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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89화 (189/389)

189화 남아 있을 수 있다고 (5)

[하나가 더 있어. 하나가 더…….]

부모님의 단말마를 느끼며, 성인을 목전에 둔 소년은 나무 뿌리와 수풀 사이에 숨긴 몸을 달달 떨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이 망할 애송이가!]

그러다 잠깐. 목소리가 분노에 찼다.

[아직도 발악을 하는 거냐……!]

주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란 오직 하나뿐인데, 산 사람의 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데. 그것은 무언가를 향해 분노하고 있었다.

“내가, 질 것 같아?”

그러다 목소리가 변했다.

[하, 그럼 너 따위 애송이가 감히 나를 이기…….]

아니다. 같은 목소리였다.

“더는, 안 돼.”

다른 사람이었다.

“더는…….”

다른 사람…….

“더는 사람을 죽여선…….”

다른 사람……?

[돼.]

그 순간, 소년이 숨어 있던 나무가 부서지고 사방에 불이 붙었다. 까만… 아주 까만 불꽃이었다.

너무도 검어서 밤처럼 느껴질 만큼.

* * *

“악마는, 오직 죽이는 것만이 답이다.”

데스브링거는 그 말을 들은 순간 깨달았다.

이 새끼는 염병, 말이 통할 새끼가 아니다. 눈알에 직접 박아 줘도 못 믿고 의심할 놈이란 말이다.

“돌겠네, 진짜.”

그렇다고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부모님이 저렇게 죽었다면─그는 부모님이 없어, 에밋으로 치환해 상상해야겠지만─누군들 저런 의심병이 안 생기고 배기겠는가.

하지만 그런 사정이 있다고 해서 저이에게 악마기사를 매도할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다.

데스브링거는 어느 쪽도 물러나기 힘은 팽팽한 상황에 괜한 짜증만 치밀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

“…대리자님.”

“악마는 교화가 불가능하다는 말도, 상상 이상으로 악독하다는 말도 맞기는 하니까요.”

그러던 찰나, 인퀴지터가 등장했다. 외부에서 찾아온 조력자였다.

“아이나 노인 같은 약자를 가장해 사람을 함정에 빠트리는 악마도, 연인이나 가족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을 홀리는 악마도 있는 세상이지 않습니까. 보기 드물고 무력 자체는 약해서 고위 악마로 취급되는 편은 아닙니다만.”

그녀가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타이밍 자체는 좋았다. 데스브링거는 놀람을 갈무리하고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형제님, 악마기사는 악마가 아닙니다. 하므로 형제님께서 말한 모든 예시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대리자님, 그 믿음은…….”

“형제님.”

전등을 허리춤에 달고 있는 이가 눈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그분이 진정 악마였다면,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진 못했을 겁니다. 저보다 그분이 더 강하니까요.”

어딘가 씁쓸한 인정이었다.

“대리자님, 어째서 그런 말씀을……!”

“그러니까 그분은 악마가 아닙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렇습니다.”

“…용사님을 노리는 걸지 어떻게 압니까!”

심문관의 외침에 인퀴지터가 눈을 깜빡였다. “농담이죠?” 데스브링거 역시 저도 모르게 물었다. 다소 반사적인 물음이었다.

“형제님, 저는 아직도 무지한 사람입니다만… 그런 제가 보기에 저보다 강한 악마가 불쾌함을 참아 가며 저와 여정을 함께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건!”

“심지어 그분은 제 신성력으로 인해 여러 번 각혈도 하셨고, 도시에 도착하면 신전에만 계셔야 했고 또 봉인구도…….”

어쨌거나 인퀴지터는 그처럼 비꼬는 대신 손을 접어 가며 정당한 이유를 찾아 주었다. 악마기사가 진정 악마라면 전혀 감수할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형제님.”

그럼에도 반론은 들어온다.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악마기사랑 참 똑같았다. 그도 받아들이기 싫은 진실은 부정하는 성향이 있으니까.

