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이 대지 위에 (4)
비 내리는 밤을 모닥불과 방수 천 없이 보내는 건 역시 꿈에 불과한 걸까?
나는 자다 말고 깼다. 피부 겉면이 아니라 안쪽에서 살살 올라오는 한기가 꽤 지독했던 탓이다.
“…역시 안 되나.”
나, 참. 에드니엄에서 캄버러로 가던 길, 그때도 비가 왔지만 제법 버틸 만했기에 이번에도 가능할까 시도해 본 건데… 아무래도 무리였나 보다.
산군이란 변수가 있다곤 하나 이렇게까지 차이가 클 줄은.
…아니야, 그래도 이 정도면 오래 버텼지.
나는 인벤토리를 뒤적였다. 혼자 있을 때 정리를 좀 해 둔지라 인벤토리의 물품은 종류별로 보기 좋게 묶여 있다. 덕분에 원하는 건 금방 찾았다.
「데운 돌│화덕에 달군 돌. 온기를 머금고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자립을 위한 나만의 준비였다. 인벤토리가 넣었을 시점의 상태 그대로 유지해 준다는 특징을 이용한 편법이기도 하다. 돌의 무게가 무게고, 부피가 부피다 보니까 많이는 준비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해서 나는 돌을 몇 개만 꺼내 몇몇 부위에 갖다 대었다. 당연하지만 결코 맨살에 닿도록 하진 않았다. 나도 화상은 싫었다.
“…….”
음. 그래도 추위는 단번에 가시지 않는구나. 하긴, 천 한 장이 의외로 큰 차이긴 하지.
나는 티 안 나게 꼼지락거리며 코트를 여몄다. 인벤토리에 담요가 하나 있고, 저들이 나를 보지 못한다는 건 무시했다.
담요를 덮었는데도 추위가 가시지 않는다면, 그땐 이 추위에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툭, 툭, 툭.
그리고 기나긴 겨울 같던 밤이 지나며 드디어 비가 그쳤다.
“에구머니나!!”
비로 인해 몸은 쫄딱 젖었으나, 마력과 데운 돌에 힘입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아침이었다. 그런데 이 비명 소리는 또 뭐람.
“뭐, 뭐야. 왜 그래.”
“누, 누, 누, 누, 누, 누가 있어.”
나는 하늘이 밝아질 즈음 몸을 일으켰다가, 마찬가지로 막 일어난 보따리장수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나란 존재를 이제야 인지한 모양이다.
“귀, 귀, 귀, 귀신?”
“…….”
내가 그렇게 무섭나… 베르세르크가 새벽 단련 나갈 때 기척 없이 일어난 건 아무 말도 안 했으면서…….
나는 살짝 울적해졌다.
“그분은 사람입니다.”
“그, 그렇군요…….”
그러나 내 행적을 되돌아보거든, 밤새 소리 한 점 내지 않다가 나무에서 스르륵 일어난 꼴이다. 심지어 생김새는 거무튀튀한 게 음침하고.
사유해 보니 귀신 소리 들어도 할 말 없긴 하다.
나는 울적함을 버리고 반성했다. 내 탓이었네, 아핫.
히이잉.
그보다 프레드릭 너는 참 칼 같구나.
나는 동이 트자마자 먹이를 줘야 한다던 마구간지기의 당부에 따라 곡물 사료를 급사했다. 성질이 더러워서 먹이를 먹을 때 빗겨 줘야 한다던 충고 역시 따랐다.
방수 천 덕에 축축이 젖진 않았지만, 습기로 인해 살짝 눅눅해진 털이 빗을 따라 고르게 누웠다.
“말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아니, 그… 여러분들이 데리고 있는 말이 운 거라고 생각했죠. 아니면 바람 소리거나.”
“아…….”
좋아, 어두우니까 이 정도까지만 하고 나도 슬슬 밥이나 먹자. 빗질은 점심 때 또 해 줘도 되니까.
나는 적당히 빗질해 준 후, 프레드릭 옆에 앉아 인벤토리에서 밥을 꺼냈다.
모닥불을 피우지 않아 음식을 조리할 수 없다는 건 내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렴, 인벤토리는 무적의 치트키였다!
달그락.
나는 나의 밥, 나의 식량, 내 목숨 줄인 도시락을 열었다. 책방 주인 동생이 일하던 곳에 부탁해서 만든 특제 도시락이다.
데운 돌과 마찬가지로, 넣었을 때와 상태가 똑같은 건 덤이다. 갓 만든 것처럼 따끈따끈하다.
