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아직까지는 (5)
오늘따라 식당 분위기가 좀 조용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으나, 그것에 집중하기엔 공복 상태가 너무 길었다.
나는 유독 많은 생선 요리에 기뻐하며 그것들을 위장에 차곡차곡 쓸어 담았다.
열흘 넘게 쓰러져 있던 나를 고려한 것인지, 다들 입에 넣으면 녹아내릴 수준으로 푹 익혀져 있어서 소화불량 걱정은 덜어도 되었다. 맛있다.
달그락.
그렇지만 역시, 많이 먹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나는 평소보다 덜 먹었는데도 불러 오는 배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남은 음식이 조금 걱정되었으나, 버서커 먹는 걸 보니까 다시 마음 놓였다.
그녀는 내가 못 먹은 것도 다 먹어 줄 양반이었다.
드르륵.
나는 의자를 뒤로 살짝 빼며 사유했다.
저렇게 먹성 좋은 친구가 현실에도 하나쯤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식당 갔을 때 최대한 다양하게 먹어 볼 수 있는데.
왜 내 주변엔 죄다 소식가들뿐이지.
크게 중요한 상념은 아니었다.
“차는 안 마시나?”
나는 대답을 해 줄까 하다가, 설명 들으면서 해 준 대답으로 오늘 치 답변 횟수는 끝났겠거니 하며 침묵을 골랐다.
대신 이제 어딜 갈지에 대한 고민을 떠올렸다. 정말 중요한 주제였다.
나, 방에 가 봤자 할 게 없다.
덜컹.
해서 식당 문을 닫는 동안 좀 더 고민해 보았다.
신전에서 책 빌려 읽기는 몸 상태가 별로기도 하고, 애초에 신전을 나가고 싶단 생각이 더 많이 들어서 패스.
나가서 그림 그리기는 이상한 기분만 들 것 같아서 기각. 식당은 방금 밥 먹었으니 가 봤자 의미 없고, 카페도 없고.
“불타 버린 숲 복원은 어떻게…….”
“정말 메마름이 끝난 게 맞는…….”
그러다 잠깐, 복도를 지나던 내 귀에 대화 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복도 벽 너머, 약초밭에서 일하고 있던 사제들의 대화였다.
그런데 그들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내가 하면 좋을 일 몇 개가 떠올랐다.
마침 출발이 며칠 미뤄질 것 같다던 말까지 더하면 아주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내가 얼마 전 신세진 정보길드에 찾아가기로 했다.
“…처참하네요.”
한편, 악마기사가 떠난 식당.
데스브링거는 참았던 숨을 토해 내듯 말을 뱉었다. 그의 손은 체할 것같이 거북한 속을 툭툭 두드리고 있다.
“음식 맛이 이상한가? 난 맛있는데.”
“음식을 말한 게 아니라… 어휴, 됐습니다. 샌님은 그냥 그렇게 살아요.”
“……?!”
데스브링거는 맹한 인퀴지터가 그의 말이 욕인지 아닌지 분석하는 동안 수저를 놓았다.
평소였다면 배가 터질 것처럼 부르도록 먹었겠으나 오늘은 영 날이 아니었다.
품에 있는 장검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음음으믐므?”
“…댁은 제발 삼키고 말하십쇼.”
“오늘도 가나, 어린 사냥꾼아?”
“넵. 오늘도 갑니다.”
악마기사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줄 것도 있으나, 지금 상황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니 뭐 어쩔 수 있나? 다른 거라도 해야지.
이번이 아니면 기회도 몇 번 오지 않을 일이니까.
“몸조심하게.”
“네.”
지난 며칠간 꾸준히 한 외출인데도 매번 배웅해 주나. 그는 그 지점에서 약간의 간지러움을 느끼며 일행들을 뒤로했다.
더는 감시받을 일 없는 그의 몸이 신전을 빠져나갔다. 좀 더 나아가면 에드니엄 성 자체를.
