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흘러가지 않는다며 (10)
입안에서 폭발이 일면 보통 죽는다. 그러나 상대는 대악마, 그런 뻔한 결말을 기대할 수는 없을 터.
그런 이유에서 나는 연무가 자욱이 피어난 상황을 두고도 다음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대비’의 형상은 어떤 상황이 들이닥치든 반격할 수 있도록 마력을 검에 끌어모으는 것이 되었다.
부우우우우!
[빌어먹을 인간이!!]
‘질기기 짝이 없는 새끼.’
거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대로 가면 대악마 이름이 울 텐데 쟤가 그냥 죽어 주겠냐고.
물론 나야 모비 딕이 그냥 울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나 대악마가 내 바람을 순순히 들어줄 리 있나.
모비 딕은 기어이 연무 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범위가 너무 넓어서 인지했을 때는 피할 수도 없었다.
“커헉!”
뒤편에서 김치만두 피 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래가 상승하며 몇십 겹의 장막을 깨 버린 게 원인일 테다.
하지만 내 코가 석 자라고. 나는 김치만두를 걱정할 처지가 못 되었다.
장막이 깨지며, 내 아래에 있는 건 이제 희박한 공기와 그보다 더 아래에 있는 모비 딕의 입안뿐이게 된 까닭이다.
“악마기사!”
[통째로 삼켜 소화해 주마!]
내 몸이 아래로 낙하했다.
“쯧.”
그래도 당하고만 있을 순 없다. 애초에 그래서 모은 마력이고.
‘베어 버려.’
하므로 나는 미리 그러모았던 마력을 더없이 좁고 세밀한 검격으로 사출했다.
서걱! 천공에 심해를 띄웠던 고래를, 검은 반월의 검기가 그대로 휩쓸고 지나갔다. 비록 그게 정말일지, 아니면 조금만 베고 끝난 것인지는 아직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펄럭!
각설하고 나는 그렇게 고래를 벤 후, 그 거대한 입에 삼켜졌다.
아, 목구멍 너머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입구도 열려 있으니 삼켜졌다까진 아니려나?
그래도 내게 썩 좋은 상황이 아니란 건 매한가지다. 베었다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검격은 별 효력 없던 것인지 잘리는 효과도 없고, 여전히 나는 추락 중이고 하니 말이다.
그래도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나는 마지막 발악으로 돌기 하나 없이 매끄럽고 축축한 고래의 혀에 칼을 박았다.
그러나 내 몸무게 때문인지 살점이 너무 물러서인지, 칼날은 박혀서 고정되기보다 살갗을 가르며 쭈욱 내려갔다.
하물며 고래의 크기가 너무 커서 입천장과 혀 사이에 껴서 멈추는 방법도 쓸 수 없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발이 안 닿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나는 저 심연 같은 목구멍에 속절없이 빠져야만 하는가?
안에 들어가도 살점을 열심히 파내면 모비 딕을 괴롭힐 수 있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바깥에서 괴롭히는 게 좋은데. 그 후 4천 미터 상공 다이빙도 좀 걱정되고.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꼴이다.
나는 이 상황에 절망하기보다, 대악마가 아주 괴로워 돌아가시도록 살점을 마구 헤집어 줄 것을 다짐하며 목구멍 너머로 굴러떨어졌다.
보글보글.
문득, 아까 쏘아 보냈던 검격이 영향을 발휘하며 빈틈을 만들어 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양옆으로 밝은 회색빛 선이 그어지더니 쩌억 갈라지며 그 틈을 더욱 벌렸다.
[네, 네놈이 기어코.]
동시에 사방이 끓는 물처럼 기포를 마구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것이 물로 변할 것처럼 말이다.
내장도 뼈도 살점도, 전부.
[기어코 나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허공에 녹아드는 물방울로 화한 찰나, 어둡기 그지없었던 사방에 빛이 스며들며 하늘이 보였다.
“악마기사!”
“흐하핫, 전우야. 잡았다!”
그다음으론 내 몸이 덜컥 무언가에게 껴안겼다.
당황해서 벨 뻔했지만 백금색이 가장 먼저 보인 덕에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버서커의 팔뚝이 내 몸을 단단히 붙잡고, 이어 버서커의 등에 매달려 있던 인퀴지터가 빛을 뿜었다.
텅!
우리들 몸이 갑자기 생긴 신성력의 장막 위를 굴렀다.
버서커가 타이밍 좋게 놔준지라 버서커(체격상 100kg 넘어 보임)와 인퀴지터(갑옷 무게 더하면 100kg는 찍고도 남음)에게 깔리는 일만큼은 면했다.
살았다.
“서, 성공했습니다. 베르세르크!”
“거봐라!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사제야!”
나는 버서커와 인퀴지터의 바로 옆쪽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십 미터를 추락하다가 평평하기 그지없는 신성력막에 갑자기 충돌한 꼴이라 삭신이 쑤셨다. 뇌진탕 안 온 게 다행이다.
그래도 목숨 건진 건 건진 거니까. 나는 군소리 없이 사방을 살폈다.
일단 그놈, 그 망할 모비 딕이 어떻게 됐는지부터 찾아야 했다.
