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삶은 잔인하고 (6)
파도치는 청산호의 호위는 마탑으로 달려가던 도중, 하늘로 올라가는 하얀색 신호를 보았다.
긴급 상황 시, 도시 전체에 내리는 대피령이었다.
거기에 서·남쪽 성문 쪽에서 하늘을 향해 켠 탐조등이란.
“악마에 대한 보고가 들어가긴 했나 본데…….”
사광기는 이쪽으로 대피하란 의미이니, 서·남쪽만 켜졌다는 건 북쪽성문을 이용하지 말란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가 아까까지 싸웠던 자는 북쪽 성문 근처 창고 지대에 있다. 결국 저 사광기는 북쪽으로 대피하다가 싸움에 휘말리지 말란 상부의 배려인 셈이다.
남쪽에 켜진 탐조등의 수가 유독 많은 건 남쪽으로 대피하는 게 더 안전하단 뜻이고.
“…대체 얼마나 위기인 거야.”
다만… 그래. 호위는 이렇게 자세한 안내가 내려질수록 오히려 불안해졌다. 상부가 저 악마에 대한 정보를 벌써 얻은 것도 그렇고, 대피령 자체도 그랬다.
베뮈르헨 역사상 대피령은 도시 형성 초기 때의 두 번을 빼면 이번이 처음이다. 저 벽이 지어진 이래,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다.
“당장 일어나세요!”
“일어나! 일어나!”
“피난해야 해!”
“짐 챙겨! 최소한만!”
군이 전투를 치를 때, 대신해서 사람들을 이끌 민간 치안대를 조직해 둬서인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대신 잘도 지시를 따라 주는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체 무슨 일이야?”
“대피령이 내려졌습니다! 남쪽 혹은 서쪽으로 대피하세요!”
“북쪽은?”
“북쪽은 가면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북쪽은 안 됩니다!!”
호위는 하나둘씩 대피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고 있던 청산호를 고쳐 안았다.
대피령이 내려질 만큼 위험한 상황인 건 알았으나, 사람들이 다 대피하기 전까지는 제발 큰 문제가 안 생겼으면 좋겠다.
더없이 절실하고 약소한 바람이었다.
* * *
[나는 탐욕 또는 인색의 좌, 판데모니엄. 그런 내게 시간 끌기를 당당히 선언한다라. 우습네. 한번 해 봐.]
판데모니엄의 말에 그녀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달려드는 붉은 물을 피해 돌바닥을 박찼다.
마치 파도처럼 밀려온 그것이 그녀가 있던 자리를 덮쳐 왔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조금만 늦었어도 휘말렸을 것이다.
1초만 줘도 10m는 넘게 퍼질 것 같다.
그러나 그 재빠름이 그녀를 당황케 했느냐면, 그렇진 않았다.
그녀는 이것과 비슷한 것을 영관 너머, 전사들조차 가지 않는 얼음의 땅에서 봤었다. 비록 그것은 굉장히 느려서, 그다지 흐르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고향의 사람들이 판데모니엄의 붉은 물을 봤다면 그것을 결코 ‘흐르는 불’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두 종류인가…….”
각설하고 판데모니엄이 쓰는 것은 묵직하니 느리게 흐르는 것과 물처럼 가볍고 찰랑거리며 빠르게 흐르는 것, 이 두 가지였다.
또한 전자는 특정한 형태를 잡으며 그녀를 공격할 수 있고 후자는 형태를 갖추지 못하되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
그녀는 그중 경계해야 할 것은 후자라 생각하며 나무 막대를 휘둘렀다.
막대기가 아슬아슬하게 부러지는 걸 면할 만큼 거센 풍압이 일더니 용암을 밀어냈다. 빠른 쪽은 제법 가벼워 보이기에 혹시나 하며 해 본 것인데, 정말 된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알아낸 사실을 토대로 붉은 물을 쳐 내도 보았다.
촤악!
바닥을 긁으며 나아간 막대기가 흐르는 불을 밀어 판데모니엄에게로 날려 버렸다.
본인의 힘에도 타격을 받는가 싶어서 해 본 일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붉은 물은 판데모니엄의 옷자락에 알아서 스며들었다. 효용 있어 보이진 않았다.
화륵!
더불어 나무 막대기에 불이 붙었다. 돌은 녹이지 못했으면서 나무는 태워 버리는 것이다.
