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외쳐 보지만 (4)
“결국 외적으로 얻을 정보는 없군.”
한편, 마이스터가 한참 만에 결론을 내렸다. 그의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진 게 없다. 담담하고 단조롭다.
“그럼 이것 자체를 연구해서 정보를 얻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아니, 한 가지 변한 건 있는 것 같다. 보라색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재밌네.”
어린 나이에 장인 타이틀을 따려면 이런 까마득한 상황에서도 재미를 느껴야 하나 보다.
뭐, 장비의 정체가 궁금하고 또 알고 싶은 내겐 그저 이득이지만.
“일단, 당신. 장비에 대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되면 나한테 말해. 새삼스럽게 떠오를 걸 기대하진 않지만, 만에 하나라는 거야.”
그사이 마이스터가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샤샤샥 적기 시작했다.
“더불어 이것이 당신에게 되돌아가는 성질 말인데, 이것에 대해서도 협조가 필요할 것 같아.”
“협조.”
“하기 싫다면 강제하진 않겠어. 내가 당신의 장비를 산 것도 아니고, 당신의 협조를 살 돈이 있는 것도 아니긴 하니까.”
다만 그 내용은 잘 모르겠다. 평소 같았으면 글 위에 한글 번역본이 떠서 읽을 수 있게 해 주는데… 얘는 번역본이 제대로 안 뜬 까닭이다.
“그렇지만 할 거지?”
글자가 뒤집혀 보여서 해석이 안 된다기엔 글쎄. 번역본이 아예 안 뜨는 건 또 아니라서.
단지… ‘@$%#@해서#[email protected]@#’ 따위로 보일 뿐이지.
“…결과는 공유되어야 한다.”
“당연한 말을.”
왜 그렇게 뜨는 걸까. 나는 눈가를 살짝 좁히며 번역본 아래 깔린 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좋아, 그럼 다음으로… 일정 좀 맞추지.”
그리고 깨달았다. 이거, 지금까지 봐 왔던 글씨들에 비하면 형태가 많이 뭉개지고 흘려져 있는데. 혹시 악필인가? 그래서 해석 못 하는 거야?
진짜 어이가 없네.
“혹시 내일 시간 되나?”
“오전은.”
“그럼 오전에 마탑에서 보는 것도 가능하겠어?”
마탑에서? 공방이 아니라?
나는 눈썹을 살짝 들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일 점심 직후에 마탑으로 가야 할 일정. 오전부터 간다고 해서 손해는 아닐 거란 판단이었다.
최소한 동선 손해는 아니니 말이다.
마탑 자체에 방문하는 건 조금 꺼려지지만, 그건 마법사들 특유의 광기… 똘기… 아무튼 그런 것 때문이니까 큰 문제 없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마탑에서 보는 것으로.”
“확인했다.”
해서 나는 스무스 하게 약속을 잡았다. 마이스터가 맺고 끊음이 확실한 타입이라 참 편했다.
…아니면 그냥, 그가 나를, 컨셉을 모르는 사람이라서 편한 걸지도 모르고 말이다. 일행들하곤 공적인 대화조차 이렇게 길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뭐, 그래 봤자 되르푸 머시기 도시 이후론 모르는 사람에게도 컨셉을 완전히 못 풀게 됐지만.
콰앙!
“대체 어떤 걸 가져온 거냐!”
“잠깐, 카를 현자님. 진정을…….”
“당장 연구동으로……!”
“현자님!!”
별개로 약속이 쉽게 잡혔다고 해서, 다음 날 일까지 쉽게 지나가진 않았다.
역시 마탑은 또라이… 아니, 괴짜들의 탑이었다.
* * *
“악마기사께서 늦으시는군요. 혹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설마 그러겠어요. 그냥 좀 늦으시는 거겠죠.”
“그래도…….”
“그냥 늦잠 자는 거 아닌가?”
“에이, 설마요.”
