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삶은 잔인하고 (1)
긴급사태를 알리는 신호탄을 다섯 발이나 난사한 대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귀환을 택했다.
나 역시 저 정도 물량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기에, 얌전히 프레드릭만 재촉했다.
전력으로 뛴 건 오랜만이라는 듯 프레드릭만 신나게 발을 움직였다.
“디트리히 기사님이 오신다!”
“문을 열어!”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머맨 떼는 아직까지 도시에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다.
덕분에 병사들은 거리낌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주변에 적이 와 있었다면 다소 어려웠을 일이었다.
끼이익.
별도로 성문을 열 준비는 미리 해 놨나 보다. 보초병들이 타이밍 맞게 잘도 문을 열어 주었다.
아무래도 먼저 온 병사들이 당부를 해 둔 듯하다.
“대장님! 성주님께선 성벽에 계십니다!”
“고맙다!”
말 타고 거리를 내달릴 수 있도록 횃불로 거리를 밝혀 준 것도 그렇다.
성으로 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쉽게 발견하고 자리를 피해 줬거니와, 시야가 트인 덕에 멈추지 않고 성벽까지 내달릴 수 있었다.
끼익.
다만, 무슨 일인가 하고 창문을 열어 보는 주민들의 모습이 밤을 덧입어 꼭 석상처럼 보인다.
이런 말 하긴 그런데, 나 이거 공포 게임에서 본 것 같다.
푸륵푸륵.
“조금만 더 버텨 다오!”
그러나 겁을 먹기엔 횃불이 너무 많다. 거기에, 횃불이 껌뻑이지 않는단 건 주변엔 귀신이 없단 소리라고, 핫하!
나는 온갖 공포 게임의 점프 스케어로 단련된 깡을 자랑하며 프레드릭의 호흡에 집중했다. 도시까지 구보와 습보 사이로 질주하며 온지라 체력이 퍽 염려된 탓이다.
소식을 전달해야 하는 입장이니 어쩔 도리는 없지만… 무리가 간 건 아닌지 걱정이다.
나는 침과 거품을 질질 흘리는 프레드릭을 보며 조금만 더 힘내 줄 것을 속으로 당부했다. 이제 고지가 눈앞이었다.
“디트리히 기사님! 돌아오셨습니까!”
성벽 위에 있던 병사가 우리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성주님은 어디 계시나!”
“4번 구역입니다!”
“모험가, 왼쪽!”
이야. 베뮈르헨이 넓긴 넓구나. 나는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셈해 보며 대장의 신호를 따랐다.
성벽 아래에도 오가는 병사와 모험가가 많아, 달리던 말들은 자동으로 속도를 늦췄다.
“악마기사?”
오. 4번 구역이 어딘진 모르겠으나, 일단 인퀴지터는 찾았다. 혼자만 있는 건 아닌지 그 옆엔 데스브링거와 아크메이지, 처음 보는 얼굴이 서 있다.
“성주님!”
“디트리히!”
아, 저쪽이 성주였구나. 하긴 용사 일행이 곁에 둔 사람이 보통 직책일 리 없지. 주변에 병사도 많다 싶고.
“내 기사!”
나는 성주가 성벽에서 뛰쳐 내려오는─비유가 아니라 진짜 점프해서 내려오더라─걸 보며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드디어 멈춘 질주에 말들이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대장의 말은 거의 죽어 가려 하는 데 비해 프레드릭은 아직 여력이 남은 눈치였지만, 어쨌든.
“다친 곳은? 아니, 돌아와 줘서 고맙네. 신께서 가호하신 게야.”
수염이 덥수룩한 성주는 대장의 양팔을 덥썩 잡았다. 그러자 막 무릎을 꿇으며 충정을 표하려던 대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태도가 익숙한가 했다.
“디트리히, 성을 위해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변한다. 대장이 그들의 방식으로 경례했다.
“성주님, 그보다 해변에 머맨이…….”
“많이 심각한가?”
“예. 해안가에 머맨이 빼곡합니다.”
“썩을 생선 같으니라고. 그 외 특이점은? 머맨의 수는 가늠할 수 있나?”
“머맨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특별한 것이 있는지 수는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관측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괜찮네.”
