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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201화 (201/389)

201화 결국 (3)

내가 받고 있는 전투 시스템의 보정은 참으로 소소하되, 없으면 안 될 수준으로 은근히 제공되는 편이다.

예컨대 내가 검을 휘두를 때 휘청이지 않고 올곧게 그을 수 있도록 해 준다거나, 검을 받아칠 때 힘 배분에 도움을 준다거나, 표적 겨냥 시 타점이 빗나가지 않도록 보정해 준다거나.

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여기에 생존본능: 회피 경로 제시와 회피반격: 빈틈, 약점 표시 스킬까지 더해지면 전투는 더욱 편해진다.

챙! 채쟁챙!

아니다. 정정하겠다. 그것으로 하여금 나와 베르세르크는 균형을 간신히 이룬다.

베르세르크가 강한 건지, 시스템이 사기인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까앙!

어찌 되었건, 밤의 숲에 금속음이 짜랑짜랑 울리며 불똥을 튀겼다.

우리 사이에 위치한 기름등은 대지가 울릴 때마다 들썩일지언정 결코 엎어지진 않는다.

부웅!

나는 내려 베기를 하는 척 손목을 비틀어 하단을 베었다.

그러자 베르세르크는 바닥에 박혀 있던 칼날을 힘주어 꺼내는 대신, 발로 창대를 걷어차는 것으로 대처했다.

깡! 날카로움보단 무게로 상대하는 두 무기가 부딪치며 쇳소리를 냈다. 나름 허점을 찔렀다고 생각했건만, 참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흡!”

와중에 베르세르크는 부딪친 충격으로 다시 바닥에 처박히려는 창대를 붙잡아, 그대로 찌르기를 감행했다.

이번엔 나의 위기였다. 내 투헨더 역시 충돌로 인해 위쪽으로 튕겨 나온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쩌면 기회다. 나는 스킬로 인해 하얗게 빛나는 갈래를 보며 몸을 비틀었다.

사악!

허리춤에서 펄럭거리던 코트 자락이 할버드에 꿰뚫렸다. 그러나 고작 그뿐이었다. 할버드는 아슬아슬하게 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며 옷을 찢었을 뿐, 살갗을 가르진 못했다.

부웅.

반면 내 몸은 발목과 허리가 틀어지며 한 바퀴 회전을 감행하는 중이다.

위로 들어 올린 팔은 손목과 잡는 법을 바꾸는 식으로 투헨더를 뱅글 돌리고 있다. 가속을 붙이기 위함이었다.

“……!”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거리다.

베르세르크는 할버드를 내지르느라 나와 근접했고, 나 역시 그녀의 무기를 스치듯 지나감으로써 거리를 더 좁혔다.

이제 그녀도 내 사정거리 안이다. 벨 수 있다.

서걱!

나는 손에 힘을 최대한 주며 풍차처럼 크게, 최대한 뒤로 잡은 채 검을 휘둘렀다.

베르세르크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챙강!

아슬아슬하게 회수되고 다시 짓쳐 든 할버드가 내 검을 막아섰다. 내가 그녀의 할버드를 막아설 때와 비슷한 수법이었다. 두 개의 날 틈새를 이용해 검을 끼워, 연격을 완전히 끊어 버린다.

“흐읍!”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노린다.

베르세르크가 손바닥 속 창대를 굴렸다. 할버드를 원형으로 휘두른 게 아니라, 창대만 회전시켰단 소리다.

그로 인해 이음새가 더욱 죄어 들고, 가해지는 압력이 더 커졌다. 병따개로 맥주병 뚜껑을 따는 순간과 비슷했다.

끼이익. 할버드의 창날에서도, 내 투헨더에서도 위험한 소리가 났다. 이대로 가면 부러지거나 휜다.

후욱!

그러나 베르세르크가 택한 건 부러트리는 쪽이 아니었다. 그대로 당기는 것이었지.

“……!”

나는 빨려 들어가듯 잡아당겨지는 검에, 반사적으로 검 자루를 바짝 쥐었다.

검을 빼앗으려는 건가! 의도를 알아차린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패배의 조건은 정하지 않았으나, 무기를 빼앗기는 게 승리로 가는 길은 아닐 터.

이대로 순순히 무기를 빼앗길 생각은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비틀었다. 머리가 내린 판단보다 빠른 행동이었다.

끼기기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내 검이 틈 사이를 어떻게든 빠져나왔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불똥이 튀는 게 참으로 선명했다.

“흡!”

그러나 베르세르크도 그걸 가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가 뒤로 물러나려 하자 빠르게 찌르기를 행했다. 아직 내 투헨더는 그녀의 할버드와 완전히 헤어지지 못한 상태다.

끼긱.

아, 과제 때문에 봤던 옛날 영화가 생각난다. 거기서 나왔던 녹색 칠판 긁는 소리가 딱 저랬는데.

나는 그런 잡생각을 잠시 떠올린 후 역으로 투헨더를 비틀어 잡았다. 아깐 베르세르크가 이음매를 조였다면 지금은 내가 조이는 꼴이었다.

