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98화 (198/389)

198화 외쳐 보지만 (7)

“안 했다.”

나는 담배를 꺼트리며 빠르게 답했다. 그러자 물건을 채 가듯 건네받은 마이스터가 눈매를 누그러트렸다.

“그래, 그렇겠지. 그럴 시간도 없고 이유도 없을 테니.”

이렇게까지 신뢰할 리는 없을 텐데. 하는 약간의 의문이 바로 날아갔다. 그냥 좋은 머리로 납득할 만한 근거를 알아서 찾아낸 거였군.

차라리 이게 편하긴 하다. 신뢰는 너무 무거우니까.

“…근데 왜 발동한 거지?”

내가 그렇게 마이스터를 해석하는 동안, 상대는 다른 고민에 빠져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선 멀뚱멀뚱한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방금 그 벽돌 같은 게 원래 빛을 내면 안 되는 거였나?

“수식이 틀렸을 텐데. 아니, 애초에 이제 와서 되는 것도……?”

저 모습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잘못 입력한 코딩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서 ‘이게 왜 되는 거지?’라고 의아해하는 프로그래머처럼 보인다. 응, 딱 그거다.

나는 그의 혼란을 바로 이해했다.

“너, 방금 봤지.”

별도로 그걸 내게 캐물어서야. 나는 떨떠름하게 시선만 쓱 주었다. “방금 빛난 거 말이야.” 마이스터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봤다.”

컨셉이라면 이런 것에까지 답하지 않겠지만…….

나는 마이스터의 시선을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담배를 얻어 피우기도 했거니와 절박하기까지 한 태도가 가엽기도 한 까닭이다. 결정적으로 마이스터가 파티에 합류할 것 같지도 않았고.

아무렴, 방음 마법을 뚫고 “저 싸가진 뭡니까, 진짜?!” 소리가 들려왔는데 합류를 점칠 수 있겠냐고.

심지어 저걸 또 마이스터는 들었다. 코웃음 치며 넘기긴 했지만.

“너도 봤다는 거지? 아, 혹시 다른 특징은 없었어?”

각설하고 여기서 끝날 인연이라면 조금은 가벼워져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되르 머시기에서 뒤통수를 맞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마이스터는 설사 합류를 하더라도 나와 나눈 대화를 파티원들에게 알려 주진 않을 것 같거든. 응, 절대로 알려 줄 인상이 아니지. 절대로.

“…내가 줍기 전부터 진동과 빛이 있었다.”

하므로 나는 캐묻는 말들에 기꺼이, 그렇지만 다소 불친절하게 응했다. 긴 자기 합리화 끝에 나누게 된 대화였다.

사무적인 내용임에도 기분이 좋아질 만큼, 얼마 주어지지 않는 타인과의 상호작용 순간이기도 했고.

“그리고?”

“건네주려던 무렵부터 진동이 약해졌다. 확실하진 않다.”

“…좋아. 다른 건?”

“글쎄.”

“온기가 느껴졌다거나, 바람이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거나?”

“온기는… 그다지. 바람도…….”

나는 그 뒤로 마이스터가 꼬치꼬치 묻는 것에 일일이 답을 주었다.

물론 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너무 잠깐이었고, 내가 얻은 단서도 얼마 되지 않으니까.

“그래, 알았어. 더 모른다면 됐어.”

하나 그 얄팍한 단서만으로도 마이스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시종일관 담담하거나 까칠하던 보라색이 꿈꾸는 소년처럼 화사해졌단 말이다.

“고마워.”

아직도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됐다면 그걸로 됐다. 나는 마이스터의 기쁨으로 내 우울을 덜어 내며 다시 연구실로 돌아갔다.

“뭐냐, 그 얼굴. 좋은 일이라도 있었냐?”

“아, 그럼요. 근 시일 내에 카를 현자님이 무릎걸음으로 마탑을 도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좋은 일이고말고요.”

“…뭐야, 성공했어?”

“쫄리세요?”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마이스터가 카를 현자에게 인성을 터트렸다.

나 같으면 기뻐서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해질 것 같은데. 마이스터는 그런 군상이 못 되나 보다.