* * *
“여긴 진짜 찾기 힘들어…….”
어차피 주점이나 일반 가게로 위장해 있을 것, 큰 길가에 있으면 어디 덧나나.
나는 그런 불만을 살짝 품으며 문을 열었다.
딸랑, 하고 문에 달린 종이 울었다.
“어서 옵쇼… 아, 당신인가? 또 왔네?”
막 영업을 시작한 시간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본업이 아니라서 요리를 못하는 건지.
나는 가게 주인의 아는 척을 무시한 채, 아무도 없는 바 테이블에 앉았다. 물론 다른 테이블이라고 사람이 있는 건 아니다.
“자 자, 한 잔!”
또각.
그사이 가게 주인은 주문도 안 한 술을 내왔다. 풍기는 향이나 빛깔이 범상치 않은 게 보통 술은 아닌 듯했다.
나는 이걸 무슨 의미로 주는 건가 싶어서 가게 주인을 슬 보았다. 짧은 잿빛 머리칼을 뒤로 모아 묶은 가게 주인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저번에 준 돈이 남아서 말이야. 서비스.”
아, 그런 의미였나.
하기야 폐쇄적인 대삼림에 정보 루트를 뚫어 준 격이다.
대족장과 그의 보좌들이 검열한 정보만 전달이 된대도 충분히 이득이겠지. 교류가 계속되다 보면 언젠간 대삼림에서도 정보길드에 포섭되는 사람이 나올 테니까.
그걸 대족장이 순순히 두고 볼 거란 생각은 안 들지만, 뭐 그거야 본인들 사정이고.
혹시 몰라서 이번 편지에 당부를 적어 두었고.
“치워라.”
“마음에 안 드나? 우리가 자신하는 술인데.”
나는 노파심에 조언을 적어 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왼손을 바 테이블에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이 테이블 표면에 닿기 전 무언가가 나타났다.
탁.
잘 말린 송아지 가죽으로 둘둘 만 편지가 테이블 위에 올랐다.
“오…….”
“전달이다.”
“이번에도 같은 곳?”
“답신은 필요 없다.”
아마 답신이 오기 전에 내가 떠날 확률이 높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해 두며 손을 거뒀다. 배턴 터치 하듯 다음으로 손을 댄 건 가게 주인이다.
“기한은?”
“없다.”
“으음, 그렇다면야. 이건 서비스로 해 주지.”
그러면 나야 감사하고.
“별도 의뢰다.”
“응?”
“너희가 파악한 ‘나’의 정보, 전부 사겠다.”
그렇지만 역시 이것까지 서비스로 받긴 무리겠지.
나는 매번 주저하며 포기해 왔던 것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내었다. 이제 되돌릴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베르가르트 성주와 면담을 시작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잠깐, 잠깐. 파는 건 문제가 없는데, 본인 정보를 왜?”
“이곳에서 정보는 상품이 아니었나?”
“…아, 그렇긴 하지만.”
정보 교환이 목적이 아니라면 내게 대답해 줄 이유는 없다. 나는 서비스 대신 미리 준비해 온 대가를 꺼냈다.
“선금이다.”
“응?”
어린아이 주먹만 한 손톱 두어 개가 테이블 위에 떨어져 내렸다.
백금색의 발톱은 결코 보통의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듯 일반 짐승의 것과 전혀 다른 빛을 발한다.
“이건… 뭐지?”
“비류호의 발톱이다.”
“뭐!?”
뭘 그리 놀라. 내가 비류호의 사체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아니면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무능한 거야?
“아니, 가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그걸…….”
다행히 그건 아닌가 보다.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이 나를 붙잡았다.
“잠깐─!”
탁!
좋아. 잡히기 전에 손을 빼냈다. 나이스.
“아직 말 다 안 끝났다고.”
“불가능한가?”
“그게 아니라……! 아잇, 참.”
