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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72화 (172/389)

172화 다음에 (5)

판데모니엄은 오소소 돋은 소름에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모비 딕을 먹은 비류호의 죽음? 그건 너무 당연해서 놀랍지도 않다.

다만 그가 놀란 건 분노의 그릇이 내보인 무력이었다.

[적어도 용사와 힘을 합칠 줄 알았더니…….]

저게 뭔가. 사실상 혼자 잡은 것과 진배없지 않은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대악마의 힘을 먹은 영수의 힘도 그레트헨을 이기지 못한다는 게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위험을 감수해 가며 저것을 빼돌리는 게 맞는가?

“물릴까요?”

[아니.]

정답은 ‘맞다’다. 저렇게 강해진 것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면, 저것보다 약한 그는 저항도 못 한 채 살해될 게 분명하므로.

[시작한다.]

이길 힘은 바라지도 않아. 그러니 다음에 맞붙었을 때 몸을 뺄 수 있는 정도만이라도 될 수 있기를.

촤르르륵.

판데모니엄의 바로 옆, 수많은 상자를 끌고 온 인간들이 바닥에 내용물을 쏟았다. 금과 은, 수많은 보석이 땅에 쏟아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단숨에 녹아내려 하나의 용암이 된다.

[다음엔 다를 테니까!]

용암에서 일어난 거대한 손이 막 비류호의 육신을 갈무리하던 인간들을 덮쳤다.

* * *

악마기사가 갑자기 쓰러짐으로써 혼이 쏙 빠졌을까, 이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거대한 불의 손이 나타나 그들을 짓누른 것이다.

무겁기 짝이 없는 용암은 그녀가 긴급히 만든 막 위로 쏟아지며 부담을 가중한다.

“이, 무슨!”

하물며 악마기사로 인해 섣불리 성역을 선포할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중독당해 쓰러진 그일진대, 여기서 신성력을 더 쏟았다간 목숨이 위험해질 터였다.

“악, 악마냐…….”

“움직이지 말게!”

“아크메이지님!”

“거의 다 됐습니다!”

다행히 신성력을 여과해 줄 막은 거의 완성되었다. 인퀴지터는 억누르고 있던 힘을 어디까지 짜내도 될지 가늠해 보았다.

“온다!”

시큰둥한 얼굴로 앉아 있던 베르세르크가 반응한 건 그때였다. 다가오는 부정을 감지한 인퀴지터 역시 눈을 부릅떴다.

쨍그랑!

“……!”

한발 늦었다. 금빛 막이 박살 나며 막고 있던 용암을 떨어트렸다.

“신이시여!”

부정한 것이 침입했으나, 우선순위는 조금 밀렸다. 저 용암에 휩쓸리거든, 그녀는 몰라도 다른 이들은 죽을 게 분명했으니 당연하다.

하여 인퀴지터는 침입자를 상대하기보다 새로운 막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아까보단 층고가 낮아졌으나, 신성력의 막은 또다시 용암을 막는 데 성공했다.

“어딜! 베르세르크가 이곳을 지킨다!”

그사이, 베르세르크는 용암을 뚫고 나온 침입자와 전투를 벌였다.

이 좁은 공간에서 할버드처럼 긴 무기를 들고 어떻게 싸우나 싶었으나, 베르세르크의 솜씨는 실로 탁월했다. 그녀는 적을 어떻게든 막아 냈다.

“악, 마가……!”

“자네 죽으려고 작정했나!”

악마기사가 일어나려다가 객혈하며 무릎을 꿇은 건 덤이다.

[인간 주제에, 제법이네. 하지만 그래 봤자 인간 수준이야.]

“큿!”

[그걸론 부족하다고?]

“……!”

반면, 베르세르크는 꾸준히 박투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교전 끝에 베르세르크는 상대의 발차기를 맞고 주르륵 미끄러졌으니.

충격을 터프하게 이겨 낸 베르세르크가 다시 달려 나가려던 차, 그녀의 앞쪽 바닥이 솟아오르듯 부서지며 용암을 뿜어냈다.

베르세르크의 걸음이 살짝 멈췄다.

“내가 나서야……!”

“인퀴지터, 다 됐습니다!”

