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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74화 (174/389)

174화 아직까지는 (2)

“아니, 그렇게 한 번에 기울이는 게 아니라. 그러면 물이 새잖아.”

“쓰읍, 흘렀냐?”

“흘렀어, 완전 흘렀어.”

“야, 이거 좀 어렵다…….”

“그건 네가 힘 조절을 못해서 그런 거고. 선은 섬세하게 조절하는 놈이 왜 물 따르는 건 못하냐.”

“그거랑 이거랑 같냐…….”

나는 낑낑댈지언정 친구의 설명을 놓치는 일 없도록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크게 보면 복잡할 것은 하나도 없으나, 평상시 접해 본 적 없는 행위란 게 모든 걸 낯설게 했다.

“자세에 너무 힘 안 줘도 돼. 그거 하나 틀린다고 누가 뭐라 안 해.”

“에이, 그렇다고 배우는 자리에서 대충 하는 건 좀 그렇지.”

그렇지만 낯선 행위를 배우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드물다. 자료 조사를 위해 가진 자리고, 친구가 흔쾌히 나서 준 거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물 주전자로부터 귀때그릇에 물을 옮겨 담는 동작을 몇 번 더 반복했다. 따르는 것 자체야 쉽지만 동일한 세기로 부드럽게 나오도록 하는 건 조금 어려웠다.

그러자 친구가 약간 입술을 꿈틀거리며 손을 고쳐 주었다. 마음이 흡족할 때만 나오는 저 녀석의 버릇이었다.

역시 대충 하지 않길 잘했다.

쪼잔한 녀석은 아니다 보니 그렇게 했어도 크게 화는 안 냈겠지만… 막역한 사이기에 예를 더 지켜야 할 때도 있으니까.

“이제 좀 잘하네.”

“아, 이제 좀 됐음?”

“그래, 됐음. 이 정도면 나한테 배웠다고 할 만하지.”

그렇게 한참을 연습했을까.

“좋아, 기분이다. 다음에 만났을 때도 이 정도로만 하면 내가 아끼는 것 하나 보여 준다.”

“아끼는 것?”

“엄청 비싸고 좋은 거야. 40년 묵은 차니까.”

“…그러면 향이 안 날아가?”

“그만큼 잘 보관한 거지. 보관 상태가 안 좋으면 세월도 의미 없어.”

“오… 그런 걸 내가 먹어도 되나.”

“내가 언제 먹게 해 준댔냐? 보여 준댔지?”

“이 자식?”

가벼운 농담이 오간 끝에, 희부예서 코 윗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 친구가 입술을 살짝 올렸다.

투둑. 한 번도 우는 걸 본 적이 없는 얼굴엔 굵은 빗줄기가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정 먹고 싶으면야, 맛 못 보여 줄 것도 없지.”

종이 울리듯 깨달음이 몰려오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돌아와라, 새끼야. 이렇게 빌 테니까, 제발 살아 돌아와…….”

이건 꿈이었다.

* * *

“허억!”

깨어난 순간, 하얗고, 폐쇄된 공간의 냄새가 코를 스쳤다. 쇄액쇄액. 숨을 쉬기가 불편한 듯, 편안한 듯, 불편했다. 돌아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 울렸다.

“나리?”

그러나 그마저도 곧 기억에서 스러진다.

나는 멀거니 느껴지는 모든 감각을 피해, 왼손으로 눈을 짚었다.

식은땀이 너무 많이 흘렀나 보다. 손바닥에 닿아 오는 감각이 참 축축했다.

“나리, 깨셨습니까요?”

“잡았나.”

다소 희미하기도 하고 방금 꾼 꿈 때문에 더 긴가민가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누군가가 훼방을 놓았다는 건 기억한다.

주변이 막 빨갛고 침입자가 시꺼먼 무언갈─어렴풋이 기억하기를 비류호 사체 같았는데─들고 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걸 먼저 물어보는 게 맞겠지. 누워 있는 느낌이 폭신한 걸로 보아 내 안위는 일단 안전권인 것 같으니까.

