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삶은 잔인하고 (7)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고, 발판을 끝까지 안 주겠다면 나도 그냥 내가 만들어서 쓴다.
나는 그런 마인드로 마력량을 체크했다. 그러곤 마력나선을 다리에만 형성해 보았다.
놀랍게도 가능은 했다. 몸 전체에 두르는 것보다 현저히 적은 양의 마력만 드는 것도─그래 봤자 회복되는 속도보다 많이 들긴 했다─제법 메리트 있었고.
물론 양다리, 즉 떨어져 있는 두 부위에 각각 두르는 건 굉장히 골치 아픈 작업이었으나… 뭐 어쩔 수 있나.
여기에 쓰는 마력을 아껴야 딜을 하나라도 더 넣거나, 더 오래 싸울 수 있는 게 현실인데.
결국 나는 전력 질주 하면서 암산으로 곱하기 나누기 문제 푸는 심정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마법사들의 지원이 조금은 그리워졌으나 그들이 있어 봤자 저 용암에 처맞고 1초 만에 리타이어 할 걸 생각하니 그리움은 금방 사라졌다.
콰가가각!
다만 다리에 검은마력 폭풍을 매달고 있어서 그런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회전 톱날로 땅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래도 효과는 좋아서, 이젠 용암을 밟아도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소용돌이치는 마력이 용암을 사방으로 튕겨 내 줬다.
콰앙!
하면 더는 눈치 볼 이유 없다. 나는 화산탄을 피해 마구 달렸다. 용암인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것이 뻗은 팔을 점프하여 피한 후, 그 넙적한 팔 위에 올라 달렸다.
점성 높은 용암으로 이뤄진 거인이라 발이 푹푹 빠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마터면 시시할 뻔했잖니, 분노!]
그쯤 되어, 내가 용암을 뚫고 제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악마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화산탄의 숫자가 늘어나고, 거인의 몸이 노랗고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터지기 전의 폭탄 같았다.
콱!
아, 거인의 어깨까지 오른 후, 그 건물로 다이빙할 생각이었는데.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옆으로 빠진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추락을 시작했다.
챙!
그쯤 돼서 용암거인은 내 판단을 현명한 것으로 바꿔 주었다. 마그마로 이뤄진 피부가 마구 움직이더니 고슴도치로 종족 변경을 한 것이다.
가시가 마구 돋은 피부가 기괴한 건 둘째 치고, 내 몸에 추가로 구멍이 날 뻔했다. 잘 뛰어내렸다.
펑, 펑펑펑!
그러나 나는 내 판단을 오래도록 칭찬할 수 없었다. 추락하는 순간에도 악마의 공격이 계속된 탓이다.
특히 화산탄 이놈은 악랄하게도 연속적으로 날아오며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일부는 몸을 비트는 것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일부는 아니어서 손을 반드시 써야만 하게 만든 거다.
탓!
그러나 위기는 오히려 기회라고.
처음엔 검으로 베어 처리했던 나는 곧내 그것을 발판 삼기로 했다. 사방에서 동시에 날아오는 게 일일이 베면 답이 없겠다 싶어서였다.
뭐, 겉표면이 식어 암석에 가깝게 변한 화산탄이라 가능한 점도 있긴 했다. 물공이었다면 아무래도 밟을 생각은 못 했겠지.
[어딜 가는 거지!?]
그러나 내가 뛰었던 허공의 바로 아래, 대지가 불처럼 솟아오르더니 곧 마그마를 분출했다.
촤악!
물처럼 솟는 것에 나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방출했다. 온몸을 얽었던 식물을 떨쳐 낼 때와 비슷했다.
틈 하나 없이 빽빽하게 방출된 선 형태의 마력이 용암을 자르고 베어 밀어냈다.
쾅!
거기에 땅을 밟은 순간 솟아오르는 가시란! 나는 숨 돌리지도 못한 채 가시를 피해 움직였다.
가시가 건물로 가는 길목을 죄다 막고 있어서 그쪽으론 갈 수도 없었다. 교묘한 가시질에 건물과 살짝 멀어졌다.
다시 시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악마는 내가 건물에 다가갈라치면 더 많은 공격을 쏟아붓는 것도 모자라 여러 장애물까지 형성했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통과를 못 할 것 같아 차마 엄두도 못 낼 수준의 장애물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데!]
심지어는, 녀석은 직접 움직이기도 했다.
나를 따라붙은 악마가 몸뚱이를 뱅글 돌리자 제 몸체만 한 꼬리가 따라 돌며 길쭉하게 늘어났다.
촤악! 엄청난 꼬리치기였다.