가게 주인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성큼성큼 걸어 가게 문에 다가갔다. 그러곤 잠금쇠를 내려 문을 완전히 닫았다. 철컹철컹. 네 개의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가게가 영업 전 상태로 돌아갔다.
“조건을 정확히 하자고. 우리 길드가 가지고 있는 당신의 정보 전부, 이거면 되는 거야?”
“정보를 토대로 낸 추측이나 의견이 있다면 그것도 사겠다.”
“좋아. 말 그대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사겠다는 거네. 이러면 정보를 취합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데…….”
가게 주인은 그리 말하며 힐끗 손톱을 보았다.
“손톱 하나 더 없어?”
없을 리가 있나. 열다섯 개 다 챙겨 왔는데.
나는 손톱을 하나 더 떨어트렸다. 가게 주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두 개를 부를 걸 그랬나.”
바가지 씌우겠다는 말을 손님 면전에서 바로 하네. 뭐, 저렇게 말하는 사람인 걸 알아서 이용하는 거지만.
나는 캄버러의 정보길드를 떠올렸다가 속으로 혀만 내둘렀다. 에드니엄의 정보길드도 그 모양이었으면 난 조사 의뢰를 나중으로 미뤘을 것이다.
땡그랑.
어쨌거나 나는 손톱 하나를 더 떨어트렸다. 가게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달란 이야긴 아니었는데? 선금이고 자시고 정보료는 이걸로 충분해.”
“혀를 무겁게 해라. 네가 몸 담은 곳에도.”
“…아, 그래. 당신이 이 정보를 샀다는 건 나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지?”
“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퍼지지 않도록 해야 할 거다.”
“그럼 값이 좀 부족하지. 직장에도 숨기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래? 그럼 더 받든가.
“아니, 기사님은 농담도 몰라?”
“네가 받은 금액만큼 혀를 무겁게 해라.”
나는 발톱 하나를 더 얹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이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내뱉었다.
“침묵을 살 발톱은 하나면 돼. 대신 사소한 궁금증 하나만 해결해 주시지.”
발톱 하나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치익. 나는 손바닥 타기 전에 냉큼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건 들키면 안 된다.
“스스로의 정보를 사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별개로 이 전개는 내 입장에서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내 개인 정보보다 돈의 가치가 덜하게 느껴지니 당연하다.
그렇지만, 뭐어. 상대 표정을 보아하니 발톱으로 갈음하게 해 줄 것 같지가 않다.
“이 발언 또한 불문에 부쳐야 할 거다.”
“아, 그럼 그럼. 이것도 나만 알고 있을 테니까.”
나는 저 말을 믿어도 될지 가늠해 보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비밀 지킬 것을 종용하는 입장이지만, 정작 당부하면서도 그것을 믿고 있진 않은 까닭이다.
아무렴 저치를 내가 얼마나 봤다고 믿겠는가. 은행원이 내 계좌 번호를 퍼트리지 않을 걸 믿는 느낌으로 그냥 신뢰하는 거지.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솔직히… 이 사실이 퍼져 나가도 내겐 별 타격이 되지 않는다. 이게 내 전투력과 직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약점으로 삼기에도 너무 미묘한 주제지 않은가.
막말로 기억이 없다는데 뭐 어쩔 거야. 오히려 이게 퍼지면 내가 설정 오류를 내도 아, 기억 문제인갑다 하고 넘기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결국 비밀 엄수도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의 수준에 불과하다. 나는 후련하게 말해 주었다.
“기억이……? 왜?”
“대답은 끝이다.”
그러나 기억이 왜 사라졌는지는 절대 침묵해야 한다. 악마 탓일지 모른다고 불똥이 튀면 그땐 나도 좀 곤란하니까.
“뭐, 좋아. 이 정도만 해도 내 궁금증은 해결됐으니까.”
“정보는.”
