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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07화 (207/389)

207화 삶은 잔인하고 (2)

청산호는 야밤에 전해진 급보를 두고 일단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곤 종을 쳐, 마탑 모두에게 해당 소식을 알렸다.

해안 쪽 하늘이 오색 불꽃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무언가 터지는 소리도 났는데 설마 모르겠어? 하는 생각 회로는 절대로 안 된다.

당장 그만해도 시종이 달려와 소식을 전한 후에야 “그랬어?” 하고 상황을 깨달은 상황이니 더더욱 그렇다.

이 시간이면 마법사들은 자고 있거나(소수), 창가 하나 내다보지 못할 만큼 연구에 몰두하고 있거나(다수). 둘 중 하나뿐이다.

“피피야, 너는 마이스터를 데려와라.”

“네.”

“대현자님! 소집 명령이면……!”

“잘 왔다, 리암. 그렇지만 소리칠 필욘 없다. 평상시대로 움직여라. 단, 이번엔 규모가 더 크게 온다 하니 마법사는 더 데려가도록. 공격 마법을 쓸 줄 안다 싶으면 그냥 다 데려가.”

“예!”

보통의 마탑주라면 대규모 마법 준비를 위해서라도 당장 성으로 달려갈 것이나, 청산호는 달랐다.

본질을 보는 마법은 공격 마법과 거리가 멀고, 청산호의 장기는 전자지 후자가 아니었다.

알고 있는 수식의 개수라면 모를까, 공격 마법을 발동하는 것 한해서는 다른 마법사가 나았다.

요컨대 70 평생 뺄셈만 해 온 사람에게 덧셈을 시키느니, 40 평생 덧셈과 뺄셈을 같이 해 온 사람에게 덧셈을 시키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남은 마법사들은 마법 아이템 옮길 준비를 해라.”

그는 성이 보유하고 있을 특정 아이템의 재고를 계산하며, 먼저 옮겨야 할 것들을 정했다.

암. 마법 화살이나 폭발 마법이 새겨진 돌들도 좋지만 지금은 밤이다. 이때 우선해서 전달해야 할 건 시야를 밝힐 수 있는 것들이다.

“무슨 무기를 담당하면 되나요.”

그렇게 한참을 지휘하고 통솔했을까. 그의 손자가 드디어 고개를 내밀었다.

오는 길에 상황을 다 파악한 것인지, 인사는 생략하고 본론만 들이민 건 덤이다.

“네가 만든 그… 괴물 같은 것 있잖느냐.”

“많이 안 좋나 보네요. 그 실패작을 쓸 생각도 다 하고.”

“그것에 들어간 돈이 자그마치 억이다. 이때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하긴.”

그러나 이런 태도야말로 기껍도록 편하다.

청산호는 말이 잘 통해서 좋은 손자를 두고 손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차례로 읊었다.

대부분 정밀하고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장비를 옮기는 일이었다. 다 옮기거나 성에 급박한 일이 터졌을 경우 그곳에 남아 수리하는 일까지 더해서.

“그보다, 할아버지.”

“왜 그러냐.”

“상단에 뭐 시킨 거 있어요?”

“음?”

“오늘따라 뭘 많이 옮기기에.”

“딱히 주문한 건 없다.”

그러나 이게 이상한 일이냐면 글쎄. 상인들이 유난 떠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들의 호들갑이 이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무렴 머맨과 싸우는 날 중 물이 도시 안쪽까지 들어찰 때면 지하 창고 터졌단 소식은 꼭 하나씩 들려오지 않던가.

“요즘 물건이 많이 들어와서 그런 거겠지.”

“뭐, 그래요. 재료가 젖으면 가격이 떨어지긴 하지.”

건물이 무너지진 않아도 물이 샐 수는 있다. 사실 자주 샌다.

더불어 세상엔 상품이 젖어 버리면 가치가 하락하는 물건이 참으로 많은지라.

그렇다고 고층에 놓는다? 그건 불가능하다.

잦은 침수로 지반 붕괴의 위험이 있는 만큼, 베뮈르헨은 건물의 높이와 층당 놓을 수 있는 물건의 무게 총량을 규제하고 있는 까닭이다.

