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남아 있을 수 있다고 (1)
보따리 장수들과 헤어진 후 도착한 곳은 작지만 발달된 도시, 되르푸마인이었다.
“이야, 검문소가 복작복작하네요.”
다만 데스브링거의 말마따나, 되르푸마인의 검문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부분 상인으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짐이 실린 마차를 가지고 있거나 등에 봇짐을 한가득 짊어지고 있단 점에서 말이다.
“도시가 강을 끼고 있어서 그런가, 장사치가 유독 많은 것 같은데.”
더불어 그로 인한 대기만 벌써 30분째다.
파 에녹에서 기록을 갱신했던 이래, 처음이었다.
“원래도 무역으로 먹고사는 성이긴 했네만… 이렇게 많을 줄은 나도 몰랐군.”
“그래도 다른 분에 비하면 저흰 일찍 들어가는 편이 아닙니까?”
그때 인퀴지터가 동그랗게 외쳤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이런 상황일 때 일반인들은 최소 1시간 이상을 소비했다. 우리가 특수 직종이라 그나마 덜 걸리는 거지.
“저희가 특수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배려받고 있다곤 하나, 그렇다고 특권에 익숙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아쉬워할 것은 아니지요.”
“나, 참. 누가 일찍 들여보내 달랬나. 그냥 사람이 복작복작하댔지.”
“네가 너무 아쉬워하는 눈치라서 한 말이다.”
“예? 허, 참. 어이가 없네요. 내가 뭘 했다고?”
어쨌거나 도시로 들어가기까진 아직도 두세 무리가 남았다. 나는 그것에 지루함을 느끼며 프레드릭의 목덜미를 살살 쓰다듬었다.
기다리는 동안 반쯤 도떼기시장화 된 주변으로 인해 프레드릭이 날뛸까 싶어서였다.
프레드릭이 멀리서 들려온 폭음에도 놀라지 않을 만큼 깡다구가 좋다지만, 그런 깡다구와 시끄러움을 참는 능력은 별개니까.
“샌님 본인이나 신경 쓰시죠.”
“난 충분히 나를 돌아보고 있다!”
“정말요? 그렇게 확신해도 돼요?”
“네놈이야말로 자기 성찰이나 해라, 이 망종!”
그런 의미에서 제발 참아라, 참아라.
나는 한쪽으로 흔들리는 꼬리와 뒤로 젖혀지는 귀를 보며 시한폭탄을 껴안은 심정이 되었다.
“다음 오시오!”
다행히 프레드릭이 폭발하기 전에 우리 차례가 왔다.
나는 일행 끄트머리에 서서 프레드릭을 이끌었다.
“맞아, 그거 들었소? 비류호 님께서…….”
“하, 진작에 들었고말고. 용사라더니, 어떻게 동부의 수호신을……!”
“들어 보니까 다른 곳에서도 다 그랬다며? 사실… 악마의 간자였던 거 아니야?”
“예끼! 그런 소리 마쇼! 신전 사람에게 뭔 일을 당하려고!”
그러다 잠깐, 하필 옆의 무리가 대화 주제로 비류호를 꺼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곳은 에드니엄이나 캄버러와 근접한 도시고, 이 정도쯤 시간이 흘렀으면 소식이 슬슬 전해질 만도 하니까 말이다.
“귀족 나으리들이 그랬잖소. 사실 수호신께서 이 땅을 메마르게 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허, 그걸 누가 믿어? 귀족들이 거짓말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참, 나. 신전에서도 같은 말을 했잖소.”
“신전도 다 똑같아. 윗분들은 다 거짓말쟁이라고.”
그렇지만 이렇게 악의적인 대화는 이들이 처음이다.
아니, 처음은 아니나 이렇게 가까이서 이런 악의가 전해진 건 처음이다.
내 시선이 반사적으로 인퀴지터에게 향했다. 이 정도 거리면 그녀도 분명 들었을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인퀴지터.”
그러나 인퀴지터는 내색하지 않기로 했나 보다.
