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아직까지는 (1)
“크흥.”
“킁.”
한참을 울고불고 고함 치고 삽질하고 서로가 판 무덤에 본인 삽질하며 나온 흙을 넣어 마이너스 플러스 제로를 만들었을까.
그들은 진한 현실 자각 시간을 가졌다. 몰려오는 창피함과 부끄러움은 덤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요, 샌님아.”
“…너도 마찬가지다. 넌 중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겸연쩍음 속에서도 약간의 후련함과 속 시원함은 얻을 수 있었으니.
그들은 예상치 못하게 와르르 쏟아부은 감정들을 털어 내며 일어섰다.
“대리자님…….”
“동료분과의 유대… 너무 아름답습니다.”
“훈훈하군요…….”
“하여간, 젊은것들은.”
하면 이제 그들을 기다리는 건 사람들의 뜨뜻미지근한 시선들이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와아아아악!!”
먼저 행동에 나선 건 본의 아니게 속내를 죄다 까발린 데스브링거였다.
“저는 없어도 될 것 같으니 소성주님이나 보러 가겠습니다!!”
“너, 너!!”
그는 상황 파악을 해야겠다는 초창기의 목표를 바로 내버렸다.
물론 그 선택의 이면에는 그들이 언성을 높이는 동안 정리가 시작되었다는 것, 해독 효과가 슬슬 나타나는지 악마기사의 안색이 좋아졌다는 것 등이 있다.
즉, 그는 그 모든 걸 고려해 자신이 필요 없음을 단번에 파악하고 도주를 고른 거다.
아주 약삭빠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너, 너만 도망을 가면!”
그러나 인퀴지터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저 배신자처럼 잽싸지도 못했고, 결정적으로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숲의 정화는…….”
“용사님껜 쉴 시간을 좀 드리는 게…….”
“하,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녀에겐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었다.
인퀴지터가 토마토처럼 빨개진 얼굴로 광휘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이것, 참. 예상치 못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터져서 다행이군.”
한편,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본 아크메이지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암, 무언가 이상하다 싶긴 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라 손도 못 쓰던 게 작금의 실정이었다. 한데 그것이 알아서 풀려서야.
감히 행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이를 먹어도 세상일엔 이다지 어설프니…….”
늙어 가며 자연적으로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세상사 일은, 특히 인간 사이의 일은 이다지도 어렵다.
그 사건이 있은 직후 사람에 대한 이해가 조금 깊어졌다고 여겼는데도 그렇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젊은 시절, 마탑 밖도 나다닐 걸 그랬어.”
마법 공식에만 열광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살다 보니, 가끔 평범한 젊은이들의 사고는 따라갈 수가 없다.
아크메이지는 그 사실이 이럴 때마다 아쉬워졌다.
그녀가 더 많은 사람을 겪고 더 많은 인간을 알았다면, 그녀는 저 젊은이들이 덜 방황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어쩌면, 어쩌면 악마기사란 사람을 바로잡는 방법을 알았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녀는 장렬히 실패했던 저번 시도를 떠올리며 애석해졌다. 나름 좋은 방법이라 여겼는데 그렇게 처참히 대패할 줄이야.
아이 키운 경험이 없다는 게 뼈아프도록 느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니, 사실 조금 자주 경험하지만.
누군가가 알면 ‘책상물림이신 분이 전공도 아닌 심리 치료를 하려 해서 일이 그렇게 굴러간 게 아닐까요.’라 한탄할 상념이었다.
“…아니, 정말 도움이 되는 건 다른 쪽일지도 모르겠군.”
하나 그에 대한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불태웠던 연구가 떠오른 까닭이다.
그렇지만 그것이야말로 제일 의미 없는 행위였다.
그 일은 후회하기엔 너무 오래되었다.
“그보다, 자네.”
“…….”
“베르세르크?”
“…응? 나 불렀나?”
“그래, 자넬 불렀네.”
이미 벌어진 일을 오랫동안 붙잡는 것이야말로 시간 낭비다.
아크메이지는 평소보다 반응이 늦된 베르세르크를 보며 눈썹을 슬쩍 들었다.
가장 어린 두 사람의 일이 해결됐다 싶으니 이젠 이쪽이 문젠가.
피할 수 없는 뒷바라지의 굴레였다.
“무슨 문제 있나?”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이 여정에 함께하는 이유다. 아크메이지는 베르세르크를 좀 더 찔러 보았다.
“없다.”
“그럼 좀 쉬지 그러나.”
악마기사를 겪으며, 저런 부류의 속내를 알아내는 요령은 나름 터득했다.
이런 이들은 직설적으로 물어보면 안 된다. 넌지시 물어봐야 하지.
“베르세르크는 멀쩡하다.”