대화를 듣고 있던 아크메이지도 베르세르크의 말에는 ‘설마’ 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부상으로 2주간 기절해 있는 거라면 모를까, 단순히 늦잠 자는 악마기사는 도무지 상상이 안 가는 탓이다.
“왜 설마인가? 악마기사도 늦잠 잘 수 있다.”
“그건 그런데…….”
물론 베르세르크의 말대로 악마기사가 늦잠 잘 수야 있긴 하다. 사람이 매번 모든 순간에 완벽할 순 없으니까.
더구나 악마기사는 전전전 도시에서 남몰래 눈물 흘린 적─안타깝지만 그 이유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도 있지 않은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도, 분명 벌어질 수는 있다. 전적이 있는 이상 납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아는 것과 별개로 상상은 안 된다, 이거죠…….”
“하긴.”
그렇지만 뭐랄까… 어울리지 않는 건 어울리지 않는 거였다. 악마기사와 웃음이란 단어 두 개가 매치 안 되는 것처럼.
결국 모두가 걱정으로 심란해졌다.
“아, 오는군.”
“그보다 왜 마탑에서 나오시는……?”
다행히 그들의 뇌가 낮잠이나 그 밖의 상상으로 점령되기 전, 악마기사가 슬 모습을 드러냈다. 평상시와 차림이 다소 다른 악마기사였다.
“나리 옷이…….”
지금껏 악마기사가 다른 옷을 입은 적이 없던 건 아니었다.
전투 때야 항상 입던 옷을 입지만, 쉴 때는 나름 다른 옷을 입기도 했다. 그래 봐야 안쪽 셔츠가 바뀌거나, 베스트 대신 코르셋을 차거나, 코트를 바꾸거나 하는 정도였지만.
“악마기사, 마탑에 소속되기로 하셨습니까?”
한데 지금은 가운 형태의 마법사 로브를 어깨에 걸치고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보다 먼저 와 있었나 보군?”
설마 악마기사가 저 로브를 입고 있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아크메이지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악마기사를 훑어보았다.
마법사 전용 로브 사이로 보이는 건틀릿에는 방문증이 매달려 있다.
“…그, 일단 들어가게.”
방문증까지 있는 걸 보아, 아무래도 누군가가 로브를 빌려줘서 입게 된 모양인데…….
아크메이지는 로브를 빌려줌으로써 ‘이 사람은 내 손님이니까 건드리면 작살 낸다’란 뜻을 전하는 마탑의 암묵적 규율을 떠올리며 로브 안쪽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마법사의 로브에는 보통 주인의 이름이 자수로 박혀 있는 까닭이다.
“…어쩌다 카를의 로브를 걸치게 된 건가?”
그렇게 발견한 이름은 놀랍게도 그녀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파도치는 청산호의 수제자이기도 하고, 다음 대현자가 될 재목으로 자주 거론되는 이름이기도 한 덕이다.
동시에 연구만 아는 괴짜이기도 하다. 어쩌다 마주쳐서 로브를 빌려 입는 것이 불가능한 괴짜 말이다.
“이런 잡담이나 하자고 불렀나?”
…하지만 악마기사가 이런 걸 순순히 알려 줄 리 없지.
그녀는 한숨과 함께 일행들을 이끌었다.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악마기사가 바로 뒤에서 따라왔다.
“악마기사, 혹시 마법도 이제 배우시는 겁니까?”
“아니, 설마 그러겠냐고요…….”
“그렇지만 로브를 입으셨다!”
“그러니까 그게…….”
오늘도 악마기사에게 다가가기 위한 두 사람의 노력이 쫑알쫑알 울려 퍼진 건 덤이다.
“아, 아크메이지님!”
“음? 아, 리암 자네인가.”
그때 누군가가 후다닥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프로 펌에 가까운 회색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성주님의 급한 요청으로 인해 대현자님께서 출타하게 된지라, 부득이하게도 오늘은 제가 안내를 맡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지.”
