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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62화 (162/389)

162화 핑계를 내지른 (2)

번뜩.

정신이 든 순간, 반사적으로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기억의 마지막 자락이 모비 딕의 머리통에 칼을 박아 넣는 것이라 그런 것 같다. 이성이 일을 하기도 전에 본능이 먼저 주변 파악에 나섰다.

또한 그렇게 보게 된 주변은 다음과 같으니.

하얀 돌로 이뤄진 벽과 천장, 부분부분 걸린 파란색 태피스트리, 그 태피스트리에 금 자수로 새겨진 고유의 문양, 포근한 침대와 이불.

지난 모험을 토대 삼아 궁예 해 보건대, 여긴 99% 확률로 신전이었다.

스륵.

나는 좀 더 힘을 써서 일어나 보았다. 편하게 있으라고 옷 몇 겹을 벗긴 건지 붕대와 셔츠만 팔랑팔랑거렸다.

베스트와 코트는 바로 옆쪽 협탁에 고이 놓여 있었고 말이다.

음. 이거 약간 데자뷔가 드는데.

설마 이번에도 2주가 삭제된 건 아니겠지?

약간의 불안감이 들었으나 아쉽게도 날짜를 알 방도는 없었다.

다만 몸은 굉장히 무거웠고 시야는 조금 흐린 것이,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다. 어지간한 부상은 금세 낫는 걸 고려해 보면 시간이 오래 흐른 것 같진 않단 소리다.

뭐, 죽기 직전까지 갔다면야 2주가 지나도 몸이 무거울 수 있음을 타타라에서 배우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거기까지 안 갔잖아?

흰바람의 충고를 따라 자잘한 부상은 입었어도 사경 헤맬 상처는 안 입었다고?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잘 거라 여긴 건지 아주 작은 소리였다.

“…뭐냐.”

오, 목소리 완전 갈라졌는데.

“…그새 깼나?”

나는 상대가 들어오는 것에 맞춰 이불을 좀더 끌어 올렸다. 다 덮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니까 딱 오른팔만 더 가리는 수준으로 말이다.

“치료가 끝난 지 한 시간도 안 지났네. 더 쉬게.”

“대악마는, 어떻게 됐지.”

들어온 건 아크메이지라. 나는 어째 매번 아크메이지에게 사후 보고를 받는 것 같다 생각하며─싸운 건 난데, 어째서─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죽었네. 자네가 죽였지. 기억 안 나나?”

나긴 나는데, 그게 막타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아서.

그래도 죽이긴 했나 보네.

“참고로 베르세르크를 뺀 자네들 모두가 쓰러져서, 부득이하게도 신전에 돌아온 상태네.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없는 사람이 둘이라 나 또한 따라온 것이고.”

한데 버서커 빼고 기절했다는 건, 나뿐 아니라 인퀴지터랑 데브도 혼절했단 소린가.

그치만 데브는 왜? 혹시 내상이 다시 악화된 건가? 아니, 아니, 악화됐더라도 신성력으론 왜 치료 못 하는데?

대악마가 죽었으니 데브 체내의 마기 문제도 해결된 거 아니야? 아니야??

나는 데브에 대한 근심과, 버서커는 진짜 인간을 초월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으며 차분히 정보를 정리했다.

컨셉이 반응으로 내놓을 만한 행위를 고르기 위한 전 단계였다.

“아, 걱정은 말게, 자네들을 업을 세 사람과 호위할 세 사람만 뽑아 돌아왔으니. 나머진 대악마의 주검을 지키며 정화 중일 걸세. 베르세르크도 그곳에 남았지.”

하나 그 침묵을 뭐라 이해한 건지, 아크메이지가 다급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나쁘진 않았다.

버서커가 거기 남아 송장을 지킨다는 건 교대를 아직 못 했단 소리고, 교대를 못 했다는 건 시간이 그렇게 많이 안 흘렀단 소리이므로.

거기에 치료 끝난 지 한 시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따라온 거다라는 발언 등을 고려하면… 길어도 나절, 짧으면 반나절쯤 흐른 게 아닐까 싶다.

