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삶은 잔인하고 (4)
“안……!”
건너편의 사람들 얼굴이 세세하게 잘 보인다. 그러나…….
탓!
발 받침 하나만 있으면, 뭐. 떨어질 이유 없지.
쿠웅!
나는 무너지는 다리를 밟고 뛰었다. 거리가 그렇게까지 안 멀어서 그런가, 점프 한 번이면 충분히 성가퀴에 닿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입 벌린 얼굴 그대로 굳었다. 내가 멀쩡히 복귀한 게 그렇게 고까운가 싶었다.
“머맨이 올라온다!”
“집중해라. 이곳은 전장이다.”
별개로 싸움 아직 안 끝났거든요.
나는 포탑보단 안전하나, 치열하긴 더 치열한 성벽을 보며 그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바다 저편에선 정체 모를 거대한 것이 실시간으로 다가오는 중이고, 머맨들의 공격은 갈수록 매서워져 간다.
“빌어먹을!”
병사들이 머맨을 죽이면 죽일수록 더욱 그랬다. 죽인 머맨의 몸뚱이는 가시에 꽂히거나 그 틈을 메움으로써 다음에 오는 머맨들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 ‘다음에 오는 머맨’들이 처음에 몰아쳤던 녀석들보다 더 강한 정예병인 건 말할 것도 없다.
고기 발판과 더불어 점점 더 높아지는 파도를 이용해 머맨들이 계속해서 성벽에 매달렸다.
위험하다 싶을 즈음 마법사들이 마법을 토해 내고, 내가 저 앞쪽에서 마력창으로 10초마다 서른 마리씩 킬을 올리지 않았다면, 나아가 인퀴지터가 성벽을 가호하지 않았다면 진즉 뚫렸을 것이다.
아, 인퀴지터가 가끔 가다 유리창 청소하는 것처럼 금빛 막으로 쭈욱 밀어낸 것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저 넉백 스킬, 적의 숫자는 못 줄여도 거리는 넉넉히 벌려 준다는 점에서 은근히 든든해.
“구멍 뚫린다!”
그러다 잠깐. 저 거대한 것을 대비해 힘을 아끼려 한 것인지, 성주와의 상의하에 인퀴지터가 가호를 거둬들이자마자 성벽에 구멍이 났다.
꿀렁꿀렁 토해지는 산성액이 기어이 친 사고였다.
“기사! 기사!!”
다만 그게 내가 있던 구역이 아닌 다른 구역의 일이라. 내가 있던 구역은 내가 머맨을 하도 많이 죽여서 오히려 평온하다.
나는 그로 하여금 지원 가도 되나, 안 되나 눈치를 보았다.
“저쪽으로 가! 배치된 곳을 벗어났다는 건 내 재량으로 커버해 줄 테니까!”
그때 아까 일로 인해 존대에서 반말로 회귀한 병사가 외쳤다. 고작 말 한마디일 뿐이나, 최고의 어시스트였다.
탁!
나는 단숨에 구멍이 뚫린 쪽까지 점프했다.
“거창!”
“전사장이다……! 대형을 유지해라!”
캬악!
그런데 구멍 새로 들어온 녀석이 유독 눈에 띈다. 유족형 머맨이 무족형 머맨보다 우람한 편이긴 하나, 그중에서도 유달리 크고 색도 다른 탓이다.
“비켜라.”
“잠깐, 방해하면!”
대충 엘리트몹이라도 되나 보지.
나는 사방에서 압박하는 창으로 인해 쉬이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을 보며 검을 뽑았다. 캬악! 갑자기 끼어든 내게 머맨이 이를 드러냈다.
서걱!
그렇지만 네가 이를 드러내서 어쩔 건데. 강아지나 고양이도 아니고 하다못해 반려 거북이나 반려 뱀도 아닌, 생태계조차 파괴하는 유해 악마를 내가 봐주겠냐.
나는 데구르르 구르는 머리통을 무시하며 추가로 들어온 녀석에게 검을 겨눴다. 부드럽게 움직인 검의 끝으로부터 마력창이 형성되어 날아갔다.
캬악!
좋아, 관통! 이걸로 두 마리 킬 적립이다.
