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삶은 잔인하고 (5)
인퀴지터는 망설임 없이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죄책감에 고개를 수그렸다. 도와줄 수도 없으면서 가장 위험한 곳에 홀로 보내 버렸다는 죄책감이었다.
어쩌면 그가 제 몸을 돌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사지로 내몰았다는 마음일 수도 있었다. 혹은 유독 불안함을 표하는 그녀의 감각 때문일 수도 있고.
“집중해요.”
서걱!
한데 그러던 와중 창질과 활질을 번갈아 가며 하던 뺀질이가 한마디 했다. 그녀가 어지간히 싸움에 몰두하지 못하는 게 보였나 보다.
“…알았다.”
“그리고 이번 건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요.”
“……!”
저놈은 진짜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그녀가 잘 읽히는 것일까.
인퀴지터는 긴가민가하며 신성력을 방출했다. 벽에 붙어 있던 녀석들이 쭈욱 밀려났다.
저 멀리 다가오는 적이 더없이 강맹해 보이는 만큼 무리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놀고먹을 수만은 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함에도 의구심은 들어서, 그녀는 확신을 얻고자 물었다.
데스브링거가 건조한 얼굴로 질문에 응했다.
“현실이 그렇잖아요. 적이 그곳 한 곳에만 출몰한 것도 아니고, 댁 달리기가 빠른 것도 아닌데.”
“악마기사께서도 이번엔 말을 타고 가셨는데…….”
“무엇보다 악마기사는 이 자리에 맞지가 않아요.”
그래. 이번 일은 악마기사가 저곳에 반드시 가야 하는 게 아니라, 인퀴지터가 이곳에 남아야만 하기에 남는 사람인 악마기사가 간 것에 속한다.
말이 이어질수록 침이 꼴깍 넘어가는 그녀와 다르게, 데스브링거는 참으로 무심히 결론지었다.
“어째서……?”
“넓은 구역을 커버하는 데 유리한 사람을 고르라면 그건 댁이죠. 수많은 사람과 같이 싸워야 하는 전장에서 전력이 하락하지 않는 사람도 댁입니다.”
전투의 지속성이 더 뛰어난 사람, 전장이 어디든 제한되는 게 적은 사람, 나아가 무언갈 강화하고 치료하는 것으로 피해를 현저히 줄일 수 있는 사람도 인퀴지터다.
“뒤에 나타난 악마의 정체야 모르지만, 댁이 가는 것으로 줄일 수 있는 피해보단 여기 남아서 싸우는 동안 줄어들 피해가 더 많을 겁니다. 뭐, 저 거대한 걸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건 또 모르지만……. 혹시 모르죠, 안 죽여도 되는 녀석인지. 물론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겠지만.”
인퀴지터의 얼굴이 감격으로 울컥 물들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현실과 별개로 그녀의 죄책감은 여전히 잔존해 있다.
“그렇군…….”
“그리고 댁이 추천 안 했더라도 갈 양반 아닙니까. 적당히 넘겨요.”
“그래도 난… 그분께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기껏해야 전장으로 보내 드리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 서럽다.”
그녀는 거대한 금빛 막을 형성해, 성벽 앞 바다를 그대로 후려쳤다. 위로 뛰어오르던 악마들이 강제로 바다 아래에 침몰하고, 그 과정에서 꽤 많은 것이 사망했다. 가시에 찔리거나, 방해 없이 내려친 마법에 바싹 구워지는 식이었다.
“그건 나도 그래요.”
함에도 파도는 갈수록 더욱 거세졌다. 마치 성벽 위로 넘어 들 것처럼.
탕! 탕! 탕! 탕!
“……!”
“어깨랑 목이 없었으면 머리도 잊어버리고 다니겠어? 기껏 제공해 준 무기를 정비도 안 하고 방치해 두게?”
그리고 지금껏 쓰였던 마법 아이템보다 더욱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촤르르륵. 무언가가 돌아가는 쇳소리가 기기묘묘했다. 길쭉한 원기둥형 몸통을 가진 쇳덩이에서 나는 소리였다.