아니면 둘이 너무 친해서 저럴 수도 있고.

“그보다 결과는 아직도 안 나왔어요?”

“…그래.”

“아, 그래요? 결국 현자님이 신봉하는 마법도 쓸모없었네요.”

“아오, 저 싸가지.”

그래도 카를의 표정이 최악은 아닌 걸 보면 후자에 가까울 성싶다.

하긴, 돌아보면 마이스터가 내 컨셉한테도 저러진 않았지. 장비라는 매개체가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서로를 신나게 까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얼마 안 되어,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갈 시간이었다.

“안 돼, 아직 연구가!!”

바짓단을 붙잡는 양반이 하나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갈 시간이 맞다.

“뭐야, 너도 여기로 가?”

마탑을 나와 여관까지 돌아가는 길엔 마이스터가 함께했다. 별건 아니고, 단순히 길이 겹쳐서였다.

“용건 있나?”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난 그저 여기 밥이 맛있어서 가는 것뿐이야. 반면, 너는?”

“…내 숙소다.”

“납득했어.”

그 김에 식사도 같이 식당에서 했다. 우리 둘 중 누구도 제의한 적 없으나, 어쩌다 보니 나온 결과였다.

“두 분이세요?”

“아니, 따로.”

“아… 그런데 자리가 하나밖에 없어서 기다리실 거 아니면 합석하셔야 하는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합석할까?”

“마음대로.”

한 테이블에서 먹은 것도… 대충 이렇게 됐다.

서로에 대한 친근감이 없고, 남에게 관심도 안 가지는 성격 둘이 모여서 벌인 환장 콜라보였다. 상성이 의외로 잘 맞는다.

이것도 결국,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포리지면 돼.”

“메뉴.”

“그, 포리지랑 콩 수프, 감자 수프가 있습니다. 메인으로는 삶은 고기가 있는데… 아, 구워 드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채소 스튜는.”

“어… 가능할 거예요. 그걸로 해 드릴까요?”

아, 그렇지만 음식은 따로 시켰다. 당연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고 해서 우리 둘이 일행인 건 아니었다.

“많네. 돈이 많나 봐.”

그 결과, 마이스터 쪽은 소박함의 극치가 되었고 내쪽은 그 반대가 되었다.

음식의 가격대가 어찌 되었고 쓰인 재료가 무엇이든 간에 가짓수 차이에선 분명 그랬단 말이다. 그릇이 무려 4개나 차이─마이스터는 하나, 나는 다섯─났으니까.

“하긴, 그 체격을 유지하려면 그 정돈 먹어야겠지.”

다만 마이스터가 왜 최소한의 것만 주문했는진 나도 모른다.

다른 음식이 맛없어서 안 시킨다기엔 여기가 맛있어서 들어왔다고 했고. 먹는 양이 적어서 주문 안 하는 거라기엔 어제 먹은 양이 제법이었다.

그렇다는 건 결국 안 사 먹는 게 아니라 못 사 먹는단 건데…….

혹시 돈이 없나?

“…….”

“…….”

…하긴, 아까 연구하는 것 보면 돈깨나 깨지게 보이긴 했지.

의뢰도 제법 받는 듯 보이긴 하지만, 본인 연구가 계속 실패해서 거기에 돈을 쏟아붓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래서 이런 데 쓸 돈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제도 밥 굶으려다가 내가 사 주니 냉큼 얻어먹은 것만 봐도 가능성은 충분하다.

“…종업원.”

하면 뭐 어쩔 수 있나. 한국인으로서 저 지긋한 시선을 무시할 순 없는데.

“같은 걸로 하나 더.”

“네!”

“……?”

아무렴, 집요한 시선 자체야 일행들 때문에 익숙해졌다지만… 걔넨 그냥 나랑 대화하고파서 그렇게 보는 거였다. 배가 고파서, 먹고 싶어서 그리 본 게 아니라.

그러니 차마 외면할 수 없다. 대화해 달라는 초롱초롱함과 배곯은 이의 시선은 별개였다.

“…너.”