다행히도 동일한 시점에 아크메이지가 보호막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인퀴지터의 눈에 광채가 서렸다.

“…난, 신경 쓰지 마라!”

“죄송합니다, 악마기사!”

때마침 허락까지 떨어지고 말았으니.

인퀴지터는 악마기사가 다칠 수 있다는 건 잠시 잊기로 했다. 모비 딕에 비견되는 부정의 악마를 놓칠 순 없었다.

“신이시여, 부디 제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신의 광휘가 이 땅에 내리며 용암을 불사르고 부정한 것을 정화했다.

퍼엉!

그러자 그들을 짓누르던 팔의 손 부분이 완전히 날아갔다. 아직 팔뚝은 남아 있으나 큰 의미는 없다. 그것은 그들을 짓누르지 못한다.

[쳇!]

다만 침입자는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상대는 다시 따라붙은 베르세르크를 떨쳐 내며 서둘러 땅을 박찼다.

침입자의 한 손엔 비류호의 몸뚱이가, 다른 손에는 베르세르크를 상대할 겸 금빛 막을 부술 겸 일시적으로 부정이 모여든 상태다.

“어딜!”

놓칠 수 없다. 그녀는 금빛 막이 깨져 나간 찰나, 그쪽으로 달려 나가며 또 한 번 거대한 막을 만들었다.

상대가 밖으로 나가고자 막을 부수려 한 시점에서 깨달은 응용법이었다.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안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놓치지 않겠다!”

[호.]

이어 베르세르크의 옆으로 달려 나가며 메이스를 든다. 인퀴지터의 녹색 눈동자가 상대를 눈에 담았다.

보랏빛 머리칼의 여인처럼 보이는 것은 막 손에 부정을 끌어모으고 있다.

[어설퍼.]

하나 그 부정은 그녀나 베르세르크를 노리지 않았다.

“앗!”

침입자가 노린 건 아크메이지와 악마기사였다.

“안 돼!”

그녀는 그 공격을 서둘러 막았다. 그로 인해 걸음이 잠깐 멈췄을까. 까앙! 베르세르크의 공격을 받아 낸 적이 씩 웃었다.

쾅!

“커헉!”

쏘아 낸 용암이 아니라, 땅에서 솟구치도록 한 용암이 아크메이지의 보호막을 뚫었다.

아크메이지가 서둘러 물을 소환해 내 그것을 막았으나, 이미 그것의 역할은 끝났다.

보호막이 박살 난 순간, 악마기사에게 신성력이 짓쳐들어갔다. 인퀴지터의 본능이 반사적으로 그 힘을 거둬들이려 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표독스러운 눈의 악마기사가 몸을 지탱하는 데 쓰던 투헨더를 들어 올렸다.

“무슨!”

강대한 마기가 섬광처럼 쏘아져 침입자의 어깨를 쏘았다. 그 충격으로 침입자의 손이 겨우 그러쥐고 있던 사체 중 몸통 부분을 떨어트렸다.

[크흐!]

“쿨럭!”

하지만 그 공격이 다였다. 무리한 탓인지, 혹은 신성력의 공격을 받는 탓인지. 악마기사가 피를 쏟아 내며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인퀴지터는 그 모습에 결국 힘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피를 쏟는 악마기사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

[어리구나. 나라면 멈추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 행동이야말로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베르세르크에게도 용암을 끼얹은 상대가 막을 부수고 뒤편으로 달려갔다. 위에서 쏟아지던 용암은 정화되어 사라졌으므로 목숨 걱정은 없으나, 상대를 붙잡을 방도는 전부 사라진 것이다.

“어딜!”

그나마 베르세르크가 용암을 뒤집어써 가며 상대를 쫓기는 했다. 그러나 침입자는 준비를 해도 단단히 했던 모양이다.

막 바깥, 상대가 도망가는 경로에는 아까 그들을 짓누르던 불의 손이 세 개나 존재했다.

용암으로 이뤄진 손들이 베르세르크를 막아 세웠다. 베르세르크가 어지간한 피해도 감수하며 싸우는 부류라지만, 그런 그녀라도 쉬이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사이 침입자는 점점 멀어졌다.