참고로 내겐 이런 도시락이 30개나 있다. 하루 세끼를 기준 삼았을 때, 다섯이면 이틀 안에 작살 날─베르세르크와 인퀴지터의 식사량을 생각하면 하루 만에 작살 날 수도 있겠다─분량이, 이제는 열흘 치가 됐단 소리다.
정말이지, 타인을 제외한 채 나 자신만을 챙긴다는 건 이다지도 간편한 일이었다. 챙길 것이 엄청나게 줄어드니까.
나는 그 지점에서 약간의 편안함과 많은 불편함을 느끼며 도시락의 내용물을 야금야금 파먹었다.
콩 수프와 훈제 생선, 삶은 달걀, 그릇을 갈음하는 빵. 노숙하면서 먹는 식사라기엔 호사스러운 음식들이 차례로 입속에 들어갔다.
“그, 나리, 식사를… 아. 이미 드셨네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 입안이 델 정도로 따뜻한 음식들인데, 왜 배 속에만 들어가면 이다지도 차가울까.
나는 다가오다가 다시 물러나는 이를 보며 주먹을 죔죔 했다. 그를 비롯한 일행들은 이제야 수프 끓는 걸 보고 있다.
먹기만 하면 되는 나와, 기상하자마자 조리부터 시작해야 하는 그들의 차이였다. 내가 밥을 느리게 먹는 편은 아니다 보니 간극은 더 벌어질 성싶다.
“가자.”
히잉.
그럼 그 시간을 이용해 줘야지.
나는 오묘한 기분을 가릴 겸, 프레드릭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고삐를 잡았다. 다들 밥 먹느라 위치가 고정됐겠다, 이참에 나도 가볍게 세수를 할 것이다.
“아, 악마기사. 설마 혼자 가시는 건…….”
설마 그러겠냐고. 나는 이런 신뢰조차 없을 만큼 거리를 벌렸는가 고민하다가, 이내 털어 냈다.
이런 건 내가 대답해 줄 사항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암묵적인 규칙이나 룰이 형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문제지.
“말에게 물을 먹이러 가는 것일 테니 걱정 말게나.”
아크메이지는 이미 알고 있기도 하고.
“아, 그, 일행. 일행 맞죠?”
“…동행하는 사이긴 하지.”
“넵, 모험가님! 시냇물은 저쪽이 더 가까울 겁니다! 어제 달려오다가 밟고 넘어질 뻔했으니 확실합니다!”
아, 그래? 그쪽이 더 가깝다면 얼마든지 거기로 가야지. 나는 보따리장수의 조언을 따라 방향을 돌렸다.
고삐를 잡은 내 손을 따라 프레드릭이 천천히 따라왔다.
얼마 안 가, 가도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서 보따리장수가 말한 실개천이 나왔다.
“이건… 못 쓰겠는데.”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지난밤 비가 오며 개천이 깊어진 건 좋은데, 동시에 흙바닥이 뒤집어지며 물이 더러워진 것이다.
차라리 다른 쪽으로 갈 걸 그랬나?
아니, 그쪽이라고 흙탕물 신세를 피했을 것 같진 않다.
나는 입가 정도만 마른세수를 하다가, 일단 고삐를 한쪽으로 더 당겼다.
상류로 가면 물이 덜 더럽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를 가진 채다.
푸르륵.
투레질 그만해. 너도 저런 물을 먹고 싶진 않을 것 아냐. 빗물 받을 생각을 못 한 건 물론 내 실수긴 하지만.
“……?”
그러다 문득, 나는 실개천의 물줄기 끝에서 오두막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끼와 잡초가 가득 낀 외관은 그것이 얼마나 방치되었는지를 말해 준다.
“저게 상인이 말한 그건가 본데.”
오두막 근처에 다다르자 개천은 많이 깨끗해진 채다.
나는 프레드릭이 물을 양껏 마실 수 있도록 하며 발은 오두막 쪽으로 가까이 했다.
“…집주인이 그냥 죽은 건 아닌가 보네.”
단순히 세월의 부산물이라고만 여기기엔 미묘한 흔적들이 있다. 내가 이런 것의 전문가가 아니어도 알 수 있는, 그런 흔적이었다.
예컨대 건물을 썩둑 자른 것처럼 난 흔적이라거나, 한쪽이 뻥 뚫린 벽이라거나 뭐 그런 것이.
“수십 년 된 것 같진 않고.”
벽의 경우, 시간이 흐르며 자연적으로 무너졌을 가능성 또한 있긴 하다. 그러나 파괴된 흔적만 제외하면 건물은 비교적 멀쩡했다. 슬쩍 들여다본 건물 안쪽의 풀 개수나 쌓인 먼지도 그렇다.
