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흘러가지 않는다며 (7)
의심받을 것을 각오하고 데브를 살려서 데려왔다. 신전에서 죽이려 들거든 그것을 막아 낸 후 둘러댈 변명도 준비했고.
그런데 별 필요가 없더라.
미운 정이 쌓여서 이번만 봐준 쪽으로 알아서들 납득을 한 건지, 뭔지. 의심은커녕 질문도 안 던져 준 덕분이다.
죽여야 한다는 의견도 김치만두를 비롯한 일행들이 처리해 줘, 그쪽도 내가 나설 구석은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물론 만일을 대비해 데브를 복잡한 눈으로 본다든가, 오른팔을 꽉 쥔 채 이를 악문다든가 고뇌하는 척 연막은 쳐 뒀지만.
“악마를 쫓으려면 뺀질이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공허히 보내선 안 되겠지요. 하여 소성주님을 모셨습니다.”
그사이 표표하게 감시 방을 탈출한 인퀴지터가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사람들 모르게 숙소 지붕에 숨어 있길 잘했다. 하마터면 이 대화들을 전부 놓칠 뻔했다.
엿들으며 가장 행복했던 대목은 물론 방금 전 만두 두 마리가 벌인 일이겠지만 말이다.
역시 인퀴지터는 최고의 만두, 최고의 용사님이다. 고기만두 자존감 회복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했던 게 많이 덜어졌다.
“악마 토벌에 대한 상담도 드릴 예정입니다만, 그 전에 들을 것이 있지요. 소성주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각설하고 지금 집중해야 할 건 이 부분이다. 나는 그들의 얼굴이 언뜻 보이는 각도에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이미 들켰으니 더는 숨겨 봤자 의미가 없겠지요.”
그 외모를 가지고도 처연함을 넘어 처량함이 느껴지는 이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먼저 용사님의 동료분과 대적한 존재는 비류호입니다.”
“잠깐… 비류호라면……!”
“아크메이지님께선 바로 알아들으시는군요. 예, 생각하신 그 존재가 맞습니다. 서쪽 땅의 전 지배자이자 몇백 년 전 모습을 감추신 분이시죠.”
“그런 존재가 어째서…….”
아크메이지의 반문에 소성주의 표정이 잠시간 묘해졌다. 어딘가 허탈한 것 같기도 하고 속되게 표현하면 현타가 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전에, 제가 멋모르고 고양이를 하나 구해 준 적이 있습니다.”
“고양이?”
“대충 비에 젖어 오들오들 떠는 것이 불쌍하여 먹이만 던져 준 정도였는데… 그게 알고 보니 비류호였더군요.”
“…그것참 기이한 인연이로군요.”
“예. 한데 그 작은 인연이 비류호께선 굉장히 마음에 드셨던 모양입니다. 하여 그 뒤로 저에게… 조금 심히 집착을 하시더군요. 저는 본인의 것이라며…….”
소성주는 거기서 다소 긴 호흡을 쉬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태곳적 짐승의 집착이라니. 심지어 약혼자도 있는 마당인데.
소성주님 팔자도 정말 제대로 꼬였다.
“하면 저번에 제대로 대화 못 하신 것도……?”
“예? 아, 혹시 편지를 가져오신 날을 말하시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소성주는 그 물음을 두고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건 제가 아닙니다. 저인 척하던 비류호셨지.”
곤란할 만했다.
“…그거 놀라운 일이군요.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하하…….”
별개로 그날 소성주가 왜 그랬는지 드디어 납득이 간다.
연인에게서 온 편지를 두고도 좋아하는 눈치가 영 아니더니, 본인이 아니어서 그랬던 거구만.
떨떠름하다 못해 싫어하던 것도 이해가 간다.
자기가 집착하는 인간의 공식 연인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좋아할 리가 있나.
고양이 이야기를 제대로 안 한 것도 그 고양이가 본인이라서 그렇겠지.
“하면 서간은…….”
“안타깝게도 보지 못했습니다. 비류호께서 태워 버리신지라.”
아, 그러면 비린내 운운한 것도 그 때문이었겠네. 비류호가 왜 내게서 비린내를 맡는진 모르겠지만─아니면 해룡의 구슬 때문이려나?─성주의 모습으로도, 본모습으로도 두 번 다 발언했으니까.