“…….”

그런데 왜 답이 없어. 혹시 그건 내 착각이었니? 그래서 답해야 할 말을 고를 수 없는 거야?

“…놓쳤습니다요.”

다행히 그건 나만의 오해가 아닌 듯하다.

비록 답하는 데브의 목소리가 이 악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거야 아마 놓쳤다는 내용 때문일 테고.

꽈득.

나는 이제 컨셉을 걱정해야 하고.

“무리해서 일어나지 마십쇼! 열하루 만에 일어났으면서 어딜 가려고……!”

“놔라……!”

크읏. 이런 전개에선 당연히 놓치는 게 맞지만 역시 아쉬워!

거기에 비류호 사체를 강탈당한 게 정말이라면, 벌써 두 번이나 막타를 빼앗긴 거잖아. 한 번이라면 몰라, 두 번은 뇌절이란 것 모르나? 하여간 작가 놈, 시나리오 알못이네!

“또 봉인구 박살 내기 싫으면 누우란 말입니다!”

“……!”

그런데 지금 뭐라고?

“…몸 상태는 제발, 알고 움직이시란 말입니다요.”

너도 컨셉 다루는 법을 완전히 익혔구나.

그래. 그런 말쯤 되면 컨셉도 자중할 수밖에 없지. 그럼그럼.

나는 그따위 생각과 함께 몸에서 힘을 뺐다. 털썩. 등에 다시 폭신한 감각이 다가왔다. 잠자리 아래에 깐 지푸라기가 새것인가 싶었다.

“…….”

안 그래도 움직이기 힘든 마당이었는데, 차라리 잘됐지.

나는 데브가 해 준 발언에 다시 한번 감사하며 팔뚝을 다시 눈가에 올렸다.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안구를 너무 직격해서 어쩔 수 없었다.

“…저, 나리. 방금 한 말은.”

아, 근데 이러니까 더 자고 싶다. 비류호 사체나 침입했던 놈 이야길 빼더라도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파악해야 하는데.

“그.”

똑똑!

근데 좀 귀찮아. 그런 심정이 몸을 지배하려던 찰나, 노크 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나는 팔뚝을 여전히 얹은 채로 입을 달싹였다.

“용건.”

눈 위에 얹은 팔뚝과 상체에서 느껴지는 촉감으로 보아, 나는 지금 붕대와 셔츠 차림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남을 들이기보단 단출한 물음 하나가 낫겠지.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판단이었다.

“저, 몸 닦을 물수건을 가져왔는데…….”

그러자 바깥에 있던 사람이 답했다. 몸 닦을 물수건이라. 하기야 자는 사람 안 씻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물에 풍덩 담글 수도 없으니 저 수밖에 없긴 하겠다.

“아, 제가 가져오겠습니다요.”

데스브링거가 헐레벌떡 일어나 물수건을 받아 왔다. 그사이,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나리, 일어서실 필욘…….”

“나가라.”

만전은 아닐지언정 못 움직일 수준 또한 아니다. 그리고 컨셉은 깨어 있다면 절대 남에게 몸 보일 사람이 아니고.

“그렇지만, 아직 몸이…….”

“두 번 말하지 않겠다.”

“…….”

나는 데브가 대야와 수건을 협탁 위에 내려놓고 떠난 후에야 그것을 집어 들었다.

더운 물에 적셔진 수건을 얼굴에 대면 이제 보드라운 온기가 차차 살갗을 적신다.

“…아.”

움직일 수 있다면 차라리 목욕탕에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상념이 잠깐 들었으나, 이내 포기했다. 사람을 불러 준비시키는 것도, 직접 거기까지 가는 것도 귀찮았다.

오랜만에 귀찮음이 청결 유지 욕구를 이겨 냈다.

『다음에 만났을 때도 이 정도로만 하면 내가 아끼는 것 하나 보여 준다.』

“…차 마시고 싶네.”