“악마는…….”
그런데 이놈이 대체 어딜 갔지?
나는 급속도로 몰려드는 구름과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사방에 튀기는 정전기의 존재를 인지한 채 모비 딕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거대한 고래의 형상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강해졌습니다.”
“폭풍인가?”
다만 버서커의 말마따나 폭풍이 오려는 것 같았다. 장막이 발판이라 무기를 차마 박을 수도, 붙잡고 버틸 무언가도 없는 이곳에 말이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얼어붙은 상태 그대로 미친 듯이 펄럭였다. 깨작깨작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래. 용사와 네놈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 여유를 두려던 판단이야말로 나의 실수다.]
그러던 차, 몰려오는 먹구름 속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빗방울이 툭, 툭 우리의 뺨과 몸을 때렸다. 높이가 높이인지라 얼음 알갱이에 더 가까운 건 뭐, 대충 넘기도록 하자.
[하니 이제는 정말 봐주지 않겠다.]
그러나 서서히 모이던 풍운이 결국 우리의 머리 위를 덮은 건 경시할 수 없는 일이다.
먹색 구름 속에서 인어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로 인해 인어가 있는 구름 무더기는 꼭 뒤집어진 바다처럼 보인다.
[절대로, 혼자 죽진 않겠다.]
와중에 지느러미와 장식용 천을 나부끼던 인어가 선언했다. 내 머리통 크기의 두 배쯤 될 눈동자는 우리를 명확히 직시하고 있다.
검은자위 속 은색 눈동자가 뱀처럼 요사스럽게 빛났다.
내 목구멍 사이로 침음이 절로 삼켜졌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 보겠다.]
와, 나. 저게 모습을 바꾼 모비 딕이란 거지? 모습이 변했다는 건 2페이즈 내지 3페이즈쯤 돌입했다는 거고?
근데 ‘캐디 진짜 잘했네’라고 칭찬하기엔 좀 크지 않나? 그 몸보다 더 큰 창을 던질 것처럼 구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죽어라.]
하물며 저 창은 던져진 순간 벼락마저 둘렀으니.
우리가 있는 자리로 천천히 낙하하는 창은 외관만 보면 신의 심판이 따로 없었다.
“악마 새끼가…….”
“길을 내겠습니다!”
어쨌거나 저것을 피하긴 피해야 한다. 더불어 피할 길은 단 하나, 저 범위 바깥으로 달리는 것뿐이고.
하여 인퀴지터가 서둘러 한쪽 방향으로 장막을 확장했다. 실전이 최고의 훈련이라고, 신성력 막 다루는 솜씨가 아주 쑥쑥 느는 것 같다.
그러나 예전부터 그래 왔듯, 인퀴지터는 속도로 싸우는 사람이 아니다. 창의 강하 속도가 아무리 늦더라도 그녀의 걸음걸이로는 아슬아슬하단 소리다.
“크핫, 달리자!”
“저, 저도 달릴 수 있습니다!”
“사제는 너무 느리다!”
“……!”
하여 버서커가 그녀를 둘러멘 채 달렸고, 나는 앞장섰다.
크르륵.
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해의 괴물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인퀴지터가 장막을 치지 않은 구석에서도 그랬다.
그것들은 장막이 없더라도 우리 바로 아래에 깔린 운무를 대신 밟았다. 아니, 그곳을 헤엄쳤다.
그러곤 장막의 길을 노리거나 그 위로 올라가 우리들을 노렸다.
귀찮기 짝이 없었다.
“잡것들이 유난이구나!”
“버러지들이…….”
나는 뒤쪽의 몬스터들은 버서커에게 맡긴 후─한쪽에 풀 플레이트와 대형 방패를 낀 사람을 들고 다른 쪽으론 할버드를 붕붕 휘두르는 근력은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건지 싶다만─마력창을 난사했다.
피통 큰 보스들에게나 안 통하지, 이런 잡몹들에겐 유용한 공격이 마력창이라 순식간에 몇십 마리가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우리가 드디어 창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생각했을 때, 창이 아래쪽 연무에 그대로 꽂혀 들어 갔다.
무른 크림처럼 밀려난 구름이 곧 번개를 쫘르르 머금으며 빛을 번쩍번쩍 뿜었다. 뇌성이 쿠릉쿠릉 울려 퍼졌다.
“컥.”
그러나 그것은 비단 시각적 효과로만 그치지 않았다.
천둥이 사방으로 요란하게 퍼질 때, 운무 바로 위에 있던 장막도 후려치고 간 것이다.
인퀴지터가 힘내 준 덕에 간신히 깨지는 건 피했다. 그렇지만 본인이 타격 입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김치만두가 또 한 번 각혈했다. 주르륵. 쟤가 코피 흘리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콰가가각!
함에도 우린 아직 쉴 때가 아니었다. 모비 딕은 정말 작정하고 우리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또 한 번 창을 내던진 것도 모자라 유도 기능을 탑재한 물의 뱀과 얼음 기둥까치 추가하여 우리의 대피를 방해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를 타격할 방도가 없다는 점이라.
