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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15화 (215/389)

215화 삶은 잔인하고 (10)

“당장 저곳으로 가야……!”

인퀴지터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틀었다.

비틀.

다만 그녀의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성역을 해제한 상태인데도 그랬다. 한 번에 과다하게 힘을 쓴 여파가 몸에 새겨졌다.

그녀는 뜨끈한 얼굴을 쓸며 성가퀴를 짚었다.

쿠웅!

“아, 망했네.”

무언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마이스터가 단조로이 뇌까린 것과 동일한 타이밍이었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과 함께 인퀴지터는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키아아아아악!

작은 탄환에 의해 목에 구멍이 나고 껍질 안쪽이 휘저어진 괴수가 울부짖고 있었다.

사르르륵.

다만 새롭게 추가된 것이 있다면, 그것의 상처 안쪽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기어 나왔단 점이라.

“…머리 분열?”

거북이와 닮은, 그러나 그보다 더 얇고 가늘고 매끄러운 선의 머리가 구멍 속에서 튀어나왔다.

작은 상처를 뚫고 튀어나오는 것이 꼭 새로운 머리가 자라나는 것처럼 보였다. 밤의 어둠을 뚫고서도 허옇게 번들거리는 비늘이 어쩐지 불길하게만 느껴진다.

“아니, 저건 뱀에 가까운데.”

다만 그것이 진정 거북이 머리였다면, 두 머리의 생김새가 다를 리 없다. 나아가 속 알맹이가 빠진 것처럼 거북이의 머리와 목이 쪼글쪼글해질 이유도 없다.

새하얀 머리가 축 늘어지려는 거북이의 목과 머리를 나선으로 칭칭 휘감았다. 새하얀 머리에 기대 서 있는 거북이 머리는 마치 잘 마른 가죽 같다. 미동 한 점 없다.

“…일단 도망가자. 더는 저걸 공격할 방법이 없으니까.”

“가라. 나는 이곳에 남는다.”

“그러든가. 용사님도 그럴 거야?”

다만 그 모든 광경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있다.

“…저는.”

이곳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가.”

또한 그녀의 뒤에는 이제 막 성벽을 벗어나고 있는 병사들이 있다.

“제가 이곳에서 물러나면, 이곳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 괴수의 전진을 막지 못한다면 그대로 깔려 죽을 병사들이.

* * *

한편, 성벽 위의 존재들이 아직 첫 번째 포조차 쏘지 못한 그 시점.

나는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투헨더를 되찾고자 앞으로 달렸다. 장검이 망가진 이상 내가 쓸 수 있는 무기는 오직 투헨더뿐이니 선택지가 없었다.

치이이익.

방금 벼락에 삼켜졌던 검은 굉장히 뜨거웠으나, 그것도 대충 넘겼다.

벼락에 데워진 무기를 잡고 싸워서 손바닥이 익나, 저 악마가 쏟아 낸 용암을 맨손으로 받아 내서 익나, 그게 그거였다.

얼굴 없는 악마가 세 쌍의 팔 중 한 쌍만을 모아 손가락을 맞댄 채 웃는 소리를 냈다.

쿠르르르─!

오, 당연하지만 그런 투헨더라고 마구 휘두를 수 있는 건 아니다.

망가지지 않을 뿐, 트루 투헨더도 철검이고, 금속은 번개를 유도한다. 빌어먹을.

해서 나는 투헨더를 빠르게 낚아챈 뒤 인벤토리에 넣고 구르듯 뛰었다. 휘릭. 내 몸을 따라 코트 자락이 휘어졌다.

쾅!

간발의 차로 내 뒤에 벼락이 내려치고, 코트를 살짝 밟고 선─앉은?─내 몸이 땅을 강하게 박찼다.

접혔던 무릎이 추진력을 얻어 앞으로 쏘아지듯 나아갔다. 이제 다시 용암지대다.

콰가가가각!

그러던 도중, 앞에선 암석창이 쇄도해 왔다. 용암지대에 들어왔답시고 내가 밟은 자리마다 반 박자 늦게 가시들이 솟은 건 덤이었다.

내게 최고 속도를 강제해, 앞에서 날아오는 암석창을 피하기 어렵도록 하는 악랄함이 아주 천재적이다.

그러나 내가 맨손이라고 저것에 대처 못 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나는 뇌를 쥐어짜는 심정이 되어, 극도록 세밀하게 마력을 운용했다.

목표는 아주 얇게, 정말 최소한으로만 마력을 써서 손을 보호하는 것이다.