그렇지만 차는 조금 마시고 싶더랬다.

『그러니까… 제발 돌아와라, 새끼야. 이렇게 빌 테니까, 제발 살아 돌아와…….』

조금, 많이 마시고 싶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네가 말한 그 40년짜리 차를. 혹 연습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며 내준 뜨거운 물이라도.

내가 본래 있어야 할 곳에서 마실 수만 있다면 참으로 기쁠 테니까.

덜컹.

나는 물수건을 내려놓았다.

목구멍 너머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으나, 대충 삼켜 버렸다. 그 감정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으므로 볼 필요 없었다.

다만 갈음하듯 사유했다. 귀찮음이고 나발이고 제대로 씻어야겠다고. 차를 더러운 몸으로 마시긴 그러니까 역시 몸을 정결히 해야겠다고.

끼익.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에드니엄 신전에서 머무른 기간이 기간이다 보니 목욕탕까진 안내받을 필요도 없었다. 길 다 외웠다.

“기분 나빠…….”

방을 나서자마자 들이닥치는 불쾌감은 내가 어찌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문을 경계로 느낌이 확 달라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방에 따로 조치를 해 둔 것 같지. 대체 어떻게 알고 했는지, 어떤 원리로 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엇, 기사님. 언제 기침하셨…….”

어쨌거나 목욕탕에 도착했다. 나는 복도에서 마주친 사제에게 더운물만 올려 달란 말을 전하고 그대로 목욕탕 입구에 섰다.

사제들은 다소 우왕좌왕했으나, 곧 뜨거운 물이 그들 손에 들려 왔다.

“그럼 물이 식을 때 불러 주십시오. 더운물을 새로 두고 가겠습니다.”

“필요 없다.”

몸을 푹 담그고 있을 정도로 기력 넘치는 건 아니다. 그저 감정만 씻어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여 나는 언제나처럼 목욕 시중을 들던 이들을 전부 쫓아 낸 후 나무통에 몸을 푹 담갔다.

쓰러져 있는 동안 사제가 머리를 다듬어 줬는지 물에 뜨는 머리카락은 다소 짧아진 상태다.

혼자 다듬는 과정에서 쥐가 파먹은 양 들쭉날쭉해진 뒷머리도 마찬가지다. 무심코 만져 본 머리카락들은 매끄러웠다.

이쯤 되면 머리 스타일 유지를 위해서라도 정기적으로 쓰러져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남이 들으면 비명 지를 우스갯소리를 지껄였다.

‘언제까지 눈 돌릴 수 있을까.’

그리고 온 머리가 물에 푹 젖었을 때, 농담으로 겨우 자아냈던 웃음이 뚝 그쳤다.

씻느라 안대를 잠시 벗어 둔 오른눈은 고스란히 수면 위에 노출된 채다.

‘언제까지 스스로를 속일 수 있겠어?’

바싹 마른 장미의 빛깔과 그 어떤 색채도 가미하지 않은 중립의 색이 남의 얼굴을 비추었다.

‘대체 언제까지…….’

풍덩.

설움은 대개 수용성이다. 대부분의 잡념도 수용성이다.

하여 나는 물 아래로 머리를 담갔다. 그리고 숨이 부족해질 즈음, 철퍽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 편지 남긴 지 좀 됐지?”

눈물과 함께 물이 식어 갔다.

“하, 엄마랑, 아빠랑, 친구 놈들까지 이걸 보고 있다면 얼마나 화병 날까.”

그러고 보니, 세상엔 이런 말이 하나 있다.

“미친 새끼, 편지도 꼬박꼬박 안 남기고… 죽어서 부활하는 게 확실치도 않은데 요즘 목숨을 아주 신발에 붙은 껌처럼 여기고. 아주 잘한다 싶겠지, 그치?”

거센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 라는 말.

“아주 멍청이 같을 거야. 세상엔 다시 없을 머저리 바보 등신 같을 거라고…….”