신전까지 왔는데도 달라지지 않은 아크메이지의 차림새를 더하면 더 그럴 테지. 치료에 전념하느라 갈아입지 못했단 거니까.

“내 눈으로 봐야겠다.”

그렇다면 이게 정답 아닐까? 보통이라면 ‘음, 그렇군’ 하고 넘기겠지만 이번 상대가 상대니까.

한 번만 더 확인해 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것이 컨셉엔 맞을 것이다. 몸이 좀 안 좋긴 하지만 추가 전투가 벌어질 것 같지도 않고.

벌어진다면 벌어지는 대로 문제가 생겼단 거니 뭐, 손해는 아닐 거다. 아마도.

“자네 미쳤나?”

“……?”

“아니, 말실수를. 자네, 아직도 뇌가 제대로 안 돌아가나?”

그런데 저기요. 고친 말이 그게 그거잖아요.

“자네, 아까 몸 상태가 얼마나─!”

아크메이지는 언성을 높이다 말고 손을 들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악마기사, 자네 아까 봉인구 박살 난 건 아나?”

“…뭐?”

엥.

“역시 몰랐군. 그렇다는 건 자네가 힘에 부쳐 일부러 박살 냈다는 것도 아니니, 결국 회복을 위해 또다시 본능적으로 마력을 끌어 썼다는 건데.”

아니, 아니 왜? 나 그렇게 심하게 안 다쳤는데.

“…자네, 혹시 외상만 신경 썼나?”

…혹시 몸 안쪽도 신경 썼어야 했나요?

고산병을 살짝 염려하긴 했는데, 그거 정말 뇌부종이라든가 폐부종이라든가 그쪽으로 나아가서 기어이 목숨 줄 간당간당하게 만든 거야?

“…악마기사, 사람은 말일세, 칼에 찔리거나 뼈가 부러져야만 죽진 않네. 뇌에 출혈이 생겨서 죽을 수도 있고 어떤 형편으로 심장이 갑자기 멈출 수도 있단 말일세.”

나는 깨달았다.

“이러한 상처의 경우 신성력 외엔 방도가 달리 없네. 일부 마법사들이 의사와 힘을 합쳐 외과 수술의 지평을 넓히고 있긴 하지만, 관련 분야를 전공한 마법사가 없으면 수술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태고.”

흰바람의 충고를 잘 듣긴 개뿔, 들어 놓고도 에헤헷 하고 씹어 먹은 게 이번 레이드였다.

“심지어 난 관련 지식이 없네. 이번엔 운 좋게도 치료마법이 먹혔지만, 이보다 더 심한 병증은 상대할 수 없단 말일세.”

더불어…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앞으론 내상도 신경 써야 한다!

“다행히 자네는 아직까지 그런 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네만… 이번엔 좀 위험했네. 그러니 이틀간 신전 밖으로 나갈 생각 말고 쉬게. 부디, 제발.”

근데 인간적으로 난이도 너무하잖아!

강제로 수천 미터 상공까지 올라가게 만들어 놓고 현실적인 질병 들이밀면 나보고 어쩌란 건데! 이럴 거면 나도 버서커처럼 다 씹어먹는 강골로 만들어 주든가!

“대악마는 우리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

밸런스 담당자 나와!!!

* * *

“엣취!”

베르세르크는 불침번을 서다 말고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가장 젊단 이유로 제일 고되다는 중번을 맡게 된 사제가 귀를 뻣뻣이 세우고 있었다.

“감기 걸렸나?”

“그, 그건 아닙니다.”

재채기를 한 것이 부끄러웠는가, 사제는 털 때문에 보이지도 않을 볼을 가렸다. 정작 동그란 귀가 파닥거리는 건 가려지지도 않았다.

“베르세르크는 좀 춥다.”

“아! 그, 그럼 불을 더 키우겠습니다!”