“길드조차 당신이 정보를 샀다는 걸 모르게 해 달라며? 그렇게 되면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부터가 까다로워져서 말이지. 각 지부에 퍼져 있는 정보를 가져올 때도 그렇고. 그래서 시간은 좀 걸려. 한 한 달 반……? 넉넉잡아 두 달이라고 해 둘까.”
두 달인가. 생각보다 긴 것 같으면서도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는 데 보편적으로 나흘에서 일주일쯤 걸리는 데다가 사건이라도 하나 터지면 2~3주는 발 묶이니까. 싸우고 나서 뻗기라도 하면 보통 2주쯤 뻗어 있고.
하면 거의 뭐… 도시 두 개쯤 지나서 받을 것 같다. 동부 딱 중간쯤에서 받겠네.
“와, 이렇게 보니까 엄청 귀찮은데. 발톱 다시 내놔.”
달그락.
“그걸 또 주네.”
나는 망설임 없이 발톱을 내주었다. 작정하고 모험가 일만 하면 쉽게 벌리는 것이 돈이다 보니 별로 아깝지도 않았다.
“문제는 전달 방법인데… 혹시 두 달 뒤에 어느 도시에 있을지 알아? 모르면 정보길드에 당신이 어떤 정보를 사 갔다는 건 보고할 수밖에 없거든. 그래야 당신 위치를 파악하고 전달할 길이 생기니까.”
별개로 이 부분은 정말 불편하네. 나는 인터넷을 새삼 그리워하며 그때그때 정해지는 일정을 떠올렸다.
문득 이번 목적지가 제법 멀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러니까, 분명 가는 데 한 달 넘게 걸린댔지? 거기에 그 도시에 동부에서 가장 큰 마탑이 있다면… 거기서 사건 하나쯤은 터지지 않을까?
하면 딱 두 달째에 거기 있지 않을까?
“베뮈르헨에 있을 거다.”
“베뮈르헨, 좋아. 그럼 거기 모험가길드 편으로 편지하지. 두 달 되기 전에 반드시 보낼 테니, 알아서 받아 가라고.”
“확인했다.”
몰라. 안 되면 내가 거기에 엉덩이 좀 붙이고 있지, 뭐.
나는 그런 대책 없는 생각과 함께 가게를 나왔다.
두 달. 새롭게 주어진 유예가 가슴 한편을 후련하면서도 무겁게 만들었다.
* * *
“이 개구멍은 언제 막히나 몰라.”
데스브링거는 이걸 말해 주고 가야 할지, 아니면 그만의 비밀로 남겨 둘지 고민하며 몸을 탁탁 털었다. 개구멍을 통과하느라 묻은 흙먼지가 허공으로 떨어져 나갔다.
“뭐, 안 막힌 덕분에 널 편하게 보러 오긴 한다.”
그러고 그는 챙겨 온 가죽 물통의 뚜껑을 땄다. 물 대신 채워 온 건 독한 술이다.
“그렇지, 에밋?”
그는 킬킬 웃으며 술을 한 모금 했다. 여행 중에는 입에 댈 일 없었던, 그러나 그 전까지만 해도 종종 마셨던 술은 입에 착착 감겼다.
“항상 말하지만, 이건 술이니까 너는 안 돼. 대신 이거나 먹어라.”
그러나 사람 무덤 앞에 와서 혼자만 술을 먹어서야 쓰나.
데스브링거는 아껴 둔 사탕을 두어 개 꺼내, 무덤 위에 올렸다. 살아 있을 적 못 먹은 사탕, 죽어서라도 맛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덤이다.
“…….”
다만 그렇게까지 하고 나니 할 말이 다 떨어졌다. 지난 며칠간 꾸준히 찾아오며 온갖 이야기를 주절거린 게 너무 컸다.
이곳을 탈출한 후 스카일라와 만나기까지의 과정. 그 후 행하고 겪었던 사건들. 그리고 끝의 끝에서 만난 용사 파티. 그들의 면면.
이젠 정말 들려줄 말이 없었다.
“에밋.”
아니, 정말 없나?
