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아직까지는 (3)
“이곳에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지라,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두 소성주는 성에 입성하자마자 한쪽으로 향했다.
그 끝에는 창고로 추정되는 장소가 있었는데… 그 안은 마법사로 가득했다. 마법사들 건너편엔 정체모를 하얀 동산이, 바닥에는 뭔지 모를 마법진이 잔뜩 새겨져 있었고 말이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잠시 주목. 부탁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데─.”
“응? 뭐야, 소성주님이시잖… 헉! 악마기사님!”
“뭐? 악마기사님이라고!?”
“사체의 주인?!”
그런데 저것들은 또 왜 저래. 날 실험체로 삼고자 하는 열정에 시동이라도 거는 건가.
“잠깐, 진정─!”
“악마기사니이이임!”
“우아아악!”
나는 차분한 인상의 레온 소성주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망가지는가. 그리고 마법사들은 또 왜 저러나. 그런 고찰 속에서 손을 살짝 휘저었다.
허공에 생겨난 마력창이 내 바로 앞에 울타리처럼 콰가가각 박혔다. 마법사들이 그 앞에서 가까스로 멈춰 섰다.
“넘으면, 죽인다.”
끼이익 멈춰 섰던 마법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적정 거리를 두고 도열했다. 그 단합력이 가히 잘 훈련된 군사와 같았다.
“악마기사니임!! 제발 비류호 주검 조금만 나눠 주십시오!”
“아닙니다! 저는 몰염치하게 공짜로 받으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합당한 값을 치를 테니 제게 넘겨 주십시오!”
“악마기사님!!!”
“기사님!!”
물론 거리를 벌리자마자 다시 집단적 독백을 시작하긴 했다. 안전거리가 생기니 말을 이해하긴 좀 더 쉬워졌지만 말이다.
하여 저들의 관심사가 내가 아니란 건 이제 알겠다. 그건 다행이었다. 다행이었는데.
왜 나한테서 비류호의 시신을 찾아?
나는 나도 모르게 소성주 둘을 쳐다보았다.
“아, 아직 전달 못 받으셨습니까?”
마침 에드니엄 소성주는 마법사들을 걷어차고 던진 캄버러 소성주에게 막 들어 올려지던─공주님 안기로─참이다.
“그, 악마에게 빼앗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남은 비류호의 사체는 악마기사님께 오롯이 귀속되었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에드니엄 소성주지만, 답변만큼은 참 착실히 해 주었다. 덕분에 상황은 좀 파악이 됐다. 떨떠름함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그도 그럴 게 비류호 송장 말이야, 침입자한테 다 빼앗긴 것 아니었어?
그리고 그게 남았다면 왜 나한테만 줘? 레이드 지분을 따지면 가져야 할 사람 더 있지 않나?
“토벌에 나섰던 모든 분이 자격이 없노라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하여 공이 가장 크신 악마기사께 전부 돌아간 것입니다.”
내게 운 좋은 일이 있다면, 그건 캄버러의 소성주가 참 눈치가 좋은 사람이란 것 같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눈치껏 추측만 했을 것이다.
“참고로 사체는 저곳에 있으며, 아크메이지님께서 손수 마법을 걸어 주신 덕택에 악마기사님 외의 사람은 안쪽으로 접근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어쩐지 별것 없어 보이는 창고에 마법사가 드글드글하더라. 그게 전부 비류호의 주검 때문이었구만.
“흐헉, 제발 털 하나만!”
“기사니이이임!!”
별개로 아크메이지는 참 현명한 사람이다.
나 외엔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마법이라니. 그거 안 걸었으면 지금쯤 비류호의 송장은 털 하나씩 빼돌려져서 벌거숭이가 되었을 것이다.
치이이익!
뭐, 그렇게 됐어도 별 의미 없었겠지만.
“소, 손이!”
“괜찮으십니까?”
나는 열기에 찌그러진 하프팜 장갑과, 그것이 가리지 못한 손바닥 부위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김없이 화상 자국이 새겨졌다. 내가 이것을 절대 못 쓴다는 증거기도 했다.
아무래도 신전이 또다시 전부 정화한 모양인데… 물론 인위로 타락시키면 내가 쓸 수도 있겠으나, 굳이 그래야 할 필요는 못 느끼겠다.
아무렴, 대부분이 살과 내장인데,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마물 먹는 요리사나 연금술사도 아니고.
뼈와 가죽도 있긴 하지만… 글쎄다. 뼈로 무기를 만들 거면 통짜 뼈를 깎아서 써야 하잖아. 그런데 저것에게서 과연 장검을 만들 수 있는 크기의 뼈가 나올까?
더불어 가죽은 또 어떻고? 가죽으로 만들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옷 종류뿐인데.
