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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67화 (167/389)

167화 핑계를 내지른 (7)

─그렇다면 우린 비류호 사냥을…….

─한데 주민들이 동요하면…….

─주민들 하나 못 다독여서야 성주 자격 있는…….

잡는 과정에서 감수할 손해도 없어, 잡은 후 피해도 없어, 오히려 비류호를 잡으면 매년 땅이 메마르던 게 사라진다고 한다.

그런 마당에 물러날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회의는 비류호를 잡는 쪽으로 결국 흘러갔다.

단지 주민들의 반발을 고려해 사실을 퍼트린 후 잡느냐, 아니면 나중에 잡느냐가 새로운 화두로 올라오며 다시 말다툼이 시작됐을 뿐이지.

─이대로는 결론이 안 나겠군. 다들 머리 좀 식히고 마저 이야기 나누는 건 어떻겠습니까?

─인정합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구제 방안 등의 논쟁거리도 남았고.

─저도 찬성합니다. 사실 아까부터 화장실이 급했던지라…….

그 때문인가. 어떤 희생도 마다치 않을 각오를 했다던 에드니엄 성주의 표정이 다소 멍해졌다.

물론 그마저도 본인이 해야 할 일은 놓치지 않았다.

“…그럼 30분 후에 회의를 다시 시작하도록 하지요. 다들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저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럼 삼십 분 후에 다시 뵙는 걸로 하지요.

그는 사람들의 의견을 순식간에 규합하여 쉬는 시간을 만들어 냈다. 그러자 일부는 작정한 것처럼 마법의 연결을 끊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이 그랬다. 마법사가 마력 낭비 어쩌고 하는 걸 보면 마력이 아까워서 그런가 보다.

─언젠가 우리 도시에 오실 일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실눈 성주마저도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하곤 쓱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잡아다가 대화를 청하고 싶었으나,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모순의 극치였다.

─성주님.

그사이, 자리에 남은 존재라곤 장내의 사람들과 캄버러의 소성주뿐이게 되었다.

소리 없는 갈망과 환희가 두 사람의 눈 사이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레온에게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막을 수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를 구할 수 없다고, 구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성주로서 골라선 안 될 선택지라고 말입니다.”

성주는 타인의 도움 없인 걷지도 못하는 본인의 다리를 쥐었다. 담요 한 장으로 가려 두었던 앙상한 다리가 마른 두 손에 꽉 쥐였다.

“한데 여러분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그러나 성주는 오래도록 제 다리를 보는 대신, 갑자기 나를 올려다보았다. 거리가 조금 있던 덕에 성주의 목이 부러져라 꺾이는 일은 없었다.

“내 아들을 이대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입니다.”

덩달아 나 역시 복잡한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아들을 희생할 각오를 했던, 그러나 가까스로 살릴 수 있게 된 부모의 앞에서 감히 딴생각할 수는 없었다.

─성주님…….

다행히 성주는 나를 오랫동안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중간에 시선을 살짝 돌려 캄버러 소성주를 보았다. 노쇠한 얼굴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내 주민들까지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훈훈함이 싹 가셨다.

“그 아이와 캄버러의 소성주에겐 미안한 말이나… 우리 도시는 지금 비류호의 화를 사기 싫어하는 자들로 가득합니다.”

─저희 도시에도 그런 소문은 돌고 있습니다.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성주는 창밖을 힐끗 보았다. 보안상의 이유로 연회 홀의 창에는 전부 두꺼운 천이 매달려 있어, 바깥이 보이는 일은 없었다.

“대악마 토벌 직후, 거대한 넝쿨들이 숲을 뒤덮은 이래 우리 도시의 신앙심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아진 상태입니다.”

함에도 소리는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다. 성에 오면서 수근대던 사람들을 본 기억은 여즉 남아 있으니까.

“물론 시간을 들이면 언젠가 그들을 설득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때가 대체 언제일까요. 그리고 그때까지 레온은 안전하겠습니까?”

성주는 그리 말한 후 눈을 감았다. “희생을 강요한 주제에 이리 말하는 것도 우습겠지만.” 의연해 보인다 싶었던 얼굴은 사실 그만의 애도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뭐가 문젠가? 땅이 마르는 게 끝나면 사람들에게도 좋은 것 아닌가?”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닙니까요.”

“그래서?”

“반발이 일까 봐 걱정하는 거죠, 뭐…….”

“그럼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지 않나?”

“그건 폭군이잖아요.”

“그, 베르세르크. 그것이 결과적으론 옳을지라도 수단이 잘못되면 결과 또한 빛을 잃는 법입니다.”

“베르세르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투쟁할 마음조차 없는 약자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

“아니, 그러니까…….”

“성주님.”

그러던 찰나, 성주의 뒤에 묵묵히 도열해 있던 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얗게 변한 수염과 정갈히 넘긴 머리카락이 굉장히 엄격해 보이는 집사였다.