지나가던 사람이 내게 비린내 운운하던 걸 생각하면 그 사람도 변장한 비류호였을지도?
“흐음. 좀 외람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 캄버러의 맹수 사태가…….”
“…그 또한 비류호께서 하신 일입니다. 저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분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벌이겠습니까.”
맹수 사태의 원인도 밝혀졌다. 당연히 악마의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범인이었다. 사랑에 미쳐 한 도시를 공격하는 영물이라니.
가능성은 두고 있었지만, 데브에게 수작을 부리던 악마와 이 사건은 정말 별도의 일이었나 보다.
그렇다고 이 사태의 무게감과 심각함이 사라지느냐? 그건 또 아니지만 말이다.
암, 다른 건 몰라도 피해자가 이미 나왔잖아? 그것도 사망자가? 그럼 악마고 태곳적 짐승이고 정의의 철퇴 맞아야지. 종족이 뭐든 간에 멋대로 사람을 죽인 시점에서 용서해 줄 이유는 하나도 없잖아.
그렇다고 비류호가 도시에 보탬이 되느냐면 ‘오래전 떠났다’란 말로 보아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럼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그 부분은 더 이상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제 제 의무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니까요.”
“의무라 하심은.”
“이 일의 원인은 저와 캄버러 소성주의 약혼 때문입니다. 비류호께서 이 약혼이 마음에 들지 않아 훼방을 놓으시는 것이지요. 하면, 제가 캄버러의 소성주와 헤어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
그러나 이쪽은 의견이 좀 다른 모양이다. 처벌을 논하는 게 아니라 그냥 대책만을 거론한 거다.
“하지만…….”
“저는 에드니엄의 소성주이자, 다음 대 성주가 될 사람입니다. 또한 제게 부여된 권리는 도시 사람들의 안전과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책임을 대가로 삼지요.”
“…….”
“제 권리를 위해 의무를 소홀히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이 이 자리의 무게니까요. 사실, 미아와 헤어지기 싫다는 이유로 일주일이란 시간을 낭비했던 만큼 더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캄버러는 그동안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까…….”
소성주가 가장 펄쩍 뛰었던 사람, 인퀴지터와 시선을 마주했다. “전 괜찮습니다.” 그 미소는 차라리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전, 이것이 옳은 선택 같지 않습니다. 캄버러의 성주님과 그 주민들은 무슨 죄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들에겐 죄가 없습니다. 이런 재액에 덮쳐질 이유 같은 건, 분명 없어요. 하나, 천재지변이란 건 까닭을 가지고 들이닥치는 게 아닙니다.”
“비류호는 천재지변이 아닙니다.”
“아니요, 죄를 물을 순 없는 시점에서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습니다.”
“왜 죄를 못 묻습니까!”
“인간에겐 그분께 대항할 힘이 없으니까요!”
“……!”
“…애초에, 비류호께선 인간들 사이의 법도를 따를 이유도 없습니다. 인간이 개미 몇 마리를 밟아 죽인 것을 두고 해당 개미 무리에게 사과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아는, 캄버러의 소성주는 이해해 줄 겁니다. 물론 굉장히 화를 내겠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제 도시 사람들을 지켜야 하고, 그리고… 미아와 미아의 도시 또한 지켜 주고 싶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다치고 죽어 나가지 않길 바라요.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선택으로 인해서.”
나는 캄버러에서 봤던 모 둘째와 비견되는 태도에 가탄했다.
이미 피해 입은 사람들이야 저마저도 빨리 선택 못 했다며 비난하겠지만, 그래도 제 딴에는 노력하여 내린 결론이 아닌가.
저 사람이 원해서 죽게 만든 것도 아니고, 소성주도 이제 스물 안팎으로 보인다. 그런 젊은 청년이 기꺼이 희생하여 타인을 구하려는 만큼, 그 헌신은 인정받아야 한다.
뭐, 헌신이고 나발이고 나는 그놈의 비류호란 놈팡이가 굉장히 못마땅하지만 말이다.
아무렴 이건 좋게 말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일 뿐, 현실적으로는 그냥 산 제물 아닌가.
더불어 저 커플 문제를 떠나, 짐승 사태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
에드니엄 소성주가 입을 다문다는 건 그들 또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니. 그들은 무슨 죄라고 입 다물고 넘어가야만 하는가?