“그래도 비류호와 싸우지 않았나.”
“하, 그게 싸움? 노르다 전사는 그딴 것을 싸움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사냥이었다.”
다만, 그래. 요령이 생겼다곤 하나 답을 아는 것이 쉽지는 않다.
“실패한 사냥.”
아크메이지의 눈매가 모호해졌다.
“그래도 자네가 마지막에 침입자를 막아선 덕에 피해가…….”
“마법사야, 눈을 제대로 떠라. 그건 막은 게 아니다.”
“…놓쳤다고 해서 자네가 한 일이 무의미하게 되진 않네.”
“베르세르크의 말은 그런 게 아니라… 하, 됐다.”
와중에 ‘분개하지 마라, 너의 탓이 아니다.’ 그런 말이 오갔을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베르세르크가 끝내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그런 게 아니면 뭔가.”
“마법사는 알 것 없다. 베르세르크의 문제다.”
저것을 알면 베르세르크를 이해하기 쉬워질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직감했으나, 답을 듣게 되는 일은 없었다.
베르세르크는 몇 번의 질문에도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효과적인 대화 회피 방법이었다.
“알겠네. 하나 문제가 되면 언제든 말하게.”
여기서 더 묻는 것도 악효과겠지. 그런 판단하에 아크메이지는 대화를 그만두었다.
“아크메이지님.”
“…왜 그러나?”
그러자 이번엔 다른 이가 다가왔다.
그녀보다 치료마법에 능통하여 악마기사 치료를 인계받아 간 마법사였다.
“악마기사님을 옮길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는 괜찮나?”
“해독제가 들어간 덕에 심각한 상황까진 안 갔습니다. 안정만 취하면 됩니다.”
다행히 악마기사의 상태가 악화되진 않았나 보다.
그녀는 감독하던 보호막 제작─몸통만 남은 비류호의 송장을 위한─과정에서 시선을 떼, 악마기사 쪽으로 돌렸다.
불에 타 재 가루가 휘날리는 땅에 고요히 누워 있을 그 기사를 보았다.
“그래서 그런데, 보다 안전한 환경을 위해 에드니엄의 신전까지 이송하고자 하는데…….”
그는 막 들것에 실리는 중이었다.
“저, 아크메이지님?”
“…그리하게.”
다만, 그리 옮겨지는 모양새가 어찌나 흑백의 화폭처럼 보이는지.
그녀는 신전 사람에게 답을 내주면서도 머릿속 한편으론 오래된 명화들을 떠올렸다.
멀쩡히 산 사람을 두고 고전과 고서가 떠오르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금방이라도 낡아 부스러질 것들을 저 젊은 사내에게 갖다 대는 게 맞는가. 그런 얄팍한 의문들이 들었다가 금세 사라졌다.
이번엔 신전 쪽 사람이 다가온 탓이다.
“추적 상황에 대해 말하러 왔는가?”
“예. 다만… 아무래도 놓칠 것 같습니다. 본인들은 좀 더 찾아보겠다곤 하는데…….”
“처음부터 가능성은 크게 본 적 없으니 자책할 필요 없다고 전해 주게. 무리할 필요도 없다고 해 주고.”
“조금만 더 수색해 보겠다고 하니, 그것까지만 하고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그러게.”
상대는 대악마로 추정되는 존재다. 아니더라도 그 정도 무위와 준비를 보인 만큼 허술하게 흔적을 남겼을 리 없고.
하여 아크메이지는 추적 실패란 결과를 두고 실망하기보다, 이것이 불러올 파장을 가늠해 보았다.
이번처럼 대악마가 부활하는 일이 벌어질까? 혹은 비류호처럼 그 힘을 흡수하여 더 강한 악마가 태어나게 될까.
어느 쪽이든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다. 어느 쪽이든 악마기사와 용사라면 처리해 낼 수 있겠으나 그들 또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므로.
“…대피한 소성주는 괜찮은가?”
“에드니엄 시민으로 추정되는 일부 패거리가 몰려와 소요 사태를 벌이긴 했습니다만, 저희가 손 쓰기도 전에 캄버러의 소성주가 나서서 그들을 전부 제압하셨습니다.”
“…정말 괜찮은 건가?”
“캄버러의 소성주님은 다친 곳 없이 멀쩡하십니다. 에드니엄 소성주님 역시 마기침식을 치료하였고, 이번 문제 역시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 선언하셨으니 큰 문제로 발전될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만.”
아크메이지는 소요 사태를 만들어 낸 멍청이들이 대체 누군가 싶어졌지만 추가로 질문하진 않았다.
스스로 해결했다면 그걸로 됐다. 거기까진 그들이 간섭할 이유 없었다.