억지 부릴 때 많이 쓰이는 말이라 썩 좋아하진 않지만, 불호와 별개로 그 말이 맞음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어쩌겠어.”

예컨대, 바로 지금처럼.

“돌아갈 방법이라곤 생각나는 게 없고, 유일한 방법으로 보이는 건 목숨을 내걸어야만 나아갈 수 있는데.”

함에도 그것을 그만둘 이유는 없다.

“죽어도 재시작할 거란 믿음마저 없으면 차마 시도하기도 두려운 길뿐인데…….”

그래, 그만둘 이유는 내게 없었다.

“이렇게라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버티겠냐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현재에 임하는 최선의 수였다.

“나, 싸우기 전만 되면 가슴이 항상 아파. 내가 정말 죽을까 봐, 그것 하나가 무서워 심장이 너무 뛰어서.”

기회가 한 번뿐이라는 건 그 자체로 두려움이고 공포다. 컨셉이 아무리 겁이 없는 전사라도 그렇다.

결국 주체는 나이고, 나란 사람은 겁 많은 현대인에 불과하므로.

“그러니 엄마, 아빠, 망할 친구 놈들아. 이걸 보고 있다면 날 바보라고 생각하지 말아 줘.”

그렇기에 스스로를 속인다.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리트라이라는 선택지가 있다고 여기면.

두려움 한 점 없이 가볍게 임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내 최선을 비웃지 말아 줘.”

그럼에도 때때로, 엄습하는 공포가 있다.

죽음, 상실, 망각, 고독.

“이 모든 걸 딛고 일어서면, 당신들을 보러 갈 수 있단 믿음 하나만으로 겨우 견디고 있으니까.”

불안.

이 모든 노력과 발버둥이 보답받지 못하리란 불안.

“너희랑 다시 놀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아, 이 세상이 게임이면 얼마나 좋을까. 재시작 따위 없는 로그라이크여도 좋으니, 게임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 세계가 게임이라면,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게임이기만 한다면.

이 모든 역경과 고난의 끝에 해피 엔딩이 보장될 것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이 고되고 힘든 모든 일도 웃으며 이겨 낼 수 있을 텐데.

“제발.”

그러므로 이건 게임이어야 한다. 스스로도 믿지 않을 말이지만, 그래도 이것은 게임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제발, 내가 잘하고 있다고 해 줘.”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지독한 시련들을 감내해야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해 줘…….”

겨우 밟고 선 희망마저 없어지고 말아.

“제발, 시스템 씹새끼야…….”

내 등에는 억지로 주어진 생의 무게들이 산처럼 쌓여 있음에도.

* * *

하지만, 이 세계를 부정함과 동시에 진실을 알고 싶기도 하다.

절망할지언정 미련은 남지 않게.

* * *

촤악.

나는 언제나처럼 답 없는 시스템을 치워 버린 후, 피에 절여진 것 같은 머리에 비눗물 한 바가지를 뿌렸다.

그리고 머리를 빡빡 감은 다음에는 붉은 색으로 물든 듯한 몸을 긁어 내듯 닦았다. 어쩌면 살과 뼈가 분리될 수준으로.

함에도 이미 깨지고 부서진 인간성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나는 그것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암, 현실에서 도망칠 수는 있어도 이것만큼은 부정해선 안 됐다.

인간성의 일부를 잃었다고 해서 죄책감마저 버린다면, 그때야말로 정말 인간이 아니게 될 것이니까.

“당신은…….”

그게 싫어서 죄책감을 한가득 진 채 정처없이 걸었다. 씻고 나니 차가 마시고 싶었던 까닭이다.

물론 식당에 가면 아크메이지가 차를 내줄 확률이 높으나… 지금은 그들과 겸상하기 싫다.

“깨어나셨군요! 안 그래도 뵙고자 찾아온 거였는데…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들이 싫어진 건 물론 아니다. 단지, 같이 차 마시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이 이 세계에 없는 이상 오늘은 차 마실 일이 없을 테고 말이다.

