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핑계를 내지른 (6)
─무슨…….
─땅이 메마르는 게 싫다면, 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설명해 주겠나?”
나는 대답 대신 에드니엄 성주에게 나뭇잎 두루마리를 던져 주었다.
“이건…….”
“육귀의 후예를 모시는 제사장들에게 받아 온 답변이다.”
“……! 육귀라면!”
─육귀라면… 대삼림에 거주하는 태곳적 짐승이 아닙니까.
─대삼림은 폐쇄적이어서 교류가 어렵다 들었는데……?
내 답변에 사람들이 약간의 놀람을 표하고 있었을까.
“악마기사, 자네…….”
아크메이지는 내 행동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에드니엄 성주는 빠르게, 그러나 품위 있게 두루마리를 펼쳐 보는 중이다.
“이건… 대삼림의 글자인가. 알아볼 수 없는, 아, 이것이 해석본인가.”
그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탁자 가운데에 나뭇잎 두루마리를 펼친 후, 본인은 해석본을 낭송했다.
“대삼림의 은인, 검은천둥뱀께. 뱀께서 보낸 사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삼림을 구원해 주셨듯이 또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계신다지요…….”
편지는 조금 길었으나, 그렇게 긴 것도 아니었다.
나에 대한 찬양─덕분에 읽는데 낯이 좀 뜨거웠다─과 일행을 향한 찬사, 본인들의 안부, 행운을 빌어 주는 말들을 빼면 정말 중요한 건 몇 문단 안 남는 까닭이다.
“…산군께서 이르시길, 태곳적 짐승은 세계의 흐름과 관련이 없다고 하십니다. 비록 그 힘이 강대하여 약간의 간섭은 할 수 있으나, 그들이 죽거나 떠난다고 하여 그 일대의 생명이 사라지진 않는 것입니다.”
그래, 저거다. 바로 저게 내가 바랐던 것이었다.
비류호가 뒈져도 이 땅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확언. 저것을 바라서 나는 편지를 보냈다.
“더불어, 노파심에 첨언합니다. 서부는 일정 시기만 되면 이유 없이 땅이 메마른다고 들었습니다. 본래부터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터를 잡고 있던 태곳적 짐승이 떠난 후 생긴 것이라지요. 하면 그것의 원인은 떠난 태곳적 짐승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잠깐, 그게 무슨 소리…….
본인도 읽다 말고 감정을 싣긴 했으나, 에드니엄 성주는 일단 손을 들어 사람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마저 글을 읽었다. 아까보다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더욱 짙은 색으로 장내에 울려 퍼졌다.
“아까 말씀드렸지요. 태곳적 짐승은 힘이 강대하여 세계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노라고. 그 간섭의 형태는 대개 흐름을 빨리하거나 늦추는 정도입니다. 완전히 멈출 수는 없으되 일시적으로 생명의 탄생을 막는 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읽는 목소리가 잠시 이를 지르무는 듯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산군은 확신하시는 눈치입니다. 하니 은인이시여, 부디 조심하십시오. 은인께서는 어린 것들의 수호자이시자 핍박받는 자들의 해방자이시고 불의한 것들의 심판자이시니, 분명 이 사실을 알거든 마땅한 벌을 내리고자 움직이실 걸 압니다. 하나 상대는 태곳적부터 이 땅에 살아온 영수. 만만치 않은 상대일 것입니다.”
그보다 성주님, 기어이 마지막까지 읽으시는 건가. 사람 낯부끄러워지게.
“함에도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나아가실 당신이니, 저는 검은천둥뱀께 승리가 따르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대족장 에쿠아 올림.”
다행히 추신은 안 읽어 주셨군.
하기야 내가 보낸 사자─정보길드─가 앞으로 약간의 협조(정보 제공)를 해 달라고 했는데, 해 줘도 되는 게 맞느냔 질문이 주 내용이다.
그것까지 읽었다면 나는 그의 분별력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건 이 회의에 전혀 필요 없는 내용이니까.
“…이 편지에 대해, 설명이 약간 필요할 것 같네만.”
별개로 여기서 더 설명을 해 달라고?
“이건, 이건…….”
“그것이 전부고, 그 이상 요구될 것도 없다. 하니 결정해라. 부조리한 권력으로부터 저항할 것인지, 제 피 흘리기 싫다고 남의 피를 바치는 채로 순응할 것인지.”
미안하지만 말을 예쁘게 잘 털어 줄 자신이 없어서, 그냥 이걸로 끝냅시다.
“다만 경고하겠다. 지금 흘리는 피가 너의 것이 아니라 해서 다음 또한 그러리란 보장은 없음을.”
어차피 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이지선다뿐이니까.
─저, 저것이 거짓일지 어떻게…….
그럼에도 누군가는 당장 흘릴 피가 두렵나 보다. 주어진 증거를 부정하려는 자가 나왔다.
“저것은 진실입니다!”
─그대는……?
“그분은 용사입니다.”
─헙.
