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다음에 (2)
넝쿨 사이에 끼는 불상사가 없도록 몇 번 뛰며 상황을 지켜보았을까.
힘을 쓰는 동안 비류호가 못 움직이는 것 같아 한번 노려 볼까도 했으나… 너무 빠르게 자라는 덩굴을 보고 포기했다.
저거 베겠다고 공중에 떴다간 돌아갈 발판만 잃고 추락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은 우후죽순으로 자라나는 보랏빛 넌출 사이에서 버티는 게 더 중요했다.
콰드드득.
그래도 무한히 자랄 건 아닌지, 덩굴의 생장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것도 그때였다.
나는 등라를 닮은 이놈의 식물이 어디까지 퍼졌나 확인하기 위해 사위를 확인했다.
다행히 구름층까진 안 뚫었다.
“…잭의 콩나무보단 낮나.”
그래도 이쯤 되면 어지간한 고층 빌딩과 비견될 만하다. 경험상 100층 넘는 건물들에 올라서면 대충 이런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넝쿨도 대충 5백 미터 내외만큼 자랐다고 보면 될까. 수천 미터 상공이었던 저번보단 훨 낫다. 여전히 지상은 아니지만.
나는 언제쯤 지표면을 밟고 레이드를 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아래를 보았다.
거리가 아득하기도 하고 덩굴로 가득해서 눈에 들어오는 건 적지만… 적어도 이 숲 일대를 이 줄기가 다 덮어 버렸다는 건 알겠다. 사람들 안 끌고 오길 잘했다는 것도.
후방으로 대피하던 데브나 캄버러 소성주가 있긴 하지만, 그들은 에드니엄 소성주를 둘러업고 있을 테니 아마 괜찮지 않을까 싶고. 걱정의 깊이가 어찌 되었든 당장 못 보러 가는 게 실정이고.
오히려 지금 걱정해야 할 사람을 꼽으라면, 그건 같이 싸우던 이들이 아닐까 싶다.
아크메이지는 아까 인퀴지터가 챙기는 걸 봤다손 쳐도 버서커는 중도에 놓친 이래 본 적이 없어서.
“우오오! 왕 큰 나무다!”
정정하자. 버서커를 걱정하는 게 멍청한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인퀴지터가 아니었다면 이 늙은이, 오늘 명이 다했겠습니다.”
“그런 말 마십시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보다 다른 이들은 어디…….”
“아, 저기 계신 것 같습니다!”
인퀴지터랑 아크메이지의 위치도 알아냈다.
나는 대여섯 개 아래의 줄기에서 잘 살아남은 이들을 보며 나무줄기에 박힌 검을 빼냈다. 몸을 고정하기 위해 잠시 박아 둔 검이다.
콱!
보랏빛 등나무 같은 껍질을 부수며 은빛 도신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근데 호랑이는 어디로 간 거냐?”
“베르세르크도 저기 있군. 한데 비류호는…….”
“비류호의 위치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방에서 부정이 진동하여…….”
글쎄. 저쪽이 시작점이긴 했는데.
나는 장검을 손가락 사이에서 가볍게 돌려 역수에서 정수로 바꾸었다.
‘온다.’
본능이 속살거렸다. 검을 든 팔은 빠르게 뒤집혀, 칼날이 몸통 앞에 수직으로 서도록 한다. 오른팔의 팔뚝이 도신 가운데를 받쳤다.
쾅!
직후 강렬한 힘이 내 칼날을 덮쳤다. 마력을 싣지 않았다면 검이 부러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힘이었다.
“악마기사!”
휘익.
다행히 그 힘은 나를 바깥으로 밀어내기만 했을 뿐, 끝까지 쫓아오진 않았다. 쳐 낸 힘도 무척이나 강해서 아래로 뚝 떨어질 일도 없었다.
날아가던 내 몸이 빙그르르 회전해, 경로에 수직으로 자라나 있던 줄기를 밟았다. 탁. 가벼운 몸짓으로 무겁게 뛰어 버린 몸이 날 공격했던 것에게로 쇄도했다.
“기습이라도 하면, 통할 줄 알았나?”
[한 번에 죽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 주마……!]
까앙!
내 검과 비류호의 손톱이 부딪쳤다. 비류호에서 (진)비류호로 각성한 건지, 아까보다 반발력이 더 거세다.
여전히 다른 한쪽 손은 자유로워서 손쉽게 나를 노리려 들기도 했다.
“거기냐!”
하나 비류호의 손가락이 내게 닿기 전, 버서커가 달려들었다. 내 건너편, 비류호에게선 후측에서 할버드를 크게 휘두르며 덤벼든 것이다.
나도 공격 범위에 들긴 했으나, 덕분에 비류호의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 다른 줄기를 밟았다. 비류호는 글쎄, 위쪽으로 뛰어 발톱을 넝쿨에 박아 넣는 식으로 천장에 달라붙어있는 듯하다.