탁.

그런 다음, 나는 최초로 내게 다가온 암석창을 붙잡았다. 화살을 잡는 심정과 비슷했다.

손바닥과 마찰하며 지나치려는 창을 더한 힘으로 움켜쥐고 그대로 휘둘렀다.

바람개비처럼 빠르게 돌아간 암석창이 다른 것들을 전부 튕겨 주었다.

강도가 비슷해서 그런가. 일방적으로 부수기보단 서로 깎여 나가며 금세 너덜너덜해졌다.

뭐, 오래 쓰길 바란 적은 없으니 상관은 없나.

나는 부서지기 직전의 암석창을 날아오는 화산탄에 박은 후, 화산탄을 끌어 내림과 동시에 그 반동으로 몸을 띄웠다.

가시가 간발의 차로 내 발꿈치를 못 꿰뚫고, 공중에 뜬 몸이 다른 화산탄을 발로 찼다.

허리 코어 힘만으로 허공에서 한 번 펄떡여, 용암이 없는 곳에 착지한 몸이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단검을 꺼내 던졌다.

쿠르르릉. 구름이 울었다.

콰앙!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최대한 높은 지대의 건물 파편에 던졌더니, 얼마 안 가 그곳에 번개가 내리꽂혔다.

바닥을 타고 뻗어 나간 전기가 찌릿찌릿했으나 이 정도면 감수할 만했다.

나는 앞으로 단검을 박을 만한 위치를 눈여겨봐 두며, 들썩이는 대지와 용암거인의 주먹을 피했다.

철썩!

그러다 잠깐, 수로에 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물과 닿은 마그마가 증기를 뿌옇게 일으키다 그대로 식어 버린다.

수로에 고인 용암을 잘못 밟았다가 느릿하게 빠질 뻔했던 경험을 고려하면 나쁜 일은 아니었다.

물의 양이 마그마 전부를 덮을 정도로 많지 않다면, 차라리 수로에 빠질 일 없도록 굳혀 주는 게 낫다.

더불어 이렇게 되면 용암이 수로를 통해 퍼지는 반경도 줄어들 거다. 물과 닿은 용암이 알아서 굳으며 벽이 되어 줄 테니까.

후일을 생각하면 역시 이게 낫다.

나는 왜 물이 차는지에 대해선 외면한 채 발을 지익 끌었다. 돌바닥을 훑은 군화가 곧 허공을 날았다.

쾅!

내가 있던 자리에 화산탄 두어 개가 박혔다.

[아까부터 피하기만 하는 꼴이 기니피그 닮아서 귀엽네. 아, 기니피그라고 알고 있어? 이만한 쥐새끼인데…….]

기니피그는 쥐과가 아니라 천축서과라서 쥐새끼라고 하면 틀리거든, 이 무식한 악마 새끼야.

나는 친구 중 한 놈이 길렀던 기니피그를 떠올리며 숨을 삼켰다.

그놈이 저 소릴 들었으면 본인까지 무식해질 듯하니 멍청한 냄새 그만 풍기고 꺼지라 지껄였을 텐데. 아쉽다.

퍼억!

와중에 용암을 헤치고 나아간 내 몸이 용암인 잡몹에게 날아차기를 행했다.

마음 같아선 드롭킥을 먹여 주고 싶었으나, 낙법을 제대로 구사할 자신이 없어서─무엇보다 바닥이 용암이라서─포기했다.

물론 나는 갈음하듯, 날아차기에 얻어맞아 쓰러진 잡몹의 몸뚱이를 밟고 넘어갔다. 콰앙! 아슬아슬하게 뒤쪽에 처박혀 있던 화산탄과 암석창이 터지며 용암을 튀겼다.

허공에서 가시로 변한 마그마가 아슬아슬하게 나를 노렸다.

그어어어어!

그뿐만이 아니다. 용암거인이 주먹을 휘두르다 휘두르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토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우에엑, 쏟아진 용암이 비처럼 내리며 내가 보호하지 못하는 상체를 노렸다.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죽이는 대신 특별히 사육해 줄 수도 있어, 그레트헨!]

“꺼져라.”

그러나 이딴 것에 굴하기엔, 이미 거지 같은 순간을 너무 많이 겪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벼락에 당했던 순간이 더 엿 같았으니 말 다 했다.

내 몸이 앞으로 튀어나가 쏟아지는 마그마를 피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몇 방울이 옷을 녹이고 어깨에 짙은 화상을 입혔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번개에 맞았을 때가 이것보다 더 심했다.