현자 리암은 곱슬기가 너무 심해 북실북실하게 부푼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가볍게 양해를 구했다.
아크메이지에겐 다소 아쉬운 일이었다.
악마기사를 검사하는 데 있어 청산호가 직접 나서 준다면 그만큼 확실한 일도 없을 텐데. 그런 마음이었다.
“해서 오늘 체크하실 분은… 이분이시죠?”
그러나 이 검진 자체가 마탑의 호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청산호의 시간은 많은 대현자 사이에서도 유독 비싼 값을 자랑하는 면이 있었고.
하여 그녀는 아쉬움을 드러내기보다 오늘 일을 진행하길 택했다.
“예, 그럼 이쪽으로.”
리암이 오늘 약속한 것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로브는 잠시 벗어 주시겠습니까? 해당 로브에 교란 마법이 걸려 있어 이대로 검사하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검사받는 곳은 매번 달라지나, 검사 과정 자체는 비슷하다. 나는 마법사들의 요청을 따라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장갑뿐 아니라 코트까지 뜯어 가는 대가로 현자 카를이 빌려준 로브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대가가 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장난 아니다. 현자님 로브를 만지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거 살짝 뜯어 보면… 안 되겠지?”
“저 사람 누군데 카를 현자님이 로브까지 내준 거야?”
“너 모르냐? 악마기사잖아.”
“다들 카를한테 분해되고 싶은 거 아니면 그만두세요.”
“넵.”
그래도 아까 돌아다닐 때 다들 눈치 보며 살살 피하는 게, 다니기 편하긴 했지. 카를이 대체 어떤 마법사이기에 로브만 보고도 뒷걸음질 치나 싶긴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과 함께 마련된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마법사들 여럿이 붙어 내 몸에 무언가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여기, 휴델렌에서 조사한 것도 참고하세요.”
“거긴 본질을 다루는 마법사가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흰바람 대현자님이 주도한 거니까 믿을 만할 거예요.”
“아, 그렇다면야.”
아, 가만히 누운 채로 사람들 말만 들으려니 잠이 솔솔 온다.
“건강엔 이상이 없는데. 오른팔의 마기 수치가 자료보다 더 강해진 것 같긴 하지만.”
“그보다 어떻게 이런 형태를 띠지? 흰바람 대현자님이 만든 봉인구를 차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 때문일까요?”
“글쎄요. 그렇다기엔 좀 이상하긴……?”
그래도 자면 안 되겠지?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애써 잠을 몰아냈다. 마법사들이 혹시라도 내게 쓸 만한 단서를 흘릴까 싶어서였다.
“이런 형태는 좀비보단 악마계약자에 가깝지 않나?”
그렇지만 이건 좀.
“움직이면─!”
콰직.
“헙.”
나는 몸을 일으키던 도중, 무심코 침대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건틀릿 자국이 남았다.
철판보다 연약한 마법사들이 입을 다문 건 동시였다. 여긴 휴델렌 마법사들보단 깡이 좀 덜한가 보다.
“방금 봤나요? 마기가 유동했는데.”
“봤습니다.”
“봤어요.”
“마력으로 정화가 됐나요? 제대로 못 봐서.”
“어, 제가 봤을 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흠. 그럼 본능적으로 쓸 땐 마기 자체가 쓰이는 건가?”
…정정하겠다. 깡이 덜한 게 아니라 더한 것 같다. 눈이 회까닥 돌았는데?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나는 악마계약자란 단어를 따져 물어야 하나, 아니면 저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줘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곤 끝내 후자를 택했다.
휴델렌에서도 비슷한 소리를 들었으니 이번은 알아서 납득하는 게 더 맞겠다 싶어서였다.
“…….”
그래도 개빡친 얼굴은 해야겠지.
나는 얼굴을 살벌하게 가장한 채 순순히 그들의 요청을 따랐다.