“사실은 알고 계시잖습니까. 마기를 제외하면… 그분의 행동은 흠잡을 것이 없다는 것을.”

“…….”

다만, 그래. 인생의 한 조각을 상실한 자들은 모두 저러는 걸까.

데스브링거는 한때 그의 모습은 생각하지 않은 채 속으로 투덜거렸다. 물론 자칫하면 악마기사까지 험담하는 꼴이므로, 길게 끌지는 않았다.

“겉모습이 아닌 안쪽을 봐 주십시오. 하면 그분이 얼마나 존경받을 만한 분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전… 모르겠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아집과 편견을 버리고 나니 더 넓은 것이 보이더군요. 형제님도 분명 그리할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자가 악마가 아니라면, 어째서 제 가족들을 건드렸단 말입니까?”

“…예?”

아. 그것.

“악마기사께서 형제님의 가족분께 위해를 끼치셨습니까?”

“…위해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이면 제 가족을 찾아가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특별한 관계가 없는, 처음 보는 사이일 텐데도! 그것에 진정 의미가 없단 말입니까?”

그건… 그건 확실히 우연이라 보기 어렵긴 하다. 악마기사를 아는 데스브링거조차도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을 정도니까.

“말해 주십시오, 대리자님. 그것은 정말 우연입니까……!”

그렇지만 악마기사가 심문관의 가족들을 해치려고 한 것은 아닐 테다.

악마기사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을 잃었다는 상실감으로 복수를 다짐한 사람이고, 설마 그런 사람이 남의 가족을 노릴 리는 없으니까.

그러니 그것만은 확실하다. 아마도 그렇다.

“잠시만…….”

그때 당황한 얼굴의 인퀴지터가 그에게 바짝 붙었다.

“너는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멍청한 샌님의 도움 요청이었다.

“악마기사가 그런 이유로 만난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나도 몰라요.”

문제는 그도 모른다는 것이다. 알면 이미 맞받아쳤을 거다.

“그, 그럼 어떻게 하지? 정말 우연이진 않을 것 아닌가!”

“글쎄요. 저는 오히려 억만분의 확률을 뚫은 우연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뎁쇼.”

그도 그럴 게, 악마기사가 뭘 알고 찾아갔겠는가. 미친 발언이지만, 설마 악마기사 속 악마가 움직였더래도 그렇다.

관상만 보고도 너는 ○○○의 혈육이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악마든 악마기사든 심문관의 가족을 쌩으로 찾아가기란 요원하다.

“아니면… 아이가 먼저 다가왔다거나.”

오히려 이쪽일 가능성이 더 크다.

갑옷이 없어서 모험가로 오인받는 경우가 더 많지만, 악마기사를 진짜 기사로 오해하는 사람 수도 꽤 있지 않나.

거기에 나리, 어른이라면 몰라도 아이에겐 엄청 상냥한 편이니까… 기사로 착각하고 다가온 아이가 검을 보고 싶어 했다면 구경시켜 줬을 수도 있다.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 무슨 아이?”

“아닙니다요.”

그러나 데스브링거는 이 모든 걸 설명하는 대신 침묵을 고집했다.

방금 대화에서 나오지 않은 정보를 그가 왜 알고 있느냐 묻는다면 그땐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개인생활을 존중해라! 하면서 머리를 방패로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역시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다.

“대리자님?”

“아, 그!”

각설하고, 심문관의 인내심이 끄트머리를 보였다. 인퀴지터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곧 외쳤다.

“그럼 물어보러 가지요! 우연인지 아닌지 물어보면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의외의 현답이었다. 악마기사가 머무는 숙소를 찾아야 하고, 그의 밤잠을 방해해야 한다는 점만 빼면.

“…부정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물어보지 않는 것과 거짓된 답이라도 들어 보려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샌님도 본인이 임기응변으로 내놓은 답이 꽤 마음에 드나 보다. 그대로 밀고 나갔다.

뭐, 나쁘진 않았다. 데스브링거가 보기에도 이것만큼 나은 답안은 없었다.