“뭐냐.”

아무튼 잡생각은 이제 그만.

나는 우연히 마주친─신전에 막 들어오는 중인 듯했다─에드니엄 소성주에게 집중했다. 그 옆에는 캄버러의 소성주가 있는 것이, 아무래도 그녀가 돌아가기 전까지 연애에 열중하고 있었나 보다.

“저, 늦은 인사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저 또한 저희의 복수를 대신 해 주신 것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하여간 두 소성주가 우아하게 묵례했다.

“…….”

그렇지만 그들의 감사가 크게 와닿진 않았다.

내가 살린 사람에게서 보람을 느끼기엔 너무 지친 탓이다. 보다 정확히는 기뻐할 기력이 없다고 해야 하나.

“앗.”

“…이런.”

그런고로 나는 반응조차 내밀지 않은 채 그들을 지나쳤다. 내가 해 준 일이 있는 만큼, 불쾌하더라도 그들은 넘어가 줄 것이다.

탁.

그들은 넘어가 주겠지만, 생각해 보니 내 쪽에서 볼일이 있긴 했다.

내 몸이 반보 돌아갔다.

“물어볼 것이 있다.”

“……!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제가 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도 각오까진 필요 없는 질문인데.

“저번에 내게 아는 척했던 자가 누구지?”

“……?”

다만 각오는 요구하지 않을지언정, 해석력은 필요로 하는 게 악마기사 언어인지라. 에드니엄 소성주의 얼굴이 모호해지고, 캄버러 소성주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고심했다.

“혹… 말씀하신 저번이 성주 회의 때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분은 베르가르트 성주님입니다.”

다행히 캄버러 소성주의 눈치가 승리했다.

“확인했다.”

베르가르트, 베르가르트.

베르세르크랑 발음이 비슷해서 잊어버릴 일은 없겠군.

나는 그런 생각과 함께 지도를 가지고 있을 사람을 찾기로 했다.

아무렴, 베르가르트가 어디에 붙은 도시인지 알아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아마 내가 모르는 이 몸의 진실이 밝혀지겠지. 어쩌면 시스템의 진실까지도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빙의한 몸의 과거와 사건의 전말이 연결되어 있는 건 흔한 클리셰니까.

“저, 기사님.”

이곳이 게임이라 믿고 싶은 마음과 더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모순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을까.

캄버러 소성주와 ‘눈으로 말해요’를 시전한 에드니엄 소성주가 나를 붙잡았다.

“베르가르트 성주님을 뵙고 싶으신 거라면 제가 연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베르가르트에는 마탑이 있으니까요. 마침 이 도시에도 마법사가 많이 온 상태고 말입니다.”

그건… 조금 아득하면서도 꽤 좋은 소식이었다.

“대가는.”

“염치가 있지, 어찌 그런 것을 바라겠습니까. 성으로 돌아가는 즉시 베르가르트에 전보를 넣어 드리겠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기사님의 전언인 만큼 오래 걸리진 않을 겁─!”

꽈악.

“…니다만, 성주님께 일이 있으실 수도 있으니 시간이 좀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해당 사항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미, 미아…….”

왜인지 갑자기 들뜬 에드니엄 소성주가 아무 말이나 내뱉고, 그걸 캄버러 소성주가 고쳐 주긴 했지만 아무튼.

“상관없다.”

“감사합니다. 하면 답신이 오거든 신전으로 사람을 보내면 되겠습니까?”

나는 캄버러 소성주에게 꼬집혀서 바닥을 구르는 에드니엄 소성주를 슬쩍 보고, 다시 캄버러 소성주를 보았다. 신전으로 사람을 보내겠다는 말이 어디서 튀어나왔나 싶어서였다.

“아니면 성으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아, 신전에서 기다릴 것인지 성에서 기다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나.

“가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성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컨셉에 따라 답을 망설임 없이 내놓았다. 비록 속에선 가기 싫다는 마음과 가야 한다는 마음이 교차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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