하지만 인퀴지터가 바로 퇴치했다. 처음 말 꺼낸 성주에게 동조하려던 자들이 바로 입 닥친 건 덤이다.
“저희는 이 땅에 오기 전 대삼림을 거쳤으며, 그곳에서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또한 그 모든 일의 중심엔 악마기사가 있었으니, 악마기사가 그들에게 답장을 받을 자격은 충분합니다!”
이 편지의 신뢰도는 이것으로 확정되었다. 이제 저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딱 두 개다.
유보와 방관은 더 이상 택할 수 없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러던 찰나, 더없이 또렷한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캄버러는 싸울 것입니다.
캄버러의 소성주였다.
─캄버러 소성주!
─캄버러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말입니다.
─캄버러 성주, 당신은 말 안 합니까?!
─그, 그것이…….
─성주님, 어서 말하시죠!
─그, 나는…….
─시민들이 바라지도 않는데 이게 맞습니까, 캄버러 성주!
물론 그녀는 곧바로 위기에 봉착했다. 그녀가 소성주란 사실을 이용해 성주들이 어떻게든 입을 막으려 든 것이다.
그러나 소성주 바로 옆에 있던 캄버러 성주는 우물쭈물거리기만 하고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시선이 몇 번이고 소성주에게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 꼭 눈치라도 보는 것 같다.
─아, 여러분들이 우리 도시의 시민들까지 챙겨 줄 만큼 다정하실 줄은 전혀 몰랐군요. 한 도시의 소성주를 당연히 희생시키려 들길래, 이 정돈 별거 아니라 치부하실 줄 알았는데.
또한 캄버러 소성주 역시 쉽게 당해 주지 않았다.
오파시티Opacity 80%쯤으로 보이는 그녀가 샐쭉 웃었다.
─소성주!
─그래서, 시민들의 의견을 묻기만 하면 됩니까?
─그, 그래요! 시민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반대할 겁니다!
─마법사,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전달해 줄 수 있겠나?
─아, 준비 없으면 까다로운데…….
─연구비가 부족하다 들었는데.
─못 할 것 뭐 있겠습니까. 까짓것 한번 해 보겠습니다.
잠깐 방금 자낳괴가…….
─자, 됐습니다!
다행히 내 기분이 묘해지기 직전, 캄버러의 마법사는 연구비를 위한 서브퀘스트를 성공했다. “이제 잇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어지는 건 어마어마한 함성이다.
─비류호를 죽이자!
─그 망할 호랑이가 우리에게 해 준 것이 뭐냐!
─소성주님은 우리에게 미래를 주시며 말하셨다! 권리는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영수고 짐승이고 알 바 아니다! 나는 내 자식의 핏값을 받고 싶다!
─비류호를 죽입시다! 신이고 뭐고 우리가 부당함에 끝없이 시험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캄버러 소성주, 이건…….”
─맹수 사태의 진범이 비류호란 소문이 퍼져서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확언을 해 주었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까진 비류호 토벌이 다른 도시에게 피해를 끼칠까 저들의 외침을 최대한 외면해 왔습니다만… 지금 들은 게 사실이라면 글쎄요. 굳이 그래야 할까 싶네요.
─소성주! 소성주가 되어서 소문이 퍼지도록 하면……!
─그건 우리 도시의 문제입니다. 당신이 신경 쓸 게 아니라.
─……!
─어찌 되었건, 비류호가 죽어도 동부에 영향이 오지 않는다면, 아니 매년 이 땅을 메마르도록 한 게 비류호의 짓이 맞다면, 우리 캄버러는 우리가 지금껏 입어 온 모든 피해의 책임을 그 망할 호랑이 새끼에게 묻고 말 것입니다. 이것에 타협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고함들 사이로 캄버러 소성주는 더없이 분명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존엄과 자유,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한 역사를 배운 현대인으로선 가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울림이었다.
물론 저 말을 하는 사람이 귀족 계급이란 건 잠깐 잊자. 티가 있다고 옥이 옥이 아니게 되진 않는 것처럼, 의미가 조금 빛바랜다고 해서 무가치하게 되진 않는다.
─…메마름이 진정 비류호의 짓이고, 그를 죽여도 별 탈이 없다면 우리 도시도 찬성하겠습니다.
─베뮈르헨 성주!
─매년 찾아오는 기근이 앗아 가는 병사만 수십입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천 단위를 넘긴 지 오래고 말입니다. 제때 한 번 꿰매는 것이 아홉 번의 일을 던다고, 이런 사정이라면 결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그건…….
또한 그녀가 포문을 엶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의견을 돌리게 되었다.
메마름의 피해가 없는 도시야 여전히 회의적이었지만, 그 영역권에 있는 자들은 곧장 캄버러의 열기를 제 몸에도 옮겨붙인 것이다.
“이건 아직 검증되지 않아 아끼려 했네만… 자네에게는 항상 한 수 배우는군. 나는 서부의 사례만 모으려 했는데 말일세.”