“존나 든든하네…….”
“더 온다!”
“구멍 막을 준비해!”
나는 구멍으로 기어들어 오는 녀석들을 계속해서 걷어차고 베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다급히 무언가를 가져와 구멍 근처에 뿌리고 쇠창살을 몇 개 박았다. 완벽하진 못해도 임시 땜질로는 제법 효용이 있어 보였다.
뭐,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이 성벽을 버리고 안쪽 성벽으로 튀어도 되긴 하겠지만.
“악마기사, 도움이 필요합니까!”
그러다 이쪽으로 달려오던 인퀴지터가 버럭 외쳤다.
“꺼져라.”
“예! 다른 곳을 도우러 가겠습니다!”
내 단답에 긍정킹이 호다닥 다른 곳을 지원하러 떠났다.
피유웅! 퍼펑!
그 순간, 내가 등지고 서 있던 도시로부터 신호탄이 올라왔다. 당장 앞의 상황에 집중하느라 소리를 듣지 못한 이들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무심코 돌렸다.
“악마가 출현했다고……?!”
손수 머맨들을 창으로 찌르며, 병사들을 독려하던 성주가 비명처럼 숨을 뱉었다. “저 정체 모를 것으로도 변수로는 충분한데, 난리 났군!” 그리 말하는 얼굴은 호쾌한 척을 하고 있다. 속은 말이 아닐 것이다.
“마기가…….”
인퀴지터도 바로 반응을 보였다. 얼굴이 무시무시해지는 게 도시 쪽에서 나타난 녀석도 보통이 아닌가 보다.
“당장 지원을 가야 한다. 저 정도면 대악마에 버금가는……!”
“뭐요, 시발? 검문을 어떻게 한 거야!”
데스브링거가 오랜만에 내가 하고픈 말을 대신 해 줬다. 그러게. 검문을 어떻게 한 거야.
대악마가 검문에 걸려서 못 들어온다고 생하면 그건 그것대로 우습긴 한데.
“바다에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일단 악마가 아니니, 차라리 저쪽에 제가……!”
콰앙!
“지원 요청!”
“이런!”
와중에 이쪽도 함부로 자리를 뜰 만한 상황─다가오는 게 악마가 아니란 건 지금 알았지만─이 못 된다. 성주에게 무어라 의견을 개진하려던 인퀴지터가 하는 수 없이 요청이 들어온 곳에 신성력을 뿜어 주었다.
나 역시 두 번째로 뚫린 곳을 향해 몰려오는 적 때문에 움직이기가 애매했다.
“성주님, 어떻게 할까요!”
“빌어먹을! 디트리히! 막스! 프란츠! 지원 요청을……!”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서 기사 셋을 뺀다? 이건 좀 악수지 않을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기사 셋이 남고, 내가 혼자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앞으로 성벽에 구멍이 여럿 나면 났지, 안 날 것 같진 않으니까.
아무렴 엘리트 머맨은 저들도 죽일 수 있다. 나보다 처리 속도가 늦을 뿐이지, 저들도 인당 구멍 하나는 커버할 수 있단 소리다. 총 세 명이니 각자 하나씩이면 동시에 세 개를 막는 셈이 될 테고.
그러니 이럴 땐 내가 가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내가 아무리 강해도, 나는 한 번에 구멍 세 개를 막을 능력이 없다.
“나를 보내라.”
“자넨…….”
해서 나는 주황색 머맨을 또 하나 죽인 후, 성주를 응시했다. 갑자기 끼어든 내 존재에 성주가 ‘이건 뭐지?’ 하는 눈을 했다.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내가 싸우는 모습을 못 봤나 보다. 내 킬 수를 안다면 저런 반응은 안 나올 텐데.
“실력에 자신 있는 건 알지만 어차피…….”
“아닙니다, 성주님. 그 모험가라면 혼자로도 충분할 겁니다!”
옆에 있던 디트리히가 나를 도와주었다. 행운이었다.
“기사 셋을 보내는 것보다, 그 하나를 보내는 게 더 나을 것이라 저는 자신합니다. 제 판단을 믿어 주십시오!”
“…디트리히?”