운 좋게 죽은 자는 나오지 않았으나, 기어이 비류호의 사체 일부를 빼앗긴 것이다. 그것도 마기를 더 많이 품고 있던 머리 쪽을.

“베르세르크, 자네!”

“젠장! 놓쳤다!”

몇 번 더 추적을 시도한 베르세르크가 결국 상대를 놓쳤다. 도주한 존재를 두고 분노를 토해 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그녀의 한쪽 팔 전체와 어깨, 허벅지, 얼굴 일부에는 용암이 튀어 피부가 자글자글 익어 가고 있었으니. 함에도 베르세르크는 고통 한 번 호소하지 않았다. 몸에 용암이 튀었다는 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는가 보다.

용암에 얻어맞지도 않은 인퀴지터와 아크메이지가 더 아연해졌다.

“치, 치료를.”

놓친 건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녀는 그것을 되새기며 떨리는 손으로 베르세르크를 붙잡아 상처를 치료했다. 열기가 덜어지고 바싹 탔던 살점이 돋아났다.

그렇게 치료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이 주변을 향했다.

“쿨럭.”

불의 손과 그것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사방으로 불을 튀기는 게 보였다.

현재의 숲은 비류호의 타락으로 독기를 머금어 버렸는데, 그게 타고 있단 말이다.

“이러면……!”

신성한 불꽃으로 태우지 않으면 사방으로 독기가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독기는 근처에 있는 에드니엄과 캄버러에 닿겠지.

어쩌면 산줄기를 따라 얄팍하게 이어진 대삼림에도 닿을지 모르고.

“저, 정화하겠습니다.”

거기에 이대로 갔다간 그들은 독이 아닌 연기에 질식당해 죽을 것이다. 결국 어느 쪽이든 방관할 수 없다.

그녀는 이 순간에도 피를 울컥울컥 쏟는 악마기사를 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신성력이 그들을 보호하고 삿된 불꽃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불과 독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방금 그건… 역시 악마겠지.”

“제길, 제길!”

아크메이지가 새로운 보호막을 형성해 악마기사의 숨통을 틔우고 치료마법으로 그의 숨을 붙였을까.

아크메이지가 방금 있었던 사건을 정의했다. 솔직히 커다란 추측 따윈 필요 없었다.

상대는 명백히 모비 딕과 비슷한 급의 악마였고, 그것의 목적은 비류호의 시신이었다.

“그나마 아무도 죽지 않은 게 다행이군. 다 빼앗기지 않은 것 역시.”

아크메이지의 말이 맞다.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건 분명 행운이었다.

베르세르크나 인퀴지터야 그것이 달려들어도 멀쩡했겠으나 그것이 작정하고 악마기사를 노렸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일부러 살려 둔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그게, 무슨…….”

“냉정하게 따졌을 때 악마기사가 죽으면 인퀴지터, 당신을 제한하는 족쇄도 사라지는 셈이 아닙니까.”

“……!”

…그래서 침입자는 그렇게 말했던 건가? 멈추지 않을 거라고? 악마기사의 목숨과 침입자의 목숨을 교환했을 거라고?

아니, 어쩌면 교환이 아닐지도 모른다. 악마기사의 몸에는 대악마가 깃들어 있으니.

그것은 악마기사의 목숨을 강제로 잇고 있다지 않나. 그것이 수를 쓴다면…….

“자네는 몸 좀 괜찮나?”

“…멀쩡하다.”

“너무 분개하지 말게. 놓친 건 자네 탓이 아니니.”

“베르세르크는 그것 때문에 화난 게……!”

썼다면? 그런 도박을 그녀가 할 수 있을 리 있나.

애당초 악마란 건 믿을 만한 존재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하지.

후회하지…….

“됐다.”

인퀴지터는 털썩 주저앉는 베르세르크를 보며 이를 앙다물었다.

“일단 돌아가지요. 악마기사를 이대로 둘 수는…….”

그래, 악마를 놓친 건 베르세르크의 탓이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인퀴지터의 책임이지.

“제가, 제가…….”

“……?”

하나,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저번처럼 신성력을 무리해서 사용한 끝에 신체에 과부하가 걸린 상황도 아니고, 분명 여력이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도.

어떻게 그녀가 적을 놓칠 수 있어.

