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외쳐 보지만 (2)
“마법을, 쓸 줄 모른다.”
마탑 소속인데 마법을 쓸 줄 모를 수 있나? 아니면 그냥 이론 계열인가?
그보다 마이스터에게 이런 설정까지 있었어?
나는 당혹감을 뒤로하고 곰곰이 기억을 뒤집어 보았다. 그런 설정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마법은 안 쓰고 과학기술로 때려 박는 캐릭터였던 건 기억이 난다. 스킬 버튼을 누르자마자 포격 장비를 꺼내 레이저 빔을 갈기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니까.
하면 마법을 못 쓰는 건 그때도 있던 설정이었을지도.
근데, 그러면 본질은 어떻게 알아내는 거지? 과학 기법인가? 역시 과학인 거야??
“설마 마법을 쓸 줄 모른다고 해서 분석을 못 할 거라는 편협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갇혀 있는 건 아니지? 만약 그런 거라면 굉장히 불쾌해.”
그사이, 마이스터가 발 빠르게 외쳤다. 내가 뭐라 할 거라 생각했나 보다.
한두 번 경험해 본 게 아니라는 듯, 당당한 말과 달리 그의 얼굴은 다소 굳어 있다.
“참고로 날 의심하는 건 상관없지만, 내가 이뤄 낸 업적을 의심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어.”
어떤 방법을 쓸지 궁금하긴 했어도 의심할 의도까진 없었는데…….
애초에 공방 한쪽에 나열된 훈장과 증명서, 비싸 보이는 온갖 기계들만 봐도 불신할 여지는 없지 않나? 목 좋은 곳에 위치한 가게도 그렇고, 오는 길에 마이스터를 알아본 사람들도 그렇고.
사기도 이 정도쯤 되면 그건 예술이다. 일반인에 불과한 나는 그냥 넘어가 줘야 하는 예술.
하므로 나는 팔짱을 낀 채 마이스터를 응시했다.
그러곤 오해를 사지 않도록 천천히 말을 골랐다. 되짚어 보니 내가 말문을 오해할 만한 형태로 트긴 했던 까닭이다.
“의심한 적 없다. 마법을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아낼 것이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가 고려했을 뿐.”
솔직히 내게 익숙한 것이 있다면 마법보단 과학 쪽인지라. 나는 범죄 수사 드라마에서 봤던 온갖 수사 방식을 떠올렸다.
그러자 외려 더 흥미진진해졌다. 마법은 빛이 뿅뿅 하면 뿅 하고 결과값이 튀어나오는 식이라 보기엔 별 재미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지만 과학 수사는… 그래도 재밌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이 세계관의 과학 지식은 정말 궁금한데.
게임에선 뜬금없이 SF 수준으로 나왔지만, 여기서까지 그러진 않을 것 아니야. 장비 수준만 봐도 최소한 그래 보이진 않는데.
“…그래?”
내가 잿밥에 관심을 두는 사이, 마이스터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내 답이 마음에 든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최악까진 아닌 듯 보여, 나는 마음을 놓았다.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서 좋네. 그리고 분석까진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 걸려. 어쩌면… 며칠까지 늘어질지도 모르고. 조부 덕에 많은 것을 봐 왔다 자부하는 나에게도 이런 건 처음이거든.”
그렇구만. 평소였다면 좀 곤란해졌을 수도 있었겠네.
“상관없다.”
그러나 나는 베뮈르헨에 대략 한 달은 더 있을 예정이다. 편지가 그때 도착한댔으니까.
“장갑은 두고 가지.”
“그래.”
그러니 이 정도 기다림은 문제도 아니다. 나는 이참에 새 장갑을 사서 껴야겠다 생각하며 벽에서 등을 떼었다. 미리 기대 두었던 투헨더 역시 챙겼다.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장비를 분석할 수 있게 해 준 대가로 공방의 출입권을 주지. 장갑을 확인할 때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들어올 수 있도록. 아, 물론 내가 없을 땐 못 들어와.”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지. 이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간단한 의뢰라면 그것도 받아 주겠어. 행운으로 알아. 내게 의뢰를 할 수 있는 대상은, 그것도 지금처럼 바쁜 기간에 직통으로 의뢰 가능한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그래도 이건 확실히 좋은 것 같다. 당장은 의뢰할 게 없더라도 연줄 자체가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
“망가트리는 일이 없도록 해라.”