문제는 그것의 위력이 아니었다. 저 공격이 망할 넉백형 공격이고, 그로 인해 건물과는 더 멀어졌으며, 밀려난 공간이 하필 용암거인의 타격 지대인 게 문제였지!
콰앙!
나는 아슬아슬하게 거인의 주먹을 피한 후, 이를 악물었다.
의식 제단이고 뭐고 저 망할 악마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답이 없을 것 같다. 아주 열받는 결론은 덤이다.
콰과과과과광!
그때 안에 갈라진 틈 사이로 마그마가 보이는 암석창이 용암 사이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화산탄에 이은 원거리 공격이었다.
심지어는 암석으로 이뤄진 작은 용암인들도 하나둘 솟아올랐다. 아무래도 쫄 소환 스킬을 하나씩은 달고 있는 게 강한 악마들 특인가 싶다.
정말이지 상도덕이 없다.
이걸 솔플 레이드라고 만든 게 맞냐?
나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가까워진 암석창을 파쇄하고 화산탄을 베어 냈다.
‘죽여 버려.’
“죽인다.”
끼이익.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수위가 점점 높아집니다, 성주님!”
“…대피 상황은 어떻지?!”
“모험가 길드에서 보고가 왔습니다! 남쪽과 서쪽부터 대피 시작, 성문을 열고 사람들을 인도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목적지는 츠베르크 언덕입니다!”
베뮈르헨의 성주는 이를 악문 채 전황과 도시 상황을 연달아 보고받았다.
성벽이야 용사란 존재 덕에 평소보다 피해가 배는 적지만 이제 다가오는 ‘섬’이 문제였고, 도시 내부는 그냥 모든 게 문제였다.
“빨리, 최대한 빨리 내보내라고 해! 결코 싸움에 휘말려 죽는 자가 나오지 않도록!”
“예!”
“우, 우린 끝났어… 도시에도 악마가…….”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역시 저 망할 거인이다.
“…약한 소리를 하는 자! 누구냐!”
“……!”
“두려워하지 마라! 도시에 나타난 악마는 이미 대응에 나섰다! 저것은 곧 제거될 것이고 사체조차 이 땅에 남기지 못할 거란 소리다!”
그는 도시 북쪽을 힐끗 보며 이를 갈았다.
먹구름으로 인해 달과 별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과 그 아래서 오롯이 빛나는 불의 거인 그리고 불타기 시작한 그 일대까지.
마지못해 혼자 보낸 모험가가 잘하곤 있는지 괜히 불안해졌다. 거인이 도시를 부수는 대신 한자리에서 허우적거리는 걸 봐도 그러했다.
모험가가 딴 곳으로 못 가게 붙잡았으니 저러는 거겠지만…….
애초에, 저런 거대한 괴물을 인간 혼자서 상대하는 게 맞기는 한가 싶어서.
그는 모험가의 자신감을 믿고 모험가 길드나 마탑의 원조마저 다른 곳에 돌려 버린 선택이 정말 맞는지 고민했다.
모험가의 말마따나 가서 개죽음당할 확률이 높은 인력들,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쓰는 게 더 효율적이긴 하겠으나… 정말, 정말 이게 맞나?
“대피령은 혹시 모를 조치에 불과하다!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잡고 싸워라! 도시를 의심하는 대신 믿음으로 싸워라! 우리가 이 도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서로를 믿고 자리를 지켜 저 망할 생선들을 막아 내는 일이다!”
그러나 접시에 담긴 음식은 그도 많다. 그는 쩌렁쩌렁한 외침으로 술렁이던 병사들을 겨우 다독인 후, 전령에게 손짓을 했다.
각지에 퍼져 있는 간부 직급에게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각고하란 말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더불어 이 말도 전해라. 성벽이 뚫릴 것 같을 시, 성벽을 버리고 후퇴할 수도 있으니 대비해 두라고.”
“예!”
“물론 후퇴가 결정되면 신호탄을 올릴 것이니, 두렵단 이유로 먼저 피하는 것은 아니 된다. 그것을 확실히 전달해 줘라. 병사들이 듣지 못하도록 하는 것 역시 잊지 말고.”
그에, 글까지 읽고 쓸 줄 아는 정예병 출신이되 어깨를 다쳐 전령으로 직업을 바꾼 이가 충성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전령들도 마찬가지였다.
명령을 받은 이들이 먼저 뛰어갔다.
“…그리고 수위가 높아진다고 했나?”
“예.”
또한 성주는 병사들을 다독이느라 미뤄 두었던 논제를 꺼내, 수문 담당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다독이며 쓴 시간 때문에 수면의 높이는 성주가 보기에도 제법 위험한 수준까지 왔다. 아무래도 첫 번째 성벽은 얼마 안 가 버려야 할 것 같단 직감이 들었다.