모든 악마를 벌할 책무의 그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제가…….”

그것이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다.

이건 그녀의 무능이다.

“이봐요, 무슨 일입니까요!”

씻을 수 없는 수치였다.

“아, 자네!”

“갑자기 연기가 솟길래 왔는데, 이건 다 뭡니까. 왜 다 바싹 탔어요??”

“잘됐네, 치료 마법에 능한 마법사들과 독에 조예가 있는… 아니 자네가 하면 되겠군.”

“예?”

인퀴지터는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에 무심코 시야가 흐려졌다.

우는 것은 그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걸 알지만 너무 분해서 참을 수 없었다.

독에 당해 쓰러진 악마기사를 치료해 줄 능력도 없는 마당에, 악마기사가 고통을 무릅쓰고 잡으려 한 상대마저 놓쳤다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프게 다가왔단 말이다.

“이건… 시발! 출혈 독이잖아! 언제 뱀에 물린 거예요?!”

“특별히 물린 걸 본 적은 없네만…….”

“호랑이가 피운 하얀뱀까치꽃 때문일 거다. 베르세르크 그거 본 적 있다. 고향에서 그 꽃 때문에 사람들 많이 죽었다.”

“하얀뱀까치꽃이요? 미친, 미친.”

하물며 모든 걸 망치기만 한 그녀와 달리, 뺀질이는 빠르게 결과를 도출하고 합당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니.

“망할 기사 나리, 대삼림에서 내가 해독제를 안 구했으면… 진짜…….”

바싹 마른 공기 속에서 그리고 늪처럼 끈적이는 기다림 속에서 뺀질이가 손을 열심히 움직였다.

입을 통해 무언가를 먹이고, 팔뚝과 다리에 무언가를 주입하는 식이었다.

“…됐어요. 빨리 치료 마법 쓰세요. 아마 피가 고여서 물집 잡힐 확률이 높은데, 그건 마법이면 되잖아요.”

“…그는, 산 건가?”

“30분도 안 돼서 항독소가 들어갔으니… 아마 살 거예요. 치료하긴 개떡 같아도 빠르게 죽는 독은 아니니까. 거기에 기사 나리가 보통 사람도 아니고… 치료마법까지 더하면 죽는 게 더 힘들 거예요.”

그리고 끝내 결론이 났다. 악마기사는 살 것이다.

비록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보다 신성력 좀 치워 봐요. 기사 나리가 말은 안 하지만 솔직히 좋을 것 같진… 샌님?”

그 무참함이 기어이 닭똥 같은 눈물방울을 불러 냈다.

“나는…….”

“인퀴지터?”

“뭐냐, 사제 우냐?”

“나는 무능하다…….”

꼭 이번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모비 딕을 토벌할 때, 끝에 가서 먼저 대피했다는 죄책감.

비류호 토벌을 두고 사람들을 설득할 때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함.

이번 토벌 초반 때 굼뜬 몸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참담함과 베르세르크의 제지가 있었다곤 하나, 상성 문제로 마지막 싸움을 도울 수 없었던 현실까지.

혹은 그 일전부터 켜켜이 쌓여 온 모든 열등감과 실감해 온 능력 부족이 껴 있을 수도 있겠다.

설움이 터져 버린 지금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용사의 자격이 없다…….”

마치 열병처럼 슬픔이 찾아와 그녀의 눈물샘을 꽈악 쥐어짰다.

“가, 가, 갑자기 뭔 소릴.”

“인퀴지터, 방금 일이라면 그건 모두가 예상치 못한 것이 아닙니까. 너무 자책 마십시오.”

“사제야, 울지 마라.”

일행들이 그녀를 달래려 했으나 그다지 와닿진 않았다. 언제나 들어 왔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것이 진실일지, 아니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빈말일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녀가 듣기엔 전자보다 후자에 좀 더 가까워 보였고 말이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인퀴지터…….”

차라리 신전에서 배움을 청할 때처럼 따끔한 질책과 울 자격도 없다는 지적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눈물이라도 참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아크메이지도 베르세르크도 너무 다정해서 문제였다. 그녀는 그 다정함에 더 서러워졌다.

“저 같은 건…….”