그녀는 올라온 머맨의 머리통을 걷어차고 검으로 정수리를 내려찍은 후 성주를 결연하게 보았다.
“성주님, 제… 판단으로도 그렇습니다. 도시에 나타난 악마의 정체는 확신할 수 없으나… 악마기사시라면 분명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실 겁니다. 그분은 대악마도 거진 홀로 사냥하신 분입니다.”
인퀴지터도 다소 죄책감이 어린 얼굴로 보증에 나섰다.
“더불어… 만일을 대비해 대피령 내릴 것을… 권유드립니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마기의 기세가 너무 강렬합니다.”
“…빌어먹을. 그 정도입니까.”
“어쩌면 대악마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악마라면… 악마기사가 아무리 강하셔도 싸움 도중 일어날 수 있는 피해까지 커버하긴 무리입니다.”
거기에 혹시 모를 대피 경고까지. 사람들이 휘말릴 걸 고려해 어떻게든 전장을 옮기려던 내겐 최고의 배려였다.
성주가 살짝 갈등하는 얼굴을 했다가, 여러 방향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결국 외쳤다.
“가능하겠나? 우리 쪽 지원이 없어도?!”
내가 그에 대고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당연한 것을 묻지 마라.”
컨셉은 악마를 상대로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좋아! 그럼 사람들을 서쪽이나 남쪽 성문을 통해서 대피시킬 테니 전장은 최대한 북쪽 성문 쪽에 고정해 주게! 지금 신호탄이 올라온 곳에서 최대한 벗어나지만 않으면 된다는 걸세!”
성주가 그에 울듯 웃듯 하며 내게 무언가를 던져 주었다. 아래쪽을 탁 치면 위로 쏘아지는 신호탄이었다.
“이것도, 사용법은 알고 있겠지? 모험가 길드나 마탑 쪽에서도 지원이 나가긴 하겠지만… 만에 하나 우리 쪽 지원까지 필요하다 싶으면─”
왜 이걸 주나 했더니,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한 보험이었나. 성주님이라 그런지 정말 철저하시네.
“지원은 필요 없다. 모험가 길드나 마탑 쪽도 마찬가지다. 와 봤자 개죽음만 당할 자들, 방해할 생각 말고 접근이나 삼가도록.”
그렇지만 썩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마탑 쪽은 그래도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모험가 길드는 죄다 근접직이잖아. 그리고 근접 직군은 내 수준으로 검기 뽑을 수 있는 게 아니면 별로 의미가 없다.
와 봤자 관중만 되거나 휘말려서 개죽음 당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그리고 마탑의 마법사들도 사실… 워낙 움직임이 굼떠서 좀 그렇다. 암, 내가 어그로 집중 스킬을 가진 것도, 그걸 토대로 마법사들에게로 어그로 튀는 걸 방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거기에 악마가 광역 스킬 한 번이라도 터트리면 마법사들 어째 떼죽음당할 각이고.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싸우느니 그냥 혼자 싸우고 만다.
“하지만…….”
“전해라. 정 돕고 싶거든, 소개疏開하는 게 날 돕는 것이 될 것이라고.”
“…일단 자네 의견은 전달하지. 그렇지만 신호탄 자체는 가져가게, 자존심 부리지 말고. 자네에게 대피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다 걸려 있으니까.”
뭐, 보험의 이유로 신호탄 가져가는 것 정도야. 나도 대타 대기 없는 솔플 레이드는 좀 불안했던 참이니 괜찮지.
나는 쓸 일 없을 듯한 신호탄을 챙겨 성벽을 떠났다.
“악마기사!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나리, 조심하셔야 합니다요!”
두 사람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등 언저리에서 두세 번 메아리쳤다.
* * *
파도치는 청산호는 침착한 얼굴로 깨진 이마를 닦았다.
피가 흥건히 묻어났으나 큰 감상은 없었다. 그저 ‘나중에 신관을 찾아가야겠군’ 수준의 생각이 다였지.
“살아 있나?”
“…아직 살아 있습니다.”
참 재수도 없지.
계약한 악마에 따라. 혹은 바친 제물의 양에 따라 악마계약자의 강함은 천차만별이라지만… 하필이면 그중 강한 축에 속하는 자와 맞대결을 하게 되다니.