“일단 5번 수문부터 9번 수문까지 열도록 하지. 그리고 병사들을 내벽으로 옮긴다!”
하여 그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도시 수로에 물이 차면 주민들의 대피가 조금 느려지겠으나, 해수면의 높이가 너무 높아져서 어쩔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물을 빼지 않으면 머맨들이 수면 점프만으로도 성벽에 올라올 것이다.
“5번 수문 개문!”
“6번 수문 개문!”
“7번…….”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을 담아 1번~4번 수문은 열지 않았다. 다른 말로는 머맨이 통과 못 할 작은 수문만을 열었다.
수로에 물이 차긴 하겠으나 대피하는 동안 머맨의 습격을 받진 않을 것이다. 애시당초 5번~9번 수문 정도면 도시의 수로에 물이 차는 데도 한참 걸릴 테고.
치이이익!
“애미 애비 뒈진 새끼들.”
그러다 잠깐. 병사들이 차차 두 번째 성벽으로 물러났을 즈음, 정비하러 왔다가 얼떨결에 같이 싸우고 있는 이가 욕과 함께 또 한 마리의 머맨을 보내 주었다.
점액질로 인해 칼날마저도 종종 미끄러트리곤 하던 머맨의 피부는 그대로 녹아내리는 중이다.
마이스터가 ‘염기탄’이라 이름붙인, 고작해야 성인 주먹만 한 아이템이 벌인 일이었다.
“하, 그런 좋은 게 있으면 일찍 좀 만들 것이지 그랬냐.”
“그게 되면 성주님 같은 사람도 대명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여간 한마디도 안 지지.”
그 위력에 경탄하고, 얼마 없는 개수에 아쉬워하면서도 성주는 크게 타박하는 걸 멈췄다.
부탁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의 의지로 연구해 온─본인 말로는 코트 하나 연구하다가 실마리를 잡았다는데─물건이 바로 염기탄인 탓이다.
시제품을 그에게 검사받은 이래, 그의 청탁을 받고 작업에 착수하여 생산해 낸 숫자가 무려 백 개─통부터 내용물까지 전부 수제품인데도─나 되고 말이다.
고작 엿새 동안 만든 걸 생각하면 그건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니다.
“됐고, 슬슬 들어가라. 효과 확인은 충분히 했을 텐데.”
“싫은데.”
“넌 대신할 사람도 없는 인재야. 공과 사는 구분해.”
마이스터의 조부인 베르너가 실망하는 것도 보기 싫지만, 마이스터란 사람 자체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살아온 세월이 아직 덜한 만큼 마이스터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다, 라는 말은 과장이겠지만… 최소한 전투 병기 쪽에는 마이스터가 담당한 것이 너무 많았다.
성주는 그것을 꼬집었다.
“저 섬이 뭔지는 보고요.”
“…가끔 나는 네가 마법사란 게 원망스러워.”
“마법사가 아니었어도 이럴 거란 생각은 안 하시는지?”
“그 말에 반박도 못 한다는 게 더 그래.”
성주는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보다 호기심이 더 중요한 망할 연구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마이스터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자기가 남을 치는 건 돼도, 남이 멋대로 건드는 건 안 되는 이가 눈썹을 와락 들었다.
“남아 있을 거면 용사 곁으로 가 있어라. 거기가 더 안전하니까.”
“…그래요.”
성주는 기어이 기어오른 머맨의 입안에 창을 내리꽂곤 그대로 들어 올렸다. 보통 창보다 날이 더 긴 무기가 머맨의 두개골을 부수고 위로 올라왔다.
“용기를 가지고 움직여라!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으아아아!”
전투는 아직도 치열하기 짝이 없었다.
“…성주님.”
한데…….
“저게 뭔지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
“……?”
다음 순간, 성주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아이템을 눈에 장착하며 희망 대신 신음을 흘렸다.
“다만… 제 눈엔 아무리 봐도 거북이로 보입니다. 맞습니까?”
밤마저 밝히는 시야 너머로 ‘섬’의 정체가 슬슬 보인다.
“…나도 그렇게 보인다. 살다 살다 저만 한 거북이는 또 처음 보지만.”
어렴풋이 찾아낸 ‘섬’은 거대한 거북이였다.
긴 다리와 긴 목을 가지고 바위로 뒤덮인 껍질을 가진, 깊은 심해에 잠들어 있다가 이제서야 얕은 바다로 나와 햇볕을 본 거북이.
“전설 속 육귀가 꼭 저러려나.”