나 이외의 사람들─아크메이지와 데스브링거─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으나, 인퀴지터는 도리어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그보다, 어서 가시지요! 검문이 끝났습니다!”
…뭐, 됐다. 상처가 되지 않았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최소한의 교류만을 자청하는 내가 신경 쓸 부분도 아니고.
“악마기사, 이번에도 외부에서 지내실─.”
“마법사.”
“엇.”
그보다 드디어 도시에 들어왔다. 다른 말로는 헤어져도 될 시간이다.
“…듣고 있네.”
“머무를 기간은.”
그래도 헤어지기 전에 일정은 맞춰 놔야지. 아예 이별할 건 아니니까.
나는 최대한 냉엄한 눈으로 아크메이지만을 쳐다봤다. 내 의도를 알아챈 아크메이지가 지팡이를 어루만졌다.
“이곳에 딱히 일이 있는 건 아니니… 모레 출발할 것 같네.”
쾌속의 답이었다.
“…이틀 후 아침에 모험가 길드에서 보겠는가? 그러니까, 7시쯤 말일세.”
거기에 정확한 시간까지 제시된, 내가 가장 바란 답.
아주 좋았다.
“대신, 잠깐이라도 좋으니 신…….”
“확인했다.”
나는 가볍게 대꾸한 후, 파티에서 이탈했다. 합류 시각과 장소가 결정된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아크메이지가 무언가 말하려 한 것도… 정말 중요한 건이었다면 달려와서 붙잡거나, 소리쳐서라도 전달했을 테니까. 어휴, 하고 물러난 걸 보면 꼭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일 거다.
“어, 어어어…….”
내 손이 프레드릭을 이끈 채 도시 안으로 휙 들어갔다. 뒤에서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가 얼빠진 소리를 흘렸지만, 그 역시 알 바 아니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곳을 벗어났다.
히잉.
“기다려.”
말을 돌볼 수 있는 여관을 찾으려면 빨리빨리 움직여야 했다.
푸힝.
“…참아.”
별개로 말들은 원래 다 이런가? 조금씩 자주 먹으려 드는 것?
나는 자료 조사만으론 알 수 없는 사실들에 매번 감탄 비슷한 걸 하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캄버러에서 챙겨 온 프레드릭의 간식이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여관을 잡으면 바로 보충하러 가야 할 성싶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시락도 확보해야 하고, 식수도 챙겨야 하고, 데운 돌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오늘내일 할 일을 떠올리며 일정을 정리했다. 내일 바로 출발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너!”
그러던 차, 누군가가 외쳤다. 상대의 낡고 해진 신전갑옷과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반쪽이 눈에 확 박혀 들어왔다.
전자는 이단심문관으로서의 특징이고, 후자는 개인으로서의 특징이었다.
“마기를 짊어진 자가 어떻게!”
한데 ‘마기를 짊어진 자’라.
그 외침을 들은 순간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악마라고 부르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건지, 아니면 생생한 적의에 당황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던 까닭이다.
뭐, 어느 쪽이든 상황이 곤란해진 건 매한가지다마는.
“다들 휘말리기 싫으면 물러나시오!”
“이, 이단심문관이다!”
“뭐야, 뭐야?”
“당장! 죽기 싫으면 거리를 벌려! 그리고 당신! 당장 신전에 연락을!”
그래서 이제 어쩐담. 저 사람은 나를 완전히 적으로 인지한 모양인데… 용사 일행에 합류한 후, 이런 일은 처음 당해 봐서 다소 난처하다.
“하, 기다려 주는 거냐, 악마?!”
“…네 소속에 감사해라. 아니었다면 혀뿌리를 뽑았을 테니.”
물론 지금껏 신전 소속 사람들에게 걸린 전적 자체가 아예 없진 않다.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 도시를 돌아다닐 때면 특히 더 그렇다.
“악마 주제에 위선은!”
“어리석은…….”
그러나 그렇게 걸렸을 때 싸움으로 이어진 적 또한 없다. 내게 말 걸어오는 신전 사람들 전부가 위쪽에서 내려온 지침을 따라 준 덕이다.
