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아직까지는 (8)
“그래서 포기할 건가?”
“……?”
“그분이 우리에게 기대 한 점 없다는 건 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기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지 않나.”
데스브링거는 인퀴지터의 말에 순간적으로 사레들릴 뻔했다.
정말이지, 저 이상주의자는 가끔 보면 어지간한 비관주의자보다도 더 신랄해질 때가 있다. 머리통이 어떻게 돼먹은 건지 모르겠다.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아니,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댁은 그렇게까지 무능하진 않다니까?”
애초에 그가 한 말은… 그가 한 이야기의 본뜻은…….
“그 말은 고맙다. 그렇지만 그런 걸로 따지면 네가 나보다 낫다.”
인퀴지터의 말에 그는 차마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인퀴지터는 모른다. 그가 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그가 이토록 체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아뇨, 전… 의미 없는 사람이 맞아요. 목적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같이 있을 가치도 없는… 그런 사람이 맞다고요, 나는.”
“너…….”
“그리고 당신도 그렇겠죠. 아마도, 그렇게 되고 말았을 거예요.”
“……?!”
데스브링거는 문득, 아크메이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악마기사가 혼란스러워서 그를 피하는 것이라고? 사실 마음 한편에는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 그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맞을 것이다.
미운 정이든 동정이든. 정이 쌓여서 살려 둘 마음이 생긴 게 아니고서야 악마기사가 그를 용납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악마기사가 차마 베지 못하고 칼날을 떨어트린 순간, 그런 표정을 한 원인이 정 때문이 아니면 뭐겠어.
“그거 알아요, 샌님?”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야.
“나리는 생각보다 더… 다정한 편이라는 것.”
악마기사가 그를 용납하도록 만든 정이 과연 여태까지도 남아 있을까? 악마기사가 그것을 인지했다면… 그것을 남겨 둘 이유가 있겠느냔 말이야.
“…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분이 약자들을 위할 리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내가 말하는 건… 평상시 우리들을 대할 때를 말하는 거예요.”
악마기사는 다정하다. 그래, 데스브링거는 이제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다정하다. 그 살벌한 말투와 과묵한 태도와 까칠한 행동 사이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방해가 되면 두고 갈 거라 엄포했으면서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하면 또 남몰래 손을 뻗어 줘요. 우리를 귀찮게 여기면서도 우리가 매달리면 쳐 내진 않아요. 난 그게… 나리만의 다정함이라 생각해요.”
동시에 그는 복수에 삶을 내던진 사람이었다. 아크메이지의 말을 빌린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악마와 대적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한데… 그런 사람에게 다정함은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다정함이야말로, 나리에겐 가장 불필요한 감정이겠죠.”
악마를 죽이는 것이 목표이고, 그 끝에 죽는 것이 목적인 사내에게 정만큼 쓸모없는 것이 있긴 해?
“다정함이… 왜 불필요한 감정이 되는 거지?”
“방해가 되잖습니까요.”
정은 사람의 발목을 잡고, 손목을 옭아매고, 종래엔 눈과 귀, 입을 막으며 목을 조른다. 데스브링거가 겪은 ‘정’이란 그런 거였다.
지긋지긋하다면서도 기어이 삶을 말뚝 박도록 하고, 벗어날 힘이 있음에도 저항할 수 없게 만들고, 어떤 순간에는 대신 죽도록 하는… 그런 감정이 ‘정’이었단 말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다정함에서 위안을 받고 사랑을 찾지만… 우린 그게 아니니까.”
목숨을 건 무력 싸움이 없는 일반 가정들에서도 그런 작용을 하는 감정이다. 한데 실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들에게 ‘정’이 피어나면 어떻게 될까.
장담하건대,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보통은 그 반대가 많으니까.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샌님.”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그들과 악마기사 중 더 불행해지는 쪽은 과연 어디일까.
