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결국 (7)
“아크메이지님을 믿고 추천하긴 했지만,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성주는 다시 방문한 대현자를 두고 창가에 섰다. 창가 너머로는 정찰대가 향한 연안이 밤의 어둠 새로 어렴풋하게 보인다.
“머맨을 겪어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그놈들의 손톱이 워낙 날카롭지 않습니까. 조금만 거리를 잘못 재어도 말의 발목을 자르고, 사람의 다리를 가를 정도로.”
사실 노렸던 건 용사가 직접 나서 주는 쪽이었다. 용사를 이런 일에 부려 먹어도 되나 싶긴 하지만, 그게 제 병사들의 목숨보다 무겁진 않은 까닭이다.
성주는 정찰 일로 목숨이나 다리를 잃은 병사 둘의 인생과 인력 부족으로 몸살을 앓는 와중에 성이 잃은 두 명의 정예병을 떠올렸다.
역시 귀한 병사들을 지킬 수 있다면 용사고 뭐고 얼마든지 부려 먹을 수 있다. 비록 신전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부탁하진 못했지만.
“성주님이 걱정하시는 바는 압니다만, 악마기사를 고용하신 것에 실망할 일은 없으실 겁니다. 비단 그가 저희의 여정에 함께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이런 일에 한해선, 용사보다 나을 겁니다.”
그러나 대현자가 저렇게까지 보증한다면, 좋다.
성주는 마음을 조금 놓기로 했다.
“하긴, 가격대가 다른 모험가보다 높긴 하더군요. 본인도 아니고 길드가 먼저 그런 가격을 부를 줄은 몰랐습니다.”
“요즘이야 저희와 일정을 맞춰 준다고 자잘한 일도 받아 주고 있다지만, 본래는 이런… 비교적 평화로운 의뢰를 잘 안 받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평화로운 일이라…….”
“악마사냥을 비교 대상으로 두었을 때 한정입니다. 보통 일에 비하면 이곳의 일도 평화로운 축은 아니지요.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후회해 봤자 늦은 상황이기도 했다. 이미 보낸 이들을 단번에 돌아오도록 하는 능력은 세상에 없다.
“악마숭배자들은 아직도 말한 게 없습니까?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그들도 배신자가 있다고 느끼는지 관련해서 길길이 날뛰긴 했으나… 정확히 인지하고 있던 건 아니더군요.”
아군조차 빠르게 이뤄진 수사를 두고 의심하는 마당이다. 하물며 벌을 당한 악마숭배자들은 어떻겠나.
그들도 진즉 이건 말이 안 된다며 필히 배신자 짓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정작 배신자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인물이나 단체는 없어, 아직까진 음모론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번 소탕을 주도한 자들도 감사하며 진행 상황을 교차 검증 중입니다만…….”
새벽부터 일하느라 고생한 병사들에겐 미안하나, 어쩔 수 없다.
그가 소탕 작전을 보고받은 건 작전 전날 밤. 그 이전에… 다른 말로는 작전 기획서가 올라오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병사를 배려하다가 악마숭배자의 끄나풀─자신의 편을 배신한 자라도 속내를 모른다면 그건 적이다─이라는 잠재적 위험을 놓칠 수는 없다.
“아직까지는 특별한 점이 없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전 기획서를 제출했을 때 백부장이 한 말과 다시 조사하며 밝혀낸 것엔 어긋남이 없었다.
악마숭배자를 고발한다는 익명의 투서를 받음. 정보의 출처와 진위가 의심스러웠으나, 전부터 악마추종자로 의심되던 인물 몇이 껴 있는 걸 보고 혹시나 해서 조사를 명함. 얼마 안 가 투서의 내용이 맞다는 게 밝혀짐. 해서 작전 기획서를 지금 제출함.
나열된 모든 단계에 비리나 부정이 섞여 들어간 것 같진 않단 말이다.
“아, 투서가 들어와도 성주님께 보고하지 않고 움직입니까?”
