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핑계를 내지른 (1)
열이 도졌다. 하늘을 쳐다보던 와중 데스브링거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자네, 괜찮나?”
“그, 괜찮습니다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몸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곤 하나, 하루 만에 나을 부상은 아니었지 않나.
그런 마당에 온종일 바람 맞아 가며 바깥을 돌아다녔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다녔을지언정 바깥 활동을 하긴 했다는 거다.
“괜찮은 안색이 아니네만. 얼굴이 붉네.”
“좀 더워서 그런가 봅니다요.”
“열이 오른 건 아니고?”
“글쎄요?”
“…이마 대게.”
“아, 아아앗.”
그러니 뭐, 상태가 악화되어도 할 말이 있겠나?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네만.”
“그건 좀… 여기서 뺄 인력이 어디 있다고 그럽니까.”
“그래서 버티겠단 소린가?
“보기만이라도, 하게 해 주십쇼.”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멀쩡했어도 도움이 안 될 몸이긴 하나, 지켜보는 것마저 못 하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거리가 너무 멀어서 보이는 게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정 마음에 걸리시면 얼음만 좀…….”
“…고집하고는.”
하므로 그는 아크메이지의 권유에도 악착같이 자리를 지켰다. 물론 회색빛 구름만 가득한 하늘이 조금 야속한 건 어쩔 수 없다.
“어, 어어어!”
한데 그러던 중, 시력이 가장 좋다는 이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에 그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을 열심히 응시했지만, 열 때문에 시야가 부연 것인지, 아니면 그냥 시력이 안 되는 것인지 딱히 보이는 건 없었다.
“점?”
“아니야, 저건…….”
“사람이 떨어진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슬슬 그의 눈에도 들어올 만큼 대상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목격된 것은 놀랍게도 부둥켜 안은 두 사람의 모습이니, 그것도 용사와 베르세르크의 신형이었다.
마법사와 사제들이 서둘러 주문을 외웠다. 그들의 안전한 착지를 위해 폭신한 빛무리와 공기층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덕분에 두 사람은 조금의 부상도 없이 땅에 내려앉았다. 물론 그들이 이미 떠안고 있던 부상은 별개였다.
“자네들, 괜찮나?”
“아, 아크메이지님.”
“베르세르크는 멀쩡하다!”
뭐라 묻기도 전에 어이가 먼저 나갔다.
베르세르크 저 양반은 온몸에 피 칠갑을 해 놓고 뭔 소릴 하는 거야.
악마의 피라고만 하기엔 곳곳에 상처가 보인다. 본인 피도 섞여 있을 것이다.
하물며 저 강건한 몸뚱이를 잘 보면, 핏줄이 살짝 도드라져 있고 눈이 충혈되기까지 했다.
인퀴지터가 옆에 있었음에도 마기침식이 진행됐단 소리다. 그 말은즉슨, 마기를 몰아낼 시간마저 부족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단 말이고.
더군다나 샌님은 파 에녹의 수성전 때보다도 더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다. 힘을 얼마나 쓴 건지 모르겠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다.
“일단 베르세르크, 자네는 약부터 어서 먹게. 그리고 인퀴지터, 인퀴지터께선…….”
그걸 아는 아크메이지와 사제들이 곧바로 베르세르크와 인퀴지터에게 달라붙었다.
베르세르크는 조금 귀찮아할지언정 거절하진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마기침식의 위험성만큼은 저 머리통에 들어가 있나 보다.
“괜찮으신 겝니까?”
“저,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은데… 아, 악마기사께서…….”
“무리하지 마시지요.”
반면 인퀴지터는 치료 자체는 순순히 받아들일지언정, 도무지 진정을 못 했으니.
“이, 이봐요. 나리는, 나리는……?”
데스브링거 역시 인퀴지터가 거론한 사람이자, 여기 있어야 하는데 없는 마지막 사람의 안부를 찾았다.
볼의 상처를 두고 사과해야 했으나 하지 못했고, 믿음에 보답해야 했으나 감사는커녕 말 한 번 걸 수 없게 된 그 기사를 찾았다.