“전달받은 것도 없는─.”
“신이시여, 제게 악을 무찌를 힘을……!”
“하.”
예컨대 ‘마기를 품고 있더라도 머리색이 회색과 검정으로 나뉘고, 양손 검을 가지고 있으며, 오른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다면 섣불리 적대하지 말고 대화를 시도해 볼 것.’ 같은 지침.
내가 용사의 동료이자, 마기를 품고 있지만 적대할 대상은 아님을 주지한 윗선의 배려였다.
그 배려의 대상이 매번 해명해야 할 나인지, 오인해서 덤볐다가 박살 날 신전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말단들에게도 그런 지침이 내려진 덕에 지금까진 불시 검문─혹시 제가 들은 그분이 맞는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아, 맞으시군요. 실례했습니다─만 좀 당해 봤지, 이렇게 싸움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죽어라!”
즉, 이런 사태는 이번이 최초다.
곤란하다.
깡!
나는 빠르게 장검을 꺼내, 닥쳐 오는 칼날을 받아쳤다. 신성력이 담겼는지 은은하게 빛나는 칼날은 제법 묵직했다.
그그그극.
그렇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나는 칼을 맞댄 채 힘겨루기를 하며, 오른손으론 프레드릭의 고삐를 잡았다.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녀석은 머리를 흔들며 불만을 쏟아 내고 있다.
까앙!
그사이, 상대는 검을 도로 회수했다. 힘과 힘 대결로는 본인이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모양이다.
“칫.”
분노에 활활 타오르는 눈이 빠르게 다음 자세를 취했다. 내가 공격할 거라 여겼는지 거리를 보통보다 더 벌린 건 덤이다.
“대체 무슨 일이야?”
“몰라. 이단인가 봐.”
“이단?”
공격할 의향이 하나도 없는 나로선, 다소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네놈……!”
그것을 모욕으로 느꼈는지, 상대의 눈동자가 더욱 타올랐다. 나보다 조금 옅은 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챙, 채챙!
그러나 멈출 생각은 아직 들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달려온 상대와 검을 다시 맞댔다. 좌, 우, 아래, 위. 제멋대로 다가오는 검로가 조금 까다로웠다. 나름대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러니까, 오인받아서 싸우게 된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한자리에 고정된 상태로 싸워야 한다는 지점이.
“오오…….”
“기사인가?”
“뭐야, 이단심문관이랑 기사랑 왜 싸워?”
“글쎄……?”
아무렴, 프레드릭이 등 뒤에 위치한 바람에 회피란 선택지가 아예 사라졌다. 고삐를 잡고 있어서 오른손을 동원하거나 양 옆으로 이동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더불어 마력을 쓰는 것도 여의찮다. 신체를 강화하거나 무기에 두르는 정도라면 모를까, 검기 난사나 마력창은 너무 위협적이지 않은가. 자칫하면 일반인도 휘말릴 수 있는데.
거기에 추후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만큼, 상대에게 큰 해를 입혀서도 안 된다.
속도전을 기반으로 공격적이게 싸워 온 나에겐, 정말이지 새로움뿐이다.
“흐압!”
그보다 이 자식, 말까지 공격 범위에 넣지 말라고. 말은 뭔 죄냐고.
나는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 걸 이용해, 준비 동작이 큰 자세도 서슴없이 쓰는 상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건 몰라도 찌르기와 내려찍기가 정말 짜증났다.
공격 범위가 유독 긴 탓에 절대 피해선 안 되는데, 맞받아치자니 경로가 까다롭거나 가해지는 힘이 너무 과해서다.
그래도 나름 머리를 써서 톤파 잡듯 역수로 검을 잡고, 팔뚝과 함께 어떻게든 버텨 봤지만… 그래도 손목에 무리가 가긴 한다. 슬슬 욱신거린다.
“죽─!”
“주제를 알아라.”