“가만히 있으면 기사 나리는 그대로 죽어 버릴 것 같은데, 내가 여기서 손을 뻗는다고 그를 구할 수는 있을까요? 오히려 나리만 더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닐까요?”
더 많은 희생을 하게 될 쪽은?
“심지어 나는, 난…….”
…그 모든 걸 감수하고 악마기사가 그에게 정을 줘야 할 이유는?
그에겐 악마에게 당해 반쯤 배신자가 될 뻔한 전적도 있고, 그로 인해 악마기사를 공격한 전적도 있으며, 그 외 도움이 되는 부분도 현저히 적은데.
“…내가 나리에게 감히 손 뻗어도 되는 거예요?”
데스브링거의 말에 인퀴지터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이 더 옳은, 아니 나은 길인가. 그녀도 모르긴 매한가지였다.
“…나는, 잘 모르겠다.”
하므로 인퀴지터는 인정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네가 말한 것이 우리가 노력하지 않을 구실이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또한 그렇기에, 그녀는 답을 내렸다. 데스브링거의 눈썹이 와락 찡그러졌다.
“그게 정답일지 어떻게 알고요?”
“모른다. 겪어 본 적 없고 풀어 본 적 없는 일인데 내가 정답이 무엇인지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게 정답인가?”
“…섣불리 움직였다간.”
“그러니까, 섣불리 움직여서 나온 결과물이 가만히 기다려서 나온 결과물보다 나쁘리란 보장이 있냐는 거다.”
다리 갑주만을 착용한 인퀴지터가 철컥 소리를 내며 허리를 폈다. 그에 맞춰 잠시 든 고개에는 그늘 한 점 없다.
“물론 우리가 무언가를 행함으로써 낸 결과물이 가만히 있어서 나온 결과물보다 나쁠 수도 있다. 그러나 너는 그걸 알 수 있나? 아니, 모르겠지. 모르니까 지금 고민하는 것 아닌가.”
대신 빛이 흘러넘쳤다.
“나도 모른다. 모르니까 행하려는 거다. 무지는 내가 포기해야 할 핑계가 되지 못하고, 내가 악마기사를 놓아도 되는 당위성이 되지 못한다. 애초에 무지를 구실 삼아 도망치는 것 자체가 내 취향도 아니다. 해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안 될 거라고 한계를 그어 두는 것 또한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고.”
햇빛에 그을리며 생겨난 주근깨와 기미조차도 가려 버리는 광채가, 그 콧날에 뺨에 목에 흘러넘쳤다.
“하므로 나는 물러나지 않을 거다. 내게 있어서 실패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 무행無行이니까.”
정말이지, 샌님은 천하에 다시 없을 고집불통 막무가내 바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악마기사를 이대로 내버려 두기 싫다. 그분이 어째서 혼자 아프고 혼자 죽어 가야 한단 말인가? 그분이 싫다고 해도, 나는 그분을 고쳐 드릴 거다. 환자는 치료소에 보내야지, 혼자 죽을 날을 받아 두고 끙끙 앓게 두어선 안 되는 법이니까.”
그리고 용사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거기에 말이다, 나는 악마기사에게 이해도, 동정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니 괜찮다! 나는 단지 그분의 곁에 나란히 서서, 때론 넘어지려는 그분을 잡아 드리고, 지금보다는 덜한 빈도로 도움받고, 그런 식으로 같이 걷고 싶은 거니까!”
“…나 참. 그게 뭐예요. 말장난이잖아요.”
“이게 왜 말장난인가? 아크메이지님이 전하길, 악마기사는 같잖은 동정과 이해만 말하지 않았나. 그럼 그 두 가지만 아니면 괜찮은 것 아닌가?”
“댁은 진짜 바보인 겁니까, 바보인 척하는 천재인 겁니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
“어휴, 됐어요. 댁한테 뭘 말한담.”
“그건 무슨 의미인가?!”
“들은 그대로의 의미요.”