“당연하지.”
각설하고, 더 이상 남을 이유가 없다면 잠시 나갔다 와야겠다. 급하게 오느라 머물기로 한 여관방을 아직 확인 못 했어.
덜컹.
나는 손님이 나가는데 돌아보지도 않는 마이스터를 뒤로하고, 공방을 나갔다. 두꺼운 철문이 쾅 소리가 나게 닫혔다.
* * *
“이건가?”
아크메이지는 그녀가 의뢰한 물건 중 하나를 보며 턱을 쓸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파도치는 청산호가 한마디 했다.
“그래. 그렇지만 이건 시제품이지, 완성품은 아니다. 제작을 맡은 녀석이 동떨어진 디자인만은 용납할 수 없다며, 착용할 당사자가 올 때까지 제작을 미룰 거라고 했으니까.”
“…대명장이라 그런가, 까다롭군.”
“그렇지만 네가 보내 준 수식 자체는 전부 보완해서 시행 착오까지 완료했으니, 치수만 재면 금방 제작될 거다.”
“흠. 알았네. 하면 치수 재러 본인 공방에 찾아가면 되나?”
“그러는 게 나을 거다. 본인 볼 일이 아니면 마탑에 오는 걸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 아, 간 날 바로 치수 잴 생각도 버려라. 첫 방문은 약속 잡으러 간다쯤으로 여기는 게 나을 거야.”
“조언 고맙네. 명심하지.”
보완된 수식의 완성도는 시제품에 걸린 마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녀는 그녀가 최초로 완성했을 때보다 간결해지고 효과가 증가된 수식을 보며 역시 맡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제일 비싸지만, 그만큼의 값을 하는 청산호다웠다.
“다른 건?”
“여기 있다.”
아크메이지는 흡족한 마음으로 다른 의뢰품도 확인했다. 물건을 감싼 비단이 그녀의 손길 아래 하나하나 풀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마법은 아직 걸지 않았다.”
“어째서?”
한 달이나 됐는데 아직도? 그녀는 그런 마음으로 되물었고, 그 대가로 청산호의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해석하자면 “정말 몰라서 되묻는 건가?” 정도가 되겠다.
“아니, 자네라면 금방 개량할 줄 알았지.”
“내 능력을 높이 사는 건 고맙지만, 과대평가는 그만두지. 나라고 해서 수식 개량이 쉬운 건 아니니까.”
거기에, 이제 와선 연구 목표가 너무 확대되었다. 청산호는 이 수식 개량에 대현자 몇 명이 붙어 있는지 아느냐며 일갈했다.
여행으로 인해 연구할 처지가 못 되어, 아이디어만 떠올린 뒤 다른 마법사들에게 넘기고 있는 아크메이지의 양심을 정확히 찌르는 일침이었다.
“저번에 어느 정도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커졌다는 말을 들으니 좀 미안하군.”
“알면 됐다.”
“음. 그래도 완성은 될 테지?”
“대현자 일곱에 현자만 사십 명이 달라붙었다. 못해도 2주 안엔 완성될 거다.”
“그거 다행이군.”
아크메이지는 납득하며 비단을 마저 풀어헤쳤다. 그러자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롱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거냐? 베르세르크를 불러온 이유가?”
“맞네.”
동시에 뒤에서 하품이나 하고 있던 베르세르크가 나섰다.
아크메이지는 그녀에게 롱소드를 넘겼다. 다른 건 몰라도 무기 보는 눈 하난 자신보다 베르세르크가 더 나을 테니 행한 일이었다.
“어찌, 괜찮나?”
“음.”
베르세르크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받아 든 물건을 왼손 오른손 번갈아 잡으며 휘둘렀다. 미약한 파공성과 함께 눈결처럼 흰 검신이 허공을 갈랐다.
“나쁘지 않다. 주문 제작보단 기성품에 가깝긴 하지만.”
“…기성품에 가깝단 건 안 좋다는 것 아닌가?”
그녀의 물음에 베르세르크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기본에 충실한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이 검은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보편적이다. 누구 한 명에 최적화되어 있진 않지만, 누가 잡아도 이 검을 편하게 쓸 수 있을 거다.”