인퀴지터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봐요, 샌님. 왜 말을─.”
“전우는 곧 내려올 거다.”
다행히도 다른 곳에서나마 답이 돌아왔다. 베르세르크였다.
“예?”
“거비 독인지 버비 독인지와 함께 내려올 거란 거다.”
맞힌 글자가 어떻게 ‘비’밖에 없나 싶지만 그게 중요하진 않고.
“왜 혼자…….”
“아, 온다.”
발판을 제공할 인퀴지터 없이 사람이 상공에 어찌 남나.
데스브링거는 그리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베르세르크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둘을 챙기느라 미처 보지 못한, 아주 거대한 것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초반만 해도 원근감에 의해 그리 티가 나지 않았으나, 조금만 시간을 들여 지켜보거든 그 크기가 어느 정도 체감이 되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피해야 합니다!”
저것이 그대로 떨어졌다간 그들을 깔아뭉갤 확률이 크다. 하여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둘 비명을 질렀다.
“아, 갈 필요 없다. 저건 저 숲에 떨어질 거다.”
그러나 베르세르크는 태연했다.
“악마기사는 멍청하지 않다.”
그 말은 사실로 밝혀졌다.
사람들의 호들갑이 무색하게, 저 거대한 생물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수백 미터는 떨어진 장소에 추락한 것이다.
물론 그 크기와 무게가 어마어마한 만큼 천지가 울리고 대지가 마구 출렁이긴 했다. 하나 생각보다 그리 큰 피해는 아니었다.
저만치 커다란 것이 떨어졌는데도 떨어진 자리 외의 숲이 초토화되거나 땅이 뒤집히진 않았으니 분명 그러할 것이다.
“대체…….”
그러나 피해는 적을지언정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결코 작지 않다.
“어서 가세.”
“정말로, 악마가?”
“저것이 그 악마란 말인가?”
“맞다. 왜 자꾸 묻나? 너희 바본가?”
“…댁이 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데스브링거는 아크메이지와 사제, 베르세르크를 따라─인퀴지터는 중도에 기절했다─생물이 낙하한 자리로 천천히 나아갔다.
몸을 장악한 열기도, 그것으로 흐려진 정신도 누군가의 생존을 봐야만 하겠다는 일념은 막지 못했다.
“대악마가… 죽었어…….”
“정말로, 대악마가……?”
“세상에…….”
“베르세르크가 잡고 싶었는데…….”
하나, 그가 추락 지점에 기어이 발을 내디뎠을 때.
데스브링거가 볼 수 있던 건 거대한 머맨─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인 악마─의 주검이었다.
정수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는 한눈에 담기도 어렵고, 엎어진 상태임에도 그 높이는 어지간한 둔덕 저리 가라 싶은 머맨 말이다.
하물며 어깨부터 골반까지 잘려 덜렁거리는.
“이게 악마의 본체……?”
“시기의 대악마는 이다지도 거대했나…….”
“지독한 마기야. 정화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겠어.”
“이걸, 정말로 세 사람이서……?”
아니, 아니다. 그가 보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다.
“나리, 나리는?”
데스브링거는 망연해지려던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열기는 이제 그의 목까치 침범하여 입안과 목구멍 내부를 바싹 말리고 있었지만, 아직 찾아야 할 게 남았다.
“전우라면 저기 있는 것 같다만.”
“그걸 왜 지금 말해요……!”
“악마기사를 찾았나?”
그런 그를 비호한 것일까. 다행히 그가 찾던 이는 금방 발견되었다.
“나리……!”
머맨의 미간에 칼을 꽂고, 그렇게 꽂은 칼에 기대 앉아 있었으니 발견 못 하는 게 더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악마기사, 자네!”
“뭐, 뭐예요. 나리 왜 반응이…….”
“엥, 저거 기절했나?”
온몸에 날카로운 상처를 달고, 입가와 코, 심지어 귓구멍에서도 피를 잔뜩 흘리고 있는 것이 썩 좋아 보이는 몰골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리!”
대악마의 시신을 오르던 데스브링거의 발이 빨라졌다.