데스브링거는 쭈그렸던 다리를 폈다. 벗은 후드 사이로 흘러든 햇빛은 그의 피부 위에서도 똑같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뭐, 좋아요. 환자는 치료소에 보내야 하는 게 맞긴 하죠. 나리에게 신성력은 독이니까 신전 소속 치료소는 안 되겠지만.”
“그건 나도 이제 알고 있다.”
“…그리고 아직 사과도 못 했고.”
“사과할 게 있나? 왜 아직도 안 했나?”
“…그러게 말입니다요. 사과란 걸 제대로 해 본 적이 드물어서 그런가, 어렵네요.”
“사과하는 게 뭐가 어렵나. 그냥 하면 되는데.”
“내가 댁처럼 우직하지 못해서 그런가 봅니다.”
보다 정확히는, 악마기사의 반응이 두려워서였지만.
“…나리가, 상처받았을까요?”
“그분이? 글쎄. 네가 뭘 했는지 모르는 이상 할 말은 없다만, 그분이 상처받는 건 잘 상상이 안 가는군.”
“그건 그런데…….”
데스브링거는 인퀴지터의 말에 눈을 껌뻑였다. 그도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칼을 내질렀던 것이고.
그러나 지금 와 돌아보면…….
“역시, 상처받았겠죠.”
“대체 뭔 짓을 한 거냐, 네놈.”
“…나리가 가치 없게 여기도록 된 건 일행 전부가 아니라 나뿐인지도.”
“진짜 뭔 짓을 한 거냐, 망종!”
“시끄러워요… 나도 죽고 싶어졌으니까.”
“자살은 나쁘다! 고백하고 참회해라!!”
“시발…….”
* * *
오랜만에 하는 독서에 얼마나 정신이 팔렸던 건지.
나는 책을 읽다 말고, 종이가 붉은색으로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해가 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만 가겠다.”
“네… 네? 아, 가시게요?”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여관을 미리 잡아 둘걸. 신전에 머무를 수 없다면 여관방에서 지내야 한다는 걸 생각 못 했어.
“안녕히 가세요!”
지금 가도 방이 남아 있으려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게 주인의 배웅을 등졌다.
꼴에 저녁 식사 때라고 배에서도 허기가 느껴졌다.
“아이고, 손님. 오셨습니까!”
다만 여관을 찾던 도중, 지나치기엔 너무 맛있어 보이는 요깃거리를 발견했다. 빵에 채소볶음을 담은 음식이었다.
“채소 하나.”
“잠시만요!”
내 지갑이 절로 열렸다.
“자, 받으십쇼!”
“잠깐.”
빵이 요리의 일부이자 그릇 역할도 담당하는 건 알겠다만, 가루가 묻어나는 점에서 내겐 그릇 탈락이다.
하여 나는 아까 산 손수건을 사이에 낀 채 채소볶음 빵을 받아 들었다. 빵이 얼마나 단단하면, 소스가 가득 채워져 있는데도 빵이 눅눅해질 기미가 안 보였다.
와삭.
조심스럽게 끄트머리를 씹어 보았을 때도 그랬다. 보통 단단한 게 아니었다. 이 부러지기 싫다면 조심스럽게 먹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안녕히 가십쇼!”
와삭와삭.
그치만 맛은 좋으니까.
나는 좌판을 떠나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맛있는 채소볶음의 맛을 음미했다.
비트와 방울토마토, 양파, 피망이 번갈아 가며 아삭거리는 식감을 주되, 그것들에게 배어 있는 소스가 혀에 감칠맛을 둘러맸다.
가장 단순하게 표현해서, 정말 맛있다.
아무래도 도시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사 먹어야 할 성싶다.
“오빠, 저기 가 보자!”
“어디? 어디!?”
“저기!!”
“레야, 잠깐!”
“너무 빨리 달리면 넘어져!”
“이히히! 빨리 와… 악!”
그러다 잠깐, 아이 하나가 내 옆을 지나다 말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 들었다.
내 오른손이 반사적으로 나아갔다가, 멈췄다.