“흠…….”

그러니 이상할 건 없다. 없었다.

없나?

“…카를.”

“예, 청산호 님.”

“내가 없는 동안 마탑을 통솔하도록.”

“예?”

“연구소 차린다고 하지 않았나? 예행연습이라 생각해라. 망치면 다음 대현자 자리가 날아갈 것도 각오해 두고.”

“…옙.”

그는 혹시 몰라 마탑 내에 상주하는 용병을 불렀다.

값비싼 마법 아이템을 제작·판매하는 만큼, 무력적 행사가 필요한 경우─진상 손님이나 도둑 등─도 있어 고용해 둔 용병이다.

“부르셨습니까?”

“나와 어디 좀 가지. 몰래 가야 하니까 복장은 최대한 얌전한 쪽으로 하고.”

“알겠습니다.”

기사 학교 중도 퇴교자라지만 급하게 쓸 수 있는 호위로는 차고 넘친다.

청산호는 호위와 함께 마탑 밖으로 나섰다. 묘하게 거슬리는 것을 알아보러 갈 차례였다.

* * *

머맨들 고유의 술수로 이 일대에 한정하여 해수면의 높이가 상승하기 시작했을까. 덕분에 자유로이 오갈 수 있게 된 그것들은 아주 조용하고, 음습하게 기습을 시도했다.

가장 먼저 시야를 막아 버리는 것부터가 그랬다.

“불을 켭니다!”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당해 줄 생각은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싸워 오며 지혜를 짜낸 결과인가.

세 명의 병사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포탑 곳곳의 호롱불에 불을 붙이더니, 옆에 설치된 무언가를 조정했다. 거울이었다.

“보인다!”

“쏴!”

그건 마치 등대와 같았다. 거울로 인해 호롱불의 빛이 반사되고 반사되어 기어이 직선으로 빛을 뿜더니만 바다를 밝게 비추는 것이.

끼익!

심지어 그런 설비는 하나가 아니었다. 원형 포탑의 테두리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던 모든 장비가 빛을 토해 내자 포탑의 주위만큼은 완벽하게 밝혀졌다.

최소한 포탑을 노리는 머맨들만큼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여! 놈들이 무너트리기 전에!”

뭐, 사실 없었어도 문제가 되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다. 나는 활을 왜 들지 않느냐며 소리치는 모험가를 뒤로하고 손을 까닥였다.

특별히 필요한 준비 동작은 아니나,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이렇게 하면 더 잘 나가는 기분이었다.

“대체 공격 안 하고 뭐 하는─”

쉐엑.

선명한 소리와 함께 마력창이 날아갔다. 밤이긴 하나, 등대 덕에 날아가는 모습도 정확히 보였다.

내가 적을 인지할 때마다 생성된 마력창이 해수면을 뚫고 머맨의 몸에 구멍을 내 주었다.

“시발, 하고 있었네.”

그럼요, 그럼요. 제가 월루(월급 루팡)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물론 이건 직장에 취업한 적이 없고, 항상 프리랜서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래도 프리랜서는 노는 순간 밥줄이 끊기는 편이니까 말이지.

“온다!”

그때 감각에 무언가 걸리더니 내가 있던 포탑까지 날아들었다. 하필 내 반대 쪽이고 눈치채는 게 늦어서 무어라 손쓸 수도 없었다.

콰앙!

“으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와 함께 포탑이 진동했다. 아무래도 마법 비스무리한 것에 처맞았나 보다.

“쫄지 마! 한 번으로 안 무너진다!”

그렇지만 어느 모험가의 말대로 벽은 별로 무너질 기미가 아니었다. 계속 얻어맞으면 모를까, 지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퍼엉!

병사들이 던진 무언가에 해수면이 터져 오르며 머맨의 육편을 바다에 마구 흩뿌렸다.

“올라온다!”

그때 포탑 벽면에 머맨이 달라붙었다. 내가 자리 잡은 창문에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위치였다.

“올라오는 놈을 먼저 쏴!”

달라붙은 유족형 머맨은 구토를 유발하려는 양 목울대를 마구 움직였다. 결코 두고 봐선 안 될 일이었다.

