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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64화 (164/389)

164화 핑계를 내지른 (4)

[협약은 계속될 것이다.]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판데모니엄은 제 앞에 선 존재를 두고 빙긋 웃었다. 비록 온갖 욕설과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결코 그것을 티 내진 않았다.

[용사나 그 일당과 싸우는 것도 용인해 주지. 에드니엄에 피해만 오지 않는다면.]

여기서 얕보이는 순간, 잡아먹힌다.

저 이빨에 아직도 끼어 있는 누군가의 몸뚱이처럼.

[…제가 그네들과 싸울 일이 뭐 있겠어요.]

시발, 시발, 시발!

판데모니엄은 온갖 저열한 욕을 속으로 되새겼다.

죽어 나자빠진 레비아탄을 향한 동정?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본인이 깝치다 죽은 걸 왜 동정한단 말인가. 그들 사이에 유대감이 있던 것도 아닌데.

[그래?]

그렇지만 레비아탄, 그 머저리가 죽음으로써 벌어진 사태는 굉장히 짜증이 난다.

대악마를 죽였다며 기세등등해할 인간들과 떨어진 그들의 명예는 그렇다 쳐도, 저 망할 호랑이가 어부지리 한 것만큼은 정말 열받는단 말이다.

빌어먹을 레비아탄!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저 노린내 나는 짐승에게 이름과 영혼까지 먹힐 건 뭐야! 덕분에 저 망할 새끼만 더 강해지고!

[그거 아쉽군…….]

그 와중에 저 망할 호랑이는 만족이란 걸 모른다.

레비아탄의 이름과 영혼을 삼킴으로써 그 모든 힘을 이어받은 것도 모자라, 판데모니엄 자신까지 탐낸 것이다.

[…하하.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더는 일이 없어서.]

평소였다면 흡족스러웠을 작태나, 제 목숨이 걸려 있다면 태도는 달라진다.

판데모니엄은 속으로만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팔랑팔랑 웃었다. 다행히 저 망할 호랑이는 그 이상 억지 부리지 않았다.

[가자.]

“예.”

판데모니엄은 서둘러 제 계약자가 모는 마차에 올랐다.

곧, 말에 날개를 이식하여 만든 진귀한 괴수가 마차를 공중에 띄워 주었다.

“저것을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겁니까?”

그리고 망할 짐승이 있던 동굴과 거리가 좀 벌어졌을 때. 계약자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판데모니엄의 미간이 살풋 좁아졌다.

[당장은 상관없어. 대악마의 힘을 소화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까.]

대악마 하나분의 힘을 날로 먹은 것과 부작용은 별개다.

아무렴 대악마란 존재는 마기, 즉 부정으로 이뤄져 있지 않은가. 저 짐승들은 그런 부정과 상극이고.

정화 능력이 있고 격이 비슷하기에 타락을 면했을 뿐, 몸 안쪽까지 멀쩡하진 못할 거다.

그리고 그건 대악마의 힘을 소화하여 제 힘으로 삼기 전까지 계속 그러하겠지.

[그러니 준비해. 놈이 힘을 소화하여 안정권에 들어가기 전, 놈을 공격해야 하니까.]

“죽입니까?”

[아니. 균형을 무너트리는 정도면 족해. 마기를 정화하는 힘이 약해지는 순간, 부정에 먹혀 타락하게 될 테니까.]

하므로 판데모니엄은 응당 꼬장을 부려 주기로 했다.

대악마의 힘이 탐나서 그걸 날름 처먹었으면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지. 다소 장사치 같은 생각은 덤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전면전까진 가지 말고, 비류호가 살아남았을 때 꼬투리 잡히지 않도록. 아,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나든 시기의 계약자들은 힘을 죄 잃을 테니 놈들 영역 먹을 준비도 하고.]

“당연한 말씀을. 용사 일행은 어떻게 할까요?”

[그것들은…….]