물론 이제 와서 그 녀석들이 배고파한대도 무시해야겠지. 그 녀석들이 굶는다는 건 상상도 안 가지만.

“시켜 줄 필요는 없었는데, 고마워.”

그사이, 내 행동의 의미를 깨달은 마이스터가 새침하게 감사를 표했다.

앞에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붙어있어, 살짝 배알이 꼬인 건 덤이다.

“왜 네 것이라 생각하지?”

“……!”

그러나 그 배알 꼬임은, 살짝 골려 주자 뻣뻣하게 굳어 버린 표정을 봄으로써 바로 풀렸다.

어제도 생각한 거지만, 얘 정말로 내 친구 닮았다.

뻔뻔하게 얻어먹는 것도, 가끔 죽도록 얄미워지는 것도, 내가 그 뻔뻔함을 이용해 장난을 칠 때면 짓는 표정도.

울고 싶을 정도로 닮았어.

“…장난이다. 먹어라.”

“내가 자존심도 없는 줄 알아?”

“그럼 버리지.”

“…돈 낭비야. 요리사의 노동력 낭비이기도 하고. 비효율적이라고.”

“알 바 아니다.”

나는 무의미한 실랑이를 나누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외로움이 사무치게 몰려왔다.

“…이건 버려지는 음식이 아까워서 먹는 거야. 알았어?”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무시할걸. 밥을 뚫어져라 보든 말든 모르는 척할걸. 머릿속은 후회로 가득 차 있다.

“알았냐고.”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쳇. 연구가 성공만 했어도 얻어먹지 않았을 텐데…….”

썩어 가던 나를 기다려 주고,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준 친구들이.

“…아침에 찾아가지.”

“알아서 해.”

나는 남은 음식을 억지로 입속에 밀어 넣은 후,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살짝 삐진 눈치의 마이스터는 내가 떠나는 걸 보지도 않았다.

뭐, 삐지지 않았어도 그랬을 테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도 지금은 마이스터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시아, 술 한 잔 더!”

“내가 그 동화를 썼다니까!”

“엘리스으으! 사랑한다!”

“하나, 둘, 건배!”

나는 식사하는 동안 흐트러진 매무새를 고쳤다. 동시에 발은 계속해서 움직였는데, 그런 내 뒤로 주점이 점점 멀어졌다.

참고로 자야 할 시간인데 왜 외출하느냐 묻는다면, 그건 자기 전 산책이라 하겠다. 프레드릭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고.

암, 말이란 게 어지간히 귀한 생물이어야지.

“말을 보러 오셨습니까?”

“그래.”

나는 여관 근처에 있는 마구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이 비싼 생물인 만큼, 교대로 마구간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잠시만요… 기사님 말은… 예. 여깄습니다.”

프레드릭이 유독 명마인 만큼 마구간지기에겐 매우 많은 돈을 쥐여 주며 제대로 지킬 것을 당부해 둔 참이다.

한데 그것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워낙 인상파여서 그런가.

마구간지기는 패를 확인하지도 않고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대우가 좋다고 여겨야 하는 건지, 이들이 방심하는 것 같아 불안해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 도시들에서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아이구, 말이 무척 까다… 아니,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래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히잉.

그래도 말은 잘 돌본 듯하네. 나는 심기가 조금 불편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노라, 그런 기색의 프레드릭을 보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앞으로도 부탁하지.”

“걱정 마십시오!”

넉넉한 팁에 마구간지기가 콧김을 뿜었다.

끼익.

나는 마구간 문을 열고 나갔다. 내가 등장한 순간부터 조용해진 마구간에는 말들의 숨소리와 마구간지기의 의아한 말소리밖에 들리는 것이 없다.

덜컹.

그리고 마지막 문까지 열고 나갔을 때, 나는 의외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제 나왔나?”

베르세르크였다.

“아크메이지가 할 말이 있다고, 흐아암. 나를 보냈다.”

베르세르크는 하품과 함께 내게 전언을 전달했다. 그녀가 새벽에 기상하는 만큼 의외로 일찍 자는 편임을 아는 나로선 그 하품이 불쾌하지 않았다.