“그럼 갑시다!”

“…어디 있는진 알고 계십니까?”

“심문관님이 알고 계신 게 아닙니까?”

“…저는 모릅니다만.”

잘하면 밤새 못 찾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특히 더.

“멍청이들의 대행진도 아니고… 말을 맡길 수 있는 여관이 몇 개 없잖습니까요. 그걸 기반으로 찾으면 되죠.”

“오!”

“그렇군… 하긴 말을 데리고 있었지.”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의 잠이 부족해지니까.

데스브링거는 한숨과 함께 협조했다. 인퀴지터의 존재 때문인가. 심문관이 얌전해진 건 덤이다.

용사의 권위가 그만큼 높다는 거겠지만… 뭔가 열받는 일이었다. 그의 말은 귓등으로 안 처들었으면서.

“표정이 왜 그런가?”

“그럼 좋아야겠어요? 정말이지, 짜증나게…….”

“흐음…….”

“그보다 샌님,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아. 그건 베르세르크께서 권유해 주신 덕이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네가 다니엘 심문관님의 뒤를 밟고 있는 걸 봤다던가.”

“오…….”

“잠깐, 제 뒤를 밟았단 말입니까?”

“그래! 맞다! 너 왜 형제님의 뒤를 밟은 거냐?!”

“…아니, 그게.”

하나 데스브링거의 분노는 금방 식었다. 이젠 그가 화낼 타이밍이 아니었다.

* * *

나는 주점의 소란을 배경음 삼아 인벤토리를 정리했다.

자주 꺼낼 일 없거나 허리춤에서 꺼내기 힘든 건 팔찌 형태의 인벤토리에, 꺼낼 일이 많거나 작은 물건은 레그백 인벤토리에 넣는 식이었다.

“도시락은 내일 완성이랬고. 식수, 프레드릭 간식, 소금, 버드나무잎, 그리고 또…….”

더불어 레그백 인벤토리는 보기도 좋고 찾기도 쉽게 테트리스를 좀 해야 한다.

나는 여관 바닥에 앉아 새롭게 보충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았다가 넣었다가를 반복했다.

“아, 데운 돌.”

와중에 하나 빼먹은 것이 떠올랐다. 급한 일은 아니었다. 내일 까먹지만 않는다면, 만들 시간은 넉넉하니 말이다.

“쓰읍. 이런 건 항상 길을 떠난 후에야 생각난단 말이지.”

별도로 그 이상 떠오르는 게 없다. 나는 짐 챙길 때면 항상 드는 미묘한 감각에 눈썹을 지그시 내렸다.

별다른 해결법은 없었다.

“푸흐.”

그래도 이 도시까지 오며 느낀 바, 여기서 더 필요할 것 같진 않다. 나는 짐을 전부 집어넣고 옷을 털었다.

지금 입은 옷은 자동 세탁 능력이 없는 거라 먼지가 묻으면 반드시 털어야 했다.

풀썩.

이어 침대에 누운 후 신발 끈을 차근차근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

“여기서 지내시는 게 맞나?”

“주인이 여기 있다잖아요.”

손님이 왔다.

“근데 이렇게 찾아가도 괜찮은…….”

벌컥.

“엇.”

이놈들이 나를 어떻게 찾았는지는 글쎄. 데스브링거가 옆에 동행하고 있으니 더는 고민하고 싶지 않다. 정보길드 짬이 있지, 나처럼 눈에 띄는 사람 하나 못 찾겠어.

“악마기사! 야밤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찾아뵙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왜 찾아왔는지는 궁금하다. 나는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린 채로 찾아온 면면을 살폈다.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 처음 보는 얼굴이 하나… 가 아니라. 어디서 본 것 같은 게… 아. 아까 낮에 싸웠던 그 이단심문관인가?

“용건.”

“말이 너무 짧─.”

“어헛.”

마지막 사람이 이곳에 왜 있는지는 좀 의아해졌으나, 굳이 묻고 싶진 않다.