“뭐 해, 물리 마법 처음 봐?”
심지어 그것을 밟고 선 채 물 따르듯 자연스럽게 시비 거는 사람이란.
딱. 이로 무언가를 제거한 채 둥그런 무언가를 던진 이가 본인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척. 이어 세워지는 건 중지다.
치이이익!
“뒈져 버려라, 생선 새끼들.”
둥그런 무언가에 얻어맞은 머맨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
“…….”
…저거, 그들이 알기로 간부급 병사들이 드물게, 아주 조심스럽게 쓰던 물건이 아니었나. 내용물이 몸에 닿으면 피부가 녹는다고 정말 조심조심해서 던지던데. 결코 저렇게 터프하게 쓰지 않던데.
상상치도 못한 모습에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렸다.
* * *
콰앙!
청산호의 호위는 갑작스럽게 끼어든 존재에 눈을 둥그러니 떴다.
“당신은……!”
반사적으로 상대의 정체를 묻는 입과 다르게, 손은 서둘러 쓰러진 청산호를 수습한다. 키만 좀 크지 깡말라서 막대기 같은 청산호가 두 손에 안아 올려졌다.
“가세요.”
그동안 끼어든 이는 하나뿐인 귀고리를 짤랑거렸다. 너저분하게 풀어 헤친 머리카락은 빛 잃은 금의 색이다.
“보호하며 싸울 생각 없으니.”
“…누군진 모르겠지만, 안쪽에서 악마가 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반드시 저지해야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그녀는 숨을 크게 쉬고 뱉었다. 쓸데없는 상처를 막기 위해 혹은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손과 팔에 감싼 붕대를 다시금 조였다.
“저 옷은 찢어지거나 불타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참고하십시오……!”
와중에 추가된 정보는 앞으로의 싸움법을 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녀는 그것참 기묘한 옷이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대충 악마기사가 입고 있는 옷처럼 신기한 물건이겠거니 싶었다.
콰앙!
“넌 또 뭐야.”
그사이 무너진 건물 파편을 밀어내며 비서가 제자리에 복귀했다.
이 한 방으로 어디까지 밀려났던 것인지, 비서의 뒤편으로 보이는 공간에는 몇 개의 구멍이 더 있다. 돌 파편이 밀어낸 쪽으로 우르르 넘어졌다.
“북쪽의 야만인?”
음. 저 소리를 듣기 싫어서 지금껏 안 입었던 거긴 한데… 그녀는 어떻게 입자마자 저 소리를 듣는가 하며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별로 알 바는 아니었다.
“지금은 당신을 죽일 사냥꾼으로 충분할 것 같네요.”
“과연 그럴까? 혓바닥만 길어선 이 땅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그녀의 발이 지익 끌리며 자리를 잡았다. 두꺼운 천이 펄럭였다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퍼버벙.
이어 새로운 신호탄이 하늘을 몇 번씩 수놓거든, 그녀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휘익! 그러다가 비서를 향하는 길목 중심에 갑자기 나타났다. 몸에 걸친 두꺼운 천 자락이 펄럭였다.
반응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닌지, 비서가 반의반 박자 늦게나마 손을 휘둘렀다. 거대한 손이 공기를 묵직하게 가르며 쏟아지는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다.
탁.
하나 적중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
그녀는 타이밍 맞게 땅을 박차고 손을 뛰어넘은 후, 발로 비서의 어깨를 밟았다. 그러곤 발뒤꿈치로 비서의 뒷목 부근을 후려쳤다.
찢어지거나 불타거나 하지 않는다곤 했으나, 그게 물리적 충격까지 전부 막아 내는 수준인지 아닌지는 알아야 하는 까닭이다.
“익!”
비서가 다급히 다른 손을 뒤로 뻗어 가드 했다.
하지만 옷에는 조금의 흔적도 남지 않을지언정, 후려친 순간 앞으로 비틀거리는 건 확인했다.
밀거나 당기거나 하는 힘은 들어가나 보군.
그녀는 앞으로 취해야 할 공격법을 정리했다. 어차피 맨손인 것, 베거나 찢는 공격 대신 타격과 관절기 위주로 가는 게 좋겠다.