하나 그녀의 한마디에 사제는 창피함을 떨쳐 내고 얼른 장작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땔감을 먹은 불이 조금 더 커졌다. 후끈한 온기가 더 많이 퍼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 그럼 담요도…….”

“걸리적거려서 싫다.”

애초에 진짜 추운 것도 아니었다.

내뱉는 숨이 형체를 가질 수 있고 흐른 콧물도 단번에 얼어붙는 곳이 그녀의 고향인데 어찌 이곳이 춥겠는가.

“…영관에 다시 오르고 싶다.”

“예?”

“아니다.”

그 지긋지긋한 곳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고향은 고향이란 걸까. 아니면 고래를 잡으러 올라갔다가 마주한 공기가 고향과 비슷해서 향수가 든 건가.

그녀는 그런 상념과 함께 시야 한편을 가린 것을 직시했다. 거대한 머맨의 송장은 반나절이 넘게 흐른 지금도 모양새가 변한 것이 없다.

사후 경직이나 뭐 그런 걸 논하는 게 아니다. 그냥, 이상하게 ‘죽었다’란 느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살아 있다’란 느낌이냐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흠.”

신경 쓰일 때마다 몇 번이고 확인한 사체지만 그래도 다시 봐야겠다.

베르세르크는 땅에 박아 두었던 할버드를 쥐고 다시 일어섰다.

“어, 어디 가십니까?”

“확인.”

그녀는 사뿐한 걸음으로 사체 위에 올랐다. 달빛을 받아 희푸르게 빛나는 악마의 시신은 은빛 가루를 덧바른 것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그것의 체액이 광조차 돌지 않은 검정색임을 감안하면 참 차이가 심한 겉과 속이었다.

“으음.”

예쁘긴 하지만, 동시에 역겹다.

악마란 사유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악마는 의무적으로 토벌해야 할 대상이자 나름 재밌는 사냥감이지만 호불호의 영역으로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지 그래. 그것이 꼭 소복이 쌓인 눈 같아서 싫었다. 하얀 머릿결도, 검은자위에 둘러싸인 은색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베르세르크는 눈이 싫었다. 정확힌 그것으로 하여금 떠오르는 기억들이, 그것이 앗아 간 많은 것이.

눈속에 파묻혀 영원히 멈춰 있을 무수한 것이.

드륵.

“……?”

한데 한참을 그 거대한 머리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을까. 그녀는 어떤 기척을 느꼈다.

드르륵.

기분 탓이 아니었다. 베르세르크의 손이 할버드를 단단히 쥐고, 오감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그르륵.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위도 양옆도 뒤나 앞도 아닌.

“일어나라─!!!”

바로 그녀가 딛고 있는 것 아래에서.

“당장 자리를 피해!”

그녀는 할버드를 내던졌다. 콰앙! 그녀의 외침과 더불어 대지가 울리자, 잠들어 있던 이들이 퍼뜩 눈을 떴다.

“으어?”

“어엉.”

“무슨─!”

군기가 안 잡혀 있군!

베르세르크는 주검으로부터 뛰어내린 후, 아직 어리벙벙해하는 자들의 뒷덜미를 잡아 던졌다.

갑작스러운 봉변에 비명 소리가 난무했으나 효과는 탁월했다. 상황 파악이 덜 됐을지언정, 그 행위로 하여금 위기를 인지한 자들이 일단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그들이 간신히 베르세르크가 말한 지대까지 대피했을 때.

콰아앙!

“─!!”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치솟으며 대악마의 죽은 몸뚱이를 삼키기 시작했다.

* * *

나는 신전에 가둬 버린 주제에, 아크메이지 본인은 날이 밝기도 전 대악마 조사를 핑계로 홀랑 떠나 버렸다.

물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마법사란 인력은 그녀뿐이고, 이 세상엔 마법사에게만 가능한 조사도 있기 때문이다.

쨍그랑.

그러나 그녀가 떠난 후, 아침식사 자리에 나온 수프 그릇이 깨진 건 좀 문제가 아닐까 싶다.