죽었을 리 없어. 악마기사가 죽었을 리 없다. 열기에 흐물흐물 녹아내린 사고는 가장 단순한 집념만을 토해 내는 중이다.
“나리…….”
그리고 그 사체의 동산에 올라 악마기사의 바로 앞에 도달했을 때.
그는 얕게나마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을 볼 수 있었다.
살아 있다.
그 순간 긴장이 탁 풀리며 세상이 어두워졌다.
* * *
에드니엄 주변 숲에서 대악마 중 하나가 사망자 없이 토벌되는 대신, 부상자 4명 중 3명이 혼수 상태에 빠진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지는 사이.
캄버러에선 소성주의 보좌관, 요한나가 절망에 빠지는 중이었다.
그녀의 친우이자 주군인 소성주를 도울 방법이 도저히 없던 까닭이다.
“술 좀 주세요.”
하여 그녀는 일이 끝나면 종종 들르곤 하던 술집으로 쳐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술을 배에 쏟아붓지 않으면 서러워 돌아가실 것 같았다.
“어, 요한나?”
한쪽에선 도박판이, 한쪽에선 연설이, 한쪽에선 음악 공연이 열린 술집은 아주 왁자지껄했다. 바 쪽 자리가 하나 남아 있는 것이 행운일 지경이다.
“자, 매번 마시던 것.”
“고마워.”
그녀는 친한 종업원으로부터 술잔을 받았다. 시작부터 원샷이 터져 나왔다.
“한 잔 더!”
“…오늘 너무 빨리 먹는 것 아니야? 무슨 일 있어?”
매번 먹던 것을 시켰을지언정, 입에 쏟아붓는 속도가 배로 빨라지면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니.
술잔을 교체해 주던 종업원이 조심스럽게 질문해 왔다. 요한나의 억울함이 잡아당겨졌다.
쾅!
요한나는 잔을 거칠게 내려 두었다.
취기에 억울함이 더해져 벌게진 얼굴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말 못 해.”
“소성주님 일인가 보네.”
“제엔장!!”
다행히도 종업원은 금방 수긍해 주었다.
그것엔 아마, 소성주가 망할 성주와 그 부인에게 치일 때마다 제가 더 속상해하던 요한나의 전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우리 불쌍한 소성주님…….”
“하이고… 혹시 망할 둘째가 또 사고 쳤어?”
“사고는 애저녁에 쳤지…….”
“쯔쯔쯔. 그놈은 언제 철이 들란가 몰라.”
물론 요한나의 한풀이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쉬이 어림짐작해 냈을 것이다.
소성주가 성주의 눈 밖에 났다는 건 도시 주민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렴, 소성주가 어렸을 때는 시장에 같이 나와 준 적 없는 성주다. 한데 둘째한텐 하루 걸러 하루마다 함께 시장 구경을 해 주며 온갖 것을 손에 쥐여 주니.
성주 일가에 관심 없어 하는 시민들마저도 그 편애는 눈치챌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둘째의 패악질은 한 번도 지적한 적 없으면서, 소성주는 조금만 실수해도 손찌검을 한다는 사실 또한 일꾼들의 입을 통해 퍼진 지 오래였다. 소성주가 그를 두고 반항이나 불평 한번 한 적 없다는 것마저도.
그러다 보니 이 도시에 사는 사람 중 소성주를 가엽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성주는 도시 주민들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성주님도 정신을 좀 차려야 될 텐데. 어떻게 의젓한 소성주님을 두고 그런 철딱서니 없는 놈을 사랑하지? 가여운 소성주님…….”
“몰라…….”
“그 양반은 언제 은퇴한대? 소성주님이 일 더 잘하시는데, 자리나 빨리 물려줄 것이지.”
“모른다고…….”
“뭐냐, 또 소성주님이 박대받았냐? 하여간 이 멍청한 성주가! 옆 도시처럼 칼을 들어야 정신을 차리지!”
“아빠는 또 왜 나오셨… 조심하세요. 반란 소리 들으면 어쩌려고.”