제법 좋은 평가였다. “악마기사와 비슷한 체격일 때에 한해서겠지만.” 뒷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군.”
악마기사에게 줄 선물이니, 타인이 쓸 것을 상정할 필욘 없다. 아크메이지는 하얀 검을 돌려받았다.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소재로 만들어져서일까. 보조할 마법이 하나도 걸려 있지 않은 검에는, 그럼에도 은은한 힘이 느껴졌다. 존귀한 힘이었다.
“참고로 검집은 아직 제작 중이다.”
“그래, 그렇구만.”
“…문제 있나?”
“그, 음. 이 검 말일세.”
다만 이것에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그건 검의 외형이라.
“너무 과하게 장식한 것 같지 않나……?”
그녀는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지점을 지적했다. 담담한 청산호마저도 그 말엔 쉬이 대답을 내주지 않았다.
“…깎은 놈 취향이다. 그래도 실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닐 거다.”
“그래야지, 당연히.”
검의 기능을 제하고 외형만 따져도 가히 예술 작품의 반열에 올릴 수 있다.
그렇기에 아크메이지는 갈등했다.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검을 악마기사가 과연 쓸까? 이제라도 검을 검게 코팅하거나, 장식을 빼야 하는 건 아닐까?
“됐고, 검에 대한 추가금은 바로 줬으면 좋겠는데. 이왕이면 수식 보완 및 개량과 장신구 몫도.”
“수식값이야 그렇다 쳐도, 장신구는 아직 제작 단계면서 요구하긴가?”
파도치는 청산호의 재촉에 아크메이지는 검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담뱃대를 물고 있던 청산호가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돈 떼먹을 거라고 의심하는 건가, 지금?”
“그럴 리가 있나. 먼저 돈을 달라고 하는 게 의외라서 그렇지. 자네가 새삼 돈이 궁할 리는 없잖나.”
“…….”
“…왜 그런가?”
“…안타깝지만, 네 예측이 맞다.”
“……?”
“후.”
아크메이지는 청산호의 긍정에 당황했다. 베뮈르헨 마탑 지부는 소속 마법사들의 특성상 가난하려야 가난할 수가 없던 까닭이다.
아무렴, 전 세계의 아이템 중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아이템을 팔 때마다 대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올 건 당연지사고 말이다.
한데 그런 마탑 지부의 종주가 금전이 궁하다? 이건 말이 안 되었다. 무슨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정확힌,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이 없다.”
“아, 그런 의미였군. 대체 어쩌다?”
“그리다나가 어언 일인지 상단 내부에 꿍쳐 놓았던 귀한 재료들을 대거 풀어 버려서 말이지.”
“…아하.”
하지만 이런 일이라면 나름 납득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저 현금 부자가 급박한 상황이 된 건 이해 못 하겠지만.
“참고로 네 의뢰에 들어갈 재료도 저기에 있다.”
“그럼 지급해야지. 한데… 그렇게 급하면 자네가 만든 물건으로 셈하면 되지 않나? 아, 주기 싫다는 의미는 아닐세. 순수한 궁금증이지.”
“오해 안 한다. 그리고 현물로 값을 치르는 건… 나도 그러고 싶었다만, 현금이나 보석류가 아니면 안 받겠다더군. 하니 어쩔 수 있나.”
“…왜? 현금으로 무겁게 받느니 자네 물건을 서부까지 가져가 파는 것이 더 이득일 텐데.”
“몰라.”
하나 상황이 그렇다는 걸 뭐 어쩌겠는가.
그녀는 검에 새겨질 마법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값을 지불했다. 어쩐지 값을 지불할 때 현금으로 가져오라더니. 그런 깨달음은 덤이었다.
“아, 아크메이지님!”
“오셨습니까요, 법사 나리.”
각설하고 이곳에서 당장 봐야 할 일은 다 끝났다. 그녀는 검을 든 청산호와 함께─청산호의 목적지는 작업실이었지만─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법 아이템을 실컷 구경하고 있던 이들이 반색했다.
“…딱 봐도 용사님이군. 옆쪽도 제법 괜찮아.”
“허허. 그렇지?”
“아,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요.”
“그래, 반갑다. 나는 이곳의 주인, 파도치는 청산호다.”