결국 찌르기를 세 번쯤 받아치고 내려찍기를 두 번쯤 당했을 때,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검이 부러지거나 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주입했던 마력이 몇 배로 부풀며 검신을 까맣게 물들였다.
‘죽여?’
서걱!
“─!”
얄팍한 충동이 스러지고, 양잡 내려찍기를 가하던 상대의 검이 순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부웅. 잘려 나간 검 조각이 둥글게 회전하여 뒤편 바닥에 내리꽂혔다.
상대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직……!”
하나 그럼에도 포기할 눈치는 아니었다. 솔직히 조금 질린다.
“아직이다! 망할 악마!”
그, 음. 악마계약자들에게 철저한 건 좋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과하지 않나.
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공격하길 시작했으면 또 몰라. 이쯤 되면 내가 봐주고 있다는 걸 본인도 느꼈을 텐데.
나는 직업 정신이 투철해도 너무 투철한 이를 보며 한숨을 겨우 참았다.
다른 땐 시비 안 걸리다가 하필 용사 일행과 거리 두기를 시행할 때 이러니 허탈함은 더했다.
용사 일행과의 거리 두기와 이 싸움이 진정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는 몰라도 서러운 건 서러운 거니까.
댕그랑.
그런 와중에 상대는 또 검을 놓고 주먹을 단단히 쥐고 있다.
박투 경험은 별로 없는데. 하여간 상대가 너무 열심히여도 문제였다.
“거기까지 해라. 네 패배다.”
그러나 천만다행이게도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베르세르크가 이 싸움에 난입한 덕이다.
“아니면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는, 어리석고 졸렬한 자가 될 셈인가?”
그녀가 언제부터 이 싸움을 지켜봤는지는 글쎄.
이런 유형의 전투는 처음이었던 만큼, 주변에까지 신경 쓰진 않아서 잘 모르겠다. 베르세르크가 작정하고 기척을 갈무리하면 찾기 어려운 편이기도 하고.
“이자는 악마계약자다! 당신이 뭘 안다고……!”
“너는 멍청인가? 그가 마음먹었다면 너는 물론이고 이 주변의 모든 사람은 이미 죽었을 거다.”
“무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무력이 아니라면, 무엇을 논할 수 있지?”
각설하고 베르세르크는 터벅터벅 걸어 나와 상대 사이에 끼어들었다. 둥그러니 물러나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엔 그녀에게 집중됐다. 베르세르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주름진 눈가가 냉하게 내 상대를 응시했다.
“속에 마기를 품었건, 마력을 품었건, 신성력을 품었건 힘은 힘이다. 검과 메이스가 다르고, 마법과 날붙이가 다르나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공통되듯.”
“그건 궤변─.”
“하므로 그 알맹이가 어찌 되든, 강한 자가 인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약하고 옹졸한 것아.”
“……!”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의외였다. 평소엔 호탕 그 자체다 보니, 저런 한기를 품을 수 있다곤 생각지 못해서.
“당신이, 당신이 뭘 안다고…….”
“악마기사!”
그러던 와중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우렁차고 우직한 목소리.
“소란이 벌어졌다 들어서 와 봤는데……!”
인퀴지터였다.
“가자.”
푸르륵.
인퀴지터가 왔다면 사건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용사의 발언만큼 직빵으로 꽂히는 것도 없을 테니까.
더구나 얌전히 싸운 바람에 뒷수습할 거리도 딱히 없다. 목격자들이야 내가 해결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하니 떠나도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계산하에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속으로 웬 횡액이냐며 투덜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딜 가는 거냐!”
“하. 넌 전사가 아니다.”
“놔, 놔라!”
“잠깐, 악마기, 헉. 베르세르크?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그 옷은 이단심문관… 자매님, 잘됐습니다. 당장 저자를……!”
“예? 악마기사께서 무슨 일이라도 벌이셨습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사람들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홍해처럼 자리를 만들어 줬단 점일까.
나는 갈라진 사람들 사이로 편히 걸어갔다. 제발, 여관을 빨리 찾아서 이만 쉬고 싶었다.
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