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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76화 (176/389)

176화 아직까지는 (4)

초반만 해도 나는 내가 로그인하기 전 시점의 악마기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과거는 대부분 맥거핀으로 끝나거나, 스토리 중에 밝혀지니 당연하다.

그러나 이곳이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반쯤 각오하고 있었다.

내가 로그인하면서 생겨난 육신이라면 다행이나, 기존에 존재하던 인간의 몸에 내가 빙의했다는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으므로.

그러나 알면서도 일부러 외면했다. 전자라면 몰라, 후자는 내게 너무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기에 행한 도피였다.

그렇지만 만약 때가 됐을 때, 지금처럼 알 수 있는 상황이 왔을 때 도망칠 의향 또한 없었다.

언제나 말하지만, 내 인생 모토는 ‘그럴 리 없다는 말만큼 무용한 것이 없으며, 그렇기에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였다.

“의문과 추측이 가득했다는 건, 무슨 의미지.”

─말처럼 그렇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당신이 행적을 알리지 않고 혼자만 움직이는 바람에 온갖 풍문이 덧붙여진 거니까요. 대체 어떻게 이동하는 건지 목격담도 별로 없고.

그렇지만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거기에, 그, 하. 까놓고 말하겠습니다. 겨우 목격담이 들어온다 싶으면 죄다 ‘범죄자나 악마 이야기만 듣고 떠난다’, ‘그것들을 죽이는 것에 한이 맺힌 것 같다’ 이러는데… 누가 의문을 안 품겠습니까? 남 이야기 떠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다 입에 담아 봤을걸요.

나는 내게 주어진 진실에 집중하여 덮쳐 온 무게를 견디고 버틸 수 있을까.

─질문은 이것으로 끝이십니까?

인생의 변환점에서 한 번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겨 낼 수 있어?

“…마지막이다. 어떻게 확신했지?”

─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때의 존재와 동일한 사람이란 것.”

─아아. 그거야… 당신이 기사의 이름을 쓰고 있으니까요?

“……?”

─……? 그, 기사를 사칭하면 제지가 가해지잖습니까. 모험가든 용병이든, 어느 단체에 적을 올리고 있는 상태라면 특히 더. 그럼에도 기사의 이름을 자유롭게 쓰고 계시니까… 또 지난 40년간 모험가에게 기사의 이름이 내려진 건 당신이 유일하기도 하고. 그래서 당연히 당신일 거라 생각했지요……?

모르겠다. 지금 당장으로써는 도무지 확신할 수 없다.

“…확인했다.”

집채만 한 시련이든 아파트만 한 시련이든 코앞에서 볼 땐 똑같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저, 그럼 제가 질문 하나만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말해라.”

─기억이 분명치 않다는 것을 두고,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나는 베르가르트 성주의 물음에 침묵했다.

해야 할 일이라. 오른팔에 악마가 있다는 걸 알고 한 말인가? 아니면 단순히 내가 은인이라서 걱정하겠단 의미인가.

“없다.”

어느 쪽이든 고를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나는 그것으로 통신을 종료했다.

대화 나누는 동안 앞으로 기울었던 몸을 반대쪽으로 폈다. 푸욱. 푹신한 소파가 내 등을 받쳤다.

“더는 볼일 없으십니까?”

“그래.”

거기에 눈치껏 마법사까지 나가며, 나 혼자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내 오른손이 눈가에 얹어졌다.

떠오르는 것이 너무 많아, 귀는 거슬릴 정도로 먹먹해진 상태다.

그렇지만 생각을 멈추는 건 어렵다.

지금 들은 모든 사실이 공식 캐릭터의 과거인지, 아니면 내가 짠 컨셉의 반영인지 또는 타인의 행적인지 고민하는 것도.

2년 전의 악마기사가 이것과 다른 장비를 입고 다녔다면, 내가 지금 입은 것은 대체 어디서 난 것인지 하는 의문도.