그리고 옷은… 백호 가죽 옷이 컨셉에 어울릴지는 미뤄 두고서라도 너무 자주 찢어지고 해져서 의미가 없다.
당장 지금까지 겪은 경험만 들춰 봐도 그렇다. 단벌 신사를 벗어나기 위해 종종 옷을 사 입곤 있으나, 잠옷용 외엔 죄 일주일을 못 가지 않았나.
이것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진 않다. 잡몹이라면 몰라, 보스들은 이거 잘 찢을 것 같거든.
거기에 난 보스들 외엔 처맞을 일이 별로 없다. 전적만 봐도 그렇다. 보스 이외에 중상을 입은 적은 지금껏 두 번─타타라 하수도 때와 대삼림의 폭포 쪽─뿐이니까.
개고생 한 것에 비해 또 자템 안 뜬 건 다소 억울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가치 있는 부위가 어디지?”
사실 그렇잖아? 내가 장비를 바꾼다고 해서 유의미하게 바뀔 건 하나도 없을 텐데.
“예?”
“일단 손톱과 꼬리가…….”
그러니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판다. 마침 지갑도 빈약해진 참이니까 이런 걸로라도 충당해야지.
서걱!
물론 소성주들에게 마땅한 값부터 치르고.
“헉!”
“훼, 훼손을.”
나는 항시 챙겨 다니는 검으로 앞발을 잘랐다. 이것이 얼마나 할지는 모르겠으나 못해도 백만 갈은 할 것이라 믿는다.
“대가다.”
“……!”
내 손이 캄버러 소성주 쪽으로 앞발을 내던졌다. 그녀가 에드니엄 소성주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행위였다.
해서 다음 순간 아차 했는데…….
쿵!
“억!”
“와악!”
캄버러 소성주가 망설임 없이 에드니엄 소성주를 마법사들에게 던져 버리고 호랑이의 앞발을 받았다.
거대한 호랑이의 앞발답게, 그녀가 거의 다 가려졌다.
“…이걸 받아도 되는 것입니까?”
“빚을 지진 않는다. 할 일을 이행해라.”
자세히 따지면 베르가르트 성주와 날 연결해주는 건 에드니엄이나… 어차피 둘이 연인 관계다. 목숨이 위험할 걸 알면서도 구하러 가는 관계인데 설마 이걸로 틀어지진 않겠지.
“이 은혜,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필요없다.”
그리고… 애초에 성주님 중개료만으로 준 것도 아니다. 피해자가 아직 남아있을 텐데 거기 보조금으로 쓰란 의미도 있다. 막 그렇게 큰 값은 못될 테지만.
…그래도 다는 못 준다. 이젠 나도 쓸데가 있으니까. 남을 돕는 것도 내 앞가림은 챙긴 후에 해야지. 그렇지?
“아, 그렇지. 거기, 자네들. 부탁할 것이 하나 있는데.”
각설하고, 소성주는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일을 제대로 진행했다.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그녀가 호랑이 앞발을 흔들며 “다른 도시에 연락하는 것 도와줄 사람.”이라 말한 순간, 자원자가 줄을 섰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에드니엄 소성주가 울상이 된 건 여담이다.
* * *
“저, 나리… 나리?”
한편, 시간을 조금 당겨 악마기사가 막 소성주 둘과 성의 창고로 이동하던 시점.
데스브링거는 사과 겸 선물용으로 준비한 장검─마침 악마기사가 검을 또 깨 먹었으니까─을 품에 안고 악마기사 전용 방에 찾아갔다. 아크메이지가 돈을 보태고 인퀴지터와 베르세르크가 안목을 발휘해 골라 준 장검이었다.
“기척이 왜…….”
그런데 어째 방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제법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저, 나리, 들어갑니다?”
기척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온갖 생각이 들어찼다. 데스브링거는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없, 없어졌…….”
베개와 붙은 쪽이 흐트러진 이불과 옷걸이에서 사라진 옷. 누가 보아도 주인이 떠나간 듯한 광경이 그의 눈에 펼쳐졌다.
“아크메이지님!”
그는 당장 식당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그곳에 있나 싶어서였다.
“…악마기사가 사라졌단 말인가!?”
그러나 이곳에는 없었다. 데스브링거에 이어 아크메이지도 낯빛이 어두워졌다. 열하루 만에 일어난 사람이 말도 없이 사라졌다면 누구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물며 악마기사는 요즘…….
“욕실은 가 봤나? 그는… 씻는 걸 제법 좋아하지 않나.”
“아, 아직 안 가 봤습니다요. 확실히 거기라면…….”
아크메이지는 대악마 모비 딕의 토벌전 이후부터 말수가 부쩍 적어진 이를 떠올렸다.
본래도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느낌이란 게 있다.