“보호막 완성입니다!”
“이쪽도 일이 다 끝난 듯하군. 이제 숲이 정화되는 것만 기다리면 되겠어.”
“대리자님께 너무 부담을 드리는 것이 아닐지 걱정됩니다.”
“어쩔 수 없네. 독기가 바람을 타고 마을로 가면 큰일이지 않나.”
그것만 아니었어도 비류호의 사체 정화를 우선했을 것이다. 방금처럼 악마에게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사제들의 신성력으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테고.”
“면목없습니다.”
“자네들 책임이 아닐세. 나도 이 여정에 함께하곤 있으나, 그 무엇도 해내지 못하지 않았나.”
물론 지금만 해도 인퀴지터뿐 아니라, 이곳까지 달려온 많은 사제가 일을 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방금 말했다시피 능력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수십의 사제가 비류호의 시신을 정화하는 것보다, 인퀴지터가 숲 전체를 정화하고 이곳에 돌아오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대체할 수 없는 능력이란 이다지도 고달픈 것이야.”
결국 아크메이지는 그 지점에서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신은 모두가 함께 세상을 구하도록 하지 않은 것일까.
어째서 소수의 사람들만 모든 이의 짐을 짊어지도록 만든 걸까.
“짐을 질 수 있는 손은 참으로 많은데.”
모두에게 그 힘이 주어졌다면 저들만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런 한탄을.
* * *
다행스럽게도 남은 비류호의 시신을 빼앗기는 일은 없었다.
인퀴지터가 대악마 반절의 부정을 정화할 때까지 추가적인 습격이 없었던 덕이다.
하여 인퀴지터는 아주 편하게 마기를 불살랐고, 이제 남은 건 거대한 호랑이의 시신뿐이 되었다.
“헛!”
“왜 그러십니까?”
“또 뭐가 문젠데요, 샌님.”
그 시점에서 인퀴지터는 한 가지 문제점을 깨달았다.
“이, 이렇게 되면 악마기사께서 이것을 못 쓰시지 않나……?”
“…어.”
“이런.”
악마기사가 이것으로 장비를 빚을 수 있으니, 약간의 마기는 남겨 놨어야 했다.
인퀴지터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또다시 자괴감에 빠졌다.
“내, 내가 또 민폐를…….”
“아니, 이건 아무도 몰랐던 것이니까…….”
“…근데 애초에 이걸로 뭐 만들 수 있긴 합니까?”
“시, 신발이라든가 가방이라든가, 장갑이라든가……. 가죽류 제품은 다 만들 수 있지 않나.”
“그, 그렇긴 한데, 싸우다가 맨날 옷 날려 먹는 게 나리 아닙니까. 자동으로 고쳐지는 마법 걸지 않으면 불편해서 안 쓰실 것 같은데.”
겨우 북돋아 둔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인 위안과 변명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분배 문제도 있지 않습니까?”
“악마기사가 거의 다 잡았는데 분배할 게 있나?”
“아니, 비류호의 위치를 특정하느라 신전에서 고생한 것도 있고, 피해 입은 사람들도 있고. 피해 보상이야 우리 몫이 아니긴 하지만.”
그러나 가까스로 잠재운 일은 다른 문제로 이어졌다. 남은 사체를 누가 갖는가. 제법 중요한 문제였다.
“비류호를 잡은 것은 전적으로 대리자님과 동료분의 공이시니 저희 도시에선 감히 탐내지 않겠습니다.”
다만 서부 때와 달리 분배는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땐 배 제공이니 병사 제공이니 뭔가 많았으나, 지금은 그렇게 끼어들 건덕지가 없던 까닭이다.
오히려 세세하게 따져 들어 가면 역으로 돈을 내야 할 부분도 많다. 때문에 에드니엄과 캄버러는 결코 본인들의 지분을 주장하지 않았다.
비류호의 사체가 오롯이 용사 파티에게 귀속되는 순간이었다. 그마저도 악마기사의 지분이 절반을 넘겼지만.
“베르세르크는 거절하겠다. 받을 자격 없다.”
“저도 뭐…….”
“저 또한… 반절을 지키지 못한 책임이 있습니다.”
“나도 딱히 지분을 요구할 만큼 염치가 없진 않네만… 인퀴지터, 그 생각은 잘못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분을 절반 넘기다 못해 결과적으로 악마기사의 독차지가 되기도 했다. 모두가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함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정화 기능 때문에 못 쓰시겠지만요.”
“…여, 역시 내가.”
“아 미친, 울먹이지 마요! 댁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내가 또…….”
“내가 잘못했으니까!!”
물론, 이런다고 악마기사에게 의미가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쥐지도 못한다면 결국 그에겐 쓰레기에 불과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