판데모니엄은 그 질문을 두고 고민했다. 용사가 나설까? 아니, 그것들이 나섰을 때 자신에게 이익이 되나?

[못 나서도록 소문을 퍼트려.]

용사가 나선다면 레비아탄의 잔재를 전부 정화해 버릴 터. 그 강대한 힘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건 너무 아깝다.

[비류호가 죽으면 정말로 동부 전체가 메마를 것이다라고 사람들 불안을 심화하란 말이야. 언젠가 용사들이 나서야 할 상황이 오거든, 그들이 사람들에게 욕먹도록.]

그러니 그쪽에게도, 그 귀한 힘을 날릴 거라면 그만한 값을 내게 만들어야지.

“알겠습니다. 다만 아깝군요. 주인님께서 직접 취하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아니야. 말 잘했어.]

하지만, 어쩌면… 그런 식의 장난질보다, 그가 먼저 마땅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것을 빼돌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시기의 영역은 포기해. 대신 돈을 모아. 최대한 빨리, 많이!]

* * *

비류호로 추정되는 존재가 대악마의 주검을 먹었다. 그 이야기가 전해진 순간 사람들의 의견은 완전히 엇갈렸다.

‘죽여야 한다’와 ‘그랬다가 동부가 망하면 어쩔거냐’ 이 두 개로 말이다.

나? 나는 잘 모르겠다. 하는 꼬라지 보니까 일단 레이드 보스 확정 같긴 한데.

닥치고 밀어붙이자니 잡은 이후의 상황이 문제다.

나야 비류호를 잡는다고 동부가 망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 사람들은 또 다르지 않나.

그러니 뭐, 어쩔 수 있나?

동부의 도시들을 다스리는 모든 성주가 모여 회의─시간이 급하여 마법사들을 통한 화상 통화가 진행되겠지만─를 할 거라니 그걸 기다려 봐야지.

만일을 대비해 내 딴에 준비한 것도 있고.

참고로 이 기다림은 컨셉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컨셉의 성질머리가 아무리 더러워도 수십만 명의 목숨이 걸린 와중에 경거망동할 정도는 아니거든.

“어린 사냥꾼 아직도 잔다.”

“아직 몸이 다 안 나아서 그럴 겁니다. 다시 안정기에 돌입했으니 며칠 안에는 깨어날 겁니다.”

이 와중에 이놈의… 데스브링거는 아직까지 퍼질러 잔단 말이지.

중간에 한 번 깨긴 했지만 “그…….”까지 말한 후 피 토하며 다시 쓰러졌다. 그 후 내상이 다시 도져서 일주일째 깨어나지 않고 있고.

총합하면 열흘 째다. 이쯤 되면 가슴이 좀 졸아든다.

“정말인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나, 참. 왜 이렇게 안 일어나는 건지. 내가 2주씩 뻗었으니까 본인도 2주 뻗겠다 이건가? 역지사지 한번 겪어 보라는 심보?

그게 진짜라면 참 나쁜 녀석이라 생각하며 나는 호밀빵을 찢었다.

위생을 이유로 손수건을 사이에 낀 오른손이 빵을 잡고, 왼손이 빵을 뜯는 식이다. 참고로 왼손은 맨손이다.

왼팔은 손목까지만 붕대를 둘러서 장갑만 벗으면 맨살이거든.

당연히 손도 씻었다. 암, 뇌부종도 겪을 수 있는 마당에 바이러스나 세균성 감염 질환이라고 없겠나.

평소보다 더 꼼꼼히, 완벽하게 씻었다. 절대 감염 질환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비류호는 죽이는 건가?”

“그건 아직…….”

호밀빵 두 덩이에 수프 한 그릇, 샐러드 한 접시, 구운 채소 몇 토막이면 이번 한 끼 식사도 끝이다.

나는 마지막 빵 조각까지 입에 넣었다.

끼익!

동시에 문이 열렸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를 듣고 일부러 막판에 먹는 속도를 좀 올렸는데, 그 덕에 타이밍이 맞았다. 나이스다.