오른팔로 한 번, 왼팔로 한 번. 약하게, 강하게. 마법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야, 이거 진짜 이상하네요. 계약한 게 아니면 어떻게 오른팔에만 마기가 몰려 있을 수 있죠?”
“오른팔이 핵이라고 하기엔… 역시 그렇죠? 흰바람 대현자님이 그걸 모를 리는 없고.”
“애초에 오른팔이 핵이면 진작에 오른팔을 자르도록 시켰을 겁니다. 저건 그냥 육신에 악마가 깃든 게 맞아요. 단지 깃든 악마가 발생시키는 마기를 전부 오른팔로 내몬 것뿐이고.”
그러다가 예전에 한 번 들었던 이야기도 튀어나왔다. 크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오른팔을 잘라 봤자 내 몸속의 악마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 구태여 손해 볼 필요 없다는 소리니까.
애초에 내가 팔 자를 생각을 안 한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고.
“봉인구로 인한 것이라 하기엔… 그 이전에도 오른팔에만 마기가 몰려 있었다고 하니까 그것도 아닐 테고.”
“이게, 진짜 계약의 효과가 아니라고요? 그냥 계약할 때 마기를 담는 그릇으로 오른팔을 쓴 거 아니에요?”
“…벤, 입조심 좀 하시죠. 악마기사에게 살해당하기 싫다면.”
“오.”
그보다 저놈은 진짜 컨셉이랑 싸우고 싶은 건가. 나는 계약 운운하던 놈을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짙게 노려보았다.
마기의 분포 형태가 악마계약자 같다고 한 거니 망정이지, 나보고 계약자라고 했다면 컨셉상 진작 칼부림 났을 거다.
“…그럼 진짜 본능적으로 마기를 오른팔에 내몬 걸까요?”
그래도 연구 열정이 엄청난 것과 별개로 목숨 아까운 건 아는지, 그들은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멀어졌다.
“그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계약자들은 마기를 순도 높게 쓰기 위해서라도 분리해 둔다지만… 어차피 마기를 마력으로 치환해 쓸 거라면 마기를 한곳에 모아 둘 필요 없잖아요.”
“…아니, 어쩌면 의미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크메이지님 말씀에 따르면 갈수록…….”
덕분에 내 귀에도 들려오는 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어쩔 수 없긴 한데, 아쉽다. 이번엔 뭐라도 얻을 수 있나 싶었는데.
쾅!
그러던 찰나, 내가 검사를 받던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입구에서 대기하던 용사 일행이 화들짝─베르세르크는 제외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던 눈치니까─놀라 몸을 일으켰다.
“뭐야.”
“마이스터! 마법사가 돼서, 함부로 문을 열고 다니면……!”
“글쎄요. 보통이라면 저도 존중해 주겠는데, 카를 현자님의 손님한테 손을 댄 상황에까지 그럴 필요 있나?”
그보다 마이스터는 대체 왜 온 거야.
“리암 현자님도 아시잖아요. 로브를 빌려준 대상을 건드리는 건 죽을 각오가 됐다는 말이란 거.”
“오해야. 그리고 그건 카를이 직접 올 일이지, 왜 네가…….”
“카를 현자님이 빠르겠어요, 제가 빠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온 것뿐이에요. 그리고 오해라기엔 로브에서 강렬한 신호가 왔다고 하셨는데?”
“로브는 건들지도 않았는데 왜 신호가……!”
어… 글쎄. 건드린 것 같은데?
문 앞에 서 있는 마이스터의 눈이 데굴 구르고, 내 시선도 한쪽으로 움직였다. 자연히 리암도 마이스터─나는 뒤편에 있었으니까 내 시선의 움직임은 못 본다─를 따라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하하하…….”
마법사 하나가 카를 현자의 로브를 들고 멋쩍게 웃고 있었다. 딱 봐도 범인이었다.
“너……!”
리암이 머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