성주는 대장의 어깨를 툭툭 다독인 후 고생했으니 쉬라는 말을 남겼다. 대장이 조금 감격한 표정이 됐다가 아직 더 움직일 수 있노라 외쳤다.
군신 관계가 바람직하긴 한데 제3자의 입장에선 지켜보기 다소 떨떠름했다.
푸르륵.
“기다려라.”
뭐, 프레드릭 물 먹일 시간 준 거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나는 쟁여 둔 물을 손에 따라, 소금까지 뿌려서 프레드릭이 먹을 수 있도록 했다. 굳이 손에 따른 건 전력 질주 후 단숨에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 좋은 짓일 것 같진 않아서다.
챱챱챱. 얼마 전 샀던 가죽 장갑이 프레드릭의 침으로 축축해졌다.
“저, 악마기사…….”
그러다 잠깐, 막 성벽에서 내려온 인퀴지터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붙이려 했다. 데스브링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퀴지터 뒤쪽에 의기소침하게 서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품에는 긴 목함이 들려 있다.
“어쩌다 기사님과…….”
음. 이제 곧 악마와의 대전투가 있을 것 같으니 말을 트는 게 맞긴 하겠지.
그렇지만 내 행적까지 공개해야 할까?
“이 녀석도 데려가라.”
“아, 예.”
나는 대장의 말을 회수하는 병사에게 프레드릭의 고삐를 넘겼다. 다만 낯선 인간이라서 그런가, 프레드릭이 고개를 휘저으며 거부하려 들었다.
“…마구간에 도착하면 이걸 내주도록.”
“넵.”
이럴 때를 위한 특별 대책이 내겐 있다. 나는 블루베리를 담아 둔 주머니를 병사에게 같이 건넸다.
블루베리 주머니를 알아본 프레드릭이 다시 얌전해졌다. 하여간 영악하다.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대현자님.”
오늘따라 타이밍이 왜 이렇게 좋을까.
프레드릭을 보내자마자, 성주가 대장과의 대화를 끝냈다. 그의 발은 성벽 위로 향하는 계단을 막 밟으려는 중이다.
“그러지요. 자네도… 악마기사 자네도 올라오겠나……?”
아크메이지가 살짝 망설이는 어조로 나를 불렀다.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어딜 배치되는지 알 수 있는 건 의외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
용사 파티의 일원이란 이름표를 떼거든, 일개 모험가에 불과한 내가 저들 도움 없이 들을 방도 또한 없고.
“성주님, 그가 대화에 참여해도 되겠습니까?”
“대리자께서 동료 삼은 이를 제가 반대할 리 있겠습니까.”
다행히 성주도 내가 끼어드는 걸 수긍했다. 대장이 나에 대해 무언갈 말했는지, 나를 보는 눈은 다소 호의적이다.
“추가 정보가 들어오긴 했으나, 아까 말씀드린 것과 크게 달라질 필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말을 거는 대신 성벽 위에 섰다. 무시당하고 시무룩해진 두 사람과 나 역시 성주와 발을 나란히 했다.
“용사님께선 중심에서 대기하고 계시다가, 가장 적의 수가 많은 곳으로 향해 주십시오.”
“예……!”
“아크메이지께서는 마법사와 함께하실 테고, 자네는…….”
“전 샌, 용사님 옆에서 보조나 하겠습니다요. 다른 수성전 때 성역을 펼치느라 못 움직인다는 허점을 노리고 들어온 기습이 있어서.”
“그건 동료분의 재량에 맡기지. 단, 용사님 곁을 함부로 떠나지 말게. 적으로 오인한 병사나 기사들이 자네를 공격할 수도 있으니.”
한데 아까부터 어째 한 명이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나는 성벽 위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이를 생각하자 기분이 오묘해졌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자네의 존재를 주지시켰겠으나, 자네가 용사님처럼 퍽 눈에 띄는 인상도 아니고 적도 쳐들어오기 직전이라… 흠. 반짝거리는 끈이라도 달고 다니겠나, 분간할 수 있도록?”
“절대로 사양합니다요.”
“그럼 해당 사항에 대해선 양해를 구하겠네.”
“옙.”
“대신 재량껏 움직여도 좋네. 성에 해가 되지만 않는다면, 성주의 권한으로 자네를 비호하지.”