“…아닙니다, 이건 이해해선 안 될 문제입니다. 이런 일방적인 희생이 이해되어선 안 됩니다!”
한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인퀴지터가 발언했다.
역시 우리 김치만두였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어렵더라도 그냥 넘어가선 안 됩니다! 반드시 벌해야 합니다!”
그래, 우리 김치만두 잘한다! 저 못돼 먹은 비류호랑 싸우자고 해! 해룡도 조졌는데 내가 비류호를 못 잡겠냐!
한 것도 없이 깡패처럼 구는 저 호랑이 새끼 잡자고! 악마 잡는 김에 저것도 때려잡아!
“제가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비류호를 벌할 수 있을 리가…….”
“태곳적 짐승이라고 무적은 아닙니다!”
“비류호께서 순순히 죄를 인정하실 리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을 죽일 순 없지 않습니까!”
에드니엄 소성주의 말에 인퀴지터의 눈이 깊어졌다.
“왜 죽이지 못합니까?”
하나만 아는 이단심문관의 눈이었다. 혹은 무언갈 깨우쳤음에도 타협을 하지 않는 우직한 사람의 눈이든가.
“권력, 재물, 힘, 그런 것에 따라 처벌의 깊이가 달라져선 안 됩니다. 그리고 살인죄의 경우 참작할 여지가 없거든 반드시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런 죄입니다, 누군가를 해한다는 것은. 하면,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십의 사람을 죽인 비류호 또한 사형 대상이지 않습니까?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까?”
“저, 심문관님. 아무리 그래도 비류호는 신앙의 대상인데…….”
“저는 서쪽 해에서 타락한 해룡을 보았습니다. 그 또한 신앙의 대상이었으나, 사람들이 그로 인해 죽어 나가는 일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칼을 들었습니다. 이것과 그것이 다릅니까?”
“…서쪽 해의 이야기는 얼핏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서해 전체가 망할 위기였지 않습니까.”
“수십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단지 본인의 욕망을 위해서. 그렇다는 건 비류호께서 사람의 목숨보다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한다는 뜻이니, 그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습니까?”
“그건…….”
“부정을 품지 않아도 악을 행하는 자는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자들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배웠으며, 많은 걸 경험한 지금도 그 판단은 똑같습니다. 한번 악을 행한 자는 무언가의 개입이 없는 한, 두 번도 세 번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학습했으니까요.”
“…….”
“다시 묻겠습니다. 아직도 죽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니요, 그건 소성주께서 판단하실 일이 아닙니다.”
인퀴지터는 강고한 시선으로 소성주를 직시했다.
“처단해야 할 악의 강함은 저희가 해결할 몫입니다.”
아, 당근빳다 죽일 수 있다고. 아까 붙어 봤을 때 그놈 별거 아니었다고.
“…안 됩니다.”
그러나 한참 만에 토해진 말은 부정이었다.
“어째서입니까?”
“정말로 죽일 수 있다고 해도… 문제는 있으니까요.”
“문제?”
“과거, 비류호가 떠나신 이래 땅의 메마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연관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비류호께서 해를 입으셨을 땐 1년 내내 땅이 메마를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건.”
“전 그런 도박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목숨만 걸린 게 아니라 주민들의 목숨도 걸려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동부 전체가 메마른다 생각하면 수천이 아니라 수십, 수백만에 달할지도 모르는 목숨이.”
이건, 인퀴지터도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수십 명을 죽인 대가를 물자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내걸 용기는 우리 둘에게 없었으므로.
“…그렇군요. 납득했습니다.”
인퀴지터가 결국 패배 선언을 했다.
“…도움이 되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아닙니다, 이건… 그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인 거니까요.”
“…대신이라 하긴 뭐하나, 작은 도움을 드릴 순 있습니다.”
갈음하듯 나선 것은 아크메이지였다.
“작은 도움이라 함은…….”
“지금 중요한 것은 맹수 사태를 하루라도 빨리 그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선 파혼이 빠르게 이뤄질 필요가 있고.”
“그렇지요……?”
“그러니 제가 마법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캄버러엔 마법사가 없을 텐데…….”