내가 미천한 안목으로 판단하기엔, 이것은 몇 년쯤 내버려졌을지언정 그 햇수가 십, 이십 년을 넘겼을 것 같진 않다.
끼이익.
나는 프레드릭이 잘 있는지 확인한 후, 무너진 벽을 통해 건물 안쪽으로 진입했다. 바닥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었으나 무너질 거란 생각이 들 수준은 아니었다.
내 시선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일부 부서진 가구가 먼저 보였다. 흐트러진 모양새가 어째 범죄 수사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비슷했다.
“진짜 싸웠나.”
나는 괜히 드라마 속 수사 반장의 포즈를 따라 해 보며 싸움의 흔적을 쫓았다. 툭. 무언가가 발에 닿았다.
옷가지에 둘러싸인 백골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누굴까. 역시 집주인일까?
나는 예를 갖춰 명복을 빌어 주면서도 괜한 호기심에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백골의 손에 쥐인 단검을 발견했다. 단검에는 P. B라는 이니셜이 멋들어진 글씨체로 새겨져 있었다.
‘하.’
문득,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웃음소리였다. 아니다. 나는 웃은 적이 없으니 이건 내 것이…….
‘이 대지 위에 새겨진 죄가 세월을 건너 찾아왔구나.’
내 것이……?
“──!!”
순간 팔이 타들어 갈 것처럼 아파 왔다. 콰드득.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아악……!”
나는 오른팔을 잡고 몸을 구부렸다. 아픔의 강도야 신성력에 온몸을 강타당했을 적과 비슷하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신성력은 온몸을 두들겨 패는 식이라 고통이 분산되지만, 지금은 오른팔 한곳에만 집중적으로 아픔이 느껴졌다.
요컨대 신성력은 5의 강도로 10군데를 후려치지만, 얘는 10의 강도로 1군데만 집요하게 때리고 있단 소리다.
입는 대미지의 총량은 신성력이 더 클지언정 내가 체감하기에 더 괴로운 것은 이쪽이다.
너무, 너무 아프다.
“아윽…….”
팔을 잘라 버리면 차라리 편할까.
나는 오른팔을 감싼 채 엎드렸다. 통각 수치 조절로 인해 고통에 내성 생길 일도 없었고, 긴장과 공포로 고통을 잊기 좋은 전투 상황도 아니라서 그런가. 이 한 번이 유독 참기 힘들었다.
‘아, 재미없게.’
“……!”
다행히 고통은 금세 멎었다. 내가 기어이 단검을 쥔 순간이었다.
“허억, 헉.”
나는 고통에 제대로 쉬지 못했던 숨을 몰아쉬며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머리가 아프고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툭. 일어나려다 말고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풀썩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뭐 하냐, 기사야.”
그런데 그런 내 위로 그늘이 졌다. 베르세르크였다.
“도움이 필요하냐?”
이게 물어봐야지만 답이 나올 문제 같진 않지만… 베르세르크는 거부 의사를 밝힌 이래, 내 의사를 가장 존중해 준 사람이다. 물어보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아니.”
인퀴지터나 데스브링거라면 대답 한 번 내준 순간 가망이 있다며 더 끈질겨지겠지. 그러나 버서커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작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들리지 않는 발소리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들썩.
“……?!”
근데 이건 뭐야.
나는 허리에서 느껴진 압력에 당황했다. 그사이, 내 허리를 휘감은 팔은 내 몸을 그대로 들어 올리는 중이다.
“너……!”
난 당신이 응답하지 않을 걸 확신하고 대답한 거였는데. 그런 믿음이었는데!
설마 부르서커 너마저……!
끼익끼익.
나를 둘러멘 버서커가 건물을 나갔다. 저항하려고 했으나 고통으로 인해 한껏 긴장했던 몸은 아직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툭.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그건 베르세르크가 날 시냇물 앞에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야영지까지 데리고 간 게 아니라.
“닦고 와라.”
덕분에 얼굴 씻을 기회는 얻었다.
나는 미련 없이 떠나는 베르세르크를 노려보다가,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일단 실개천에 손을 담갔다. 베르세르크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는 건 그 본인밖에 없을 것이다, 분명.
“…이거 굉장히 궁상맞은데.”
그보다 실개천 앞에 엎드린 채로 얼굴을 닦는다니. 내 처지 왜 이러냐? 진짜 볼품없네.
그래도 다른 방도가 없다. 나는 한숨을 푹 쉰 후 얼굴을 닦고, 다리에 힘이 돌아왔을 때에는 코트를 벗은 채 온몸에 물을 뿌렸다. 땀에 전 채로 마르는 것보단 냇물에 전 채로 마르는 게 더 나았다.