까드드드득!

그렇지만 괜찮다. 괜찮을 거다.

나는 지금껏 내구도 90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는, 90대 초반으로 떨어져도 다시 100으로 수복되었던 검을 믿었다.

챙강!

“……!”

할버드와 투헨더, 둘 중 더 강한 것은 분명 내 것이다.

부웅.

역시! 나는 기어오르는 쾌감을 잠시 외면한 채, 기어이 할버드의 도끼날을 부러트리고 풀려난 검을 움직였다.

내 것이 상대의 것을 부러트리리라 의심치 않았기에, 내 무기는 의미 없이 바닥에 처박히거나 하진 않은 상태다.

오히려 내가 경로를 조절하자, 풀려남과 동시에 터져 나온 힘이 그대로 가속에 쏟아부어졌다. 검이 꼭 풍차처럼 돌아갔다.

터엉!

베르세르크가 다급히 맞춰 휘둘렀지만 쌓인 힘과 가속은 내가 위다. 할버드의 창대와 내 투헨더가 부딪치고 창대가 밀려났다.

하면? 가속이 이어지는 나와 연격이 박살 나 버린 베르세르크 사이에는 이제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생겼다.

절대로 막을 수는 없다.

휘익!

그녀도 그것을 알고 가드 대신 다른 것을 시도했다.

튕겨 나감으로써 무기 쪽이 뒤로 가고 자루 부분이 앞으로 왔겠다, 어차피 도끼날은 박살 나서 쓸모도 없겠다.

그냥 자루 쪽을 내밀어 날 공격한 것이다.

도끼날이 부러졌더라도 여전히 건재한 2.5m의 사정거리를 이용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 경로였다. 그것으로 나와 그녀의 묘수풀이 답은 정해졌다.

나는 아까처럼 창대를 피하고, 검을 휘둘렀다.

내 검이 그녀에게로 짓쳐 들었다.

툭!

직후, 풀숲에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퍼억! 내 투헨더가 바닥에 내리꽂힌 건 덤이다.

“…….”

“…….”

나는 방금 소리의 주인이 무엇이며, 내 투헨더가 왜 직격하지 않았는지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답은 정면 시야에 나와 있었다.

베르세르크는 무기를 버려 가며 뒤로 물러났고, 나는 그녀가 비운 자리를 타격했다. 그뿐이었다.

“더 할 건가.”

이겼나? 내가 이겼나?

나는 슬그머니 드는 생각에 설레발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기가 깨진 것이 전투 불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만큼, 이건 패배로 안 칠 수도 있겠다 싶었던 탓이다.

대신 다음 공격이 바로 오지는 않을 것임은 확신했다. 주먹다짐으로 이어지는 한이 있어도 즉시는 아니라는 본능의 판단이었다.

하여 나는 느긋이 바닥에 꽂힌 검을 회수했다.

그러자 풀을 가르고 축축한 진흙 사이에 처박힌 검이 흙먼지와 함께 올라왔다. 어찌나 깊이 박혔는지, 뽑을 때는 힘까지 좀 줘야 했다.

약간 아서왕이 된 기분이다.

“…내 패배다.”

그러다 잠깐.

내가 검을 다 뽑았을 때, 베르세르크가 주먹을 그러쥐며 선언했다. 등불이 춤을 출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 속 금빛이 녹아내렸다.

“그대의 강함에 경의를.”

하나 그 녹아내린 금은 생각처럼 이지러진 형상이 아니었다. 의외였다.

실력 차이로 진 게 아니라 무기 차이로 진 거니 약간의 화나 아쉬움이 남아 있을 순 있겠다 싶었는데.

아, 따지고 보면 그렇게 뜻밖의 일도 아닌가? 평상시의 그녀는 굉장히 호탕하고 또 시원시원한 편이니까. 이런 변수조차도 자신의 실력이라 받아들이는 걸지도.

여튼간, 이런 것에 뒤끝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베르세르크는 다 어울린다. 또한 그렇기에 너무 기뻐하기도 좀 그렇게 됐다.

나는 승리로 인해 들뜨는 기분을 적당히 흩트렸다.

“…너도 수고했다.”

그사이, 베르세르크는 부러진 무기를 주워 들며 고생했노라 치하했다. 진정 사람 취급한다기보다는 여태껏 애용해 온 무기에게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 보내 주는 모양새였다.

그치만 무기 박살은 내 잘못이 아니… 아니다. 내 잘못인가? 모르고 부러트린 게 아니라 의도한 거니까 내 잘못이라 하는 게 맞나?

꼭 부러트리지 않았어도 이어 나갈 수 있었을 싸움이고, 여차하면 내가 패배를 했어도 되긴 했으니까……. 물론 컨셉상 패배는 용납하지 않겠지만.

팅. 나는 고뇌에 빠진 채 군화 앞코로 검날을 가볍게 차올렸다. 반바퀴 회전한 검이 내 어깨에 얹어졌다.