정말이지 전해져 내려온 기록이 도움이 된 건지 안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기록처럼 용이 나타난 건 아니나, 용을 대비하겠답시고 만든 무기는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성주는 침음을 삼키며 아이템을 내렸다. 그러고는 마이스터를 찾았다. 비록 반 박자 뒤에 제가 용사 곁으로 보냈다는 걸 기억했지만 말이다.
“쯧.”
그는 전령을 보내기 위해 손짓을 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가 직접 가야겠다.
“나는 다른 곳을 보고 오겠다. 부탁한다!”
“예!”
그는 해당 구역 지휘관의 어깨를 쳐 준 후 호위로 달고 다니는 기사를 이끌고 성벽 위를 달렸다.
“겁먹지 마라! 우리에겐 신의 사자가 있다!”
“우린 지금껏 바다와 싸워 왔다! 이번에도 이길 수 있다!”
“공포에게 몸을 내주지 마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살 수 있는 가능성마저 지운다!”
“당장 앞의 적에게 집중해라! 너희의 살길은 내가 터 줄 것이다, 반드시!”
이동하는 내내 병사들을 격려한 건 덤이었다. 그의 다리가 금빛 막이 휘감은 성벽 쪽에 거진 다다랐다.
“성주님, 마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 성벽을 기어오른 전령이 따라붙으며 외쳤다. 성주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냐.”
“대부분의 마법사는 시민들의 대피를 도우며 같이 피난하되, 그나마 전투가 가능한 인력은 이쪽으로 보내겠다 하십니다. 다만 청산호 대현자님께선 중상을 입으셔서 본인의 원조는 기대하시지 말라는 전언이…….”
“뭐?!”
성주는 반사적으로 언성을 올렸다가, 치열한 전장의 소리가 그것을 겨우 묻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목소리를 죽였다.
“…대현자의 상태는?”
“그건 전달 사항에 없어서… 그, 대신 더 중요한 사항을 말하셨습니다. 뒤쪽에서 나타난 저 악마… 무언가를 강림시키는 의식을─”
“저 거인을 소환한 악마, 아무래도 마역을 강림시키려는 것 같아요.”
펄럭! 하는 옷자락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 건 그때였다.
상처로 가득한 거구의 슬렌드족이 수십 미터를 날아올라 성가퀴를 밟았다. 방금까지 화재 현장에 있었던 건지 재와 먼지, 화상 자국으로 뒤덮인 건 덤이었다.
푸르륵. 뒤쪽에선 어렴풋하게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콰직!
“보다 정확히는, 다른 곳에 존재하는 공간을 이곳으로 불러내는 의식을 치르는 듯했어요. 마역이라 한 건 농밀한 마기로 가득 차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고.”
그녀는 병사도 아니면서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창을 휘둘렀다. 정확한 공격에 막 성벽 위로 올라오려던 전사장 머맨이 즉사했다.
보니까 팔 한쪽과 다리 한쪽을 못 쓰는 것 같은데, 참 놀라운 능력이었다. 이쯤 되면 마음대로 창을 가져다 쓴 것도 용납할 수 있다.
“마역을 강림시킨다니, 그런 게…….”
“글쎄요. 그렇지만 녀석이 스스로를 탐욕의 좌 판데모니엄이라 소개한 건 제법 고려할 만한 일이겠지요.”
오랜 세월을 거쳐 굳은 나무 수액의 빛깔이 색바랜 속눈썹 사이에서 깜빡였다.
희미하게 진 주름은 그녀의 나이를 더욱 가늠하기 힘들게 만든다.
“대악마……!”
“악마기사는 강하지만 상대는 만반의 준비를 다한 것으로 보여요. 이곳을 빠르게 정리하고 그를 도우러 가는 것이 현명한 행위겠죠.”
성주는 그녀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들을 미리 대피시키길 잘했군.” 그사이에 드는 생각은 고작 그런 것이다.
앞에는 정체 모를 거대한 짐승에 뒤에는 대악마. 답이 없다.
“그보다 자네는… 아니, 병동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걸을 수는 있나?”
“걱정 마세요, 다리 한짝으로 걷는 건 익숙하니까. 더불어 제가 누군지 묻고 싶었던 거라면, 저는 악마기사의 동행이고 용사의 일행이에요. 방금 말한 사실들은 제가 그것과 싸워 봐서 알게 된 거고요.”
“싸웠다고?”
“청산호였나… 그 마법사가 호위 하나만 달랑 데리고 악마계약자와 다투는데, 아무리 봐도 질 것 같아서 개입 좀 했어요. 나중에 물어보도록 해요.”