푸르륵.
“…기다려.”
그다음으론 뭐 하냐는 눈빛의 프레드릭을 달래며 마지막으로 세수했다. 고통이 거의 가시니, 이제 이 일에 대한 생각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고통이 왜 발현되었는가, 원인이 있다면 무엇이 방아쇠가 된 것인가, 나중에도 재발할 가능성이 있는가, 막을 방법은 있는가 등등.
그렇지만 감 잡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이 장소가 원인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밖에는.
거기에 아까 그 웃음소리는…….
나는 또다시 오른팔이 타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반사적으로 팔을 붙잡았다.
아마도 환상통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기엔 충분했다.
“…갈수록 가지가지 하네, 진짜.”
모르겠다. 나는 세수하느라 벗어둔 안대를 쥐고 힙겹게 일어났다. 이제 다리에 힘 풀릴 일은 없을 것 같다.
히잉.
“보채지 마라.”
나는 프레드릭에게 사과를 하나 던져 준 후,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고통이 다시 덮쳐 올까 걱정도 들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백골이 죽기 전까지 쥐고 있었던 단검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이것은 이제 이 사람의 정체와, 만에 하나 악마기사의 과거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솔직히, 방금 있던 일이 이유 없이 일어났을 리는 없으니까.
“…잠시 빌려 가겠습니다.”
대신 나는 그 사람을 묻어 주기 위해 투헨더로 땅을 팠다.
단검을 받아 가는 대가라고 하긴 뭐하지만, 그래도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온몸에 끼얹었던 시냇물이 땀처럼 흘러내렸다.
푹, 푹, 푹.
“후.”
아, 투헨더로 땅 파는 것 더럽게 힘드네.
나는 오 분여간의 고군분투 끝에 백골을 묻을 만한 작은 구덩이를 파 냈다.
이분이 살점과 근육마저 전부 없어져서 망정이지, 갓 죽은 사람이었다면 그만한 부피를 파느라 더 고생했을 것이다.
팍.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진 않겠지. 나는 나무를 다듬어 만든 십자가를 무덤 위에 박고, 그 위에 돌멩이 한 무더기를 쌓았다.
내가 아는 간이 무덤의 형태는 대충 이러했기에 한 행위였다. 이 세계라고 무덤 만드는 방식이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고 말이다.
“어, 저기 나리 말이다!”
“역시, 안 가셨지 않았나!”
“본인도 불안해했으면서.”
“그, 그건 네가 계속 겁주니까……!”
“그보다 말만 두고 나리는 어디 가셨답니까?”
“글쎄… 아, 저기 계신 것 같다.”
“나리? 안에서 뭐 하십니까?”
그래도 이것만 하기엔 좀 아쉬운데.
나는 재잘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올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가리며, 뭐가 빠졌는지 고민했다. 그러니까, 외국 드라마나 한국 드라마에서 누구 무덤 찾아가는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꽃, 꽃이 빠진 것 같다.
“아, 무덤이…….”
“…혼자 만들어 주신 겁니까?”
그러나 지금의 내겐 꽃이 없었다. 컨셉 가지고 꽃을 모아 오는 것도 좀 이상하고.
그러니 뭐 어쩔 수 있나? 한국식 제사라도 동원하는 수밖에.
툭.
나는 프레드릭 간식용으로 샀던 사과와 바나나, 블루베리, 배를 꺼내 차례로 놓았다.
술이 있었다면 술을 뿌려 주었겠으나 아쉽게도 그건 없었다. 절도… 쟤네가 늦게 왔으면 했겠지만 먼저 와서 못 할 것 같다.
나는 술인 척 물을 따라 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곳을 떠났다. 눈치 보던 두 사람이 내 뒤를 쫓았다.
“함께하셔도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나도 편하긴 했겠… 지만 단검 챙기는 행위에는 분명 질문이 들어왔겠지. 어쩌면 내가 고통에 겨워하는 걸 보고 또 난리 칠지도 모르고.
그럴 바에야 그냥 혼자 하고 만다.
나는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프레드릭의 고삐를 잡고 야영지로 향했다.
베뮈르헨까진 아직도 많이 남았다.
* * *
“용사가 이곳으로 온다는구려.”
“오, 드디어 머맨들과의 전쟁을 끝낼 때가 왔나?”
“모르오. 용사가 하는 걸 보면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긴 하다마는.”
베뮈르헨의 마탑을 총괄하는 대현자이자, 본질 마법의 대가, 파도치는 청산호는 성주에게 시큰둥히 답변했다.