이건 고향에서 봤던 것과 비슷했다. 그곳의 흐르는 불도 바위는 녹이지 못하되 나무는 태웠으니까.
시험 삼아 담가 봤던 무기도 그랬다. 철로 이뤄진 것은 달구기만 했고 나무로 제작한 것은 재로 만들었다.
“무기를 마련해 올 걸 그랬나.”
그렇다면 저것도 철은 아마 못 녹일 터. 그녀는 또 한 번 덮쳐 오는 붉은 물을 두고, 또한 악마기사와의 싸움으로 부서진 묵색 할버드를 떠올리며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상관은 없지.”
아쉬움만 느꼈다. 연연하진 않았다.
스승의 것이던 할버드는 그녀가 스승을 살해한 이래 이십 년 넘도록 그녀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그날에 묻은 피 하나를 떠올리거든 그것은 언젠가 부서져야만 했다.
그녀의 발이 돌을 쳐 내고 건물 위에 올라 지붕의 뼈대를 구성하던 나무 기둥을 쥐었다.
힘을 주느라 부푼 근육이 더욱 도드라지자, 거대한 기둥이 그대로 뜯겨져 나왔다.
휘익.
심지어 악마를 정확히 노리며 그대로 던져졌다. 쇄도하는 나무 기둥에 얼굴 없는 악마가 귀를 느슨히 세웠다. 마치 샐쭉 웃는 양.
[깔짝이는 게 다라니, 인간이란.]
판데모니엄은 검붉은 물을 꺼내 나무 기둥을 붙잡았다. 움직임이 느릴지언정 점성이 있는 액체는 나무를 손쉽게 막아 냈다.
휘익!
그러나 하나만으로 그칠 이유가 그녀에게 있는가? 절대로 아니.
그녀는 나무 기둥을 뜯고 돌을 빼내 마구 던졌다.
접근하면 저 뜨거운 액체에 화상을 입을 테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언가 약점이 드러나기 전까진 이렇게라도 상대를 알아봐야 했다.
툭, 툭, 툭
그녀가 던진 많은 것이 검붉은 물에 막히고, 묽은 액체가 골목을 메우려 들었다. 수로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악마가 불러낸 액체가 수로에 고이는 걸 보고, 아직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악마를 다시 보았다.
저건 여유일까, 움직여선 안 될 이유가 있는 걸까.
지금 그녀를 대하는 것도 그렇다. 저번처럼 강대한 거인을 불러낸다면 그녀를 확실하게 죽이진 못해도, 지금보다 더한 압박은 줄 수 있을 터였다.
한데 녀석은 아직도 힘을 쓸 의향이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나와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군요.”
[네가 분노의 그릇도 아니고, 진심을 다할 가치가 있을 리 없잖아.]
강자의 인내는 무언가의 증거다. 그것의 선함이나…….
[그냥 기회 줄 때 돌아가는 건 어때? 난 네가 좀 마음에 들거든. 순수하고 선명한 욕망은 또 오랜만이라.]
그것의 꿍꿍이속이나.
지붕 위에 선 그녀의 금안이 사냥감을 찾는 매처럼 지상을 훑었다. 판데모니엄의 말 따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악마가 논하는 자비를 신뢰하느니 악마기사의 더러운 성격이 연기라는 쪽을 믿겠다.
“아. 그래.”
실제로도 봐라.
“의식이 아직 진행 중이었던 거군요?”
기회 운운하는 말 아래에는 함정이 그득그득 존재감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글쎄.]
지금껏 그녀를 공격해 온 붉은 물은 전부 판데모니엄에게서 새어 나왔다. 주변으로 흩어지는 것도 그렇다.
하여 그녀는 의식 저지가 이미 늦은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악마가 나왔던 건물에선 여전히 의식이 거행 중이었다.
판데모니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줄 알았던 붉은 물이, 사실 건물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과 섞여 있는 것부터가 그렇다.
[안다고 막을 수 있을까?]
의식은 저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시도는 해 볼 수 있겠죠.”
그녀는 붉은 물에 덮이듯 하며 불타고 있는 건물을 보았다.
마법사도 아니고 악마기사처럼 넓은 구역을 한 번에 자를 수도 없는 그녀가 상대하긴 확실히 어렵긴 하다.