그때 아크메이지가 살금 속삭였다. 시선 하나 돌리지 않은 채라 가까이 있지 않다면 그녀가 내게 말을 걸고 있음을 알아채긴 힘들 것이다.
“고맙네. 자네 덕에 활로가 생겼네.”
별개로 아크메이지는 서부의 사례를 모으고 있었나.
하기야 그녀가 바보도 아니고, 뻔히 보이는 결말에 대비 하나쯤은 해 뒀을 거다.
대삼림의 산군에게 물어볼 생각을 못 한 건 의외지만, 뭐. 이상할 것까지는 없었고 말이다.
본인이 아는 게 많아서 그런가, 아니면 마탑이 지식의 보고여서 그런가. 아크메이지는 마탑 이외의 장소에서 좀처럼 지식을 얻으려 들지 않았거든.
보다 정확히는 얻을 수 있을 거라 사고하지 않는 편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만 저 말을 한 건 육귀의 후예가 아닌가! 후예의 생각과 진실이 다를 가능성도……!
“자 자, 그러지 마시고 이 말도 들어 주시지요. 안 그래도 저 역시 이에 대해 할 말이 있었습니다만…….”
각설하고 그녀가 모아 온 증거까지 더해지자 흐름은 이쪽으로 더 넘어왔다.
물론 아크메이지의 말에 따르면 서부의 사례는 검증이 아직 덜 됐긴 한데… 그 말의 부족한 신뢰성은 산군의 편지가 보충해 주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크흠… 그, 비류호를 죽인다면… 얼마만큼의 병력을 내놓아야 하는지……?
“그건…….”
“필요 없다.”
“저도… 엇.”
또한 결정적으로, 저들은 비류호를 잡는 행위 자체마저도 손해를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노린내 풍기는 짐승 따위, 차 식을 시간이면 족하다.”
잡는 건 내가 될 것이다.
─저, 아까부터 저 청년은 누구기에…….
─악마기사. 서북 지역에서 제법 이름 날린 모험가입니다.
─모험가? 그럼 지금 한낱 모험가가…….
“동시에 용사께서 택한 동료기도 합니다.”
─…아니라 용사께서 택한 동료라 저리 호기롭나 보군.
그보다 방금 탈룰라 한 성주 누구냐. 회피 기동 만렙이시네요.
─하지만 용사님도 아니고, 동료가 저리 자신하는 게…….
“저기, 저 또한……”
─마역에서 새어 나온 악마가 있다 하면 지옥 끝까지 쫓아갈 기세로 찾아 죽이고, 악마를 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힘을 인간에게 휘두른 자가 나타나면 불문곡직 그 목을 베어 시산을 이루니.
그렇지만 나는 탈룰라 한 성주를 찾을 수 없었고, 아까부터 말이 씹혀 온 인퀴지터 역시 발언하지 못했다.
한 명의 인물이 나를 정확히 직시한 채 말을 이어 나간 까닭이다.
─손속이 잔혹하여 자비라곤 보이지 않으나, 무고한 자를 결코 베지 않는 것에서 신념이 보인다. 묘연한 행적에는 의문과 추측이 가득하나,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행적만으로도 가히 영웅이란 단어를 붙이기에 손색이 없다.
심지어 상대는 나와 시선이 맞닿았을 때 싱긋 웃기까지 했다.
─하니 오슬라의 이름으로 일개 모험가에게 감히 ‘기사’란 이름을 하사하고자 한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는 실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의 정수리에는 여우의 것처럼 세모나고 넙데데한 귀가 있다.
─제가 오슬라에 있었을 때의 일이었죠. 아, 물론 제가 낸 의견은 아닙니다. 전 그때 일개 견습기사였는 걸요. 뭐, 덕분에 실전 연습을 나갔다가 당신의 활약을 직접 눈으로 담게 됐습니다만.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뭘 봤다고?
─언젠가 볼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순간에 보게 될 줄이야. 세상 모를 일이네요.
─오슬라에서… 기사의 이름을.
─뭐, 중요한 건 아니죠? 저쪽은 절 기억도 못 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저 모험가에게 발언 자격이 있다는 의미는 될 것 같습니다?
“…애시당초 그는 이번 대악마 토벌에 참가한 자입니다. 대악마를 잡은 자가 비류호의 목을 운운하는 것은 결코 오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긴 그렇죠. 제가 괜한 참견을.
“저, 저 또한 나설 것입니다!”
“뭐냐, 비류호 사냥 얘기하는 건가? 베르세르크도 나설 거다! 호랑이 사냥한다!!”
─용사님께서도 의향을 내비치신 이상 더 말할 건 없을 것 같군요.
나는 반사적으로 껌뻑이려는 눈을 겨우 참았다. 대신 볼 안쪽을 티 안 나게 씹었다.
악마기사의 과거.
온갖 핑계를 내지르며 애써 외면하고 있던 폭탄이 대비할 틈도 없이 성큼 다가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