“네놈이 불러도 안 오니까 나온 것 아니야! 그리고 반란 소리 나면 뭐 어쩔 건데. 옆 동네처럼 학살이라도 하겠냐, 설마?”
“…그 말 에드니엄 사람들 앞에선 절대 하지 마세요, 아빠.”
“내가 멍청이냐? 그 사람들 앞에서 이런 소리 하게.”
에드니엄. 그 단어에 요한나는 가라앉아 가던 기분이 또 한 번 울컥하는 걸 느꼈다.
에드니엄 소성주와 비류호. 그 단어가 바로 연상된 까닭이다.
“소성주님도 소성주님이야. 우리들의 권리를 위해서는 그렇게 잘 싸우는 사람이 왜 본인 일에만 물러져서는……. 저것도 가족이라고 생각해 주시는 건지.”
“그러니까요. 완전 망할 새끼들이지.”
그녀는 부자의 말을 들으며 이를 벅벅 갈았다. 우리 가여운 소성주님. 발 같은 가족 사이에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이젠 연인까지 뭔 사달이냐고. 가운데 껴서 죽은 사람들도 대체 뭔 죄고.
“어쨌거나 우린 가 본다. 너무 많이 마시진 말고.”
“그래. 네가 휴가 내면 우리 소성주님은 누가 돌보니.”
“다들 나는 안중에도 없죠? 젠장. 술 한 잔이나 더 줘요.”
“당연하지. 술 한 잔 다시 갑니다!”
요한나는 올라오는 설움과 빡침에 기어이 네 번째 잔을 비우고 다섯 번째 술을 받았다. 오늘은 그냥 마시다 죽을 작정이었다.
“빌어 처먹을 짐승 새끼 하나 못 잡아서 일을 이렇게 만들어!”
한데 그녀가 여섯 번째 잔을 비우려던 찰나, 옆쪽 테이블에서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 저 아저씨 또 시작이네.”
“…뭔데요?”
“응? 아, 그, 요즘 맹수들이 엄청 늘었잖아요. 모험가도 많이 보내고, 병사들도 당연히 보내지고.”
“…그런데요?”
“근데 저쪽, 저 노란 머리 양반 딸이 모험가라지 뭐예요. 반대쪽 양반 아들은 병사고. 문제는 둘 다 이번 사태에 나섰다가…….”
주인장과 종업원은 자리를 뜬 상태라. 그녀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에게서 들었다.
다만 손님은 끝까지 말을 잇기보다, 중도에 손짓으로 방향을 틀었다. 엄지로 목을 쓱쓱 긋는 제스처. 더 듣지 않아도 이해가 갔다.
“뭐, 인마!?”
“너희 병사 놈들이 일을 제대로 했으면 모험가들까지 동원될 일도 없잖아!”
“말 다 했냐?! 자원해서 왔다가 실력 부족으로 죽은 건 모험가들인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동시에 저들의 싸움도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짐승들이 몰려오는 원인을 알 수 없다 보니, 그나마 보이는 사람들에게 감정의 응어리를 푸는 것일 테다. 원망할 곳도 없는 건 너무 서러우니까.
“…원인은 다른 곳에 있는데.”
문제는 사태의 진범이 존재하고 또 그 존재를 벌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라.
“응?”
“빌어먹을.”
애시당초 해당 사안은 밝혀지지도 않을 예정이었다.
어차피 벌하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그냥 해프닝으로 넘겨 버리는 게 낫다는 것이 소성주와 성주의 판단이었던 탓이다.
요한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반대하지도 않았다. 주군의 뜻이 그렇다면 신하 된 도리로서 따라야 했다.
가해자의 존재를 모른 채, 피해자들끼리 손톱을 세우는 비참한 광경을 눈앞에 두더라도 말이다.
“시끄럽게, 뭐 하는 짓이야?”
“시발.”
“야, 다 치워. 더럽게시리.”
그런데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은 또 왜 와.
요한나는 본능적으로 술을 뱉을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소성주를 모시는 사람이 소성주의 동생에게 무례를 범하는 건 모양새가 영 그렇지 않은가. 설사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이더라도 말이다.
“이거 놔!”
