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흘러가지 않는다며 (9)
위쪽까지 오르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우리가 한 번 점프할 때마다 대략 20m쯤 뛰는 듯했는데, 그걸 2백여 번 반복하니 금방 동등한 고도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 주제에……!]
하면 단순 계산으론 4천m 어림의 상공일까.
에베레스트산 정상 고도가 8천8백쯤인 걸 고려하면 인간이 간다고 죽을 높이는 아니었다.
“드디어,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발판을 넓히겠습니다!”
[잔재주로 감히 하늘에 올라!]
물론 중간중간 이는 강한 바람이나 희박한 산소로 인해 도진 고산증,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등이 우리를 덮치긴 했다.
그러나 인퀴지터는 신성력으로 어떻게든 때웠고, 나는 이 악물고 버텼다.
고산병의 경우 결국 기압 문제니까, 마력을 몸에 둘둘 두르면 마력이 방어막 효과를 하지 않을까. 뭐 그런 논리로 시도해 본 일도 나름 영향이 있던 것 같다.
체온 유지는 아크메이지가 준 약을 먹으니까 어떻게든 바닥 치는 건 막았고.
“으하하! 드디어 그 비싼 얼굴을 보는구나!”
버서커는… 버서커는 나도 모르겠다. 저게 바로 ‘괜찮아! 튕겨 냈다!’의 표본인가? 아니, 애초에 인간이긴 해?
기압도 기압이지만 숨조차 얼어붙는 기온을 두고 옷 한 장으로 버티게.
나랑 같이 약을 먹었다지만 그래도 좀 미친 것 같다. 나는 우주 법칙을 외면하는 이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싶어졌으나 참았다.
대신 1평 남짓에서 수십 제곱미터로 늘어난 신성력의 표면을 밟았다.
희미한 금빛 장막 아래론 수천 미터 아래의 대지가 보였으나, 그게 또 비현실적이어서 꼭 CG처럼 느껴졌다.
하물며 우리 바로 앞에는 구름을 비단처럼 두른 고래가 있었으니.
하얀 배는 평범한 고래의 것이지만 위쪽 거죽은 파도로 이뤄져 있다. 파도 속에는 빛 알갱이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 밤하늘을 보는 것 같기도, 심해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상대가 대악마임을 몰랐다면 신화적 존재겠거니 숭배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였단 말이다.
[다시 떨어트려 주마!]
부우우우!
그때 모비 딕이 울었다. 벌어진 입안은 고아한 겉모양과 달리 먹을 베어 문 것처럼 시꺼멓다. 그가 악이라는 마지막 증명이었다.
“옵니다!”
와중에 놈은 도망치지 않았다. 애초에 행동하는 걸 보면 본체 자체가 굼떠서─덩치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도망을 선택지로 못 두는 것 같지만 말이다.
“흐핫! 같은 땅을 밟았다면 거리낄 것 없지!”
“만일을 대비해 1m마다 몇 개의 발판을 더 만들어 두겠습니다!”
그러나 이젠 억지로 막을 필요 없다.
버서커는 수평을 전부 휩쓸 것처럼 쏟아져 오는 물 속성 비이임을 그대로 점프해서 피했다.
반면, 나는 방패를 치켜세우는 인퀴지터의 뒷목을 왼손으로 잡았다.
어차피 물기둥의 두께 때문에 가장 위쪽 발판─지금 밟고 있는 것─은 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1m 아래에는 새로운 발판이, 2m, 3m 아래에도 발판이 더 있다.
쨍그랑!
나는 딛고 있던 발판이 깨짐과 동시에 내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두 번째 막이 발에 닿았을 때, 그건 내가 직접 발을 굴러 깼다.
“왜…….”
몸이 한층 더 내려갔다. 하면 이제 몸만 좀 낮춰도 물줄기를 피할 수 있다.
퍼엉!
“이런 수가……!”
나는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지나는 물기둥을 느끼며 인퀴지터의 머리를 억누르던 손을 떼었다.
김치만두가 버서커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머리를 들 리 없다는 믿음이었다.
당연하게도 인퀴지터는 그 믿음에 보답했고, 우린 편하게 공격을 피했다. 보통의 게임처럼 공간이 딱 제한되어 있지 않아서 사용할 수 있는 꼼수였다.
콰가가각!
어쨌거나 전방을 부채꼴로 휩쓸던 빔은 이제 나를 지나갔다. 하면 이제 딜 타이밍이지.