[주제도 모르는 것, 꺼져라!]
그리고 버서커가 단숨에 뛰어올라 그 몸을 베기 직전.
비류호가 포효함과 동시에 반투명한 무언가가 그 몸에서 쑤욱 뛰쳐나왔다.
약간 영혼체가 튀어나온 것 같은 이펙트인데… 물리력은 가지고 있나 보다. 희끄무레한 것의 몸통 박치기가 버서커의 균형을 흐트렸다.
버서커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아래쪽 덩굴에 다시 추락했다. 희끄무레한 영체는 호랑이의 형태로 눈을 형형히 빛내며 버서커를 노리고 있다.
아무래도 분신 패턴 뭐, 그런 것 같다.
퍼버벅!
[큭……!]
그러면 나야 땡큐지. 우리는 원래 합을 맞추며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각개격파 전문이거든.
나는 비류호가 분신 만드는 타이밍에 날린─그땐 뭘 하려는지 몰랐지만 일단 날리고 봤다─마력창들이 잘 박힌 걸 확인하며, 두 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검기가 비류호 있던 자리를 베었다. 무거운 줄기가 우득 소리를 내며 어긋났다. 다른 것에 얽히고설킨 덕에 무너지는 건 겨우 피했다는 느낌이다.
우드득!
“……!”
하나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넝쿨의 표면에서 갑자기 자라난 풀들을 두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들이 내 발목을 사로잡은 까닭이다.
심지어 그에 맞춰 달려드는 비류호란.
“악마기사!”
“거리가 멀어서 도울 수가……!”
도움 같은 건 딱히 필요 없다.
나는 장검을 위로 던지며 투헨더를 뽑았다. 뽑는 시간으로 인해 타이밍 맞추기가 힘들어? 그건 인벤토리를 이용하면 그만이다.
내겐 가방형 인벤토리 대신 접촉형 인벤토리도 있으니까.
소모되는 마력이 꽤 커서 자주 쓰진 못하지만 한두 번쯤은 문제 없다.
하여 난 오른손으로 투헨더를 접촉, 인벤토리에 넣은 후 장검을 던진 왼손에 다시 소환했다. 투헨더가 나무줄기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그라운드 크래시.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내가 딛고 있던 등라를 파쇄하고 비류호를 뒤로 밀었다.
푸스스슥.
나는 무너지려 드는 발판으로부터 뛰었다. 그 과정에서 떨어지는 장검을 붙잡으면 이제 도로 원상태다.
나는 식물에 발 붙잡히는 걸 유의하며 넝쿨 위를 달렸다. 밀려났던 비류호 역시 반쯤 짐승화하며 내게 따라붙었다.
“으아아! 치사하다, 전우여! 너만 재밌는 놈이랑 싸우고!”
분신이 반대쪽으로 유인하고 있는 건지, 뭔지. 버서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이젠 진짜 팀 킬 걱정 없다. 인퀴지터나 아크메이지도 멀어진 바람에 그들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겠지만.
[커헝!]
그때 비류호가 손을 휘저었다. 그에 맞춰 거대한 호랑이의 앞발이 내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썩둑. 그 한 방에 줄기가 네 토막이 나며 잘려 나갔다. 내 몸이 공중에 뜬 토막을 빠르게 밟고 뛰며, 맞받아치듯 검기 몇 조각을 날렸다.
서로 얽힌 것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잘게 쪼개진 덩굴 뭉치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타다다닥.
그래도 상관없다. 나와 비류호는 계속 나아갔다. 이 줄기의 수림은 아주 넓었고,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내려가는 수단 또한 있었다.
서걱!
나는 비류호의 다음 발판을 베어 버린 후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복수라도 하듯 비류호가 밑동을 베었다. 지탱하던 부분이 잘려 나가며 허공에 뜬 상황이 된 넝쿨이 자연히 아래로 떨어졌다.
이것 참, 해룡이랑 싸울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인데.
추락을 염두에 둔 채 배배 꼬인, 두꺼운 원통형 발판에 의지하며 싸워야 한다는 건 비슷하나, 딱 그것만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요동치는 넌출을 보며 크게 뛰었다. 제비 꼬리처럼 양쪽으로 옷자락이 펼쳐지고, 불쑥 자라난 가지가 나를 꿰뚫을 것처럼 굴었다.
하물며 뒤편에는 짐승이 된 비류호의 아가리가 버티고 있으니.
내 몸이 회전하여 등라를 베고 회전하던 과정에서 비류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검을 앞으로 내밀어 이를 직시하게 했다.
봄바드. 마력의 선이 비류호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물론 이 정도 고통은 감수하겠다는 양, 호구는 계속해서 내게 다가왔다.
탁.
이대로 입안에 또 다이빙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내가 건너가려 했던 발판이 드디어 내 발에 닿았다.
콰앙!