“1년에 들어오는 고발장이 몇 개인데 그걸 다 보고받겠습니까. 보통은 백부장 선에서 처리하고, 조사 결과가 확실할 때만 제게 올라옵니다.”
이것도 악마숭배자 건이라서 그가 최종 보고를 받는 거지, 일반 범죄자가 대상이었다면 받지도 않았을 거다.
“어쨌거나… 작전 기획서 및 약식 보고를 받은 직후, 의구심이 들어 작전이 시행되기까지 관련자들을 전부 감시도 했습니다만 남몰래 접촉하는 자는 없더군요.”
대놓고 감시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특화된 사람을 붙여 둔 것임에도 그렇다.
단정하긴 이르나, 경비대 자체에 끄나풀이 꽂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투서를 보낸 자도 조사하고 있지만… 심부름꾼 몇 명을 이용해 돌려 돌려 전달한 걸 보니 그쪽에서도 뭔가 나올 것 같진 않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애석할 정도로 참 치밀한 밀고자(악마추종자 추정)였다.
“슬슬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지요. 답이 쉬이 나올 문제도 아니거니와… 놈들의 내분 덕에 암약하는 질병 덩어리를 거진 정리했으니까요. 이렇게 잡았는데도 한 무리가 가득 남아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성주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야.”
그렇지만 입 밖에 낸 말을 이유 삼아 성주는 이 일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결코 방심은 아니었다. 단지 그와 선대가 키워 온 경비대를 믿을 뿐이지.
왜, 그들이 악마숭배자들을 쉬이 도시에 들였을 리 없고, 색출 과정에서 놓친 자가 많았을 리 없으며, 그 모든 걸 어렵사리 피한 자가 있더라도 그 수가 많지는 않을 거란─그리고 그게 이번 투서로 대거 쓸려 갔을 것이란─믿음 말이다.
“하면 머맨들은 요즘 어떻습니까?”
“좋지 않습니다. 정찰대가 발견하는 머맨의 숫자는 늘었는데, 정작 바다는 잠잠한 상태니까요.”
해서 성주는 대현자와 함께 다른 화제를 두고 두 번째 대화를 시작했다.
기실, 첫 번째 것보다 더 중요한 안건이었다.
“도시에 내려오는 기록에 따르면 이럴 땐 항상 거대한 것이 왔는데… 이번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흐음. 거대한 것이라면…….”
“거대한 해일이나… 폭풍이나… 용 따위 말입니다.”
“용……?”
“오래전 기록이라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용오름을 착각한 걸지도 모르고요.”
용오름이 폭풍의 일종이라는 게 밝혀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마법으로 폭풍을 재현한 후에야 정립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하여 일부 지식인 계층은 여전히 용오름을 용이 지나간 자리로 알고 있으나… 적어도 베뮈르헨의 성주는 해당 이론을 확인한 상태였다.
“용이 목격됐다는 기록은 두세 번 정도 있으나 피해가 아예 없다는 것도 증거 중 하나입니다. 용일 확률은 낮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용이 나타날 가능성을 일축했다.
암, 서부의 해룡마저 죽은 이상 세계에 남은 용은─인간이 파악한 바로는─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용은 저 북쪽, 야만인들의 땅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그 용일 리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능성은 열어 두는 게 낫겠습니다.”
“당연한 말씀을요. 만일을 대비해 거대 괴수 전용 병기는 꾸준히 연구해 오고 있습니다. 기술력의 문제로 이렇다 할 만한 건 아직 하나밖에 안 나왔습니다만…….”
“하나라도 있긴 하다니 다행입니─ 음?”
“……?”
한데 그의 말을 받아 주던 아크메이지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녀의 시선은 그를 살짝 비껴 나 뒤쪽을 바라보고 있다.
“무슨 일이라도…….”
자연히 성주도 아크메이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건…….”
네모난 창가 너머로, 머맨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의 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정찰대가 향한 해안 쪽이었다.