“우왓, 왓!”
탁! 탁!
그사이, 여자아이가 균형을 잡으려는 듯 어떻게든 다른 발을 내뻗어 버텼다. 그러나 이미 무게중심은 앞으로 넘어간 상태다.
아이의 몸이 완전히 넘어갔다.
철퍽.
그에 맞춰, 나는 빵을 버리고 왼손을 뻗었다. 오른손으로 넘기기엔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단 판단이었다.
텁.
“왓!”
그래도 그 대가로 기어이 넘어가던 아이의 팔은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 기울어졌던 아이의 몸을 천천히 뒤로 당겼다.
“괜찮아?!”
“레야 괜찮, 헉!”
“저, 감사합니… 힉!”
아이의 일행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추가로 달려왔다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죄, 죄송합니다…….”
“히익. 모험가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나한테 부딪친 것도 아니고 별로 사과할 건 없는데. 오히려 개인적인 감정으로 빠르게 못 도와준 내가 더 미안할 부분이고.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아이들의 몸을 힐끗 보곤 말없이 마저 길을 갔다.
“가, 간다…….”
“나 모험가 이렇게 가까이서는 처음 봐.”
“무진장 무섭고 멋있다…….”
“모험가야? 기사님 아닐까?”
“기사……!”
“으엇!”
“뭐야? 왜?”
“누가 음식을 한 입만 먹고 버렸어! 나쁜 사람이야!”
“헉! 진짜로!”
“아까워!! 이럴 거면 나 주지!”
“잠깐만, 여기 부분은 털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바로 턴했다.
나도 음식의 귀함은 알지만, 그래도 얘들아,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먹는 건 좀 아니지!
“떨어진 부분은 버리고, 빵 안쪽만…….”
“오빠, 나 이 손수건 가져가도 돼?”
“손수건? 뭐야 이거, 엄청 비싸 보이는… 응?”
동그란 머리통 위로 그림자가 졌을까. 그것을 알아챈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찰떡 같은 뺨이 창백해졌다.
“헉!”
“떨어진 건 먹는 게 아니다.”
나는 일단 아이들 손에서 빵을 분리해 냈다. 바짝 굳은 아이들은 반응도 못 했다. 철퍽. 빵이 바닥으로 돌아갔다.
손수건? 그건 그냥 여자애 손에 남겨 놨다. 예비용 손수건도 샀거니와, 없더라도 다시 사면 그만 아닌가. 몇 번 쓴 적 없는 거라 못 줄 만한 것도 아니고.
“죄, 죄송…….”
“나에게 사과하지 마라.”
별개로 요놈들아, 그건 나한테 사과할 게 아니라 너희 위장에 사과할 일이지. 여긴 가뜩이나 병원도 없어서 제대로 탈나면 고치기도 어려울 텐데.
나는 바들바들 떠는 세 아이를 보며 약하게 숨을 내뱉었다. 내 몸통의 반토막만 한 것들이 저러니까 마음이 괜히 쓰였다.
“따라와라.”
“히익!”
“혼나나 봐, 우리…….”
“엄마아…….”
하니 뭐 어쩌겠나. 어떤 우연은 인연이라고. 내 눈에 안 보였다면 모를까, 한 번 보였다면 뭐라도 해 줘야지.
나는 아까 빵을 샀던 노점까지 아이들을 이끌고 갔다.
내가 벌 줄 거라 생각했는지 아이들은 벌벌 떨고 주민들이 시선을 집중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암, 인상이랑 분위기가 글러 먹은 걸 어떡해. 다시 커스텀하게 해 줄 것도 아닌데.
“네 개.”
“앗, 아까 그 손님 아니십니까?”
해서 나는 그걸 우선해서 풀어 주기보다 그냥 알아서 풀어지길 기다렸다.
동전 몇 닢이 주인장의 손으로 떠나가고, 산 빵 중 세 개는 내 눈짓을 통해 주인장에게서 아이들에게로 넘어갔다.