혹시 나랑 한바탕 한 것 때문에 자리에서 빠졌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자네는…….”
사이가 이 모양이라 물어볼 수도 없는 게 더 착잡하다며, 나는 말 걸어오는 성주에게 집중했다.
“엄밀히 따져서 이 땅에 기사는 별 의미가 없네. 우리는 성벽을 이용해 화살을 쏘고, 창을 내질러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편이니까.”
성주는 그리 말하며, 우리가 선 성벽 아래─바다과 접한 면─를 가리켰다. 거리를 두고 하나 더 지어진 성벽과, 그 너머 가시가 빼곡한 공간이 보였다. 드문드문 세워진 마법 전등은 어두운 시야를 밝히는 데 유용했다.
여러 갈래 꼬인 둑과 포탑은 딱 그 뒤였다.
“해서 기사들이 나서는 순간은 오직 정찰이나, 성벽을 뚫고 넘어온 머맨을 처리할 때, 모든 전투가 끝나 물이 빠지며 드러난 둑 위를 걸으며 미처 도망가지 못한 머맨들을 죽일 때뿐이네.”
확실히, 이러면 내가 나서기가 힘들겠다 싶다. 사실 모든 해전이 그랬던 편이지만.
“그러니 원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배정을…….”
차라리 외성벽의 돌출부로 갈까. 나는 첫 번째 열 포탑과 연결된 다리─치雉라고 하기엔 너무 약해 보였거니와 바다 위 포탑과 연결하는 기능 외엔 별것 없어 보였다─들과 그 위에 서 있는 병사들을 보며 고민했다.
저쪽으로 간다면 일단 검기나 마력창은 마구잡이로 써도 될 것 같은데. 바다 한가운데인 만큼 팀 킬이나 주변 파괴 걱정은 안 해도 될 테니까.
“저곳에 가겠다고? 원래 모험가로 구성하는 편이니 상관은 없지만…….”
내 말에 성주의 표정이 오묘해졌으나,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경고를 했다. 저곳은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며, 활을 쏠 줄 알아야 싸우기 편할 것이라고.
바다로 추락해도 살아 돌아올 자신이 없진 않는 데다가, 화살 대신 마력창만 난사하면 그만인 내겐 별 필요 없는 경고였다.
“무운을 빌지.”
성주는 그 말과 함께 담당 병사에게 일러둬야겠다며 손짓을 했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 몇이 후다닥 움직이며 누군가를 데려왔다.
“내가 말한다고 말려질 사람도 아니고, 간섭할 권리도 내게 없다는 건 아네만…….”
그사이, 모든 걸 지켜보기만 하던 아크메이지가 입을 열었다.
“몸 성히 돌아오게.”
“…그렇습니다, 악마기사!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도 막 2주씩 쓰러지지 마시고요…….”
따지자면 별것 아닌 사이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으나, 어쩐지 입안이 까끌까끌해졌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아까부터 거슬리던 데스브링거의 목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니까 이거 제발 가져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요, 나리.”
달칵. 열린 목함 사이로 하얀 검이 보였다. 더없이 아름답고, 순결한 검이.
“이것보다 더 좋은 검입니다요.”
…전에 주겠다고 내밀었던 검도 아직 데스브링거는 가지고 있다. 어째서인지는 글쎄. 내가 언젠간 받으리란 희망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싸우다가 검 종종 깨 먹으시잖습니까. 그때를 대비해 여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 색이 안 맞아서 안 돼. 응, 컬파(컬러 팔레트)는 중요한걸.
나는 최대한 가벼운 생각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병사와 대화를 막 마친 이는 심각해 보이는 우리 모습에 잠시 기다림을 베푸는 중이다.
“가면 되나.”
“그러면 되긴 하는데…….”
그럼 됐다. 나는 담당자로 보이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다소 묘한 눈이었으나 내게 무어라 말 걸지는 않았다.
“이쪽입니다.”
병사는 나를 이끌며 주의할 점을 몇 개 말해 주었다.
벽이 무너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배정된 자리를 최대한 벗어나지 말 것.
자리가 없을 때, 죽은 자가 있으면 시체를 바깥으로 밀거나 치워도 좋으니 계속해서 공격을 할 것.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절대 다리로 가지 말 것.