그녀는 저편으로 뛰어내린 후 숨 돌릴 틈도 없이 뒤를 돌아 비서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저런 거대한 손은 살갗이 닿을 거리에선 대응이 어렵다는 걸 노린 행위였다.
비서의 매처럼 선명한 눈매가 일그러지더니 뿌리치듯 팔을 휘둘렀다. 덩치에 맞지 않게 납작 엎드린 그녀가 팔이 지나가기 무섭게 날아오르듯 뛰었다.
퍼억!
그녀의 무릎이 상대의 명치에 정확히 박혔다.
역시나 통했다. 보통 사람보단 덜한 반응을 보였을지언정, 분명 고통을 느낀 얼굴이었던 거다.
확신을 얻은 그녀는 다음으로 주먹을 움직였다. 검지손가락을 툭 튀어나오도록 해 뾰족한 충격이 가해지도록 한 주먹이다.
그러나 빗장뼈와 빗장뼈 사이, 목울대, 코를 후려치는 손에 묵직한 타격감 대신 다른 게 들어온다.
안면에 보호막이 순간적으로 형성된 탓이다.
물론 조건이 있는지 비서의 이어 커프형 귀고리의 보석 중 하나가 박살 났다.
콰앙!
비틀거리던 이가 부풀었던 팔을 줄이고 다리를 부풀려 대지를 내려찍었다. 수로 가장자리가 무너져 내리며 전방에 마기를 풀었다.
이건 악마기사가 종종 쓰던 수법이었지. 그녀는 피부 겉면에 새겨지는 가는 상처를 두고 뒷걸음질했다.
별개로 저 보호막의 발동 조건이 어떻게 되는 거지? 지속 시간은? 막는 것의 한계는? 귀고리의 보석이 부서지는 것과 연관성은?
사르륵.
비서의 발이 다시 돌아왔다. 귀에 걸린 귀고리를 손가락으로 만져 본 후에야 깨달은 자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싸움만 처하는 민족이란……!”
그렇게 말해 봐야 칭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녀는 거대한 손을 피해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며 발끝으로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차올렸다.
정확히 상대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간 돌멩이에, 비서가 뒤로 미끄러지며 손으로 쳐 냈다.
“이게……!”
그러나 고작 한 번만 해서야 섭하다.
그녀는 대여섯 번 돌멩이를 더 날린 후, 바로 뒤에 있던 건물에 손을 올렸다. 앞선 싸움으로 무너진 건물에는 마침 그녀가 쓸 만한 무기가 있었다.
“……!”
퍼억!
기둥으로 쓰이던, 지금은 무너져서 돌무더기 사이에 홀로 튀어나와 있던 나무가 무기처럼 휘둘렸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듯 비서가 눈을 찡그리며 막아 냈다. 콰직! 나무 기둥이 단번에 부서지고, 남은 기둥이 날아가 비서의 머리통을 노렸다.
“이게!”
그 역시 비서는 막았다. 보호구가 있어도 머리쪽으로 돌아오는 공격만은 반사적으로 막으려 드는 일반인의 행동이었다.
그럼 편하다. 그녀는 비서가 스스로의 손으로 제 시야를 막은 사이, 빠르게 접근해 돌려 차기를 가했다. 발뒤꿈치가 비서의 관자놀이를 쳤다.
쨍그랑.
이어 커프의 보석이 또 하나 깨졌다.
아무래도 머리 한정으로 가해진 충격에 보석을 대신 부담하고, 부담 가능한 한계치를 넘기면 깨지는 것 같은데… 아무튼 좌우 합쳐 4개 남았다.
“……!”
충격이 분산되는 게 아니라 무효화되는 건 싸움에 있어 상당히 다른 형상을 가져온다.
그걸 알기에 그녀는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상대가 보석이 깨진 걸 깨닫고 또다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알 바 아니었다.
그녀는 사냥법을 찾은 사냥꾼처럼 집요하게 상대의 머리를 노렸다. 그걸 상대가 알아채더라도 상관없었다.