컨셉의 반영이라면 대체 어떤 미지의 힘이 이걸 벌인 것인지, 타인의 행적이라면 진짜 악마기사는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전부, 멈추기 어렵다.

“하.”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지금 낼 수 있는 답은 하나도 없다.

아무렴, 이건 중도에 끼어든 내가 사전 정보 없이 알아낼 수 있는 답이 아니었다. 이 농간을 벌였을 시스템 혹은…….

어딘가로 증발했거나 숨어 있을 진짜 악마기사에게 들을 말이지.

“후.”

나는 한참 동안을 손바닥 속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러곤 손을 떼어 낸 순간에 온갖 상념을 갈무리했다. 다행히,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떠오르는 가설과 추측이 많아서 문제인 거지, 감정이 크게 요동치며 눈앞을 가리진 않은 까닭이다.

그 이유론 글쎄. 욕실에서 울분을 털어 낼 대로 털어 낸 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울고 웃고 화내기엔 기력이 너무 부족하다.

장작이 없는 화로가 타오르지 못하는 것처럼, 이젠 소진될 감정마저 없는 느낌이라고 봐도 되겠다.

“…이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다만 아까도 겨우 미뤄 두었던 회의감은 뭐 이리 잘 찾아오는지.

뭐,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다.

게임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앎에도 수월히 견디고자 억척같이 외면하고 있던 상황이 지금의 내가 아니었나.

한데 그 가운데에 이런 폭탄을 터트려서야. 완전히 납득할 수 있게 해 주면 몰라, 애매한 현실감만 들게 해 주니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럴 거면.”

엔딩이 없다면, 그래서 엔딩을 보기 위해 싸우고 피 토하며 발버둥 쳐왔던 모든 행위가 무의미할 가능성이 크다면.

차라리 모든 걸 관두고 어디 시골 구석에 짱박히고 싶어 하는 사고가 결국 들 수밖에 없으니까.

“이럴 거면…….”

혹은, 혹은…….

나는 잠시 눈가를 덮었던 팔을 떼었다.

건틀릿에 둘러싸인 오른팔이, 그 안에 숨어 있을 살갗은 더없이 검을 팔이 보였다.

아마도, 설정이 아닐 그것이.

“빌어먹을.”

툭.

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지 못한 채로 다시 눈을 짚었다.

경애하는 당신들을 위해 마지막 충동만은 억눌렀다.

암, 내가 아무리 불효자라도 최소한 마지막 순간까지 보이고 싶지 않은 장면은 있다. 설사 이 모든 게 당신들에겐 전해지지 않을지라도 그렇다.

『그럼 됐다. 실패해도 좋고, 망해도 좋다. 네 삶에 의미를 붙일 수 있다면, 난 그걸로 널 응원하마.』

그게 내가 당신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일 테니까.

드륵.

또한, 같은 맥락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일어나기를 택했다. 엔딩에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있을 수도 있다는 그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한 선택이었다.

혹은 이왕 여기까지 온 것, 최소한의 전말을 알기까지만이라도 더 발악해 보자는 독심일 수도 있겠다. 근성은 어지간한 K-게이머들의 기본 스탯이니까.

억지로 세워진 다리가 잠시간 후들후들 떨렸으나, 몇 번의 걸음 끝에 가려졌다.

다시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

덜컥.

“…드디어 나왔군.”

“……?”

그런데 방을 나가고자 문을 열어 보니, 아크메이지와 데스브링거가 기다리고 있더라.

뒤에선 소성주 두 사람이 눈치를 보고 있었고.

“뭐냐.”

어, 혹시 나를 찾으러 온 건가? 왜? 말없이 신전을 나가서?

“자네는…….”

아, 생각해 보니 찾아올 이유는 많은 것 같다. 사실 많지 않아도 찾아오는 게 맞다.

열하루 만에 깨어난 사람이 병실을 비우다 못해 병원을 나가 버리면 보호자든 담당 의사든 누구든 잡으러 와야지.