나는 막에 오르자마자 돌진하듯 앞으로 뛰쳐나갔다. 버서커도 물기둥을 잘 피했는지 저편에서 고래에게 달려드는 게 보인다.
“죽어라.”
나는 혹여라도 밟고 있는 막을 치지 않게 조심해 가며 검을 휘둘렀다.
보통 게임이면 뒤로 피하는 꼼수는 못 써도 발판이 박살 날 걱정은 안 했을 텐데. 약간의 설움은 덤이다.
서걱!
그래도 딜은 딜이지. 나는 본래 하나만 새겨졌어야 할 검흔이 세 개로 불어난 걸 보며 나름 흡족해졌다.
없이도 해결이 되는 일이 많아 안 썼던, 그러나 레이드임을 고려해─레이드 보스는 피통이 어마어마한 편이니까─활성화한 ‘세 개의 발톱’ 스킬 효과였다.
부우우우!
공격이 세 개면 대미지도 3배! 거기에 버서커 딜까지 더해졌다.
모비 딕이 몸을 비틀며 울었다. 허공에 물방울이 모여들더니 순식간에 얼어붙어 우리에게 쏘아졌다. 그중 일부는 얼어붙는 대신 뱀의 형상을 띠며 유도로 나를 쫓아오기도 했다.
챙, 채채챙!
그 때문에 고래 위로 뛰어오르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나는 하필 안 좋은 타이밍에 쏟아진 얼음덩이를 깨부수고 물로 이뤄진 뱀을 분해해 주었다.
이 순간에도 우리가 딛고 있는 발판은 인퀴지터의 힘으로 인해 몇십 겹이 겹쳐진, 아주 단단한 표면이 되어 가고 있다.
그래도 바닥에 타격 가서 좋을 건 없지.
나는 쏟아지는 공격들 전부를 박살 낸 후 또 한 번 검격을 쏟아 냈다. 근접할수록 마력도 덜 들고 위력도 세지기 때문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채다.
쿵쿵!
다만 딜&탱이 너무 다가오거든 근접 공격 하는 게 국룰이라고, 너무 접근하자 모비 딕이 몸부림을 치며 우리를 뭉개려 들었다. 그 비대한 살집으로 우리를 깔아 버릴 것처럼 군 것이다.
엉겁결에 얻어맞은 발판─어쩌면 노림수일지도 모른다. 발판이 부서지면 우리 모두 추락사하니까─이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깨지려 들었지만 인퀴지터는 버텨 냈다.
나와 버서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발버둥을 피해 그 하얀 살을 베고 양옆에 달린 지느러미들을 잘랐다.
안타깝게도 추락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얘가 떠 있는 원리는 다른 것에 있나 보다.
[인간 따위가!]
한데 왜 인외 보스들은 할 수 있는 말이 ‘인간 따위’ 혹은 ‘인간 주제에’, ‘감히 인간이’밖에 없을까.
아, 악마를 버러지로 취급하면서 매번 승리를 자신하는 내 컨셉이 할 말은 아닌가?
‘치졸한 잡쓰레기 놈이.’
나는 잡념을 치우며 뒤로 물러났다가, 놈이 멈추는 타이밍에 검을 재차 휘둘렀다.
아래서부터 위로. 입가부터 눈까지 그대로 베인 고래가 몸을 파드득 뒤로 물렸다. 까만 마기가 잔향처럼 남았다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당해 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그러나 곧 죽어도 대악마라고,─굳이 그래 줄 필요 없는데도─그것은 계속해서 처맞는 대신 새로운 패턴을 내보였다.
제 몸체를 구성하던 물의 비늘들을 구름과 함께 내보낸 거다.
콰과과과강!
3m짜리 파도가 빛의 막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점프라거나 달리기 등으로 피할 공간조차 내주지 않았다. 보통 게임이었으면 무적기나 탱커 뒤에 숨어서 보내야 하는 기믹인 셈이다.
“우왁!”
모든 패턴 쌩까고 신나게 전열에서 고래를 두드려 패던 버서커가 가장 먼저 휘말렸다.
“멍청한.”
반면 나는 게이머 짬밥으로 하여금 어떻게든 물결에 휘말리는 건 면했다. 눈치껏 동작을 보고 발을 뺀 덕이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기만 하면 결국 벼랑이다. 후방으로 달리던 내 미간이 보이지 않는 돌파구 앞에 눈살을 여몄다.