“베르세르크는 기억력이 안 좋아서 쪽지로 받아 왔다.”

다만 왜 하필 그녀가 왔는지에 대한 의문은 있다.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를 보내면 문제가 발생할 거란 판단이 들었나?

“여기 있다.”

뭐, 내 입장에선 그저 감사한 일이긴 하다.

베르세르크도 선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서 있긴 하나, 최소한 다른 이들처럼 선을 넘으려 들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바스락.

됐고, 쪽지에 뭐라 적었는지 보자. 근 시일 내에 출발한다고 적혀 있으면 난 안 갈 거라고 답장 줘야 하니까.

“확인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아무래도 없을 것 같다.

나는 명확한 일자를 제시하는 대신, ‘출발이 늦어질 성싶다.’, ‘아무리 빨라도 최소 2주는 걸릴 거다.’ 등의 문장으로 이뤄진 쪽지를 접었다.

이 정도면 내가 편지를 먼저 받을지도 모르겠다.

“악마기사.”

한데 내가 수긍의 답을 주고 돌아서려는 순간, 베르세르크가 나를 붙잡았다.

그녀도 아크메이지처럼 내 뒤통수를 치려는 걸까? 불안감이 일순 들었다.

“나는 노르다 전사로서 정당하고 고결한 대련을 청하고 싶다.”

그러나 돌아온 건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그런 내 도전을 받아 주겠나?”

평상시의 유쾌함과 호탕함, 가벼움은 찾아볼 수도 없는 이가 나를 엄숙히 직시했다.

미묘하게 더 높은 시선은 조각된 매가 색을 품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열기에 녹아내린 금이 굳기 전 띠는 빛깔 같기도 했다.

뜨겁지만 결국 금속이고, 가치 있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거절한다면 응당 물러나겠다.”

베르세르크가 매번 포장해 오던 그녀의 본질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여태껏 꾸준히 봐 온 베르세르크보다 몇 번 마주친 적 없는 웨폰마스터가 먼저 떠오르는 본질.

“확인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냥, 일종의 변덕이었다.

인퀴지터나 데스브링거라면 모를까, 베르세르크는 대련 한 번 받아 준다고 거리가 단번에 좁혀질 사이는 아니니까.

베르세르크 역시, 나와 가까워지는 걸 목적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대련 하나만을 원한다는 판단이 들기도 했고.

또 그녀와의 대련은… 나름 재밌었다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한 번쯤은,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변명이었다.

“시간은.”

“시간을 정하는 것은 도전받는 자의 권리다.”

그보다 시간은 내게 맡기겠다고? 그럼 나야 편하지.

“하면 다가오는 새벽이 아닌 내일 새벽 4시로 하겠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렸다. 미루는 건 취향이 아니기에 가장 빠른 날짜로 잡은 거다.

참고로 오전이나 오후가 아닌 이유는 장비 연구 때문이다. 아무래도 공방에선 싸울 수 없으니 말이다.

더불어… 밤보단 새벽에 싸우는 것이 다른 일행의 의심을 덜 사겠지. 베르세르크는 원래 새벽 네 시쯤부터 단련하러 나가니까.

“장소는.”

“도시 밖. 들어왔던 성문 쪽으로.”

“알겠다. 고맙다.”

고작해야 싸움─대련이라 했으니 목숨조차 걸 필요 없을─을 받아 준 것에 불과하다. 해서 나는 베르세르크의 감사 인사를 외면한 채 여관으로 돌아갔다.

밤이 깊어 감에도 주점만은 왁자지껄해서 그런가. 침대에 누워 수면 시간을 설정하는 그 시간까지 그럭저럭 괴롭진 않았다.

「 ▲ 7시간 00분 자기 ▼ 」

아. 내일, 공방에서 할 게 없으면 거기서도 자야지.

비도, 바람도 없어서 추울 일 없는 공간은 이제 도시뿐일 테니까.

‘슬픔에 잠겨 죽어 버리겠군. 제기랄.’

눈이 스르륵 감기고, 의식이 점멸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