단순히 거리가 먼 것과, 먼 거리 사이에 거대한 골짜기가 있는 것이 또 다른 것처럼.
“아, 아크메이지님. 안 그래도 찾았… 예? 그, 기사님이라면 한참 전에 목욕을 마치고 가셨습니다만.”
그러나 그 점에 집중하기에는 당장 사라진 사람을 찾는 게 우선이다. 아크메이지와 데스브링거는 욕실을 청소하던 사제의 말에 고개를 떨구었다.
추측은 맞았으나 너무 늦었다.
“그렇지. 저, 아크메이지님.”
“그, 이걸 말해도 되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뭔가?”
“악마기사님께서 사용하신 수건에 피가 옅게 묻어 나와서 말입니다. 혹 상처가 도지신 거라면…….”
“…말해 줘서 고맙네.”
하물며 다음 거취를 알아내기는커녕 걱정만 더 쌓였다. 그들은 터덜터덜 그쪽 복도를 떠났다.
“…역시 나리는 제가 껄끄러운 걸까요?”
“그가 자네를 껄끄러워할 이유가 뭐 있나.”
“악마랑… 계약했으니까…….”
“가계약이지, 그것도 강제로 하게 된. 무엇보다 그건 지금 완전히 풀리지 않았나. 제약도 완전히 풀렸고.”
“그건 그렇지만… 나리는 그걸 아직 안 들었잖습니까. 비류호를 잡기 전만 해도 저랑 대화하는 걸 기피하셨고.”
아크메이지는 데스브링거의 말에 잠시 말문을 멈췄다. 비류호의 토벌 전, 비류호를 찾기 위해 보낸 엿새간 악마기사가 눈에 띄게 데스브링거를 피한 건 맞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그녀도, 인퀴지터도 악마기사와 말 섞은 횟수를 되짚어 보면 다섯 손가락으로 세는 게 가능하다.
이건 정말 이상한 게 맞았다. 악마기사가 아무리 과묵해도 아크메이지의 말만큼은 경청해 주는 편이었으니까.
“…그때는, 단지 혼란스러워서 그랬을 것이네.”
그러나 그걸 티 낼 수는 없다. 아크메이지는 왜 갈수록 유대가 쌓이긴커녕 갈등만 쌓이는지 한탄하며, 인자한 표정을 꾸며 냈다.
“가치관이란 게 쉽게 변하는 일이 드문 것 아닌가.”
“…….”
“오히려 나는 그가 자네와의 대화를 기피한 것보다,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자네를 살려 둔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
“자네도 알지 않나. 정말 그가 자네를 무가치하게 여겼다면 단칼에 베었을 거란 걸.”
“…그건, 그래요. 항상 방해가 되면 두고 갈 거라 말하면서 실제론 단 한 번도…….”
“그는 감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고 배울 기회도 없었으며 스스로 알고자 하지도 않는 사람이네.”
다행히 청년이 가진 오해는 그녀가 풀어 줄 수 있는 것에 속했다. 아크메이지는 그녀가 느껴 온 바를 조곤조곤 풀어 냈다.
“암, 죽는 순간까지 홀로 악마와 대적하는 것이 목표라면, 그에게 감정이 무슨 가치를 갖겠나? 악마를 향한 분노와 증오만 벼리고 벼리면 그만인데.”
“그렇… 죠.”
“그렇기에 그는 진솔하지 못해. 어쩌면 그 스스로도 본인의 감정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지. 겪어 본 적도, 배운 적도 없을 테니까.”
“…….”
“그러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게. 미움도 꺼림도 결국 의식하고 있기에 나오는 감정이니. 정말 무서운 건 무관심이야.”
“…그건 법사 나리 경험담입니까요?”
“비슷하네.”
그녀는 악마기사의 행방을 알게 되면 알려 주러 오겠다던 사제가 달려오는 걸 보았다.
“내 경우엔 사랑이었지만.”
* * *
“실례를 무릅쓰더라도 당장 마주해야 할 대화가 아니라면 30분의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느냐고 답신이 왔습니다.”
“기다리겠다.”
“예.”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데, 오늘 출발할 가능성은 끝없이 0에 수렴한다. 그러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별 상관 없다.
해서 나는 입이 무겁고 실력 좋은 마법사를 앞에 두고 눈을 감았다. 더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인가.
복잡하던 마음은 많이 가시고 내가 물어볼 것들이 차분히 떠올랐다.
처음 날 본 게 언제였는지, 묘연한 행적에 의문과 추측이 가득하단 건 무슨 의미인지, 악마기사란 존재를 최로로 인지한 순간은 언제인지.
그 과거에 보았던 악마기사는 어땠는지.
정말로, 할 질문이 많았다.
“연결되었습니다!”