정작 의사역의 사제들은 내 눈치 보느라 쩔쩔맸다마는.

“일단, 신전으로 돌아가세. 자리를 제공해 주신 소성주님께서도 감사를 전합니다.”

“그, 별것 아닙니다. 편히 있다 가시지요.”

“아닙니다. 너무 오래 폐를 끼칠 순 없지요.”

반면 보호자 격의 아크메이지는 이 악문 발음으로 나를 이끌려 했다.

그 옆의 데스브링거는 끊임없이 곁눈질만을 하는 중이다. 그의 품에서는 난데없는 장검이 달랑거리고 있다.

“용건.”

나는 데스브링거가 쓰지도 않는 장검을 왜 들고 있나 싶어졌으나, 크게 의심하지 않고 넘어갔다.

대신 컨셉은 말을 안 듣는 게 챠밍 포인트라며 응접실의 입구 앞에 버티고 섰다.

아크메이지가 화는 나는데 차마 내지 못하는 얼굴을 했다. 골 때린다는 표정이다.

“…자네, 그게 지금 할 말.”

“저! 나리,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도 들어야 하고, 또 식사도 하셔야 하고…….”

그러나 그 골 때림이 분노로 넘어가기 전, 데브가 크게 외쳤다. 그건 제법 들어 줄 만한 말이었다.

아깐 안 말해 주더니 지금은 왜 또 말해 주나 싶긴 하지만. 이미 소성주들에게 들은 것이 좀 있지만.

그래도 다음 일정도 듣긴 해야 하니까.

“…이게 맞는 짓인지 모르겠군.”

“…….”

무엇보다 식사라는 단어 듣고 나니까 제대로 허기가 진다. 젠장, 지금까진 잊고 있었는데!

* * *

스스로의 나약함을 보완하고자, 베르세르크에게 지도 대련을 부탁했을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어 오전 시간을 다 까먹고 말았을 때.

인퀴지터는 자연스럽게 식당으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있고, 훈련으로 인해 배가 고파 온 것도 있었으며, 모두가 그곳에 있을 것이란 무의식적인 학습도 있었다.

“으하핫. 배고프다!”

“저희 왔습… 어…….”

한데 이 분위기는 대체 무엇인지.

인퀴지터는 있는 눈치, 없는 눈치 전부 끌어모아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조용한 식당은 평소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더 이상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였다.

“오! 전우여! 일어났는가?!”

“그, 깨셨습니까? 몸은 괜찮으십니까?”

물론 지난 열흘간 비어 있던 악마기사의 자리가 채워진 건 좋은 일이다. 그가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도 건강함의 증명 같아 안도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베르세르크도 배가 고파서 왔다. 같이 먹자.”

인퀴지터는 말없이 밥 먹는 악마기사를 보고, 반대편에서 수저를 든 아크메이지님과 뺀질이를 보았다.

심지어 뺀질이의 품엔 악마기사에게 선물해 주겠다던 장검이 아직까지도 들려 있으니.

뭔가 이상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상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저…….”

“오셨습니까.”

모르겠다. 인퀴지터는 여상스러운 것 같은 아크메이지를 보고, 다시 뺀질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열심히 눈총을 주었다. 뭔 상황인가. 앉아서 밥이나 드십쇼. 필사의 눈짓 의사소통이 이뤄졌다.

“근데 뭐냐? 오늘따라 음식이 많다!”

“…자네들이 올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 놨네. 수프는 곧 올 테니 배고프면 다른 거라도 먹게.”

“오오! 고맙다!”

모르겠다. 일단 앉자.

인퀴지터는 살금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며, 언제나처럼 악마기사의 옆옆옆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열흘 만에 깨어나 식사하는 까닭인가. 악마기사의 앞에는 평상시 먹던 양의 배쯤 되는 음식들이 놓여 있다. 고기 대신 생선도 올라가 있었다.

“…오신 김에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넵.”