청산호. 기함을 토하려던 성주는 간신히 입을 막았다. 그러곤 상대의 말에 겨우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이곳에 없는 이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비록 형편없이 당해 버려서 악마기사에게 맡기고 올 수밖에 없었지만… 악마기사도 그 악마와 상성이 좋은 편은 아닐 거라 생각해요. 용사님이 가는 게 제일 맞을 겁니다.”
그사이 계약자 어쩌고, 계약자 사살하려니 악마가 등장 어쩌고 하던 이가 상성이 안 좋아서 맡기고 왔단 말로 말을 마쳤다.
짜임새가 빡빡하진 않을지언정 말이 안 되는 내용 같진 않았다. 입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부상이 특히 그러했다.
결정적으로 용사의 일행이라면 용사가 알아볼 테고.
하여 그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뒤, 목소리가 닿을 거리의 용사를 불렀다.
용사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도 같이 하고 있었으므로, 겸사겸사였다. 생초면인 사이에도 사뭇 걱정될 만큼 상대의 부상은 컸다.
“마이스터! 용사님!”
“뭐예요.”
“성주님? 앗, 베르세르크! 몸이……!”
“…베르세르크가 아니에요.”
“아, 웨폰마스터셨습니까! 그보다 몸이… 어서 치료하겠습니다!”
“엥, 웨폰마스터 나리 오셨습니까요?”
“고마워요.”
와중에 백금발의 전사는 용사의 동료가 맞았다. 하면 그녀가 한 말도 전부 진실일 텐데, 그럼 자연히 청산호도…….
“마이스터! 아무리 생각해도 저 거북이가 악마든 아니든 우리에게 호의적일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실패작’으로 타격을 주는 건 가능할 것 같나?”
성주는 다른 곳에 흐르려던 생각을 다잡았다. 또한 갈음하듯 그가 이곳에 온 이유를 밝혔다.
퍼억! 이 순간에도 각자의 손은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다.
“거북이?”
“직접 봐라!”
그는 관찰 아이템을 마이스터에게 던져 주었다. 안경을 벗은 이가 다른 손으론 염기탄을 던지며 관찰 아이템을 눈가에 대었다.
“…일단 확답은 못 해요. 저 거북이의 등판이 얼마나 딱딱한지도 모르고, 위력 확인도 최소한만 된 게 ‘실패작’이잖아요.”
“통한다, 안 통한다 가늠조차도 되지 않는 건가?”
“…강철은 관통한 전적이 있으니 그 정도만 된다면 피해는 입힐 수 있겠죠.”
좋아, 그거면 됐다.
성주는 마이스터에게 명령을 내렸다.
“준비해 놔. 판단이 내려지는 즉시 발포할 수 있도록.”
“사람 좀 붙여 줘요.”
“원하는 대로 데려가.”
“그리고 설치 공간 좀 비워 놔야 해요. 설치하는 데 시간 걸리니까 그것도 고려해야 하는데…….”
“다 해 줄 테니까 너는 진행만 해!”
“네.”
대명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아래로 우다다 내려갔다. “자네도 따라가게. 나라고 생각하고 보호해!” 성주는 민들레 홀씨 같은 이에게 서둘러 제 호위를 따라붙였다.
“저, 성주님…….”
그쯤 되어 잠자코 있던 용사가 반응을 보였다. 다친 자들을 치료하고 올라오는 머맨들을 밀어낸 인퀴지터가 그에게 살풋 시선을 주었다.
잘된 일이었다. 마이스터를 보조하려면 용사의 협조가 필요했다.
성주의 입이 빠르게 열렸다.
“용사님, 저희에게 저런 거대 괴수를 공격할─”
콰앙!
그러던 차, 눈가가 잠시 밝아진다 싶더니만 곧이어 천둥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번개와 뇌성의 차이가 얼마 없는 걸로 보아, 제법 가까운 곳에서 벼락이 친 듯했다.
“……?”
“저긴…….”
그러나 그 벼락이 친 곳이 하필이면 불의 거인이 있는 땅이라.
악마기사가 싸우는 장소에, 악마가 그와 대적하는 공간에 하필이면 낙뢰가 친 게… 과연 우연일까?
“악마기사…….”
꽈르르릉!
“……!”
또다시 벼락이 쳤다. 아까와 거의 동일한 자리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기이한 현상이기도 하다.
하여 성벽 위에 있던 자들은 본능적으로 가슴 한편이 선득해짐을 느꼈다.
두 눈으로 진실을 목도하기 전까진 씻어 낼 수 없는, 그러나 보러 갈 수 없는 상황이기에 오직 믿음만을 품는 것이 다인 불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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