하물며 상대는 그녀보다 더 강한 자이니, 보통이라면 방법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고민 중이야?”
[……?]
“나는 준비되었는데.”
상대가 그녀를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이 없다는 조건하에, 온전한 ‘그녀’라면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재촉했다.
“…그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수십 년을 지속된 고집은 너무도 단단해서, 쉬이 흔들리는 법이 없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함에도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녀는 기둥을 또 한 번 뜯어 내, 그것들을 맹렬한 기세로 던졌다.
악마의 본체를 노리지는 않았기에 붉은 물들이 그것을 막아서는 일은 없었다.
[……?]
몇 개의 기둥이 흐르는 돌 사이에 수직으로 꽂혀, 불타기 시작했다. 판데모니엄은 이것의 의도를 아직 눈치 못 챘는지 가만히 서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대악마로 추정되는 만큼 강하기야 강하나, 이런 싸움에는 익숙지 않다 이거다.
하지만 몰라 줄수록 그녀에겐 좋다.
그녀의 발이 땅에 박아 둔 말뚝 쪽으로 뛰어내렸다. 치열한 열기에 벌써 무너지고 있는 말뚝은 잠깐만큼은 그녀의 발판이 되어 주었다.
[너!]
그래도 단번에 의도를 짚어 낸 걸 보면 아주 멍청하진 않은 악마다.
그녀는 말뚝을 박차, 건물의 무너진 벽면을 밟았다. 그 안쪽은 타오르는 상자들로 가득했으나, 못 밟을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몸이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매캐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
더불어 벽 너머에 쌓여 있는 상자 더미를 밟자, 뜨끈한 열기에 몸에 두른 천이 오그라들며 피부에 들러붙었다. 현재 진행형으로 상자 무더기가 불타고 있는 상황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에 차마 신경 쓸 수 없었다. 앞의 전경이 생각했던 것과 사뭇 다른 까닭이다.
“이건…….”
건물 내에 쌓인 수백 개의 상자는 실시간으로 불타며 쇳물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쇳물은 끝없이 판데모니엄에게로 모여들었으니.
상자가 타고 남은 자리에는 덧칠되듯 다른 것이 새겨졌다.
검은 돌로 쌓은 내벽과 바닥에 깔린 버건디색 카펫, 드문드문 벽에 장식된 금촛대, 곳곳에 배치된 고상한 조각상과 그림.
마치 고풍스럽고 오래된 저택을 연상시키는 풍경이 새롭게 떠올랐단 말이다.
하나 그 고풍스러움은 그 속에서 강렬히 풍겨 오는 마기로 인해 음울함과 사악함으로 와닿는 감상을 변질시킨다.
무지한 그녀조차 ‘있어선 안 될 세계’임을 깨달을 정도였다.
[망치게 할 것 같으니?]
상상치도 못한 광경에 조금 당황했을까. 그녀는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당혹감을 지우고 행동에 나섰다.
감정에 휘둘리는 자는 전사의 자격이 없으니 당연했다.
다만 그녀는 풍경이 다른 세상에 의식 제단이 있는 걸 보며 보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역시 안쪽이 약점이었다는 양, 판데모니엄도 그녀를 따라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웅!
아직까진 버티고 있으나, 불에 갉아먹히고 있는 대들보가 아슬아슬한 소리를 냈다.
함에도 그녀는 대들보 위를 내달렸다. 그것을 악마가 바짝 따라붙었다. 아니, 그것이 좀더 빨랐다.
그을음 자국을 남기며 그녀의 앞으로 내질러 온 것이 세 쌍의 손을 펼쳤다.
촤악! 바닥에 있던 붉은 물이 치솟아 오르며 시야를 가렸다. 결코 경계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겠단 태도다.
[놀이는 끝났어.]
그럴수록 넘고 싶어진단 걸 모르나? 그녀는 생긋 웃으며 여유를 갖추고자 했다.
촤아악!
그러나 얕잡아 보는 걸 끝낸 악마의 공격은 제법 매서운가 했다.
그녀는 솟구치는 몇 개의 촉수─붉은 물을 길게 뽑아내 만든─를 보며 재빨리 회피 기동을 했다.
하나 판데모니엄의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촉수는 그녀를 노림과 동시에 대들보를 잘라 냈고, 몇 개의 촉수는 처음부터 기둥을 노렸다.