“아크메이지님?”

“회의 준비가 곧 끝납니다.”

중요한 회의인 만큼, 통신구를 통하는 수준이 아니라 응접실을 차려 성주들의 모습을 투영할 것이다, 뭐다 하더니만.

준비가 슬슬 다 됐나.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후, 물 한 잔과 함께 뒷말을 기다렸다.

“그럼…….”

“비류호를 적대하게 될 경우, 우리가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해당 자격으로 참가할 것입니다. 바로 준비해서 가지요.”

그렇지만 이 회의 결과가 과연 좋을까? 피해를 입지 않은 도시의 입장에선 이 모든 게 남 일처럼 느껴질 텐데?

그리고 사람은 그 어떤 불행도 자신에게 닥치지 않으면 크게 공감하질 못한다.

나는 결과가 썩 좋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 내 얼굴이 살풋 찌푸려졌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가지 않는 게 나으려나. 준비한 게 있긴 하지만, 아직 내 손에 도착하질 않았단 말이지.

만약 그것 없이 참가했다가, 컨셉이 급발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도 나오면…….

“저, 저기!”

내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누군가가 통통 달려왔다. 내가 알기론 데브를 담당하고 있는 일반인 사제─신성력이 없단 소리다─였다.

“자네는…….”

근데 저 사람이 왜 저리 급하게 달려오지. 혹시 문제라도…….

“깨어나셨어요!”

요 근래 들은 말 중 가장 기쁜 이야기가 예상치 못하게 날아왔다.

나나 일행이 당장 성으로 가야 할 상황이라 문제지.

“아, 아크메이지님.”

“…당장 시작하는 건 아니니, 얼굴 잠깐 보고 가는 것 정돈 괜찮겠지요.”

그래도 법사님이 제법 융통성 있는 사람이라 말이지.

“가자!”

“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인퀴지터와 버서커가 우당탕탕 데브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크메이지가 헛헛 웃으며 그들을 느리게 따랐다.

“자네는 안 오나?”

나도 엉겁결에 따라갔다.

“…뭐 금이라도 발견했습니까? 급하게들 들어오시게.”

“멍청하긴, 네놈이 이제 일어나서 온 것 아닌가!”

“으하핫, 늦잠 너무 오래 잤다!”

“이 정도 가지고, 뭐…….”

물론 나는 걸어서 따라갔으므로, 그 근처에 다다랐을 땐 방에서 셋이 대화 나누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선택한 단어와 달리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좋아하는 눈치라, 막 방에 들어가던 아크메이지가 살풋 웃었다.

“열흘이나 잔 게 뭐가 이 정도인가!”

“어린 사냥꾼아, 체력 좀 더 길러라. 앞으론 일찍일찍 일어나게.”

“아니, 그게 제 맘대로 됩니까. 그리고 이건 체력 문제가 아니라고요.”

아, 첨언하자면 나는 방에 들어가는 대신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별 이유는 없었다. 정이 들어서 살렸고, 아닌 척 믿고 있기에 살려 두는 중… 이란 연막까진 어떻게 받아들여졌지만, 이 이상은 캐붕의 영역이겠다 싶었을 뿐이다.

당장 아크메이지만 봐도 그렇다. 그녀는 방에 들어가기 직전, 복도에 멈춰 선 나를 보곤 ‘이해한다’란 눈을 했지 않은가.

저 사람 머릿속에서의 나는 오랫동안 유지해 온 가치관의 붕괴를 겪는 중일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유도하기도 했고.

그러니 여기서 멈추는 게 딱이다. 마음 같아선 둥가둥가라도 해 주고 싶지만, 캐릭터 빌딩은 돌 하나하나씩 쌓아 가야 안 무너진다.

“밥도 많이 먹어라. 얼굴이 반쪽이 됐다.”

“댁들이 너무 많이 먹는 거면서…….”

“우리가 많이 먹는 것과 별개로 넌 좀 먹어야 한다.”