생선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녀는 갈수록 수척해지는 악마기사를 떠올리며 이번 기회에 그가 최대한 많이 먹기를 빌었다.

“에드니엄에서 다른 도시로 가는 길이 불편하여, 캄버러로 다시 이동할 것이라 미리 말씀드렸지요. 기왕 캄버러로 돌아가는 것, 소성주님과 일정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해서 출발은 며칠 미뤄질 것 같습니다. 소성주님이 바쁘시다더군요.”

“네… 네?”

그런데 아크메이지의 설명이 그녀에게 의문을 심어 주었다. 그녀가 들은 것과 조금 다른 까닭이다.

소성주님과 일정을 맞추기로 한 것은 맞지만, 이쪽에게 전적으로 맞춰 주신다고 하지 않았나?

“비류호의 사체를 들고 도망친 악마에 대한 소식 역시 아직 들어오지 않았고 말입니다.”

거기에 도망친 악마의 소식이라니.

그녀가 기억하기로, 악마의 수색은 이틀 전 완전히 포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을 텐데?

“저, 아크메이지님. 그 소식은…….”

인퀴지터는 진위를 확실히 하고자 손을 들어올리려 했다.

잘못 들은 거라면 그녀의 중대한 실수고, 새로 들어온 소식이 있는데 그녀만 전달을 못 받은 거면 또 다른 문제인 까닭이다.

꽈악.

그러나 발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본능적으로 그녀의 행위를 말렸다.

인퀴지터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동그랗던 눈매를 날카롭게 좁히며 제 바로 앞자리를 응시했다.

‘왜 밟는 거냐!’

‘눈치 좀 챙겨요!’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 사이에서 왁왁거림이 잠깐 오갔다.

“일이 마무리되면 다음으론 베뮈르헨에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가는 데만도 한 달 넘게 걸리는 곳이지만… 동부에서 가장 큰 마탑이 있는 곳이니 말입니다.”

그사이 아크메이지는 악마기사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나누고 결정했던 사항을 천천히 늘어놓았다.

모두에게 말하는 말투지만 실상 악마기사 들으라고 하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베뮈르헨에 가면…….”

더불어 베뮈르헨은 가장 큰 마탑이 있는 도시임과 동시에 머맨들과 전쟁을 벌이는 도시다.

그곳에 가면 싸울 일밖에 없으니 몸을 가능한 만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으라는 것은 특히 그가 들어야 할 부분일 테다.

“…거기서 자네의 몸을 한 번 더 체크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그러니까, 그녀가 듣기론 그랬다. 지금의 아크메이지는 어째서인지 말을 안 해 줬지만.

인퀴지터는 아크메이지가 왜 그걸 말하지 않는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것엔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입을 다물었다.

잘못 전달하는 것과 빼놓고 전달하는 것은 좀 다르니까.

“하니 가능하면 그때까지 몸을 좀 아껴 주게.”

그렇지만 아까는 정말 왜 다르게 말하신 거지.

그녀는 이따가 따로 여쭤봐야겠다 생각하며 멍하니 식탁을 노려보았다. 배고프다. 오전 내내 움직이며 주린 배에 맛깔나는 음식 향기가 계속 기어들어 왔다.

“그 외의 사항은… 아, 비류호의 주검은 자네의 몫이네. 어떻게 처리할 건가?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면 장인을 연결해 주겠네.”

“팔겠다.”

“…적당히 주선해 주지.”

다행히 아크메이지의 말은 길지 않았다. 때마침 그녀 몫의 수프가 도착한 건 덤이다.

그녀가 스푼을 잡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펼쳐졌단 것이다.

“…뭐 합니까요.”

거기에 뺀질이의 눈총까지 있어서야.

먹어도 되는 거겠지? 인퀴지터는 눈을 두어 번 굴린 후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쥐었다.

비록 베르세르크는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수프고 뭐고 이미 나온 것들을 마구 입에 밀어넣는 중이지만, 이제라도 먹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침묵의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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