해서 나는 처음 말문을 텄던 이를 응시했다. 급하다고 한 것치고 표정이 나쁘진 않아서 더 상황이 궁금해졌다.

“그, 악마기사.”

문득 이들과 대화하는 게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가, 그대로 스러졌다. 별로 중요한 상념은 아니었다.

“오늘… 민간인 가정에 방문한 적 있습니까?”

중요한 게 있다면, 저걸 쟤네가 어떻게 아느냐는 부분이겠지.

“참고로 알려 줄 이유 없다는 말은 사양입니다요! 일행 문제를 떠나 다른 이유로 묻는 거니까요!”

와중에 내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 데스브링거가 선수 쳤다. 덕분에 내 미간 사이의 골은 더욱 좁아졌다.

“있다.”

근데 이게 왜 중요한 일이지?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혹시 그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아는 사이십니까?”

나는 그 가족에 대한 걱정과 이것까지 시시콜콜 보고해야 하는가 하는 갈등 속에서 말을 골랐다.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사항입니다.”라고 냉큼 덧붙인 인퀴지터만 아니었다면 아마 버럭 신경질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관대한 컨셉이 이번까지만 참는다.

“…모른다. 됐나?”

“우연은 무─.”

“어허. 다 듣고 나서기로 했잖습니까.”

“정말입니까? 정말 모르는 사이가 맞습니까?”

그러나 3번은 참지 않는다.

내가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사정 설명조차 없이 심문당할 이유는 없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중요하단 말로 어물쩍 넘긴 주제에 답을 채근하는 꼴이 참 예의 바르군.”

“아, 그건… 죄송합니다! 취조할 때의 버릇이……!”

“변명은 듣지 않겠다. 마땅한 이유를 댈 생각이 없다면 꺼져라. 내 일정을 멋대로 알아낸 것만 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으니.”

나는 몸을 뒤로 살짝 당기며 열었던 문을 닫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탁!

그걸 가로막아 선 건 회색 머리 이단심문관의 손이었다. 이글거리는 눈은 데스브링거의 제지를 기어이 뚫고 나에게 닿는다.

“아니, 넌 설명해야 할 거다. 내 가족을 만난 이유를!”

조금 뜬금없는 소리였다,

내가 네 가족을 언제 만났다고?

“미친, 힘만 더럽게 세서……!”

“형제님, 흥분하셨잖습니까! 악마기사, 오해는 말아 주십시오. 이건 적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장 말해! 내 가족을 만나서 뭘할 생각이었는지─.”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을…….”

그러다 잠깐.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까 만난 아이의 사촌 형이 이단심문관이라고 하지 않았나?

“역시 넌 악마가─!”

이게 이렇게 이어진다고?

“형제님!”

“이봐요!”

나는 상상치도 못한, 정말이지 미쳐 버린 우연에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이게 이렇게……?

“악마기사, 정말로 다니엘 심문관님의 가족분들과 모르는 사이가 맞습니까? 모르는데도 만난 것에 이유가 있다면, 제발 들려 주실 수 있습니까? 오해를 풀기 위함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그, 그래. 이건 말해 줘야지. 이런 오해가 있다면 말해 줘야 하는 게 맞지……. 나 같아도 낮에 처싸웠던 상대가 내 가족 만나러 갔다고 하면 기함이 나올 테니까 말해 주긴 할 건데…….

이걸 어떻게 말해? 내가 거리에서 울었고, 울고 있던 나에게 꼬마 아이가 다가왔고, 그 꼬마 아이가 우연히 이단심문관의 사촌이었다는 걸 어떻게…….

“악마기사, 우연이… 맞습니까?”

나는 아이의 집에서 내가 떠올렸던 생각을 회상했다. ‘암, 이단심문관에게 말이 좀 흘러 들어간들, 설마 용사 파티에게까지 닿겠는가?’라는 문장을 다시 되짚었다.

“악마기사?”

“…우연이다.”

그게 플래그였을 줄이야.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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