발 디딜 공간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두려울 게 없다. 발판이 된 줄기가 으스러지도록 힘을 준 내 몸이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세 개의 발톱까지 활성화하자 호랑이를 가르려 드는 검격은 이제 3개가 된다.
[크악!]
봄바드 같은 관통상은 버텨도 얼굴을 네 토막 낼 기세의 검기는 못 버티나 보지.
나는 비류호가 다시 인간형으로 모습을 바꾸는 걸 보며, 덩굴 하나에 매달렸다.
지금껏 짐승형에서 어떤 피해를 입어도 인간형에선 별 티가 안 나던 비류호가, 이번 부상만큼은 얼굴을 짚어 가며 가렸다. 손으로 가린 살갗 사이에선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쩌저적.
그의 가슴팍 한가운데의 검은 구멍은 아까보다 더 커진 상태다.
탁한 적색 눈동자가 으득으득 이를 갈다가 캬악 포효했다.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처럼 섰다가 곧 비단 자락처럼 길어졌다. 그것이 꼭 장산범과 같았다.
파스스슥.
이번엔 또 뭔 패턴인지.
나는 내가 매달려 있던 덩굴이 갑작스럽게 시드는 걸 확인하며 다급히 뛰었다.
하나 그다음으로 밟은 것도 비슷한 상태였다. 보다 정확히는 일정 높이 위에 형성된 모든 줄기가.
콰드득!
그러나 그것에 그치지 않고 새롭게 자라난다. 그러다가 또 부서진다. 생성과 파괴, 그것의 반복인 것이다.
‘전부 불태워 버린다면 편할 텐데.’
아니, 이건 좀 에바잖아! 비행종을 발판 삼을 때도 애들이 불규칙하게 이동하긴 했지만, 적어도 밟았을 때 스러지거나 하진 않았어!
심지어 이건 생성과 파괴의 기준이 일정하지도 않잖아! 랜덤이냐?! 가챠 발판인 거냐?!!
나는 욕 나오는 난이도에 이를 악물었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조금 궁금하나, 그마저도 닥쳐온 위기에 바로 뒷전이 되었다.
지 혼자만 발판의 자유를 누리는 비류호가 들개처럼 달려 내게 달려들었다.
내 몸이 빙글 회전했다.
서걱!
줄기의 가호는 없을지언정 발톱은 내게도 있다. 나는 세 개의 반월을 띄워 비류호를 견제한 후, 파사삭 흩어지는 발판을 밟았다.
생존본능? 그건 쿨타임 차는 족족 돌렸다.
내 공간 감각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나무 부스러기가 비처럼 내리고 시드는 것과 자라난 것이 분간 안 가는 상황에서마저 자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달리기만 한다면 몰라, 비류호랑 싸우고 있는 지금은 더.
「독 7%」
그때 오랜만에 보는 듯한 알림이 뜨며 독 게이지를 알렸다. 간간이 핀 꽃이 원인 같은데 참, 가지가지 한다.
내 이가 꽉 다물리며 마치 촉수처럼 자라나 나를 쫓는 것을 피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굵은 것을 길 삼아 달렸다.
내가 밟은 부분부터 빠르게 부스러졌지만 다행히 내 몸이 더 날랬다.
[죽어!]
내 발이 덩굴로부터 뛰어올라, 비류호와 손톱을 교차했다. 수백 미터 상공에 불똥이 튀고, 내가 어질함을 참아 가며 겨우 만든 마력창들이 비류호의 몸뚱이 일부를 관통했다.
딜교는 내 승리다. 빌어먹게도 난 이제 추락할 예정이지만.
「독 10%」
파르르륵.
바람이 엄청나게 몸을 때리며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휘날리도록 했다. 보랏빛 등라에 만개한 꽃들은 희적색 가루를 사방으로 풍기는 중이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향기롭다.
그리고 내가 몇 바퀴 돌아 어떻게든 충격을 분산한 끝에 쾅, 하고 내 다리가 아래쪽 두꺼운 줄기와 충돌했다.
마력으로 강화한 덕에 몸이 박살 나진 않았는데, 줄기가 비탈져서 내 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무슨 스노보드 타는 것도 아니고. 톱밥이 눈발처럼 휘날렸다.
콱.
그렇게 몇십 미터를 밀려났을까.
나는 가까스로 다른 줄기로 넘어가 다시 등산을 시작했다. 비류호는 제 아래에만 멀쩡히 가지를 뻗어 나게 하여 아주 편안히 나에게로 달려오는 중이다.
[인간─!]
“죽어라, 버러지.”
올라가는 나와, 내리꽂히는 비류호가 순간적으로 교차하며 서로의 위치를 바꾸었다.
단단히 쥔 내 투헨더가 비류호의 옆구리를 가르고, 비류호의 손톱이 내 어깨를 할퀴었다.
촤악.
핏줄기가 사방으로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