자고로 그릇 깨짐이란 온갖 불길한 징조 및 ‘사건 들어간다, 입 벌려라’의 전조로 많이 쓰이는 클리셰지 않은가.

“헉. 안 다치셨습니까?!”

그보다 이거 진짜 왜 깨진 거야. 찬 그릇에 뜨거운 수프를 바로 담았니? 아니면 식탁에 내려 둘 때 우연찮게 고유진동 수와 외부진동 수가 일치했다거나?

“새, 새것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어쨌거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나는 사제가 서둘러 깨진 그릇과 음식을 수거해 가는 걸 보며 막 들어 올렸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사제가 총총걸음으로 식당을 나가자 이제 자리에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고독은 또 오랜만이라, 약간 떨떠름해졌다. 약간 심심하기도 하고.

“…….”

그러나 이 심심함이 다 기절한 양반들 때문이라고 사유하면 마음은 금세 심각해진다.

암, 아크메이지나 버서커야 대악마 조사를 위해 나갔다지만, 만두 두 마리의 빈자리는 그게 원인이 아니잖은가.

하나는 과하게 힘을 쓴 여파로 기절했고, 다른 하나는 내상이 도져서 혼절했다.

하물며 후자는 마기로 인해 제대로 된 치료가 어렵기까지 했다.

평소처럼 ‘아싸, 개이득’ 하며 넘길 상황이 아니란 거다.

“…후.”

그나마 인퀴지터는 애가 강건해서 곧 깨어나리란 믿음이 있는데, 데브는… 데브는 모르겠다.

걔가 배신자가 아니란 확신이야 있지만─애가 배신했다기엔 태도도 많이 껄쩍지근하고, 시시때때로 의문의 각혈도 했는데 뭘 의심해─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던 까닭이다.

당장만 해도 그렇다.

원인으로 추정되는 대악마를 해치웠는데 애가 마기를 여즉 품고 있지 않나.

데브의 진심과 별개로 무언가 강제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지거든 지금처럼 컨셉을 뭉갤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또 당사자인 데브의 심정 또한 걱정이다.

원인을 처치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았고, 몰래 줘 본 해룡의 구슬도 효과 없는 걸 보면 아마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성질이 아닌가 싶은데.

그 경우 고기만두는 얼마나 힘들겠는가.

내 컨셉처럼 극렬한 증오는 없는 듯하니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재차 속이 탔다.

안 그래도 자신의 출신이랄지 그런 걸로 인해 자존감이 낮은 애다 보니 더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일로 더 악화되면 됐지, 좋아지진 않을 게 분명해서.

툭.

나는 결국 손을 이마에 댄 채 팔을 괴었다. 머리가 아팠다.

“빌어먹을.”

머리가 아픈데, 생각이 멎질 않는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 옥상에서 데브를 처음 발견했을 때 좀 더 의심해 볼걸. 데브는 우리와 계속 함께할 수 있을까? 데브에게 생긴 골칫덩이를 우리는 해결해 줄 수 있고? 해결할 수 없다면 그때는? 등등. 온갖 물음이 계속 꼬리를 물며 뇌리를 가득 채우고 마는 거다.

그리고 그 꼬리의 끝엔 항상 내게 검을 내지르던 데스브링거의 모습이 얹어져서.

나는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해진 볼을 쓸었다.

‘데브가 우리와, 나와 함께할 생각이 있을까?’

역시, 머리가 아팠다.

탁탁탁.

아, 왜 일곱 대악마 중 하나를 죽였는데 나는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 거냐.

탁탁탁탁.

첫 단추를 이렇게 꿰매서야 나머지 여섯, 아니 다섯인가? 다섯 마리는 언제 잡고 사탄은 어떻게 잡냐고.

탁탁탁탁탁.

젠장. 승전 파티 분위기는커녕 위기만 오는 게 진짜 말이 되는…….

벌컥!

“아, 악마기사님!”

나는 손에 대고 있던 이마를 느긋이 떼었다. 그러곤 막 들어온 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악마를 감시하는 쪽에서 전령이!”

그릇 깨짐 클리셰가 기어이 일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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