[죽으렴.]
심지어 판데모니엄 본인까지 전투에 나섰다.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어깨와 가슴을 찢고 옆구리를 꿰뚫었다.
그 순간에도 몸을 뒤틀며 판데모니엄을 역공한 판단 덕에 뼈가 부러지고 심장이 짓이겨지진 않았으나 근육이 익고 피부가 너덜너덜해졌다.
이제 이쪽 팔은 못 쓸 것이다.
치이익.
공격한 손도 처지가 비슷했다.
판데모니엄의 뱃가죽을 후려침으로써 밀어낸 건 좋은데, 그 대가로 손바닥 부분에 화상이 새겨졌다.
쿠웅.
이 순간에도 보는 기둥이 잘려 나감에 따라 무너지며 기울어지는 중이다.
그녀는 새삼 상대와의 격차를 깨닫고 의식 저지란 부가 목적은 포기하기로 했다.
상대가 방심하는 걸 그만둔 이상, 그 목적을 노리는 건 오만이었다.
촥! 물러나는 그녀의 다리를 촉수 하나가 스치자 그 한 번으로 옷자락과 살갗이 타들어 갔다.
퍽, 퍼억!
판데모니엄 본체도 그랬다. 상대의 외피가 노란 쇳물로 이뤄져 있다는 건 참으로 거지 같은 일이었다.
공격을 해도 방어를 해도 일방적으로 이쪽만 당한다. 그녀는 그녀 위로 떨어지는 기둥을 걷어차 판데모니엄에게 날려 버린 후, 다음 보로 뛰었다.
쿠구구구궁.
이런 상황에 건물 바닥에선 붉은 거인이 일어서기 시작했으니.
밀도감 있는 불과 암석의 거인은 보를 들어 올리며 건물의 지붕에 머리를 대었다. 그녀가 막 착지했던 가장 위쪽의 보도 거인에 의해 타들어 가며 중심부가 재가 되어 무너지는 중이다.
탁!
하여 그녀는 천장을 박살 내며 바깥으로 탈출했다. 타닥타닥. 불타고 있던 천장이 그녀를 괴롭혔다. 판데모니엄의 마지막 공격이 그녀의 종아리 한쪽을 꿰뚫은 건 덤이었다.
무기만 있었어도! 저도 모르게 한탄이 나왔다.
히잉!
그때 멀리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의 기척이 다가왔다. 강대한 마력과 정돈된 호흡.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악마기사!”
그녀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상대가 진심을 드러내자마자 당하기만 한 게 굴욕적이고, 그래도 목표에 성공한 건 다행이다 싶어서였다.
그렇지만 역시 분하다.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기만 한 건 너무도 분해.
그러니… 제발 고집은 그만두고 싶어. 그렇지 않아?
“안쪽에 의식 제단이 있어요! 무언갈 부르는 것 같으니 저지해야 합니다!”
그녀는 무력감에 분을 짓이기면서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위해 지붕으로부터 뛰어내렸다.
판데모니엄은 더 이상 공격할 의향이 없는지, 더는 들어오는 방해가 없다.
공중으로 뜬 몸이 다가오는 기척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확인했다.”
단단히 붙잡힌 손과 손이 힘을 주며 상대를 끌어당기고 서로를 밀었다. 자리가 뒤바뀌었다.
“말과 함께 성벽으로 가라.”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해요.”
그녀의 몸은 용암이 아직 없는 대지로, 악마기사의 몸은 건물 안쪽으로 던져졌다. 새까만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서걱!
까만 검격이 거대한 거인을 베어 넘겼다.
쾅!
까만 마력을 나선으로 방출하며 휘몰아치는 기술. 개발할 땐 쓸모가 없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쏠쏠하게 쓰인다.
나는 용암을 갈아 사방으로 튕겨 내는 것으로 서 있을 자리를 마련해 낸 후 그런 평가를 내렸다.
[드디어 왔구나.]
그러나 서 있을 자리를 만들 수 있으면 뭐 하나. 베고 싶은 건 제대로 베지 못했는데.
나는 용암의 거인이 내 검격을 전부 막아 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잘렸으나 액체라는 특징을 이용해 바로 수복한 게 결코 아니었다. 그냥 못 벴다. 그뿐이다.
아까부터 미칠 듯이 간지러운 오른팔이 이제는 욱신거리기까지 했다. 재로 텁텁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분노.]