다리에 서 있다가 다리가 무너질 조짐이 보인다면 가까운 쪽─포탑이나 성─으로 대피할 것.
“포탑에 고립되는 것이 싫다고 성으로 무리해서 건너진 마십쇼. 그러다 죽는 놈이 더 많습니다.”
갑옷으로 몸 전반이 가려졌음에도 흉터가 드문드문 보이는 병사는 건조한 어조로 내게 조언했다.
“다리가 무너지는 속도는 정말 빠르니까요.”
자주 무너지는 만큼 엄청 단단하게─부실 공사란 의미보다는 포격을 이겨 낼 수준이 아니란 것에 가까운 듯하다─만들지 않는다며 병사는 말했다.
“그리고 적이 보이지 않는다며 주변 이와 떠들며 시간을 보내려 들지 마십쇼.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그는 종종 머맨들이 포탑 아래를 갉아 무너트리려 든다며,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조용히 하는 게 좋노라 조언했다. 이건 확실히 기억해야만 할 주제였다.
“바다를 밝히는 등도 주시하십쇼. 놈들은 시야를 가리기 위해 등부터 끄니까, 그게 전투의 시작이나 다름없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외의 정보는 별것 없었다. 식사, 대소변 보는 곳, 교대 시간 정도였지.
“모험가 씨는 일단 저곳에 서 계시면 될 것 같고…….”
그러던 차. 병사가 말하다 말고, 자리에서 벌벌 떨던 한 명의 등을 퍽 쳤다.
“긴장 풀어! 정신 제대로 못 잡으면 살 수 있는 기회도 놓쳐!”
그 애먼 외침에선 오랜 관록이 묻어났다.
“으하핫, 새내기라서 그러는 거니까 냅둬. 저건 신관 나리가 와도 못 고쳐!”
“쯧. 그러게 새내기가 여기에 왜 와?”
“여기가 돈은 두둑이 주잖아. 죽어도 돈을 주는 곳은 여기밖에 없어!”
“돈도 살아야 쓰는 건데… 쯧.”
별개로 모험가로 구성된다던 성주의 말은 틀림이 없나 보다. 자리를 쓱 둘러보니 병사는 몇 없고 전부 모험가다.
“당신도 여긴 처음?”
“긴장할 것 같은 표정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조언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 세간에 퍼진 소문보단 덜 죽어.”
“물론 포탑이 무너지면 얄쨜 없이 다 죽는 거지만!”
“히익!”
“와하하! 신입 겁먹었다!”
그러나 모험가들임에도 그들은 이곳에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옷만 자유 복장일 뿐, 움직이는 모양새는 이곳에 배정된 병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거다.
그리고 그건, 이들이 그만큼 오랫동안 이곳에 출석했음을 말해 준다.
“떠들지 말고 바다를 응시해! 불이 꺼지는 곳이 있다면 바로 보고하고!”
“옛 서.”
“크, 방금 병사 같았어.”
하기야 성주 입장에선 생존률 낮은 곳에 정기적으로 병사를 꼬라박긴 싫겠지. 병사가 뿅하면 뿅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에다가 시간도 들여야 하니까.
반면 모험가는 알아서 장비도 마련해 오지, 실력이 낮아 봤자 본인만 죽을 뿐 성엔 손해가 없지, 죽어도 자리를 채워 줄 놈들이 계속 찾아오니 돈만 쓰면 그만이다.
좋게 말하면 효율이고, 나쁘게 말하면 희생인 셈이다. 마땅한 대가를 주는 데다가 본인들이 자청한 일이니 지탄받을 것까진 없겠지만 말이다.
“전방! 불 하나가 꺼졌습니다!”
그때 몇 없던 병사 하나가 외쳤다. 포탑의 가장 위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밤바다 위로 우렁차게 퍼졌다.
“이제 성으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전원 무장!”
밤에도 바닷속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환하게 켜 둔 전등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명심해라! 우리가 하나라도 더 많이 죽일수록 성벽의 부담이 줄어든다는 걸!”
바다로 인해 높아진 바닷속에서 물장구치는 꼬리가 하나둘 생겨났다.
“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