[하핫, 그래. 사실 네가 받아들일 건 기대도 안 했어.]

그쯤 되어, 용암의 한가운데 있던 악마가 움직임을 보였다.

직접 와 주나? 깔짝이는 원거리 공격에 돌아 버릴 것 같던 가슴속, 한 줄기 기대가 피어올랐다.

[기대가 뭐야, 역으로 의심하지 않았을까?]

본인 대신 화산탄이 날아왔다.

이런 씹…….

콰앙!

더 짜증나는 건, 그게 일반 화산탄과 상당히 달랐다는 점이다.

나는 몸체를 어마어마하게 불리다 못해 가시 갑주를 두르고 굴러오는 화산탄을 보며─가시 공이냐?─입술을 달싹였다.

필터링 있는 게임이었다면 ♡♡으로 고쳐졌을 몇 개의 욕들이 혀 위를 맴돌았다. 욕을 줄이자고 다짐한 게 우스워질 정도였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건 부처님도 인정해 줄 부분 아닌가?

필드 특성으로 인해 이동하려면 꾸준히 마력을 소모해야 하고, 그래서 마력이 드는 공격은 함부로 할 수도 없고, 적의 공격은 쉴 새 없이 쏟아져서 딜 타이밍이 나오지를 않는데! 보스도 멀리 있어서 겨우 난 딜 타이밍마저 날려 보내야 할 때가 많은데!!

이걸 부처님도 화 안 내고 배기겠냐고!!

퉤!

거기에 용암거인이 침 좀 뱉었기로니, 그 잡몹들까지 비슷한 짓을 하고 있다.

나는 용암 위라서 구르는 짓도 못한 채 온몸을 비틀어 가며 어떻게든 회피했다. 위급하다 싶으면 인벤토리에 넣어 둔 투헨더를 잠시 소환하기도 했다.

쿠르르릉!

[내가 너를 압도하는 순간이 오다니, 세상 참 모를 일이야.]

‘집어넣어, 이 멍청한 새끼야!’

“……!”

그러다 번개 맞을 뻔한 뒤론 차마 못 꺼내겠다 싶어졌지만 말이다.

퍼억!

한데 그렇게 열심히 번개를 피하던 도중, 나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용암으로 이뤄진 잡몹 놈들, 번개에 맞으면 터진다. 뜨거운 액체 상태인 만큼 추가로 녹거나 깨지진 않아도, 주입된 에너지를 못 이겨 스스로 팍 하고 터지긴 한단 거다.

[한눈팔면 섭하지!]

그럼 저 용암거인도 가능한 건가? 저 망할 거인도 터트릴 수 있는 거야?

쿠르르릉!

마침 구름이 우짖었다.

이제 3초쯤 뒤에 낙뢰가 칠 것이다.

“흡!”

나는 슬슬 패턴으로 정립된 공격에 맞춤 대응을 보이며 힐끗 악마의 손을 보았다. 한 줌 쥐인 진주가 참으로 꼴받았다.

팍!

하여튼 긴가민가하며 던진 단검은 뾰족한 날이 위가 가도록 하여 용암거인의 팔뚝에 박히고 마니.

거인의 팔에 벼락이 직격한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피뢰침 역할의 단검을 통해 용암 속으로 파고든 과전류가 거인의 팔을 ‘팡’ 터트렸다.

[……!]

“……!”

거인의 손과 팔뚝이 분리되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됐다.

[하. 이걸 이렇게?]

좋아. 그럼 앞으로 피뢰침은 거인 확정이고.

나는 거인이 팔을 잃은 틈을 노려 앞으로 몸을 쏘아 보냈다. 가시 공을 피하고, 화산탄을 밟아 뛰면 슬슬 악마가 코앞이다.

구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노려 잠시 꺼낸 투헨더는 양손에 단단히 쥐여 힘을 한가득 받는다.

“……!”

개같은 악마 새끼야, 딱 대라.

나는 마력을 아끼고 아껴 검기마저 둘렀다.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없는 만큼, 지금 최대한 딜을 넣어야 했다.

[칭찬해 줄게, 그레트헨─!]

문득, 찢어질 듯 웃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이건 예상 못 했다고!]

‘안 돼! 다가가면─!’

나는 그 웃음소리에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남은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악마가 얼굴 없이 싱긋 웃는 듯한 환상이 보인 건 바로 다음이었다.