“조사를 위해 캄버러에 잠시 머물기로 한 마탑의 조사대가 있습니다. 마침 저에겐 그들과 연락할 수 있는 방도가 있고 말입니다. 전령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전달할 수 있을 겝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씁쓸해진 마음을 달래고자 잡념을 떠올렸다.
하여간 다른 태곳적 짐승들은 멀쩡했는데─해룡은 살짝 맛이 갔지만 그건 이어받을 애가 타락해서 그런 거지, 원래 성격이 더러워 보이진 않았으니─여긴 왜 이 모양이냐.
비류호면 백호잖아. 백호면 호랑이인 거고. 호랑이 인성 왜 이럼? 혹시 마늘과 쑥이 없어서 인성을 못 가졌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것밖에 도와드릴 방도가 없어서 죄송할 뿐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도움인 걸요.”
정말이지, 세상엔 왜 이렇게 불합리한 일이 많은 거야.
* * *
캄버러의 소성주, 미아는 급하게 전해진 전보에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모든 보고가 끝나 마법사가 떠나간 후, 집무실에 그대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보좌관인 요한나가 그녀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괜찮아?”
“맹수들이 습격하는 원인을 알아낸 것도 모자라, 그것이 곧 끊길 거라는데 괜찮고말고… 라 대답해야겠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겠네.”
“미아.”
“하, 너와 내가 헤어지면 해결이 될 거라고? 그러면 이제 끝날 거라고? 장난해? 사람이 죽었어! 사람이 스물다섯 명이나 죽었다고!”
미아는 주저앉은 채로 소파에 손을 올렸다. 하루에 여덟 시간 넘도록 펜을 잡으며 변형된 손톱이 소파의 천을 찢을 것처럼 할퀴었다.
“연인을 눈 뜨고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내 성의 주민들마저 죽었는데, 그 원인에게 처벌조차 하지 못한 채로 어떻게 넘어가란 거야!!”
틀렸다. 찢을 것처럼이 아니었다. 손톱이 기어코 그 두꺼운 천 조각을 꿰뚫었다.
“손, 손 다쳐.”
“어떻게, 어떻게 이래.”
“미아, 저번에도 이러다가 손 한동안 못 썼잖아. 이건 일단 놓고 말하자.”
“어떻게……!!”
요한나의 달램에 소파는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았던 몸도 억지로 일으켜져, 집무실의 의자까지 옮겨졌다.
“어떻게, 세상이 이래.”
함에도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아는 손등을 눈가에 얹었다.
솔직히 환멸이 났다. 오랫동안 잘 버텨 왔다고 생각해 왔는데, 순식간에 모든 것이 부질없다란 생각이 들 정도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여자가 거드럭대며 집안을 휘어잡는 것도 참았어. 총애받는단 이유로 사생아 새끼한테 자리를 위협받는 것도, 그 머저리 새끼의 뒤처리 담당이 되는 것도 웃으며 버텼고. 근데 그렇게 살아온 결과가 난데없는 봉변과 사랑하는 사람까지 빼앗기는 결말인가? 이게 맞아?”
“미아…….”
“후, 그래. 사생아란 말은 틀렸지. 그 X만이는 새어머니의 자식이니까. 아버지란 작자가 어머니 돌아가시기도 전에 몰래 바람을 피워 가진 자식이래도, 일단 새어머니의 피만 물려받은 자식이라 주장하고 계시니까.”
그녀는 말을 하다가 다시 분노에 차 책상을 내려쳤다. 쾅! 주먹이 엄청난 소리를 울렸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버텨 왔는데? 이제 겨우 자리를 다져서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려고 했더니만, 내 남자를 눈독 들이는 짐승 새끼 때문에 안 된다고? 그도 모자라 그 새끼한테 죽은 주민들이 있는데도 그냥 입 닥치고 넘어가야 한다고? 이게 말이 돼?”
“짐승 새끼는 아니고 비류호…….”
“숭배받든 뭐든 짐승은 짐승이야! 진정 신 대우를 받고 싶었으면 떠나질 말든가, 아니면 영원히 돌아오질 말았어야지!”
한편, 제 주군이자 친우의 성질머리를 잘 아는 요한나는 미아의 외침에 몸을 파드득 떨었다.