본체를 공격하고 싶어도 너무 높고, 내가 무리해서 마력포를 쏴 대도 공격이 닿을라치면 위의 구름 바다에 숨어 버린다.
그렇다고 본인이 아래에 내려와서 공격할 타이밍을 주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보스 새끼가 진짜 일방적으로 공격만 하고 우리 턴은 안 내주는 거다.
“잡졸만 보내다니, 비겁하기 짝이 없군! 본인이 내려와 당당히 맞서 싸워라!”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먼저 맞이한 건 버서커였다.
그녀는 할버드로 무수히 많은 잡졸의 머리를 쪼개 버린 후, 그들의 핏물로 몸을 적신 채 외쳤다.
인퀴지터? 초반만 해도 어찌저찌 메이스를 들고 싸우던 이는 이제 한곳에 주저앉아 있다. 계속된 공격에 발판을 유지하고, 때때로 들이닥치는 강풍으로부터 우릴 보호하는 데만 해도 벅차게 된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버티면 돼.’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것이,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말라 죽는 것이 우리의 미래일 리 없다는 사고를 거치는 중이었다.
아무렴 근거 없는 생각도 아니었다. 이렇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보스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모든 건 약점이 있다. 그러므로 저 보스 또한 약점이 있을 거다.
단지 그게, 공격으로 공략해야만 하는 방식이 아닐 뿐이지.
‘버티기만 하면.’
서걱!
나는 갈수록 격렬해지는 공세를 모조리 분쇄하며 검을 잡았다.
미처 쳐 내지 못하고 박살 내지 못한 공격들에 의해 몸은 다소 너덜너덜해진 상황이지만, 큰 부상은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놈은 스스로 죽는다.’
“네놈.”
방금 쳐 낸 공격이, 아까 쳐 낸 공격보다 약하다는 감각이 들었거든.
“이젠 그 창조차 들 힘이 없나 보지.”
[…죽어!]
역시 너 이 자식, 마나통에 한계가 있구나?
[한낱 그릇 따위가!!]
나는 고개를 내민 모비 딕을 보며 입꼬리를 최대한 열 뻗칠 형태로 끌어올렸다.
머릿속으론 저놈의 공략법을 완전히 글자화 하는 중이다.
“발악해 봐라, 버러지. 네 뜻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일은 영원히 없을 터이니.”
[…분노!!!]
공격 턴이 아예 안 돌아올 때부터 반쯤 직감했지만, 저놈은 죽이는 보스가 아니었다. 일정 시간 버티기만 하면 알아서 자멸하는 보스지.
아까 전만 해도 ‘봉인구를 박살 낼까 말까’ 내지 ‘이거 진짜 개쌉에바 무리인데요’란 생각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는데, 지금은 또 ‘할 만하다’란 판단이 든 것부터가 그 증거다.
놈은 슬슬 힘에 부치고 있다.
“악마기사, 저는…….”
“버텨라.”
“…네!”
변수가 있다면 그건 인퀴지터의 체력인데.
나는 피조차 정화하는 신성력의 물결과, 그 속에 파묻힌 김치만두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대신할 수 있다면 대신했을 텐데.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서 무리시킬 수밖에 없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너만큼은, 너만큼은 데려가고 말겠다!]
그러므로 최소한 저놈의 수급만큼은 가져다줘야겠다.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바다를 빠져나와 창째로 내게 돌진해 오는 모비 딕을 보았다. 그건 마치 유성이 내게 달려드는 것 같았다.
“하, 드디어……!”
“어떻게든……!”
그래도 피하지 않는다. 피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머저리.”
“예?”
“나 부른 건가?”
“뛰어내려라.”
나는 투헨더를 곧게 붙잡았다.
“방해다.”
더불어 어떻게든 아끼고 아껴, 지금까지 남겨 온 마력 중 딱 절반을 다리에 불어넣었다. 신체를 강화하다 못해, 흘러넘치고 만 검은 기운이 마치 불꽃처럼 넘실거렸다.
“너는 정말 나쁜 놈이다.”
“악마기사, 그게 무슨…….”
“혼자 재밌는 사냥감 다 독차지한다.”
“예?”
“내려가면 나랑 대련 한 판 더 해야 한다.”
고도 4천 미터의 찬 공기도 얼리지 못할 불꽃이었다.
“베르세르크, 저는 대화를 따라갈 수가─.”
“간다!”
“와악!”
그리고 버서커가 인퀴지터를 덥석 들고 그대로 뛰어내렸을 때, 그 순간에야말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장막이 사라지기 직전, 온 힘을 다해 그 발판을 박찼다.
“검을 맞대 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버러지.”
[……!]
내 몸이 아슬아슬하게 모비 딕의 창을 비껴 나가 그 창날의 면을 밟았다.
거대하다는 것은 이토록 세밀하지 못하다.
“베어 주마.”
물론 작다는 건 작다는 것 나름의 페널티가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불굴의 정신 발동!」
남은 마력을 쏟아붓는 걸 넘어, 남은 HP마저 모조리 변환하여 더욱 끌어모은 마력의 칼날이 창천을 갈랐다.
검은 달이 하늘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