속하셔야 합니다!”

“가라.”

혹은 그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믿었던 악마기사마저도 결국 구조 요청 신호탄을 터트리지 않았나.

베르세르크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베르세르크!”

그쯤 되어 그녀는 내렸던 결론에 다시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될 거라면. 차라리 이렇게 인력을 분산할 게 아니라 베르세르크를 도와 저 괴수를 완벽히 처리해야 하는 건 아닐까.

아니다, 악마기사를 구해야 하니 저 괴수보단… 저 괴수보단…….

“약속을……!”

인퀴지터는 문득, 악마기사조차 처리하지 못한 악마를 제가 상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원론적인 의문에까지 닿았다.

저 압도적인 마기를 진정 그녀가 이겨 낼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물음이었다. 그녀까지 패배하면 이곳은, 이 도시는 가망이 없었다.

“…약속을.”

그녀가 버티기만 하면 적을 처단해 줄 그 사람이 없으므로, 다음이란 건 없단 말이다.

이 여정에 선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퀴지터의 몸이 덜컥 멈췄다.

“뭐 해!”

그러던 찰나, 뺀질이보다 더 얄밉다고 생각한 대명장이 그녀를 붙잡았다.

슬렌드족답게 가늘지만 장인답게 근육으로 빼곡한 팔은 참으로 힘이 셌다. 그녀의 발이 살짝 미끄러졌다. 생각보다 힘이 더 강하다.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좀 적당히 하지?! 짜증나게 미적거리지 말라고!”

더불어 야단치는 목소리는 날카롭고 나직했으니.

“너만 걱정하는 사람 있는 거 아니야! 어영부영하면 사람만 더 죽는다는 걸 아니까 참는 거지! 전장 처음 겪어 보냐!? 정신 차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래, 여긴 전장이었다. 무엇을 고르든 사람이 죽는, 다만 덜 죽고 더 죽고의 차이가 있을 뿐인 전장.

“정말 사람을 살리고 싶다면, 빨리 끝낼 생각이나 해!”

결국 인퀴지터의 입이 다물렸다. 마법사라 그런가, 팩트만 꼬집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탁탁.

반쯤 강제로 이끌린 다리는 다시 힘을 싣고 앞으로 나아간다.

“먼저 가십쇼!”

“…죄송합니다!”

얼마 안 가 기사들 앞에 거진 도착했을까. 말 세 마리에 나눠 탄 기사와 마법사들이 먼저 출발했다.

데스브링거는 남아 있는 두 마리의 말 중 좀 더 마른 쪽에 올라탄 상태다.

“댁, 타요! 샌님은 쟤!”

미리 말에 타 있던 데스브링거가 마이스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에 마이스터는 남은 말─딱 봐도 명마란 게 느껴지는 말이었다─을 힐끗 보더니, 이내 데스브링거의 손을 받아들였다.

“괜찮겠나?”

“댁 혼자 타는 게 우리 둘이 타는 거랑 똑같은 무게거든요?”

말 하나에 성인 남성 둘이 나란히 타도 되는 건가. 인퀴지터가 그것에 의문을 품을 무렵, 뺀질이가 톡 쏘듯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저 둘을 합한 무게나 갑옷에 방패까지 장비한 인퀴지터나 그게 그거였다.

푸르륵.

“…넌?”

자연히 인퀴지터는 남은 말을 잡았다. 한데 이제 보니 악마기사가 타고 다니던 말과 닮은 것 같다.

아니, 동일한 말이다.

푸르르륵.

주인이 아닌 자가 타려 들어서인가. 녀석은 불만을 좀 표하다가 이번만 봐준다는 느낌으로 등을 내주었다.

보통 말보다 체급이 하나 더 큰 말이 그녀를 탄탄히 받쳤다.

“갑시다!”

말은 길었지만, 10초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만에 탑승한 그들이 말의 배를 가볍게 찼다.

쿠르르르릉!

그때 거대한 붕괴음이 들려왔다. 속력이 붙는 말 위에서 그들의 고개가 힐끗 돌아갔다.

쿵!

허물어지는 두 번째 성벽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거대 거북의 몸이 박치기를 몇 번 시도한 결과물이었다.

“벽이…….”

또한 그 사이로 쏟아지는 건 다량의 소금물과 미처 바다로 떠내려가지 못한 머맨의 사체라.

자랑스러운 베뮈르헨의 벽이 무너졌음에 기사들이 탄식했다.

“베르세르크!”

반면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는 베르세르크의 안위를 걱정했다. “미친, 앞 좀 봐!” 데스브링거는 마이스터의 외침으로 인해 걱정만 했다.

고개를 돌려 베르세르크의 상황을 엿본 건 인퀴지터뿐이었다.

콰앙!

목숨조차 도외시한 것처럼, 베르세르크의 몸이 무너져 내리는 성벽의 파편을 밟고 괴수에게로 달려들었다.

미처 부서지지 않은 전등의 빛을 반사하는 백금빛 머리칼은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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