“외람되오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언제나 자네의 말을 경청하네.”

그에 성주는 가벼이 답했다. 동시에 이쪽을 돌아보았는데, 눈치를 보는 건지 허락을 구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저희가 들어도 될 이야기라면.”

다만 아크메이지가 그리 답한 걸 보아 아마 후자였던 것 같다. 집사가 묵례하곤 말을 이었다.

“오래전, 당신께선 말씀하셨지요. 우리 모두의 평온을 위해 한 명의 희생을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자네, 그건…….”

“우리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성주로 추대했습니다. 또한 그 마음은 아직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건 아직 내가 이 자리에 오르지 않았을 때의 일 아닌가. 이 자리에 서서도 모두의 피를 요구하는 건…….”

“만약 비류호께서 잡아간 자가 소성주님이 아닌 다른 주민이었다면, 성주님께선 이번과 같은 선택을 하셨겠습니까?”

집사의 말에 성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나…….” 한계까지 감정을 눌러 담은 목소리가 참으로 짙었다.

“전대 성주의 일로 스스로에게 그리고 소성주님께 엄격히 구시는 건 압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은 아마 말할 것입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입니다.”

성주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결국 이번에도 녹색 머리카락이 피를 불러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

그런데 이게 이쪽으로 화살이 날아온다고?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 집사와 성주 사이의 대화에 집중하다 말고 깜짝 놀랐다.

뒤쪽에서 숨 흐트러지는 소리가 들려온 걸 보면 데브도 들었나 보다. 마땅히, 그러할 수밖에 없는 거리지만.

“저, 집사님, 그건…….”

“틀린 것을 바로잡는 피를 말입니다.”

“……?”

집사가 허허 웃더니 곧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그의 시선은 얼떨결에 구실이 되어 버린 데브에게 닿아 있다.

“죄송합니다. 손님분껜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셨겠군요.”

“…아니, 뭐.”

“그러나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마셨으면 합니다. 피가 언급되긴 했으나, 이 미신은 결코 부정적인 게 아니니 말입니다.”

노년의 사내는 인자하게 웃었다. 성주 또한 겨우 고개를 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요. 저 말은 결코 나쁜 뜻이 아닙니다. 변화와 변혁을 알리는 신호탄이지.”

언젠가 들었던 대화와 사뭇 다른 시작이었다.

이번엔 데브가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냥 피가 흐른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런 단순한 게 아닙니다.”

성주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조용히 이야기를 풀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우리가 겉껍데기의 평온을 유지하고자 누군가의 죽음을 방관하던 과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전 성주를 암살했다는 이야기라면, 그건 들었습니다. 그 후 전 성주의 가족이 무고한 자들을 상대로 학살을 벌였다고.”

“아신다니 이야기는 빨라지겠군요.”

감정을 많이 가다듬은 것인지, 성주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단조롭게 속삭였다.

나는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아마 그때 식당을 박차고 나가서 못 듣고, 이후론 들을 일 없어서 그런 거겠지만.

“우리는 그날 이후, 진정한 잘못은 우리에게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타인의 피해는 진정 나의 피해와 연관이 없지 않으며, 악을 방관하는 것은 결국 악에게 동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막아야겠단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주의 죽음을 상징하는 녹색 머리카락을 하나의 상징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또 한 번 녹색 머리카락이 휘날린다면, 그건 우리가 또다시 악에 침묵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뒤집기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경고라고 말입니다.”

“……!”

그건 아마, 저 말이 데브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란 판단이 들어서일 것이다.

“그러니 녹색 머리칼이 불러오는 피는 옳은 것입니다. 부조리에 저항하고자 하는 용기의 무게만큼 말입니다.”

혹은 내가 개입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게 분명해서일지도 모르고.

“그런 점에서 용사님과 그 동료분께선 저희에게 많은 행운을 가져와 주셨군요. 제가 잊고 있던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게 해 준 것도 모자라 흘릴 피마저 줄여 주셨으니.”

한데 어째서 나는 그 사실을 잊고 그 아이에게 희생을 요구한 걸까요? 성주가 탄식했다.

“…저, 성주님.”

그때 데브가 후드를 슬그머니 뒤집어쓴 채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원망은… 안 하시는 겁니까요?”

“무엇을 말입니까.”

“성주를 죽였다는… 그 사람이요.”

“당연히. 하지 않습니다.”

어떤 표정인지는 글쎄.

“우리에겐 그를 원망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으로 인해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그 사람은 분명 개인적인 감정으로 했을 것 같은데…….”

“나선 이가 어떤 마음으로 나섰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생존이든 복수든 간에 결국 참지 못하여 스스로 칼을 든 근본적 원인은 아무도 성주를 막지 않아서일 것이니까요.”