* * *
아까 땅을 파는 것으로 냇가로부터 물을 끌어오긴 했다.
그러나 그 물은 도랑이 다 차자마자 시내와 연결된 곳을 막아 버렸기에─이유는 모른다─그릇 씻는 데 쓸 수는 없었다.
식수 겸 말 먹일 용도인지라 오염되면 곤란한 까닭이다.
하여 나와 다른 병사들은 그릇을 닦기 위해 친히 걸음했다. 다른 조에서도 일찍 먹은 자가 있긴 했는지, 후다닥 따라붙었다.
“휴우. 대장님은 2인 이상 움직이면 보내 주겠다고 하시지만, 솔직히 두 명끼리만 움직이면 너무 무섭다니까.”
아… 나처럼 규칙을 모를 사람들도 아닌데 어쩐지 안 움직이더라. 최소 인원으로 가긴 무섭다 이거지.
“모험가님은 안 무서우세요?”
“우리보다 야영에 더 익숙할 사람인데 뭐가 무섭겠어요, 선배님.”
“아, 그렇네.”
“그리고 선배님이 여길 무서워하는 건 밤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머맨이 튀어나올까 봐 그런 거잖아요.”
“아. 이걸 들키네.”
흠칫.
나는 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대사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누가 저 말 좀 세상으로부터 압수해 봐. 나 저 대사만 들으면 눈물 나.
“근데 나만 무섭냐? 너희도 솔직히 무섭잖아.”
“안 무섭지는 않죠……. 드물다 할 뿐 전적이 있긴 하니까…….”
“거봐.”
별개로 우리가 캠프를 차린 곳은 해변과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다. 근처에 있는 물가도 바다와 이어지는 게 아니고.
그런데도 여기까지 머맨이 오나 싶다.
조금 신기하다.
“…머맨이 여기까지 오나.”
“음? 아. 예. 여기엔 물이 있으니까 작정하면 얼마든지 오죠.”
물이 있으니까 온다……?
“이미 아시겠지만, 머맨은 물이 마르면 죽잖아요. 그래서 지상에서 오래 활동 못 하는 편인데… 이렇게 중간중간 개천이나 물웅덩이가 있으면 피부 위로 물을 끼얹어 가며 돌아다녀요.”
“말 먹일 물 때문이라도 냇가 근처에 자리 잡아야 하는 입장에선 지랄맞은 일이죠.”
머맨한테 그런 특징도 있구나……. 그럼 다른 그릇 씻으러 갈 때 다른 사람 달고 가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겠네.
나는 새로운 지식을 적립했다. 이런 건 게임에서도 안 나와서 몰랐다. 뭐, 나왔는데도 내가 기억 못 하는 걸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긴 머맨이 바다에 나와 활동할 수 있는 영역권 너머에 속하고, 야영지와 바다 사이에 특별한 수원도 없는 편인데…….”
가끔 비가 오고 난 뒤엔 물이 고이는 곳이 있기도 하고, 다른 곳을 통해 지그재그로 오는 것도 가능은 하다며 병사들이 투덜거렸다.
“근데 여긴 안전한 편이에요. 다른 야영지는 열 번에 한 번꼴로 습격받으니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머맨의 출현지가 주로 동부인 걸 고려하면 자주 쓸 일은 없을 지식이나… 세상일이란 건 모르는 법이니까.
“그래서…….”
“멈춰라.”
그래. 내가 이 말을 듣지 않았으면 지금 서성거리는 기척도 몰라뵈지 않았겠는가?
“…정지.”
내가 병사 하나를 멈춰 세우자, 눈치 좋은 이가 동조했다. 당황하던 다른 병사들도 비슷했다.
뭔가 싶어 하던 이들은 있었을지언정 멈추지 않은 자들은 없었다.
“적입니까?”
“적……!”
내 긍정이 있고 난 후엔 더욱 빨랐다.