“미리 유서를 써 두길 잘했군.”
“죽을 날 받아 둔 사람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저까지 죽을 것 같지 않습니까.”
청산호는 그로 인한 안타까움을 단 한마디로 정리했다. 호위가 단번에 딴죽을 걸었다.
“현실적으로 보도록, 우리가 살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명색이 대현자님이신데 이렇게 허무히 지시겠습니까?”
“네겐 안타까운 소식이겠지만, 나는 현존하는 대현자 중 전투 분야로는 가장 뒤떨어지는 사람이야.”
그러니 나약하게 죽어 버려도 이상할 건 없다며, 청산호는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농담을 했다. 쾅! 비서의 거대한 손이 그들을 덮쳤다.
“제발 피하세요!”
“내가 저걸 피할 수 있었으면 검사를 했겠지, 마법사를 했겠나?”
“그럼 입이라도 다무십시오! 열받으니까!”
“고용주에게 말하는 말본새가 별로군. 돌아가면 감봉이야.”
“감봉이어도 좋으니 제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십쇼.”
간발의 차로, 호위가 그를 낚아채어 뒤로 물러났다. 퍼엉! 청산호는 비서에게 냅다 폭발 물질을 던지는 것으로 그들의 후퇴를 도왔다.
말은 그렇게 해도 합은 좋았다.
“돈을 쏟아부은 값은 하네. 그렇지 않나요, 대현자님?”
비록 상대가 청산호의 주 고객 중 하나이며 그로 인해 굉장히 튼튼한 옷을 마련해… 그들의 공격이 하나도 안 먹히고 있지만 말이다.
“누가 만들었는데, 당연한 말을.”
“지금 자부심 가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우아한 프릴 셔츠와 다리 라인에 맞춰 제작된 롱스커트는 그의 역작 중 하나다. 그게 비록 적의 손에 있을지언정, 청산호는 저 작품의 완성도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비록 너무 잘 만들어져서 지금의 그를 고생시키고 있긴 하지만.
“대규모 마법으로 포격하지 않는 이상 저건 안 찢어져.”
“…제발, 그런 물건은 상대 봐 가며 파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마탑은 망해. 네 월급도 못 벌겠지.”
“하. 어쩔 수 없네요.”
암울한 상황을 웃어넘기기 위한 만담이 잠깐 지속된 사이, 비서가 건물을 부수며 그들에게 달려왔다.
이 주변은 민가도 아니거니와, 각자의 볼일로 와 있던 사람들도 소란을 듣고 대피한 상태라 인명 피해는 없었다.
콰앙!
물론 그들이 죽는다면 생길 것이다.
“……!”
청산호가 사용한 아이템이 상대의 발을 묶고, 그의 손에 전개한 마법이 막 펼쳐졌다.
서리 폭풍이 거리를 강타했다.
“진즉에 좀 쓰시지!”
“우웩.”
“으아악!”
마법 발동까지의 과정을 몇 개 생략했더니 마력이 내장을 뒤흔들었다.
이 부분을 생략하면 위력만 하락하고 시전자에겐 문제가 없는 것 아니었나? 청산호는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았다.
“의식을 멈출 수는 있을지 모르겠군.”
거의 완성되어 가는데… 청산호가 그리 말하려는 순간, 서리 폭풍으로 인한 얼음들이 화려하게 깨져 나갔다.
수풀에 숨어 있다가, 사냥감이 다가오자마자 뛰쳐나가는 짐승처럼 다가오는 것은 적이다.
“대현자님!”
이건 못 피하겠는데.
청산호의 냉정한 정신이 판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그의 생은 여기서 끝날 모양이다. 별 미련은 없었다.
“네 피를 시작으로 도시를 망가트리겠다……!”
아니, 연구랑 손자에 대한 미련은 조금 있나?
“그 아이가 연구를 완성하는 건 보고 싶었는데…….”
거대한 손에 처맞기도 전에 그의 의식이 끊겼다. 서리 폭풍에 대한 반동이었다.
콰앙!
다만 가물기 전 시야의 끝자락에, 새까만 가죽 바지가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