“넌 정말 괜찮았을까?”
그는 무덤 앞에 편하게 앉아 후드를 벗었다.
“아니지, 괜찮을 리 없지.”
여러 이유로 감추고 살았던, 그렇지만 가장 근본이 되었던 건 아마도 이 땅에서 있었던 일이었을 녹색 머리카락이 햇빛의 영역에 들어갔다.
암녹색 머리카락 위로 금빛이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죽음이란 건 그런 거니까.”
광휘는 참으로 짙어서, 속눈썹과 눈동자에도 드리워졌다.
데스브링거는 익숙치 않은 감각에 눈을 살풋 찡그렸다.
“…있잖아, 에밋. 내가 죽거든, 아마 난 신의 품에는 못 갈 거야. 누군가는 내 복수를 정당하다고 해 주겠지만, 결과적으로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다치게 했으니까. 내가… 나로 인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변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언젠가는 익숙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더는 그걸 후회하지 않기로 했어. 응. 나는 죽어서도 네 곁에 못 가겠지만, 그래도 난 그걸 후회하지 않을 거야. 잘못된 방법을 택했을지언정, 나는 불의에 침묵할 수 없었던 것뿐이라고 여기기로 했으니까.”
언제부턴가 그늘에 녹아드는 것이 숨쉬는 것만큼이나 쉬워진 것처럼.
“그러니 에밋, 내가 널 못 만나러 간다고 뭐라 하지 말아 주라. 이게 내가 사는 방식이었을 뿐이었던 거니까. 침묵할 수도 없고, 더 나은 방법을 고를 머리도 없었던 게 바로 나였다고…….”
양지에 나와 있는 것이 더는 낯설지 않을 순간 또한 반드시 그에게 올 것이다.
“그게 꼬우면 살아나. 알았지? 어떻게 살렸는데 그따위로 살 수 있냐고, 그럴 거면 목숨 내놓으라고 외치면서 무덤에서 일어나. 웃으면서 반겨 줄 테니까.”
그러니 그가 할 일은 이제 하나뿐이다.
“대신, 그 순간까지 나는 이렇게 살 거야. 이렇게 살아남을 거야.”
살아간다. 목숨의 무게를 어깨에 얹고 살아간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으니까 앞으론 고쳐 가면서. 그러나 이미 저지른 죄의 무게는 결코 잊지 않은 채로.
여전히 화낼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화를 내면서 살아갈 것이다.
“아!”
데스브링거는 묘지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가 오나 싶어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직도 강한 햇빛이 쏟아진다.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정도로 강렬한 햇빛이었다.
“이래서 저녁에 온다 다짐한 건데, 오늘도 까먹었네. 나 빡대가린가.”
그는 괜히 자신의 기억력을 탓하며 다시 후드를 썼다. 진심과 별개로 정말 햇빛이 강해서 앞을 보려면 후드가 필요했다.
“…응?”
그런데 저기, 저 평원 위를 걷는 인영 하나는 대체 뭘까. 저쪽은 정규 길도 아니고 숲과 이어지는 길이라 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그는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고 상대를 낱낱이 살폈다.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약간의 특징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검정색과 회색 두 가지의 머리색이라든가, 등허리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검 같은 것이.
“…누가 봐도 나리잖아?!”
아니, 저 사람이 왜 도시 밖으로 나왔단 말인가. 그것도 동행 한 명 없이!
“연락, 연락…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지!”
그는 저게 함정인가, 아닌가 고민하고. 제가 마법사가 아님을 또 한 번 통탄스러워하다가 결국 선택을 내렸다.
따라가자.
함정일 확률이 없는 건 아니나, 저게 진짜 악마기사라면… 그건 정말 대형 사고 아니겠나.
아직까지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관계지만 그래도 열흘 넘게 누워 있던 사람을 혼자 보낼 순 없었다.
데스브링거의 다리가 후다닥 평원의 들풀에 숨어 악마기사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