“모이십시오!”
다행히 해결법은 뒤편에 있던 인퀴지터에게서 나왔다. 격랑을 목격한 김치만두가 반구형 방어막으로 대피소를 형성한 것이다.
바닥에 몇 겹의 장막을 고정한 상태라 여유가 난 건지, 아니면 무리해서라도 도망칠 공간을 만들어 준 건지.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나 당장 피할 곳이 생겼다면 그걸로 다행이다.
나는 밀물을 꼬리처럼 매단 채 슬라이딩하듯 인퀴지터의 방어막 안에 들어갔다.
HP가 쭈욱 깎이는 걸 보니 이게 대피소에 들어온 건지 공격을 처맞은 건지 헷갈리지만 그래도 이게 덜 아플 거다, 아마도.
철썩!
한편 파도가 방어막에 닿자 수증기 비슷한 것을 피워 올렸다. 자세히 보면 방어막 표면은 끝없이 금이 가고 수복되기를 반복 중임을 알 수 있다.
기도하는 인퀴지터의 표정이 더욱 결연해졌다.
꽈르르륵.
“머저리처럼 굴지 마라.”
와중에 버서커, 결국 살긴 사는구만.
나는 물살에 휩쓸리는 순간에도 기어코 이쪽으로 방향을 튼 이에게 경탄을 보내며, 방어막 바깥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버서커의 멱살을 그대로 잡아 대피소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푸하! 살았다!”
그냥 파도는 아닌지, 잠깐 밖으로 손 내뻗었다고 옷깃이 찢기고 잔상처가 새겨졌다. 버서커도 비슷했다. 그녀의 피부에는 하얗고 붉은 상처가 자잘하게 나 있다.
피와 물이 섞여 금빛 막 위에 떨어졌다.
“으하하!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그래도 살아 있으면 그걸로 됐다. 무릎을 꿇고 강렬한 빛과 함께 기도를 올리던 인퀴지터가 살풋 웃었다.
바닥을 이루는 장막에 방어막까지. 이 싸움판이 성립될 수 있는 조건을 전부 부담하고 있어서인가. 그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가 삽시간에 메말랐다.
[가라!]
그러나 격랑이 한차례 우리를 지나치고 간 후에도 우리는 여유를 누릴 수 없었다.
인퀴지터가 마기에 할퀴어져 깨지기 직전인 바닥을 가다듬는 사이. 그리고 우리가 자세를 정비하여 다시 고래에게 근접하려던 순간에 모비 딕이 한 행동 때문이었다.
부글부글부글.
심해를 갖다 둔 것 같던 위쪽 거죽이 끓더니 무언가를 토해 냈다.
그것은 별이었고 또 그림자였다. 악이었다.
크르르르.
빛이라 생각했던 허연 눈동자들이 우리를 맹렬히 직시하기 시작했다.
“하, 잡졸인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버러지가.”
아, 미친. 쫄 패턴 에반데.
나는 하늘고래의 등짝에서 치솟는 괴물들을 보며 검을 다잡았다.
어디 해양 생물 품에서 나온 것 아니랄까 봐, 다들 바다 생물을 베이스로 한 크리처다.
문어, 뱀, 머맨, 악어, 게, 물개 등의 생물을 기기괴괴하게 변형했단 소리다.
그러나 생김새만이 문제가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을 보며 이게 몇 마리 나오고 끝일지, 아니면 전투의 끝까지 나올지 고민해 보았다.
전자라면 한 번에 쓸어버리면 되고, 후자라면 마력과 체력을 더욱 배분해 가며 싸워야 한다.
[놈들을 죽여!]
“잔챙이들은 재미없다! 다 치워 버리기 전에 꺼져라!”
하나 이건 좀 더 두고 봐야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놈들이 바닥을 깨려 합니다!”
반대로 놈들을 지금 죽여야 한다는 건 명명백백했고.
“너, 버틸 수 있나.”
“…네!”
녀석들이 바닥을 깨려 들고 있긴 하지만 인퀴지터가 버틸 수 있다고 했으니 마력은 좀 더 아끼자.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해서 나는 당장 검격을 쏟아 양단해 버리기보다, 투헨더를 제대로 붙잡는 걸 택했다.
그 후, 내 칼이 가장 먼저 다가온 뱀의 머리를 베고, 그 피를 뒤집어써 가며 절단된 목을 밟고 너머로 뛰었다.