파도치는 청산호는 본질 마법의 대가. 그의 눈은 사람의 본질마저도 꿰뚫을 때가 있다.
하여 아크메이지는 청산호의 말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다른 건 몰라도, 청산호의 평가는 어긋나는 일이 드물었다.
“한데 들고 계신 건…….”
“그게… 이번에 의뢰를 맡겼다던 물건입니까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엄청… 비싸 보이네요.”
신성과 순수, 시작을 뜻하는 백색에 인퀴지터가 순수한 반응을 보였다.
반면 데스브링거는 사치스럽기까지 한 디자인에 다소 미묘한 기색을 보이는 중이다.
“생긴 게 꼭 성검 같네요……. 이거, 나리까지 정화하는 것 아닙니까?”
“설마 그런 걸 선물이랍시고 준비하겠나… 대비는 해 뒀으니 걱정 말게.”
안 그래도 악마기사가 타격 입을 가능성을 고려해, 검 손잡이는 특수한 물질로 코팅할 예정이다. 맞춤 검집도 마찬가지다.
검집이 다 만들어지고, 그것에 검을 넣기만 하면 이것이 악마기사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크메이지님, 관련해 묻고 싶었습니다만, 악마기사께서 이것을 쥘 수 있게 되더라도 힘을 싣는 데 문제가 생기진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전에 마력을 실으면 폭발하실 거라고 하셨던 게 기억이 나서…….”
“그것도 방법을 마련해 두었으니 걱정 마시지요.”
인퀴지터가 지금 제시한 문제점도 마찬가지다.
아크메이지가 청산호에게 맡긴 의뢰 중, 수식 개량 쪽이 바로 이것을 위한 준비였기 때문이다.
“완성되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나… 그것도 곧일 테니까요.”
그녀는 데스브링거로 하여금, 신전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제기된 악마기사를 떠올렸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마법─신성력을 여과하는─은 이제 부정을 여과하는 것으로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흰바람이 마력 먹는 뱀을 조사하며 밝혀낸 정보와 한때 악마기사가 보여 줬던 해룡의 구슬까지 참고한 개선이었다.
“아마 완성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겁니다.”
이 연구가 시작된 최초의 목적은 악마기사가 이런 소재에도 마력을 담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이 연구가 완성되면 악마와 악마계약자들은 제법 고역을 치르게 될 것이다. 신성력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정을 여과하거나 정화하는 마법이 탄생할 테니까.
목표가 일개 여파에 불과해진 순간이었다.
“그게… 가능한 겁니까?”
“가능한 것이기에 이리 된 것 아니겠습니까. 비록 우리 모두가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을 뿐이지.”
과거엔 이런 식의 발상을 아무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여러 일을 겪고 또 새로운 것들이 등장하게 된 지금은 다르다.
그녀는 완성품을 눈에 그려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제야 개발됐다니 뭔가 다행이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러네요.”
“…개발이 늦어서 미안하군.”
“아니, 법사 나리를 탓하는 게 아니라요.”
아크메이지는 허둥지둥 말을 수습하는 이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도 개발 기간 동안 ‘이제 와서야 이런 걸 떠올리다니’ 따위의 생각을 몇십 번이나 했으니 그의 힐난은 타당했다.
“근데 이거 악마기사가 받긴 하겠나? 베르세르크가 생각하기엔 안 받을 것 같은데.”
“…조용히 해요, 투사 나리.”
“…그, 그래도 이 정도면, 바, 받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베르세르크가 한 말도 타당하긴 마찬가지다. 예전에 샀던 장검도 아직까지 안 받아 준 악마기사가 과연 이것을 받을까.
애써 선물을 준비한 마음과 별개로, 아크메이지도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서글프게도.
“볼 것 다 봤으면 난 이만 가 보지.”
“그러게. 다음에 보지.”
그사이 청산호가 자리를 떴다. 아마 작업실로 내려가는 즉시 검 제작에 대한 나머지 절차를 밟을 것이다.
“…저, 법사 나리. 기사 나리는 지금 쉬고 계실까요?”
“글쎄… 그러지 않겠나?”
아크메이지는 청산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한편, 상대의 물음에 모호한 추측을 내놓았다. 어쩔 수 없었다. 따로 행동하게 된 후로 악마기사의 행적을 알기란 매우 까다로워졌다.