술에 혹은 원망에 취해 싸우던 이들이 병사들에 의해 제압당했다. 난투극으로 신고 들어간 건 아니기에 딱 옴짝달싹 못 하게만 잡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게 정말 좋은 전개인지는 잘 모르겠지마는.
“미치겠네, 여기까지…….”
별개로 아까부터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목소리가 하나 있었으니.
요한나는 제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던 손님이 인상을 와락 구기고 있었다. 손님의 시선은 막 가게에 들어오던 둘째에게 닿아 있다.
“아, 찾았다.”
심지어 둘째 도련놈은 그녀의 옆자리 손님을 보며 화색을 했다. 아는 사이인가 했다. 보고받은 적은 없지만.
“이봐, 모험가. 호위 의뢰를 왜 거절했지?”
“낮에 뵈었을 때 일정 문제로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 않나요? 지정 고용을 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아, 왜 그녀가 몰랐는지 알겠다. 그냥 오늘 새롭게 수작 거는 거였다.
요한나는 성과 도시 내 여자들로도 모자라 모험가에게까지 손을 뻗는 파렴치한을 보며 속으로 연신 욕을 지껄였다.
성주의 둘째 아들의 등장에 조용해진 사위도 그녀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지정 고용까지 했는데 왜 안 되는데!”
“저, 도련님.”
나서기 싫지만, 말도 섞기 싫지만 그래도 성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녀다. 직속상관은 아닐지언정 둘째 도련님도 멀리 보면 모시는 사람이고.
하여 요한나는 억지를 막고자 나섰다. 그녀의 개입에 둘째의 눈썹이 휙 들어 올려졌다.
“너는 왜─!”
“이 개자식아!”
문득, 안줏거리로 나오는 콩 줄기가 그런 둘째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나도 모르게 저질러 버렸나? 다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보인다.
요한나가 저도 모르게 본인 손을 본 것처럼.
“도련님!”
“뭐, 뭐야! 어떤 새끼가─!”
“잘 만났다, 이 자식! 네놈도 문제야! 네놈들이 소성주 견제하겠답시고 별 헛짓거리 하며 병사를 낭비하지만 않았어도 내 딸은 안 죽었어!”
“뭐?!”
“네놈들이 내 딸이 죽였다고!!”
다행히 요한나의 손이 그녀 모르게 일을 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태가 좋게 돌아가느냐면 그건 아니지만.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죽어, 죽으라고! 도움도 안 되는 새끼야!! 죽어!!”
“막, 막아!”
“미친놈아!”
모험가 딸이 괜히 나온 건 아닌 모양이다.
모험가 딸을 잃었다던 사내가 자기를 억누르던 병사들을 뿌리치고 둘째의 멱을 쥔 것이다.
호위랍시고 있던 놈들은 반응조차 못 했다.
“아, 안 돼요!”
요한나는 저 호위를 다 잘라 버릴 거란 다짐을 함과 동시에 탄식을 흘렸다.
이건 이제 덮을 수 없다. 저 머저리는 본인이 입은 피해만 떠올리며 반드시 이 사람을 벌할 것이다.
“이, 미친, 미친놈이─!”
“같이 죽자,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
“그놈의 소성주, 소성주! 그년이 나섰으면 뭐 됐을 것 같아!? 호랑이 새끼가 나선 일에 그년이라고 뭐 해냈을 것 같냐고!!”
벌할 건데.
“뭔……!”
“머저리들! 네놈들 자식 새끼는 소성주 어미가 살아 돌아와도 못 구해! 네놈들이 떠받드는 비류호 그 금수 새끼가 죽인 거니까─!”
“도련님!!”
저 미친놈이 저건 또 어떻게 알고 입을 털어!
요한나는 조금 남아 있던 취기마저 전부 날아가는 걸 느꼈다.
“비류호……?”
“그 이름이 왜 나와?”
이것도 이제 못 덮는다. 소성주가 본인들의 권리를 누리라 누리라 외치는 바람에, 알아서 제 권리를 찾아 먹게 된 주민들은 절대 그들 뒤에 의문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