정찰대의 경험으로 안 사실이지만, 유족형 머맨은 산성액을 뱉을 줄 알았다.

콰직!

“죽었……!”

“달라붙는 건 내가 처리한다.”

각도상, 벽에 달라붙은 머맨은 창가 밖으로 몸을 내밀어야만 쏠 수 있다. 불편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단 소리다.

하니 달라붙는 놈 하나만큼은 내가 담당해서 처리하는 게 낫겠지. 나는 바깥으로 몸을 내몰 필요도 없고 단 한 방만 날리면 돼서 시간적 우위도 가지고 있으니까.

“…이번은 무조건 살아 돌아가겠는데.”

다소 플래그적 발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같은 곳에서 싸우던 사람이 죽으면 슬프니까.

쾅쾅쾅!

다만 그동안 해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폭발 소리가 나며 해수면이 터지는 건 기본에, 밤의 바다인데도 묘하게 붉은빛을 띠는 것이 보였다.

멀지 않은 곳의 포탑은 머맨들을 처덕처덕 붙인 채로 벽 한쪽이 허물어졌다.

으아아악!

누군가가 바다에 빠지는 소리가 섬뜩했다.

“온다!”

그때 모험가 하나가 화색 어린 외침을 토해 냈다. “화끈하게 쏴 줘!” 그의 말이 어디서 튀어나왔는가 더듬어 보면, 이제 성벽 위에서 빛이 번쩍번쩍함을 알 수 있다.

“마법사들, 가라!”

쿠릉, 쿠르르릉.

우리 쪽 포탑과 저쪽 포탑 사이에 먹구름이 모여들었다. 허연 섬광이 번뜩이는 게 딱 천둥 치는 하늘의 그것이었다.

콰앙!

그리고 그것이 소리와 함께─거리가 가까워서 동시에 들린 듯하다─바다로 내리꽂힌 순간,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아니다. 빛에 대응할 수 있는 속도의 생물이 존재할 리 없으므로, 그것은 낙뢰를 보고 솟아오른 게 아니다. 번개가 칠 걸 예상하고 계속해서 튀어오르던 수십 마리 중 한 마리가 얻어걸린 것이지.

퍽!

“어……?”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그게 아니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경악스러운 것은…….

“뭐야, 한 마리만 죽이고 끝이야?”

나는 전기 구이가 되는 대신, 몸 안에서 폭탄이 터진 것처럼 펑 하고 터진 것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저건 아마… 전기에 맞고 죽은 것이 아닐 것이다.

“뭐야, 뭐냐고!”

나는 파티원과 거리를 두기 전, 아크메이지와 흰바람의 통화를 엿듣다가─내 잘못은 아니다. 식당에서 통화한 아크메이지와 흰바람 잘못이지─알게 된 사실을 떠올렸다.

자후카야로 계속해서 실험하던 흰바람이 새롭게 밝혀낸 또 하나의 특징.

마력을 먹을 수 있는 생물에게는 한 번에 섭취 가능한 마력량의 한계치가 있었다. 그러니까, 과식하면 죽었다.

딱 저렇게 몸이 터져서.

“…여기에도 있었나.”

그래. 한번 등장한 몹, 계속해서 안 나오면 섭하긴 하지. 그런데 제발 섭섭하게 해 줄 순 없는 거였냐?

정말 빌어먹을 세계였다.

* * *

[망할 뱀 새끼.]

판데모니엄은 틀어진 계획을 두고 유감을 한가득 표했다. 본래는 좀 더 시간을 둘 예정이었으나, 상대가 멋대로 일정을 끌어당겨 버린 탓이다.

“죄송합니다.”

[닥쳐, 무능한 새끼야. 짜증나니까.]

그 유감은 비단 ‘망할 뱀 새끼’에게만 향해 있진 않았다.

날선 어조에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충성스러운 시종 겸 계약자는 바로 그 옆에서 묵묵히 선 채 같은 벌을 받고 있다.

그들의 온몸에 박힌 가시가 끝없이 피를 뽑아냈다.

투둑.

그리고 뽑힌 피는 보석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진다. 판데모니엄의 발치는 수많은 적석들로 가득하다.