그들은 금세 감정을 추스르고 뒤에 매고 있던 창을 꼬나쥐었다. 순식간에 완성된 대열은 기습을 대비하는 형태다.
“거리를 두고 따라와라.”
“같이 가시는 게…….”
“방해다.”
이것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속할까? 그렇지만 대장과 부대장이 안 보고 있으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나는 고민하며 병사들 앞에 섰다. “횃불 가져가세요.” 병사 하나가 자신의 불을 내밀었다.
달칵.
그렇지만 횃불을 들면 팔 한쪽을 못 써서 오히려 불편하더라. 나는 허리춤에 전등을 매달아 켠 후,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불빛을 통해 내 위치를 파악한 듯, 적이 기습을 준비하는 게 느껴졌다.
시야를 트기 위해 자른 수풀 너머,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갈대 사이로 몸을 바싹 낮춘 것이다.
“저대로 보내도 괜찮은…….”
“일단 기다려 보자.”
그러나 이미 발각된 기습도 기습일까? 나는 투헨더를 뽑았다. 투둑툭. 뽑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돌아간 검날이 풀숲 사이 흙바닥을 긁었다.
풀과 습기로 인해 축축한 바닥에서는 건조한 흙을 긁을 때완 또 다른 소리가 난다.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그리고 거리가 적당히 좁혀졌을 즈음, 나는 뛰쳐나오는 머맨을 두고 투헨더를 튕겨 올렸다. 서걱. 발로 차는 과정 없이 허공으로 튀어 오른 투헨더가 머맨을 대각선으로 베고, 관성을 그대로 유지하며 회전해 두 번째 머맨을 베었다.
유족有足형 머맨. 즉, 다리가 있는 머맨이었다.
“머맨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나는 추가로 숨은 머맨을 찾아 베었다. 처음엔 기습하려던 녀석들도 세 마리가 죽으니 한꺼번에 뛰쳐나와 덤비더랬다.
서걱!
갑자기 귀찮아져서 그냥 검기로 싹 베었다. 처음엔 자연 경관이라도 지켜 주고자 검만 휘둘렀던 건데… 생각해 보니까 베뮈르헨 입장에선 갈대가 없는 게 낫겠더라고. 있어 봐야 지금처럼 머맨의 기습 용도로밖에 안 쓰일 테니까.
“너, 일단 야영지로 돌아가서…….”
그사이, 병사 중에서 가장 짬이 높아 보이는 이가 막내(추정)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아니. 다 돌아가라.”
그에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근처에 남은 머맨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곤두세운 감각은 이제 경종을 때리고 있다.
“머맨 수십 마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지금 있던 놈들은 선봉대였다는 양, 머맨이 더 오고 있었다.
“대장! 머맨들이 옵니다!”
“뭐?!”
남아서 혼자 싸울까도 했으나, 어쩐지 감이 안 좋아서 같이 빠지기를 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쁜 판단은 아닌 듯했다.
다가오는 기척의 수를 보니 나는 몰라도 병사들은 도시로 빠져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분명 프레드릭도 데리고 퇴각할 것 아니야.
당연히 나는 걸어서 돌아가게 될 테고.
그건 좀 싫었다. 외부로 나갈 의뢰임을 알았을 때 혹시 몰라 이틀 치 식량을 준비했대도 그렇다.
뚜벅이는 사양이다.
“수는?”
“최소 삼십 이상.”
육안으로 확인한 건 아니지만 틀리진 않을 거다. 나는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기척을 느끼며 투헨더 대신 롱소드를 붙잡았다.
머맨이 먼저 도착할 것을 경계해, 머맨이 오는 방향을 가로막은 채로 검을 고쳐 쥔 건 덤이다.
“40m 이내로 접근했다.”
“…퇴각 준비! 쓸모없는 짐은 버린다! 다들 말에 올라!”
대장은 내게 무언갈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말의 허실을 파악하려 들진 않았다. 이게 진실일 경우 낭비된 시간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부터 생각하는 사람의 판단이었다.