“……?”
“엇.”
“어… 저희 주시는 거예요?”
“이제 가라.”
채소볶음보단 고기볶음이 더 낫겠거니 하며 내용물도 바꿔 줬으니 잘 먹겠지.
나는 아이들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 걸 보며 먼저 자리를 떴다. 내가 떠나야 애들이 더 편하게 먹겠거니 하는 판단이었다.
탁탁탁!
“엇, 레야!”
덥썩!
그런데 옷깃이 잡혔다. 나는 당겨진 코트 자락에 고개를 힐끗 돌렸다.
갈색 머리 소녀가 내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모험가님!”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위아래 유치가 빠지며 동그란 구멍이 생긴 입, 빵글빵글한 뺨과 앙증맞은 코 위로 솔솔 뿌려진 주근깨. 조그만 손이 꽉 쥔 손수건과 빵까지.
동전 몇 닢으로 사기엔 너무 귀한 미소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까 책방에서 아웅다웅 다투던 가게 주인과 그 동생을 목격한 순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뭉클함이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꼭꼭 씹어 먹어라.”
“네!”
그래도 그 어렴풋한 감각이 나쁘지 않다. 훨씬 기분 좋다. 오늘 외출은 성공적이었다.
“모험가님, 바이 바이!”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덮쳐 오는 설움을 삼켰다.
“악마기사!!”
“……!”
그리고, 뒤편에서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대련하기로 했으면서 왜 약속 안 지키나!!”
베르세르크였다.
“앗, 악마기사!”
“나리!”
거기에 인퀴지터랑 데스브링거까지.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아픈 거면 빨리 검사 받고 와라. 대련은 만전의 상태로 해야 재밌다.”
“나리… 그, 모, 몸은 좀 어떠신지……. 지금도 아프시거나 한 건 아니죠……?”
나는 활짝 웃고 있거나 눈치를 보면서도 조잘거리는 이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바라던 대로 거리를 둘 것 같은 모양새가 아닌 까닭이다.
“일단 돌아갑시다, 악마기사. 마법사님이 당장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전우야, 어서 가자.”
“그래요, 가요. 저, 그. 드릴 것도 있단 말입니다. 같이 전하고 싶은 말도 있고…….”
정말이지, 아크메이지가 대체 뭘 한 걸까. 설득에 아예 실패한 거야? 내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했는데도?
아, 아니면 아크메이지가 그대로 전달하질 않은 건가. 말이 워낙 강했으니까.
혹은… 그래. 그냥 저들이 말을 안 듣는 걸지도 모르겠다. 베르세르크는 대놓고 마이 웨이고, 인퀴지터도 데브도 은근 반골 기질이 있으니까.
“악마기사?”
“…전우야, 너.”
그것이 기특하거나 감동적이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밀어내고 거부해도 다가와 주는 이들을 싫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니까.
“비켜라.”
그렇지만… 이건 내가 바라는 일은 아니다.
그래, 내가 바라면 안 되는 일이다.
“도시를 떠날 것이란 소식을 전할 게 아니라면.”
나와 저들에겐 거리가 필요하다.
엔딩을 보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같은 길을 걸을지언정, 어떤 형태의 헤어짐이 일어나도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을 수준의 거리가.
“악마기사…….”
“나리……?”
보다 노골적으로는, 내가 이 여정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이 여정에서 빠지든, 여정을 이어 나가던 도중에 능력의 부족으로 사망하든.
악마로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든.
어떤 순간에도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는 비지니스적의 거리가 필요하단 말이다.
철컥.
하므로, 나는 건틀릿의 쇳소리와 함께 그들을 지나쳤다.
눈길 같은 건 결코 주지 않았다. 오래전 자의 아닌 자의로 무수한 관계를 끊을 때 알게 된 것인데, 무관심만큼 가장 확실한 단절 방법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젠 고독한 늑대니 흑염룡이니 하며 컨셉을 놀리는 짓도 못 해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