[나가서 문이나 지켜. 내가 힘을 끌어 올리는 동안, 방해하는 사람 없도록.]

“예.”

그렇게 기분이 좀 풀렸을 때, 그는 가시를 거둬들였다.

[명심해, 이번이 마지막 기회란 걸.]

“…그럼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몸을 한두 번 비틀거린 이가 고개를 조아렸다. 진주가 매끄러운 빛을 내며 흔들렸다.

달칵.

[카일.]

그렇게 계약자 한 명이 나가고, 그는 남아 있던 이를 불렀다.

그의 심기가 불편하단 이유로 연대책임을 지게 된 상태인데도 상대의 표정엔 불만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탐욕을 기준으로 모든 계약자를 뽑은 그가 오롯이 충성심만을 보고 계약해 준 이다웠다.

[이리 와.]

“예.”

판데모니엄은 보랏빛이 도는 검은 털과 커다란 부리, 거대한 날개를 가진 시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말했지, 네 모든 것을 바쳐야 할 순간이 오리라고.]

“예.”

그렇지만 아끼는 마음이 자신의 이익보다 높지는 않다. 판데모니엄은 거미 다리처럼 마디가 도드라지고 긴 손가락을 크게 펼쳤다.

안 그래도 길던 손가락이 더욱 길고 뾰족해졌다.

[그게 지금이란다. 죽여도 되겠니?]

“예.”

첨예한 손끝이 상호 동의하에 계약자의 목숨을 끊었다. 허락을 받은 죽임이라 계약의 페널티도 받지 않았다.

심장이 뽑힌 자리에 끝없이 핏물이 흘러내렸다. 타오르는 진홍 대신 죽어 가는 것의 색이었다.

그가 아는 어떤 불꽃보다는 덜 아름답되, 그것을 제외하면 가장 아름다운 색.

[하아.]

판데모니엄은 그대로 아끼던 것의 심장을 먹었다. 계약으로 인해 나눠 주었던 힘이 돌아오고, 인간 하나 분의 힘이 더 차올랐다.

스르륵.

그사이, 흐르던 핏물이 그에게로 모여들어 옷자락을 타고 올랐다. 드레스 자락이 타오르듯 사라지며 탐욕의 본신을 세상에 드러냈다.

녹아 흐르는 금과 보석으로 이뤄진 베일을 두르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끝없는 공허만이 존재하며, 세 쌍의 손으로 재물을 움켜쥔 자의 육신이었다. 세상의 욕망을 모두 듣고자 내세운 귀 여섯 개가 거대한 꼬리와 함께 쫑긋거렸다.

주변의 모든 것을, 하다못해 계약자였던 존재의 시체마저도 집어삼키는 열기는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중이다.

죽여라.

그러다 잠깐. 나가고자 문을 녹이려던 몸이 멈칫했다. 천둥처럼 울려 퍼진 목소리는 판데모니엄의 뇌를 지배하는 중이다.

용사와 함께 그것을, 반드시.

…염병할 왕! 배려도 없는 새끼!

[…망할.]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본신의 힘을 전부 낼 수 있는 권리를 받은 건 감사하나, 머리통에 대놓고 말하는 건 제발 그만해 줬으면 좋겠다. 이 미친놈이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라, 우리들이 힘의 제약을 받지 않는 상태라고 여기기라도 하는 건가?

[영혼만 남은 새끼도 이걸 버티는데…….]

별개로 쓸모없는 계약자들을 정리하며 제법 힘을 끌어 올렸다 생각했는데도 아직 이 정도다. 판데모니엄은 불쾌함에 이를 악물며 다리를 세웠다.

[그래도 이번엔 내가 이긴다.]

“응? 뭐야, 안쪽에서 불이…….”

“뭐? 불?”

“당장 물 가져……!”

화르륵 불타 녹아내리는 문 사이로 수백 개의 상자가 비쳤다. 전부 금이고 은이고 보석이었다.

[만마전Pandemonium을 열어라.]

“뭐야, 저건!”

“도망, 도망……!”

“흐아아악!”

수천만의 재화가 그에게로 모여들고, 왕의 인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짐을 옮기라는 명령에 야밤에도 일을 하던 짐꾼들의 몸이 불길에 휩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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