“샌님까지 그러깁니까.”

“음, 식사를 가져오는 게 낫겠나?”

“법사 나리까지. 아니, 저 그렇게 심각합니까?”

거기에… 그, 어떻게든 뭉개서 흐지부지 넘기긴 했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데브가 내 눈치를 더 보는 것 같단 말이지.

참고로 이건 악마토벌 하러 갈 때를 참고한 거라 틀릴 수도 있다.

그런데 뭐, 아마 맞지 않을까? 데브 입장에선 자기가 먼저 공격한 전적도 있고, 내가 언제 자길 죽이려 들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 테니까…….

그러니 내가 껴 봤자 저 도탑고 정겨운 분위기마저 망가질 거다.

역시 나는 밖에 있는 게 낫다.

“뭐, 살이 좀 빠지긴 했네요.”

그사이, 본인 얼굴을 더듬기라도 한 건지 데브가 그따위의 말을 지껄였다. 좀이 아니라 많이겠지만 일단 누구도 그 말을 정정해 주진 않았다.

“…어라, 잠깐.”

“왜 그러지?”

“제 턱 왜 이럽니까?”

“무슨 문제 있나?”

“……?”

“아니, 수염이 사라졌……!”

“응?”

근데 뺨 만지다가 턱까지 만져 봤나 보네.

나는 며칠 전, 데브를 관리해 주던 사제가 데브의 수염을 죄 깎아 버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사제 딴에는 잠든 동안 삐죽 자란 줄 알고 깎아 줬던 것일 테다. 결과적으로 데브에겐 불필요한 호의였지만.

“내 수염……!!”

“다시 기르면 되지 않나.”

“으핫핫핫. 그 얘기였나?”

“겨우 기른 건데……!”

“그냥 밀고 다녀라, 어린 사냥꾼아. 어차피 안 어울렸다.”

“어울리라고 기른 건 아니거든요!?”

참고로 내가 그걸 발견한 건 수염이 이미 반쯤 밀렸을 때라 말이다…….

말리는 것도 캐붕이고 이미 반 밀린 상태에서 멈추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말았다. 모히칸 머리라면 몰라도 모히칸 수염은 뭔가 이상하잖아.

“미안하네. 그것까진 신경 못 써 줘서.”

“됐습니다요. 이미 지나간 걸…….”

그래도 수염에 한참 꽁해 있을 성격은 아니라.

“그, 죽었습니까?”

데스브링거는 화제를 돌렸다. 주어는 생략되었으나 누구의 죽음을 묻는진 알 것 같다.

“자네도 보았다시피, 대악마 모비 딕이라면 그렇게 죽었네. 그 후에 좀 골칫거리가 생기긴 했지만.”

“정말 죽었습니까?”

“그럼.”

“정말로, 죽었습니까?”

한데 이번에 반복되는 질문이 어째 의미심장하다.

못 믿어서 하는 말이면 말투가 얼떨떨해야 하는데, 데브의 말은 굉장히 경직되어 있던 탓이다.

마치 TV 퀴즈 쇼에서 PD가 “과연 정답일까요?”라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처럼.

“너, 피가……!”

“사냥꾼아, 다시 아픈가?”

거기에 거의 다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객혈을 했다는 건…….

“…다시 확인해 보지.”

결국 본인의 피해를 감수하고 데브가 힌트를 줬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도 모비 딕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힌트.

이걸 못 받아먹으면 나가 죽어야 한다.

“일단 우린 비류호에 대한 회의에 참가하러 가야 하네. 그동안 더 쉬고 있게.”

“엥, 잠깐. 그러면 저도 그냥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자네 열흘 만에 일어난 건 알고 그리 말하는 건가? 악마기사에게서 못된 것만 배우지 말게.”

그보다 지금 이 한마디, 너무 아픈 것 아닙니까, 법사님?

사람 뼈 맞았어요, 지금!! 이거 전치 4주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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