그러자 성주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들고 있던 술병을 던졌다.
쨍그랑.
“성주, 내 방에서 병 던지는 일은 그만하라 했지 않소.”
청산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리병을 깨트렸다. 성주의 입술이 더 튀어나온 건 덤이다.
“어차피 의미도 없잖아.”
“뒷정리를 해야 하잖소. 당신이 할 게 아니면 그만두시오.”
팔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청산호는 보고 있던 편지를 덮었다. 청산호의 콧대 위에 놓인 안경이 안경 줄을 찰랑 흔들었다.
잘그락잘그락.
그사이, 청산호의 손짓에 바닥에 흩어져 있던 유리 조각들이 맑은 소리와 함께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한데 뭉쳐 적당히 굳어졌다. 머맨을 죽이는 성주의 모습을 형상화한 형태였다.
“냉정하긴.”
“성주, 당신이 비효율적인 것이오.”
청산호는 만들어진 유리 조각상을 성주에게 되돌려 주었다.
“조각상이 가지고 싶다면 그냥 요구하시오. 당신이 하는 사소한 부탁마저 거절할 정도로 시간이 없진 않으니까.”
“뭐야, 그 감동 멘트?”
“대신 더 중요한 이야기가 없다면 이만 돌아가시오. 까다로운 의뢰가 두 개나 들어왔으니까.”
“…그럼 그렇지.”
“뭘 기대한 거요?”
청산호는 매번 뜬금없는 소리나 하는 성주를 두고 이해할 수 없다는 심정만을 띄웠다.
그러곤 성주가 오늘도 순순히 안 돌아가겠다는 판단하에 자신의 일거리를 꺼내들었다. “하여간 재밌고 까다로운 연구 주제를 들고 오는 능력은 1등이군.” 약간의 불평 아닌 불평은 덤이었다.
“그건 뭐야?”
“검이 될 재료요.”
“검?”
청산호는 동봉된 편지를 다시 정독한 후, 보다 면밀한 탐구를 위해 마법을 펼쳤다. 거대한 뼈의 재질이 분석되며 정확한 정보가 출력되었다.
“아무리 봐도 뼈로 보이는데… 그보다 이건 대체 누구 뼈야? 일반 짐승 뼈치곤 너무 큰데.”
“음.”
성주가 옆에서 재잘거리는 건 익숙하다. 청산호는 답변 대신 마법으로 종을 울렸다. 곧 담당 시종이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내 손자 좀 데려와라. 검과 장신구형 아이템을 제작해야 하는데 네 손재주가 필요할 것 같다고 하면 알아들을 거다.”
“네.”
비록 시종은 들어오자마자 명령을 받고 다시 나가야 했지만 말이다.
“내 말 무시하는 거야? 그리고 그 애까지 불러야 할 일이야?”
“성주,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의뢰의 물품에 대해 성주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는 내게 없소.”
“치사하게 굴지 마.”
“말은 똑바로 하시오. 당신이 억지를 부리는 거겠지.”
“베르너!”
“두 분, 계속 싸우실 거면 저 다시 가도 되나요.”
“음?”
“엥.”
청산호는 성주와 입씨름을 하다 말고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부르긴 했으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온 얼굴이 문 앞에 있었다.
“일찍 왔구나.”
“바로 앞에서 카를 현자님을 뵙고 있었던지라.”
“잘됐다. 와서 일 좀 도와라.”
“대가는요?”
“그리다나에서 내놓은 재료 하나를 노리고 있다 들었다.”
“사 주시게요?”
“그래.”
“좋아요.”
자신의 손자에 대해 잘 아는 청산호는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손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지부진하게 흥정하는 대신 단번에 협상을 이뤄 냈다.
“…저기, 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니?”
“일 없으면 매일 찾아오려는 분에게 매번 인사드리는 것도 귀찮아져서.”
“…베르너의 손자라는 걸 아주 온몸으로 외치는구나.”
“감사합니다. 그래서 제가 깎아야 할 건?”
“장신구형 아이템은 견적을 좀 더 재 봐야 하니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 당장 할 건 이거다.”
청산호는 작업대 위에 올려진 거대한 뼈를 가리켰다.
“동부의 태곳적 짐승이 사냥당했다는 소식은 너도 들었겠지. 그것의 뼈다.”
상상치 못한 정체에, 기껏해야 악마의 뼈를 생각하고 있던 성주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손자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거, 재밌겠네요.”
20살의 나이에 대명장大名匠이란 명예를 거머쥔 천재가 흥미로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