“내가 괴로움에 겨워 죽고 싶을 땐 얼굴을 내밀지 않은 주제에, 감히. 감히…….”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녀는 제 주군이 가여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눈치 볼 것 없다는 양 쳐들어온 새어머니와 사생아라는 사실만 숨긴 채 그 누구보다 거만하게 구는 동생 사이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전부 봐 온 까닭이다.
하물며 그 고통 속에서도 미아가 버텨 온 이유는 딱 하나, 그녀의 어머니가 도시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겨서였다.
그 유언 하나 때문에 편애하는 아버지와 견제하는 새어머니, 교만한 새남동생을 견뎌 가며 도시 사람들 모두가 칭송하는 소성주가 된 거다. 본인의 행복 따윈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그 유언 하나만을 지키겠다고.
하여 미아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에드니엄 소성주가 더 기꺼웠는데…….
“요한나.”
“응.”
“내가 더 화나는 건, 도저히 저항할 방법이 없다는 거야. 마음 같아선 그 짐승 새끼를 쳐 죽이자고 하고 싶은데, 금수 주제에 힘만 세서는…….”
“…미아.”
“아, 힘만 센 게 다가 아니지. 그 짐승을 죽인 뒤 어떻게 될지 아느냐며 떠들 작자나, 그 짐승을 죽이느니 살려 두고 그 은혜를 두고두고 받는 게 더 이익이라 외칠 사람이 더 많을 테니. 암, 그렇고말고. 본인들 가족이 죽은 게 아니면 솔직히 그게 더 이득인걸.”
“…….”
“…그런데 웃긴 건 뭔지 알아? 그러한 모든 이유로 놈을 치워 버릴 방법이, 벌할 방도가 없다는 걸 직감한 순간, 차라리 다 때려치우고 레온이랑 도망가 버리는 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단 거야.”
“……! 너……!”
“정말 꼴불견이지? 어떻게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성공적으로 도망칠 가능성은 둘째 치더라도 내가 떠나면 피해 입은 사람들은 누가 돌봐 준다고. 내가 떠나면 이 도시는 저 XXX에게 넘어갈 텐데, 그로 인한 부작용은 어떻고? 남겨진 비류호의 역정에 도시 사람들이 피 볼 확률은?”
“…미아, 너 소성주를 그 정도로…….”
“무책임하기 그지없지. 알아. 나도 아는데… 하지만 한편으론 그래. 빌어먹을. 어머니는 왜 내게 그런 유언을 남기신 거지? 지금껏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 없지만, 지금만은 너무 서러워. 우리가 누리는 권리만큼 희생해야 하는 위치인 건 알지만, 어떤 책임에도 물러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난, 나는…….”
요한나는 기어코 눈물을 터트리는 친구를 보며 다만 그녀를 꼬옥 안아 주었다.
어째서 너처럼 훌륭히 그 자리를 소화해 온 사람이 보답 하나 못 받는지.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소성주였기에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던 우리는 진정 네게 보답할 길이 없는지. 그녀 자신 또한 의문을 가지며.
* * *
“이곳인가?”
하루에 걸쳐 데브는 몸을 회복했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나, 누구 등에 업힌 채로 돌아다니다가 죽을 정도는 벗어난 느낌이었다.
더구나 악마를 잡기 위한 파티─이 정도 규모면 공대란 말이 더 어울리겠다마는─도 그 틈을 타 다 꾸려졌다.
성주가 내준 병사 서른과 능력 있는 사제만 마흔쯤 해서─마법사들은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오래 걸려 빼기로 했다─나만 합류하면 출발할 수 있는 상황이 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이 이상 시간 끌기도 캐릭터 붕괴라. 나는 더 늦게 나타날까 하던 마음을 겨우 접고,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파티가 출발한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예.”
“…마기가 느껴집니다. 이젠 저도 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반나절을 달려 어느 숲 깊숙한 곳에 도달한 순간.
“잠깐, 마기가 가까워지는─!”
“엇, 다가오는뎁쇼?”
[허, 인간 주제에 감히 나를 찾아내?]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게 미사포를 주었던 자나, 데브가 예전에 증언했던 존재와 아주 똑같은 모습의 악마였다.
역시 데브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썼는진 몰라도─.]
“죽인다, 악마.”
또한, 저 새끼가 우리 고기만두 괴롭힌 게 확실한 이상 곱게는 안 보낸다.
‘죽여.’
새끼, 딱 대라. 넌 이제 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