첨벙! 용암 속으로 침수한 악마가 내 검로를 회피했다. 이 새끼가? 내 어이가 가출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뒤에서 온다!’

촤악!

하나 어이없다고 배려해 줄 상대가 내 적인가? 그렇진 않다.

나는 마그마가 부자연스럽게 튀기는 소리를 듣고 바로 대응했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내 바로 뒤, 발치 부분이다.

콰가가각!

나는 몸을 최대한 빠르게 틀어, 바닥을 긁듯 투헨더를 휘둘렀다.

까앙!

내 종아리살을 베어 내려 한 듯한 손이 투헨더에 의해 가로막혔다. 물론 저놈의 손은─빌어먹게도─여섯 개나 되므로 나는 곧바로 백스텝을 밟았다.

역시나 틀린 판단은 아니었는지 그 뒤로 악마의 손이 내가 있던 허공을 갈랐다.

[후후후흐하하하하!]

기분 나쁜 웃음이 낭창하게 공기를 휘며 악마가 다시 마그마에 녹아들었다.

날듯 뒤로 뛴 내 몸이, 무너진 건물 파편을 밟고 서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장사치 새끼, 직접 나설 수만 있었어도……!’

망할. 곤두선 이성 아래에는 부글부글 끓는 감정이 한가득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레트헨. 불꽃 없는 너보단 준비한 내가 더 강했나 봐.]

X발, 이딴 불합리한 싸움이 있을 수 있다고?

이게 레이드라고?

[아하하하하하!]

이게, 이딴 게.

쿠릉.

거인에게 단검을 던지기엔 거리가 멀다. 나는 먹구름이 울자마자 투헨더를 최대한 멀리 던졌다.

간발의 차로 땅벼락이 쳤다. 콰앙! 투헨더가 벼락에 맞은 상태로 추락을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런 마당에 밟고 서 있던 바닥은 들썩이며 용암 분출을 준비한다. 나는 저 멀리서 나타난 악마의 형상을 발견하고, 내게 굴러오는 가시 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쾅!

용암이 내 아래서 터지기 전, 내 몸이 날아오르듯 떠올랐다.

겸사겸사 새빨갛게 달궈진 투헨더는 마그마에 꽂히기 전에 내 손에 붙잡힌다. 열기에 일그러진 가죽이 내 손에 들러붙었다.

[정말이지, 네 화난 얼굴이 참 마음에 들어. 네가 정말 분노였다면 이런 표정도 구경하지 못했을 텐데.]

나는 허공에서 검을 붙잡은 그대로 몸을 틀어 잡몹을 베고, 팔을 잃은 채로 마그마를 토해 내는 거인을 피해 달렸다.

쿠웅!

가시 공이 내 앞을 또 한 번 막았으나 지금은 검을 잡고 있다. 나는 아깝지만 투헨더에 검기를 길게 둘러 그것을 쪼개고 너머로 나아갔다.

깔린 용암이 부분부분 원형으로 빛나더니 가시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 위로는 번개가 요란하게, 무작위로 내리친다.

[그렇지만 노는 것도 슬슬 끝이야.]

그걸 보고 피할 수 있는가?

정답은 ‘아니’다.

[방심하다가 기회를 날려 먹는 건 장사치가 할 일이 아니거든.]

‘염병, 피─!’

빛을 보고 피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암, 탄착 지점을 알지도 못한 채로 빛의 속도를 이기는 게 말이 될 리가 없잖은가.

지금까진 소리로 듣고 유인하거나 그냥 냅다 달려서 피했을 뿐이다. 지금처럼 사방에서 우르르 쾅쾅거리면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꽈르르릉!

“커헉!”

‘X발!’

해서 나는 기어이 벼락에 얻어맞았고, 연이어 솟아난 잡몹에게 한 대를 허락했다.

저릿함에 반응조차 못한 몸이 부웅 날아 저편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 순간에도 벼락은 두 번 더 내 몸을 후려친다. 시야가 검게 점멸했다가 하얗게 빛이 났다가, 붉어졌다.

불합리하다.

헛웃음과 함께 억울함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푸욱!

더 우스운 건, 이러는 중에도 착지 위치 운이 바닥을 기었단 점이다. 무너진 건물 파편에 어깨가 정확히 관통됐는지, 따끔한 충격과 함께 피가 튀었다.

“큽.”

입에서도, 코에서도 뭔가가 흘러내렸다. 사방에서 춤을 추는 불꽃이 말해 주길, 아무래도 피인 듯했다.

온몸이 덥고 또 더웠다.