쾅!
연이어 거인의 손이 내가 있던 자리를 내려쳤다.
나는 다급히 몸을 뒤로 뺐다. 용암이 주변에 그득그득해서 조금 곤란하긴 했으나, 건물이 무너지고 있다는 게 오히려 호재였다.
나는 쌓이는 잔재를 밟고 뒤로 물러났다. 불꽃이 새어 나오는 파편은 제법 뜨거웠으나 발이 탄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베르세르크… 아니, 웨폰마스터인가? 굉장히 오랜만에 본 그녀는 프레드릭을 데리고 대피한 건지 기척이 멀어지기만 한다.
같이 싸우려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본인도 그 몸으론 어렵다는 걸 아나 보다. 좋다.
[너를 위해 준비한 판이야, 마음에 들까?]
하면 이제 궁리할 건 단 하나다.
어떻게 하면 저 너머에 있다는 의식 제단을 박살 낼 수 있을까. 마력을 더 담아서 벨까? 그렇지만 얼굴 없는 놈이 가만히 있을 리 없는데. 거인이 좀 굼뜬 것 같으니 돌아가서 베는 게 낫진 않나? 마력나선으로 그냥 강행돌파 해?
[하, 하긴. 넌 진짜 분노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나는 용암의 거인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용암 베일의 악마를 관찰했다. 뿔인 줄 알았던 세모꼴의 귀들이 날개처럼 펼쳐졌다.
[기대해! 네놈의 영혼을 박제할 수 있는 보석을 만들어 뒀으니!]
용암거인이 움직임과 동시에 허공으로부터 유성우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물론 먼저 떠오른 게 유성우지, 자세히 따지면 화산탄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일단 내부에 용암을 품고 날아오니까.
‘돈 없인 뭣도 못 하는 새끼가…….’
나는 그중 두 개를 한 번 베어 보고, 베고 남은 덩어리조차 위협적으로 바닥에 내리꽂히는 걸 확인한 후 회피로 완전히 방법을 굳혔다.
용암거인이 움직이는 것도 문제였다.
형체를 유지하기 위함인지 점성 높은 용암으로 구성된 녀석이라 굼뜨긴 꿈떴지만… 저런 건 한 방 맞으면 훅 간다.
겉표면이 용암이라 밟을 수도 없다는 점에서 더 악질이다.
쾅, 콰앙, 쾅!!
결국 나는 유성을 피해 뒤로 점프하고, 용암거인의 주먹을 피해 옆으로 물러났다가 몰려오는 용암에 또다시 뒷걸음질했다.
너무 물러나면 거리를 잡기 힘드니 건물을 밟아서라도 돌아가 보려 했으나, 그럴 때면 내가 갈 곳에 화산탄이 내리꽂혔다.
심지어 화산탄만 꽂히면 몰라, 1초 뒤 폭발하더니 용암을 퐁퐁 흘리기까지 했다.
사라지지 않는 장판을 남발하다니, 정말 악마다운 악랄함이었다.
서걱!
[미안하지만, 공격이 너무 잘 보여.]
와중에 한두 번씩 날려 본 참격은 통하지도 않는다. 나는 용암 사이에 서서 공격도 하기 힘든 악마를 보며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렸다.
마력도 오늘따라 조절이 더 힘들어서 신경이 배는 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준비는 좀 덜할 걸 그랬나?]
아, 제발. 이쯤 되면 발판 정돈 달라고. 그놈의 모비호도 랜덤 발판은 줬어! 공중 전투도 인퀴지터가 발판 만들어 줬고!
근데 이건 뭐야! 건물이 있다고 발판 생략이냐?! 건물은 거인이 죄다 무너트려서 용암으로 잠식시키고 있는 주제에!
나는 후끈한 공기를 들이켜며 이를 갈았다. 이럴 거면 마탑 쪽 지원은 받을 걸 그랬다. 진짜 인생 염ㅂ… 염장이 너무 지나치네.
[왜 그래?]
요즘 욕이 는 것 같다며 나는 스스로 검열을 행한 후, 숨을 크게 뱉었다.
[꼭 건드릴 자신도 없는 것처럼.]
담배 지랄맞게 당기네!
‘…저 빌어 처먹을 놈을 죽여!’
내 몸 표면에 마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