이어 보이는 머맨은 허공에 뜬 몸을 회전하는 것으로 피했다.
목을 박찰 때의 힘을 이용해 다리를 위로, 머리를 아래로 하면 달라진 표면적으로 인해 머맨의 창은 저를 빗나가기 딱 좋았다.
촤악.
그렇게 창을 피한 몸은 머맨의 뒤편에 착지했으니.
나는 머맨의 물고기 꼬리를 밟아 선 채, 미처 몸을 다 돌리지 못한 머맨의 등을 찔렀다. 투헨더의 길쭉한 칼날이 등부터 가슴팍 사이를 정확히 관통했다.
그다음으로는 투헨더에 마력을 조금 담아 절삭력을 높였다.
그러곤 칼날을 뽑는 대신, 머맨의 피육을 갈라 원을 그리듯 꺼냈다. 드드득 소리와 함께 살점과 피를 튀기며 나온 칼날이 막 나를 덮치려던 또 다른 괴물을 베었다.
콰지직!
꽃게를 닮은 생물의 외골격이 박살 나고, 그 안의 살과 내장이 마구 튀었다.
나는 손등으로 핏물을 닦아 내며 검을 추슬렀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번에 내 길을 막는 건 여덟 개의 다리를 종횡무진 휘두르는 문어형 괴물이다.
여덟 개의 다리를 전부 예측하며 피하는 건 다소 귀찮다. 나는 오랜만에 스킬 ‘생존본능’을 발동해 가장 효율적인 길을 확인했다.
스팅거. 랜스처럼 앞으로 선 칼날이 생존본능과 결합하여 여덟 개의 다리를 피하고 문어의 미간에 박혀 들어 갔다.
연이어 달려드는 악어는 투헨더를 바닥에 버린 후, 발로 아래턱을 밟고 위턱은 팔로 잡아 버텼다. 이어 서둘러 뽑은 장검으로 위턱을 가로로 잘라 주둥이 일부를 분리해 주었다.
제가 입 일부를 잃은지도 모르고 텁 하고 입을 닫은 악어가 곧장 눈을 부릅떴다.
콱.
늦었다. 내 장검이 그것의 뇌를 찔러 한 큐에 보내 주었다.
팅!
직후 나는 투헨더를 발로 차올려 잡아챘다. 그런 다음에는 장검을 위로 던져 빈손을 만들고, 그렇게 비게 된 손으로 투헨더를 단단히 쥐어 횡으로 휘둘렀다.
앞에서 달려들던 머맨 두 마리가 허리 부분부터 잘려 죽었다.
이어 오른쪽에 향하게 된 투헨더는 온전히 오른손에 맡기고, 비게 된 왼손으로는 떨어지던 장검을 받았다.
촤악.
장검의 약간 어긋난 횡베기에 뱀의 머리가 목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탁. 휙휙 돌아갈 때 핏물을 털어 낸 장검이 그나마 깨끗하게 검집에 들어갔다.
“크하하하, 죽어라, 죽어라!!”
좋아. 이쪽 방면은 그래도 정리가 되었고.
나는 나보다 더 많은 킬 수를 올리는 버서커를 보며 더욱 마음 놓았다.
저치가 날뛰는 이상 인퀴지터에게 몬스터가 닿을 일은 없다. 속도도 빠르니 몬스터가 오래 살아서 인퀴지터에게 타격을 주는 일도 덜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보스 공략에 나선다.
나는 투헨더를 고쳐 잡으며 제게 창을 뻗는 머맨의 머리통을 밟고 더 높게 뛰었다.
수천 미터 상공에서 살얼음이 낀 코트 자락이 하얀 바람에 나부꼈다.
그리고 내 숨마저 하얗게 얼어붙었을 때, 나는 물줄기를 입에 그러모으는 고래 앞에 서서 투헨더를 추켜세웠다.
얼다 못해 얼음 송이가 송송 낀 머리카락이 눈을 살풋 찔렀다.
‘죽여.’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꼈는지 모비 딕이 물로 이뤄진 뱀들을 내게 쏘아 보냈지만 상관없다.
세 개의 발톱이 뱀들을 분해하고, 직선으로 뻗은 칼날이 검은 마력 기둥을 포효하듯 토해 냈다.
‘저 빌어 처먹을 새끼를 찢어 죽여.’
콰아아앙!
모비 딕이 품고 있던 물 형태의 마기가 입 밖으로 쏟아지기 전, 내 마력과 충돌하여 폭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