“저, 제가 먼저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연락이 이어졌다. 소성주의 이름으로 불렀던 만큼 먼저 나선 건 에드니엄 소성주였다.
─이야, 에드니엄 소성주.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에드니엄의 홍복이네요.
“감사합니다, 베르가르트 성주님.”
─한데 갑작스런 연락은……? 혹 무슨 도움이 필요하신지?
“도움… 이라기엔 애매한 부탁이 있습니다.”
그는 조리 있게 내가 자리를 주선해 달라 했음을 설명했다.
내가 용사의 동료여서인지 혹은 내가 해낸 일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악마기사의 과거 행적 때문인지.
베르가르트 성주는 흔쾌히 대화를 수락했다.
“그럼 전 이만.”
무거운 이야기가 나올 것을 예상한 소성주가 서둘러 자리를 떠나 주었다.
─정식으로 뵙네요. 베르가르트의 성주, 율리안입니다. 사실 제대로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으면 했는데 설마 먼저 청해 주실 줄이야. 영광이네요.
각설하고, 베르가르트 성주는 성격이 본래 그러한듯 그다지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이러면 내가 원하는 바를 얻긴 더 쉬울 터였다.
─그래서… 제게 대화를 요청하신 이유는?
“물어볼 것이 있다.”
나는 한숨을 뱉듯 혹은 비명을 지르듯, 한 자 한 자 씹어 가며 속삭였다.
“회의에서 한 말, 그때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어… 그냥 그게 다인데요? 본인도 아시잖아요.
“난 그때의 기억이 없다.”
─오…….
기억하는 척 에둘러 물어볼까도 했으나 그것으로 얻을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하여 나는 방향을 조금 틀기로 했다.
이것으로 컨셉이 깨져서 얻을 위험보다, 이것으로 얻을 정보가 내겐 더 가치 있었다.
─이유는…….
“개인사까지 말해야 답이 나올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하긴, 그렇죠?
베르가르트 성주, 율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정말 별거 없습니다. 실전 연습을 나갔던 자리에 악마가 나타났고, 그 악마에게 견습기사와 교관들이 죽어 나가던 때 당신이 나타나 악마를 참수한 게 다니까요.
“그때의 내 모습은 어땠지?”
─어, 모습이요?
목소리만 전달하는 구조인지라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율리안이 조금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그, 당사자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좀, 그렇긴 했죠?
“정확히.”
─예, 좀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긴 머리카락은 산발이고, 옷과 머리카락에 가려져서 얼굴도 잘 보이지 않고, 온몸은 핏물로 젖어서 더럽게 얼룩져 있는데, 결정적으로 새까만 마력이 몸 전체에 넘실- 넘실하면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게…….
“옷은, 옷차림새는 어땠지.”
─옷……?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참고로 제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더럽고 해진 망토로 몸 대부분을 가리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거리가 너무 멀기도 했고.
“안쪽을 아예 못 봤나.”
─…음음. 아, 모험가들이 흔히 입는 가죽 방어구 차림… 같기도 하네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동시에 나 또한 당황했다.
율리안이 묘사한 악마기사의 과거 모습은 공식 악마기사의 외형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러니까, 내가 커스텀한 외형이 아니라 공식이 기본으로 주는 모습이었단 말이다. 다듬지 않은 장발에, 추레한 망토, 가죽 갑옷 따위가.
“…머리색은 보았나?”
─머리색이요? 글쎄요? 아까도 말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지금이랑 같지 않으셨을까요? 염색약을 쓰지 않고서야.
“대화는.”
─아무래도 못 해 봤죠. 단칼에 악마를 참수한 후 저희의 외침을 모조리 무시한 채 갈 길 가셨으니까. 명예 서임식에서조차 얼굴 안 비치셨는걸요. 이것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나는 그저, 그때도 지금과 같은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을지 궁금했을 뿐이다. 해서 물어본 질문인데 설마 이런 답이 돌아올 줄은.
“…그게 언제였지?”
─옙. 안 묻겠습니다. 그보다 언제냐고 물으셨나요?
그러나 복잡해진 마음과 별개로 질문은 아직 남았다.
나는 그것이 언제 벌어진 일인지를 물었다.
내가 활동하기 전에도 악마기사의 위명이 퍼져 있단 점에서, 내가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도 악마기사가 존재했다는 건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그것이 몇 년 되었는지는 제법 중요한 정보인 까닭이다.
아무렴, 그래야 내가 기억을 잃은 시기를 확신할 수 있고, 또 조사해야 할 범위를 알 수 있으니까.
─그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2년 전이네요. 네, 2년 전이요.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고작 2년 전 일이라니.
…공식에서 준 설정의 악마기사는 최소 5년은 넘게 악마기사란 이름으로 활동했을 텐데?
머리가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