“아아아악!”
죽이기 가장 쉬운 방법이 그거라서 노리는 것뿐이지, 죽이지 않고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은 참 많았다.
“약점만 보호하면 다인 줄 알았나 보죠?”
예컨대 상대의 손가락을 부러트리거나, 관절을 이용해 팔을 꺾거나, 돌로 발목을 내려찍어 뼈가 보이도록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녀는 머리만 좀 노려 주니 그곳만 노골적으로 방어한 이를 두고 순식간에 다른 부위를 무력화했다. 상대가 마기로 몸을 부풀려도 상관없었다.
관찰한바 상대는 하나의 부위만 강화할 수 있었고, 그녀는 그 정도 조건을 두고 충분히 사람의 팔다리를 부러트릴 수 있었다.
쨍그랑!
마지막 보석이 깨졌다.
“내가, 내가…….”
퍼억!
그녀의 인내도 깨졌다. 그녀는 단번에 상대를 눕히고 머리를 부수기 위해 발을 들어 올렸다.
콰앙!
고향에서 ‘흐르는 불’이라 부르는 붉은 물이 튀어나오며 그녀를 덮치려 들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테다.
그녀는 확인 사살 대신, 다음 전투를 위해 자기 보신 하는 걸 택했다.
[안 되지, 안 돼.]
그사이, 튀어나온 붉은 물이 비서의 몸뚱이를 휘감았다. “안……!” 짤막한 비명과 함께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의 비명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문지기 역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넌 항상 실망만 시키는구나. 뭐, 상관은 없지만.]
“죄, 죄송…….”
[그보다, 죽여도 되니? 되지?]
“아, 안……!”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본신의 힘을 허락받은 이상, 계약의 페널티 따위 아무 문제 없거든.]
붉은 물이 비서의 몸뚱이를 완전히 삼켜 그대로 녹여 버렸다.
[무엇보다, 네가 모비 딕의 진주를 빼돌리는 걸 내가 그냥 두고 봤을 리 없잖니. 탐낼 걸 탐내야지.]
그동안, 시체 몇 구가 너저분히 퍼져 있는 어느 건물로부터는 불길이 피어올랐다. 건물 전체를 불사르는 화마였다.
또한 입구에서는 금방이라도 검게 굳을 것처럼 밀도감이 있는 검붉은 덩어리가 새어 나왔느니. 붉은 물이 굳으면 딱 저짝이 되지 않을까 싶다.
[또 보는구나.]
참방.
뜨겁지도 않은지,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샤기 하나가 그 위로 걸어왔다. 아니다. 과연 샤기일까? 노랗게 달궈진 쇳물로 이뤄진 옷자락과 같은 재질의 귀, 꼬리를 가진 것도 과연 샤기라 볼 수 있나.
차라리 악마는 아닌가.
[복수전이라도 할 거니?]
그녀는 입술을 씰룩였다. 암, 모습이 달라졌어도 생각 한 번이면 저것의 정체 따윈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저것은 저번의 그 악마다. 그녀가 막지 못했고, 막을 수 없었던.
“아뇨.”
마음 같아선 복수전이란 말에 긍정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경계선에 서 있는 상황이었다. 베르세르크와 웨폰마스터, 두 개의 멍에 사이에서.
여전히.
“그렇지만 싸우긴 할 거예요.”
하므로 이것은 복수전이 될 수 없다. 복수전은 그녀가 두 개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오롯이 올바른 이름만을 남기게 됐을 때야 가능할 것이므로.
“복수전이 아니더라도 승패는 가를 수 있는 싸움이잖아요.”
그렇지만 이 싸움에 맥없이 물러나지도 않겠다.
[저번과 확실히 달라지긴 했나… 그래도 부족해. 너, 죽을걸?]
“걱정 마세요. 안 죽으니까.”
복수가 아니더라도 그녀가 이길 방법은 있었다.
“내 역할은 시간 끌기인 걸요.”
그래. 악마의 존재를 눈치 못 챘을 리 없는 그들이 오기만 한다면, 필히 그녀의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