그가 쉬는지 혹은 일하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걱정 말게. 안색이 나쁘진 않았잖나.”
그런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단서는 고작 공적인 일로 만나는 순간과, 도시 사이를 이동할 때뿐이었으니.
다행스럽게도 그때 본 악마기사는 썩… 나쁜 상황 같진 않았다.
그래. 인간다운 삶을 전부 포기한 채 맞이하는 평온도 평온이라 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 괜찮은 축에 속할 것이다. 기나긴 겨울에 갇혀, 무겁디무거운 눈에 깔려, 천천히 압사하는 것도 겉만 보면 고요한 것처럼.
“그럼, 결국 이건…….”
“그래도 포기하진 말게.”
하나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도 되는가?
“그 이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할 말은 아니네만…….”
그건 아마 아닐 것이다.
“난… 인퀴지터와 자네가 하는 일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네.”
그렇지만 그녀가 직접 나설 수 있는가? 그것 또한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실패가 두려울 나이였다.
“…정말요?”
아크메이지는 오래전 과거를 떠올리고, 또 근래의 일들을 떠올렸다. 실패, 실패, 실패, 전부 실패. 더는 나설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분야에 한해서 그녀는 파멸적으로 재능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네.”
그럴 바에야 뒤에 물러나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
뒤에서 묵묵히, 받쳐 주는 것이야말로 정말 나은 판단일지 몰라. 지난 한 달처럼.
“걱정 마십시오, 아크메이지님! 전 포기하지 않습니다!”
“…네. 좋습니다, 인퀴지터.”
해서 아크메이지는 그녀가 나설 생각을 고이 접고,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를 응원하기로 했다.
이게 옳은 판단일지는 글쎄. 멀지 않은 시기에 밝혀지리란 예감이 왔다. 이제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 * *
할 게 없다.
나는 잡은 여관방을 확인하고, 프레드릭의 안위를 다시 한번 챙긴 다음, 모험가 길드로 가 퀘스트 목록까지 싹 다 뒤져 본 후 결론을 내렸다.
진짜 할 게 없다.
“그리다나에서 수송 인력을 구하는데, 그건 어떠신지…….”
수송 임무면 다른 도시까지 가야 하잖아. 그건 곤란하다.
나는 사무원의 추천을 거절했다. 그러곤 갈음하듯 당부했다. 내 이름으로 편지가 오거든, 내가 숙박하는 여관으로 사람을 보내 달란 부탁이다.
“약간의 값을 지불하시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요.”
“지불하겠다.”
모험가 길드는 이것도 의뢰로 취급하는 듯 흔쾌히 받아 주었다. 이제 편지 잊어 먹을 걱정은 없다.
“안녕히 가세요!!”
하면 길드에서 볼일은 이제 더 없다. 나는 길드 건물을 나오며 알게 모르게 허리를 폈다. 새로 산 가죽 장갑을 낀 왼손은 허리에 얹어져 스트레칭을 은근히 돕는다.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한담. 의뢰가 없으면 지루한 건 둘째 치더라도 지갑을 채울 수가 없는데. 매일 아침마다 길드를 털어 봐야 하나?
나는 조잘거리는 두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유독 심심한 귀를 긁적였다. 여러모로 난처했다. 이렇게 여유 있을 때 아니면 돈 벌 시간이 없는데.
쨍강쨍강.
한데 그 순간,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둔중하기보다 경박해서 귀가 시끄러워지는 종소리였다.
절로 시선이 움직였다.
“안으로 들어가!”
“무슨 일이야?”
“들어오쇼!”
“일단 들어와!”
그와 동시에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물 안에 있던 이들은 현관문을 활짝 열되 창문을 닫았고,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은 근처 건물에 들어가거나 한쪽으로 후다닥 달리는 식이었다.
“어서 들어오슈!”
“잠시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아는 사이건 모르는 사이건 일단 저 신호가 울려 퍼지면 건물 안에 들여보내 주는 건가. 근데 저 신호가 대체 뭐기에?
“이봐.”
나는 창문을 다 닫고 사람들에게 손짓하던 이에게로 다가갔다.
“당신도 어서… 아, 모험가?”