“10m 단위씩 가까워질 때마다 말해라!”
대신 대장도 내 옆에 섰다. 나처럼 병사들이 도망갈 틈을 벌어 주려는 건가 싶다.
“30m.”
나는 식수와 식량, 모포 따위는 내버려 둔 채 무기만 챙겨 말에게 달려가는 병사들을 보았다.
“빌어먹을, 밥 아직 못 먹었는데.”
일부 병사들이 외치는 말엔 살짝 애잔함이 느껴졌다.
사실 나 혼자 정리하라고 하면 이쪽에 다다르기도 전에 다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이라, 급하게 안 움직여도 되는데. 괜히 안타까웠다.
“20m.”
그러나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좀 그렇고, 찜찜함을 외면하기도 좀 그런지라.
나는 대장의 명령을 따라 꼬박꼬박 보고나 했다. 지상에서 사는 생물도 아니면서 발이 꽤 빠르단 생각도 좀 들었다.
“대장님, 모험가님, 말!”
부대장은 우리가 바로 탈 수 있도록 바로 뒤쪽까지 말을 끌고 온다.
“전부 기승했습니다!”
“좋아, 출발해라!”
그리고 10m쯤 거리가 좁혀졌을 때, 모두가 기승을 완료했다. “먼저 타라.” 내 검에 칠흑 같은 마력이 맺혔다.
서걱!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마력을 아낄 필요가 덜하다. 나는 넉넉잡아 전방 수십 미터를 단숨에 베어 버렸다.
“…낮에 봤으면 장관이었겠는데.”
아마도 그렇겠지. 생물체의 몸뚱이가 육/신 되는 장면은 별로일지언정 풀숲 잘리는 모습은 신기할 테니까.
푸르륵.
각설하고 가까이 접근했던 머맨을 한 번에 죽인 이상, 도주에는 여유가 생겼다.
나는 긴장이나 흥분한 구석이 없는 프레드릭 위로 올랐다. 그제야 말에 오른 상태던 대장도 움직였다.
“일단 도시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모험가! 다가오는 적이 더 남아 있나?”
“남아 있다.”
“몇 마리?”
글쎄… 수를 세는 게 가능할 정도로 가깝지는 않아서. 있다는 건 대충 알겠는데 정밀한 숫자는 모르겠다.
“…다 처리할 자신 있나?”
“당연한 것을 묻지 마라.”
오… 마력 다 안 쓰길 잘했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던 것에 더 가깝긴 하지만.
어쨌거나 내 대답에 대장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외쳤다.
“부대장! 병사들을 이끌고 도시로 돌아가라!”
“예?!”
“전원, 부대장과 함께 도시로 돌아가라! 나와 모험가는 좀 더 정보를 모으겠다!”
“하지만!”
“모험가, 감속한다!”
“…아이 씨!!”
나와 대장, 부대장은 늦게 출발한 만큼 아직 후미에 위치한 상태였으니, 이탈은 어렵지 않았다.
나와 그녀의 말이 천천히 감속했다. 프레드릭이 투레질과 함께 앞발로 땅을 긁었다.
“다가오는 머맨을 전부 제거한 후 해안을 정찰한다. 이견 있나?”
“없다.”
내려서 상대하는 게 나을까. 다가오는 시간이 있는데 그냥 말 타고 검기 슉슉 날리며 접근하기도 전에 처리할까.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일단 후자를 고르기로 했다. 안 되겠다 싶으면 냅다 내려서 싸우지, 뭐.
“…가자.”
나는 대장을 따라 나아갔다.
다만 운 좋게도 아까의 일격에 머맨 대부분이 죽어, 잔당들은 말 위에서도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이제 해안만 확인하면……?”
문제는 그렇게 다 죽인 후, 해안가 쪽으로 접근했을 때 본 광경이었지만.
“…당장 돌아간다!”
디펜스전이 대부분 물량전이긴 한데, 그렇다고 파도가 다 가려질 정도로 많이 몰려오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