“…….”

진짜, 헛웃음만 나온다.

[혹시 묻는데, 죽을 것 같니?]

…이런 싸움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결국 이럴 거라면 내가 지금껏 발에 땀나도록 뛴 것엔 대체 어떤 가치가 있어?

공격하기도 힘들고, 기껏 좁힌 거리도 허사가 되고, 그런 마당에 결국 무작위 공격에 맞아 쓰러질 결말이라면, 나는…….

“쿨럭.”

울컥 올라오는 피를 구태여 막지 않았다. 초점이 흔들려서 희부예졌다가 선명해졌다를 반복하는 시야는 어쩐지 범위가 이상하다.

마치, 2/3로 줄어든 듯한 느낌이었다.

[죽을 것 같다면 말해 줘. 보존해야 하니까.]

음, 아. 눈 한쪽이 익었나.

나는 안구가 익는 경험도 다 해 본다고 생각하며 다리와 어깨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냐고 묻는다면 글쎄.

이유를 찾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악마와 싸우는 것은 이제 각오나 다짐보다는 관성에 더 가까워졌으니까.

엔딩이라는 허상에 다가가고자 한 걸음 내딛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관성.

쑤욱.

하여 나는 웃음만 나는 상황 속에서도 몸을 일으켰고, 그에 따라 관통된 어깨도 뽑혀 나왔다. 뾰족한 나무 쪼가리에 꿰뚫렸던 자리는 피를 줄줄 흘린다.

[그렇지만 아직도 일어설 힘이 남아 있다는 건 그것대로 놀랍네.]

시이이이발. 몇 개 없는 대악마 레이드 중 하나를 초행 1트 만에 깨라고 설계한 놈 죽인다. 공략법도 안 나온 신규 레이드 들박해서 깨세요라고 하는 운영자 놈 반드시 죽여 버린다.

나는 허탈함을 농담으로 어떻게든 덮어 가린 후, 지혈을 위해 단검을 꺼냈다.

마그마에 한 번 담갔다 빼지며 벌겋게 달아오른 단검이 그대로 상처 부위 위에 얹어졌다.

치이익.

불에 지져 상처 땜질하기. 옛 시대부터 유구하게 내려온 출혈 치료법이었다. 아니면 말고.

[너, 인간 아니던가? 인간이 이렇게까지 질긴 목숨을 가질 수 있었나?]

통각 수치가 통증을 조절시켰는데도 기분이 더럽기는 한가.

나는 그 사실에 새로운 빡침을 얻으며 더운 숨을 뱉었다. 비틀. 내가 통증을 못 느껴도 몸에는 착실히 대미지가 쌓이는지라, 몸이 잠시간 흔들렸다.

[뭐… 하긴, 그쯤 되어야 그릇 주제에 분노를 억누를 수 있는 거겠지.]

그렇지만 멈출 수는 없다. 멈출 수는 없었다.

‘억울하면, 화를 내.’

아까도 말했지만, 이제 와서 멈추기엔 너무 멀리 왔다.

‘그럼 저걸 죽여 줄 테니까.’

끼이이익.

어디선가 쇳소리가 들려오고, 내 손이 주먹을 까닥였다.

퍼엉, 펑. 저 먼 곳의 성벽에서 치열한 싸움의 소리가 전해져 왔다.

‘어떻게든 저 자식을 찢어 죽여 줄 테니까……!’

그건 내가 멈출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다.

‘X발, 그러니 화 좀 내라고! 주도권 좀 작작 붙잡아!!’

번개를 두 번 처맞아서 폭삭 익어 버린 듯한 몸뚱이가 완전히 일으켜 세워졌다.

“죽인다.”

투헨더가 어디 있을까. 아, 넣어 놨던가? 그래. 인벤토리에 있는 것 같네.

“악마.”

내 몸이 앞으로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그걸 내가 두고 볼 리 없잖아.]

‘X발!’

콰앙!

불현듯, 엄청난 압력이 온몸을 강타했다. 무엇이 나를 공격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벼락일지도 모르고,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고, 사고가 몇 번씩 잘렸다 이어 붙여지길 반복했다. 시간을 건너뛴 기분이었다.

고통조차 아득하니 멀어져 어떤 감각도 선사하지 않았다. 세상이 희다.

“……!”

[─지만, 만신전의 입구가 완성됐다.]

쿵. 그렇게 몇 초. 혹은 몇 분. 겨우 돌아온 정신이 세상을 더듬었다. 멀어진 감각 위로는 무언가가 내 몸을 짓누르고 있음이 어렴풋하게 와닿는다.