진정 학살의 신호탄이었던 암살이 데브의 것이라면, 이걸로 그의 가슴에 뚫린 까만 구멍이 전부 메워지긴 어렵겠으나…….

“아무렴, 우리가 처음부터 성주의 폭거를 막았다면 그가 칼을 들었을까요?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 담합하여, 성주를 제지했다면 그런 사건이 일어났겠습니까? 악행을 방관함으로써 ‘그래도 된다. 그래도 우리는 침묵할 것이다.’란 신호를 던진 건 우리들이었습니다. 이번에 저지를 뻔한 실수처럼. 하니 그 칼날은 결국 우리의 원죄가 잉태한 것이며, 그로 인해 생겼던 학살도 결국 우리의 업보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한 삽. 적어도 한 삽만큼은 메워졌을 것 아닌가.

“어떤 무지한 자들은 죽은 전 성주를 옹호하고, 그때 잃은 사건의 상실이 너무 아픈 자들은 옳지 않다는 걸 앎에도 원망을 품겠지만, 적어도 그때 나섰던 많은 이는 그리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죄를 까발린 자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건 분명 의미가 없지 않다.

* * *

캄버러의 소성주, 미아는 환상이 사라진 자리를 가만 보았다. 용사와 그 일행들, 회의를 주최했던 에드니엄 성주, 그의 집사 등이 있던 자리를.

“이야, 성주란 자리도 장난 없네요. 아들을 희생시켜야 한다니.”

“그게 제일 편하니까.”

요한나는 자리에 없다. 소성주의 보좌관까지 동행시킬 자리는 아니었으니까.

대신 말이 제법 통하는 마법사는 있었다. 미아는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그렇지 않나? 남을 위해 내가 피 흘리는 건 나의 용기만 고려하면 될 문제지만, 나를 위해 남이 피를 흘리면, 그땐 그가 흘린 무게만큼의 값을 지불할 생각부터 드는 것을.”

“뭐, 그렇긴 하죠. 물건도 돈 주고 사야 하는 세상인데, 남의 피와 목숨을 공짜로 살 순 없으니까. 그래도 그쪽은 돈이 많잖아요?”

“그렇지만 권력자지. 그리고 이런 사건에서 권력은 오히려 독이야. 조금만 잘못해도 권력 남용으로 내몰리기 좋으니까.”

“무시할 수도 있을 텐데.”

“보통은 그러할 거야. 그러나 에드니엄은 과거 시민들의 손에 의해 성주가 바뀐 전적이 있어. 물론 저 성주님의 경우 그것이 두려워 저렇게 몸 사린 건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렇지.”

“착해 빠지신 분이시네요. 저 같으면 안 그럴 텐데. 그렇게 살면 힘들잖아요.”

미아는 마법사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힘든가? 확실히 힘들긴 하다, 이끌어 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의 도덕적 잣대만을 밀고 나가는 것은. 끝없이 자신을 검증하고 성찰하는 일은 분명 힘든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고됨의 대가가 저 밖의 사람들이라면, 그건 제법 할 만하지 않나?”

그럼에도 그녀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할 수 없다.

“내가 그리고 그 성주님이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면. 저들이 그리고 성주님의 집사가 먼저 나서서 외쳐 주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녀가 힘들게 살아온 보답이, 지금 저 밖에서 끝없이 들려오는데 어찌 후회하겠는가?

“샐롯.”

“부르셨습니까?”

미아는 시종을 부르는 종을 울린 후, 눈꺼풀을 잠깐 내렸다.

『어떤 순간에는 말보다 더 빠른 답이 있단다. 바로 네 손에 쥐인 검이지.』

뮌문트 기사학교 출신, 정식 기사였던 어머니가 어둠 너머 한 조각의 기억 속에서 손짓했다.

미아의 눈이 떠졌다.

“어머니의 검을 가져와.”

“…예!”

“비류호가 거주하는 자리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 분명 찾는 데 며칠의 시간이 소요될 터. 나는 그 전에 저쪽으로 합류한다, 이 도시를 대표한다는 자격으로.”

비록 그녀에겐 정식 기사 자격이 없으나 그래도 잡아 온 가닥은 있다.

설사 토벌 자체에 참여할 수 없대도 그렇다.

“모두가 내 편을 들어 주고 있는데,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겠지. 안 그런가, 마법사?”

“…제게 물어보셔도 저는 이 도시 사람이 아니니 잘 모르죠? 그렇지만, 뭐. 다들 말리긴커녕 신나서 따라갈 것 같긴 하네요.”

그녀의 님과, 그 님을 앗아 가려 들었던 짐승 새끼를 볼 수만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곳으로 향할 것이다.

.

.

.

“찾았다.”

[네놈……!]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

기꺼이, 그 영수의 몰락을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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