“시발, 뭐라는 거야.”

“히끅.”

그때, 뺀질이가 그들 앞에서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천박한 욕을 입에 담았다.

“지금 나 놀려요? 장난해? 누군 같이 싸우고 싶어도 능력이 안 돼서 못 싸우는데……!”

은근하게 뺀질이를 부러워하던 그녀의 불만이 자극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넌, 넌 대악마의 위치라도 알아내지 않았나! 방금처럼 해독도 했고! 반면 나는, 나는 방해만 되는데……!”

“그건 이번 특수고! 당신은 매번 나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싸울 수 있잖아요!”

“이 꼴을 봐라! 이게 어떻게 나란히 하는 거냐! 난 악마기사께 도움이 안 된다!”

“시발, 지랄하네! 너는 기사 나리가 폭주하면 막아 줄 힘도 있고, 나리가 손이 부족할 때 손을 뻗어 줄 수도 있잖아!”

생애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폭언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게 거슬리거나 불쾌하다면 글쎄.

“악마기사는 내가 없어도 싸울 수 있다!”

“그 양반은 나 없이도 싸워요! 그딴 당연한 말 해서 꼴받게 하지 말라고!”

“너야말로, 꼬, 꼴받게 하지 마라! 왜 논점 흐리고 지랄이냐!”

“이, 인퀴지터, 말이.”

“말 다 했어요, 이 망할 샌님아?!”

“너야말로 말 다 했나, 이 멍청이! 망종!”

오히려 폭언을 들으면 들을수록 무능의 설움과 무력함의 분노만이 차올랐다.

“매번 후방에 남아서 기다려야 하는 사람 심정은 알고 말하는 겁니까?! 그게 얼마나 비참한데!”

“너야말로, 도움이 되고 싶은데 오히려 폐만 끼치고, 상대에겐 지지도 않으시는 분이 나로 인해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심정을 아나!!”

아니다. 그건 본래 있던 것이었다.

단지 오가는 고성하에 감정의 분화구가 점차 커지며 뻥 하고 터져 나왔을 뿐.

“염병, 내가 그걸 알 리가 없잖아! 난 곁에 설 수도, 대화 나눌 기회도 더는 못 받는데!”

“나도 그분 곁에 서지 못하고 대화도 못 한다!! 나도 네놈과 똑같다고!”

제대로 표출한 적 없던 답답함과 울분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런 마당에 나는, 나는! 내 판단은 항상 틀리는 것 같아서……! 너는 항상 그분께 도움이 됐지만, 나는 매번 망치기만 해서……!”

“염병, 내가 어떤 판단을 해서 맞혔는데요! 말해 보든가! 참고로 내 최근 행적이 입 다물고 죽으려 했던 건데!”

“말 잘했다! 이 머저리! 왜 입 다물고 죽으려 했나! 너도 염병, 내가 믿음이 안 가는 건가!”

“아니, 시발, 논점 네가 먼저 흐리냐고요! 그리고 안 믿은 건 아니거든요?! 단지, 나는 그냥… 내가 그럴 가치가 없는 인간이니까……!”

“네가 왜 그럴 가치가 없나!!”

“시, 시, 시발! 댁도 폐만 끼치는 머저리는 아니거든요!”

왁왁 소리를 지르던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는 결국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았다. 서로 속내를 다 까발리다 보니까 감정이 북받쳐 오른 탓이다.

“나는 쓸모없다…….”

“지랄 염병 하지 말고요, 댁이 쓸모없다면 나는 더 쓸모없다고…….”

“너는 쓸모 있다… 나는 없다…….”

“꼴받는 소리 작작 하고요……. 난, 난 심지어 이번에…….”

“이번에 뭐어… 흐엉.”

“빌어먹을, 기사 나리, 분명 실망해서 대화도 안 해 주시는 걸거야… 흐허엉.”

“크흥, 뭐라는, 거냐. 그분은 실망 같은 것 안 한다……. 원래 기대 안 하시는 분이니까… 킁.”

“시발, 네가 제일 나빠요, 샌님 새끼야…….”

대화를 가만히 듣던 아크메이지가 베르세르크에게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시키고, 본인은 악마기사 치료에 열중하기로 선택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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