가문 시야가 껌뻑이며 나를 압박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젠 용사도 못 막아.]

나를 짓뭉갠 것은 거대한 암석의 손이었다.

…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가자, 악마들아.]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구나.

애초에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었어.

[오늘부로, 동부의 멸망이 시작될 테니!]

나는 얼굴 없는 악마의 뒤편을 망연히 응시했다.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검은 신전과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악마들의 떼.

아무래도 녀석이 준비하던 건 무한소환진 비슷한 것이었나 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온몸을 내주더라도 의식 제단부터 없앴을 텐데.

‘빌어먹을. 이봐, 아직도 미적대기야?!’

…아니, 알았더라도 없앨 수는 있었을까? 나는 시도할 때마다 무위로 돌아간 노림수들을 떠올리며 바스락거리는 눈꺼풀을 내렸다.

‘저놈이야 메커니즘을 몰라서 그런다 쳐도 넌 아니잖아!’

그럴 리가 있나. 알았더라도 못 막았을 것이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심지어는 팔다리가 달려 있는 것 같지도 않는 온몸을 토대로 확신했다.

내가 아무리 저걸 막고 싶어도, 나는 못 막는다.

[시작은 이 도시다. 도시에 있는 인간을 모조리 죽여.]

그래, 나는 저걸 막지 못해.

내가 약해서,

저게 너무 강해서.

저게 가당찮을 정도로 밸런스를 뚫어 버려서 나는 못 이긴다고.

‘이러다 다 죽는다고! 네놈이나 나뿐 아니라, 이 일대의 사람들 전부!’

시이이발. 이딴 게 게임이냐? 이딴 게, 이딴 것이…….

부족한 무력에 대한 설움이, 나아가 부당함과 부조리함에 대한 원통함이 차올랐다.

내가 왜 이딴 개좆같은 일을 당해야만 해. 더없이 선명한 울분이 녹고 일그러진 살갗 위를 타고 흘렀다. 왜 이런 불합리한 싸움을 해야만 하냐고. 형태를 갖춘 감정은 음습하게 파인 눈꼬리를 지나 귀로, 귀를 우묵하게 피해 뒤통수로 흘러내렸다.

신경이 차단된 것처럼 말을 듣지 않는 몸뚱이 중, 유일하게 내 의사를 반영해 주는 기관이었다.

‘넌 신경도 안 쓰인다 이거냐!?’

그러나 그마저도 슬슬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사지말단이 소실된 듯한 기분과 함께 고개를 움직이는 것조차 이젠 힘들다. 사실 이런 생각마저도 그렇다. 사흘 밤낮을 새운 것처럼 머리가 계속 하얗게 변하려고만 한다.

생각이 생각이 아니고, 사고가 사고가 아니다. 몽롱하다. 자고 싶다.

‘젠장, 젠장, 젠장!’

…이대로 자면 편안해질 텐데.

‘빌어먹을. 일어나, 일어나라고!’

…이대로 죽어 버리면, 더는.

‘일어나!’

…아.

[저, 만신전주님. 저건 어떻게 할까요?]

[넌 싸울 준비나 해. 곧 분노가 깨어날 테니까.]

나는 가까스로 떠오른 성주의 말을 두고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자네에게 대피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다 걸렸으니까.』 아직 내가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옙.]

하므로, 하므로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냈다. 마침 암석의 손은 나를 짓누르던 걸 그만두고 옆으로 치워지는 중이다. 하늘이 뚫렸다.

슥.

내 빈손에 신호탄이 생겨났다.

[어라?]

탁.

나는 어거지로 팔을 움직여, 신호탄의 아래쪽이 땅과 부딪치게 했다. 트리거가 발동되자 신호탄이 작동을 시작했다.

피유우우우웅!!

[우와앗! 만신전주님, 저놈이 움직였는뎁쇼!]

[뭐야, 아직인가?]

얼핏, 그런 상념이 들었다. 여기 올 만한 인력이 남아 있을까? 용사 일행은 여력이 남아 있어 이곳에 올까.

그렇지만… 만약 없더라도 상관은 없어.

그들이 나를 도울 순 없더라도… 최소한 이곳의 위험성은 신호탄을 통해 알게 될 테니까.

펑!

하늘에 쏘아진 빛이 터졌다.

그게 내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고생 많았어요. 이제… 쉬어도 돼요.」

다정한 위로와 함께 시야가 끊겼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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