“베르세르크는 조금 있다가 가겠다. 먼저 가라.”

그때 베르세르크가 한마디 했다.

하필 무기를 보면서 그런 말을 한지라 내 가슴은 괜히 철렁거렸다. 부러진 무기를 애도하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인 까닭이다.

하지만 희미하게 비치는 얼굴과 목소리를 다시 살피거든, 그녀는 부서진 무기에 딱히 신경을 두는 것 같지 않다.

어떠한 미련이 있다기엔 너무 여상스럽고 담백한 태도였다.

하면 그녀가 조금 있다 가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기가 박살 난 건 안중에도 없으나 패배의 원인은 곱씹어 봐야겠다는 마음인가? 도시 가서 복기하면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너무 늦장 부리면 날이 밝는다. 성문을 뛰어넘기 어려워질 거란 소리다.

“악마기사.”

…뭐, 그것까진 내가 신경 써 줄 필요 없겠지. 서로 걱정해 주고 챙겨 줄 사이는 아니니까.

“오늘 내 고집을 받아 줘서 고마웠다.”

나는 베르세르크의 감사 인사를 뒤로한 채 그곳을 벗어났다.

새벽녘 이슬이 너무 차서 그런가, 방금까지 즐거웠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끝마무리였다.

* * *

[시기의 추종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그거 놀라운데.]

끝으로 갈수록 검게 물드는 보랏빛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는 실눈, 배꼽까지 파인 드레스를 걸친 존재가 나름대로 탄성을 토해 냈다.

푸드득. 그, 판데모니엄의 곁에는 몇 마리의 까마귀가 날아다니고 있다.

[이름은 애저녁에 소화되었을 텐데도.]

“이름이 흡수되기 전까진 힘이 유지되었다는 모양입니다.”

[당연한 소리를.]

그는 까마쥐 중 한 마리를 팔뚝에 얹으며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아무렴, 계약이 이름으로 유지된다는 건 인간보다 악마인 그가 더 잘 알았다.

이름이 바뀌어도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 인간과 다르게, 악마는 이름과 본질이 연결되어 있으니 당연하다.

[이름이 먹혀 완전히 흡수되든, 그대로 허공에 흩어져 분해되든, 어떤 식으로 사라지기 전까진 마땅히 계약이 이행되었겠지. 그게 ‘계약’이니까.]

속일 순 있으나 어길 순 없다. 그게 계약이다.

절대적이고, 가장 불공정하되 가장 공평하며, 가장 지극한 법도.

이 세계의 신도, 다른 세계에서 온 침략자인 그들도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하지만 웃기긴 하네. 내가 이름을 흡수할수록 계약의 효력이 떨어지며 가진 힘이 서서히 사라졌을 텐데. 그걸 알면서도 죽은 자를 추종하고 싶은가?]

“그럼요. 저희도 당신께서 당하신다면…….”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필요 없어. 아니면 내가 실망하길 바라는 건가?]

“죄송합니다.”

탐욕이란 감정에 충성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목표한 것을 얻기 위한 협력, 더 많은 것을 벌기 위한 공조 따위가 어울리지.

같은 맥락에서 판데모니엄은 저따위 빈말을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무렴, 그가 계약자를 뽑는 기준은 그가 당하는 순간 그를 위해 움직일 게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 놈들인가 아닌가였다.

그걸 아는 마당에 저런 빈말 따위, 아무 의미 없다. 무가치하다.

돈이 되지 않는다.

하므로 필요 없었다.

[깎인 점수는 행동으로 보충해. 다 정리해 버려.]

“예,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바다의 숨은 뱀은 어떻게 됐지?]

“접선 중입니다. 처음과 두 번째 사절은 머맨에게 죽고, 세 번째는 뱀에게 먹혀, 지금 네 번째 사절을 보낸 상태입니다.”

[하, 호랑이고 뱀이고 짐승 새끼들이란.]

본신의 힘을 다할 수 있었다면 저리 까불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거다. 판데모니엄은 그것에 깊은 짜증을 느꼈다.

훔쳐 온 힘을 전부 먹어 치웠음에도, 아니 먹어 치움으로써 무력에 대한 갈증이 더 짙어진 상태기에 더욱 그러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엔 반드시 좋은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하, 당연히 그래야 할 거야.]

하지만… 그것도 이제 곧이다.

판데모니엄은 속속들이 모여드는 힘의 조각들을 느끼며 거미 다리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았다.

손바닥에 비해 더없이 긴 손가락은 마치 새의 발톱 같기도 하고 고슴도치의 가시 같기도 하다.

[이번 기회를 말아먹으면, 너는 나뿐 아니라 왕의 실망까지 얻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 속에 살포시 숨겨져 있는 것은 왕의 인장이라.

[명심해. 우리에게 다음은 없어.]

새와 박쥐의 날개, 염소의 머리, 산양의 뿔, 뱀의 꼬리, 멧돼지의 이, 당나귀의 다리를 가진 존재의 그림이 그 무엇보다 사악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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