“저게 무슨 신호지?”
“응? 아, 외지인인가.”
그녀는 머리를 살짝 긁더니 성벽을 가리켰다.
종소리는 거기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무언가 쳐들어왔으니 민간인은 건물 안으로 대피하란 신호요. 당신도 싸울 게 아니면 어서 들어오쇼.”
쨍강쨍강. 한쪽을 시점으로 종소리는 점차 퍼져, 도시를 둘러싼 모든 성벽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화륵화륵. 봉화도 마찬가지였다.
“…사양하지.”
무언가 쳐들어온 게 사실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나는 종소리의 시작점을 목적지로 잡고, 발에 힘을 주었다.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면, 걱정할 필요 없…….”
쾅!
“…는데. 귀신이여?”
아, 힘을 너무 줬더니 바닥이 좀 부서졌다. 흙과 달리 돌바닥은 보수도 어려울 텐데.
나는 그것에 죄송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일단 탄력이 붙은 다리에 힘을 더 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대피한 상태라,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곧 나나 일행이 도시에 들어왔을 때 지나쳤던 성문이 보였다.
“물러나! 더, 더!”
“건물에 있는 자들은 얼른 위층으로 올라가라! 저 검은 물에 닿으면 안 된다!”
“흐악, 흐아아악!”
무슨 일이 벌어졌나 했더니, 저주였나.
나는 예전에도 몇 번 겪었던 광경을 발견하곤 눈썹을 와락 찌푸렸다. 그러곤 미처 피하지 못한,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을 뒤로 던지기 시작했다.
“당신, 닿으면 안 되는……!”
“물건을 딛고 버텨라.”
내 신발은 저 저주를 통과시키지 않는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저주의 물을 밟고 움직였다.
이미 저주에 휩쓸린 자들은 어쩔 수 없으나, 순발력으로 짐에 매달려 저주를 피한 자들은 내가 구할 수 있었다.
“가, 감사─.”
“필요 없다.”
“우아아악!”
안아서 옮겨 주기엔 대피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중 아슬아슬해 보이는 사람도 많고.
하여 나는 근처에 있던 짐마차를 냅다 부쉈다. 마력을 두른 다리가 마차 옆면을 긁은 순간, 뒤집은 U 자 형태의 지붕이 찢어발겨지며 그대로 날아갔다.
콰가각.
물론 그로 인해 마차 안에 실려 있던 짐 일부가 상하긴 했다. 그러나 내 알 반가? 당장 사람 태울 수 있는 게 중요하지.
쿵!
“윽.”
안전지대가 마련된 순간, 나는 사람들을 죄다 그쪽으로 던졌다.
마차가 그렇게 넓지 않아서 사람들끼리 부딪치는 불상사가 종종 벌어졌으나, 그뿐이었다. 마차 밖으로 튀어 나가거나 마차가 균형을 잃거나 하진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서로 부딪치며 아픈 건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치면 되니까.
“으, 우앗!”
그러던 순간, 다리 난간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서 있던 아이 하나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잡았다.”
와오, 십년감수했네.
나는 아이를 가까스로 낚아챈 후, 한 손으로 받쳐 안았다. 마차로 던지기엔 거리가 좀 있었다.
“거, 기사님! 이쪽으로!”
거기에 마법사들까지 도착해서야.
나는 솜털을 몽실몽실하게 피워 낸 마법사의 외침에 아이를 돌아보았다.
“눈 감고, 마음 속으로 십 초만 세는 거다. 숫자는 셀 수 있나?”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아이는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딱 십 초다. 그동안 어떤 느낌이 들어도 눈 뜨지 마라. 숫자는 반드시 속으로 세고.”
“네…….”
아이가 눈을 딱 감고, 수를 세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를 솜털 쪽으로 던진 것도 동시였다.
폭신.
“좋아, 받았다!”
“……?”
좋아, 운 좋게 아이가 울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자유로워진 두 손을 움직였다.
“흐악!”
“시끄럽다.”
“흡.”
아직 남아 있던 사람들이 마저 구해졌다. 마법사들이 솜털을 거두지 않은 덕에 더 이상 마차로 던질 필욘 없었다.
성벽 너머까지 포함해서, 저주의 영역에서 간신히 버티던 사람들이 금세 전부 구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