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흘러가지 않는 (3)
데스브링거는 찰나간 많은 것을 떠올렸다.
“……?”
그러나 무기질적인 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는 그 모든 것을 잊었다.
『그는 결국 힘만큼은 거머쥐었어.』
그저 그 말만, 우습게도 그 말들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똑같이 발버둥을 치는데도 그는 더 많은 것을, 더 깊은 복수를 이룰 수 있다고.』
당신이 악마로 인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얼마나 많은 절망과 무수한 슬픔을 거쳐 왔는지 알면서도 기어코 질투가 먼저 고개를 들고 만 거다.
우득.
그것이 부끄러워서라도 당신 앞에 설 수 없다.
그는 악마기사가 상황을 깨닫기 전, 그러니까 사람들이 몰려와 그 자신의 실체를 까발리기 전에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 기사는 그를 잡지 않았다.
“어딜 가나, 어린 사냥꾼아!”
그 기사는.
잡지 않았다.
“와악!”
“베르세르크는 하나도 이해 못 했다! 설명하고 가라!”
“에잇, 난 몰라요!!”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마구 지나치기가 무섭게 대지가 쿵 하고 울렸다. 뒤돌아볼 것도 없이 베르세르크임을 알 수 있는 무게감이었다.
인퀴지터보다 달리기가 빠르거니와 사제─일반인─들처럼 길에 구애받을 일도 없으니 가장 먼저 쫓아온 게 분명하다.
“설명하고 가라!!”
“난 모른다고요!!”
그에 저절로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평소였다면 진즉 따라잡혔을 거리는 무슨 이유에선지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굉장히 ‘빨라졌다’라는 느낌이었다.
“어린 사냥꾼아!!”
해서 그는 더더욱 힘을 내었다.
왜 갑자기 빨라졌는진 모르겠지만. 아, 아니다. 가계약을 강제할 때, 발설 금지 제약을 거는 대신 신체를 강화해 주겠다고 했으니 그로 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게 어딜 봐서 ‘약간’이란 말인가? 달리기 속도가 체감될 정도로 빨라졌는데.
데스브링거는 헛웃음을 짓고는 골목으로 냅다 들어갔다.
바라진 않았으나 신체 능력을 보정받아 비등하게 달릴 수 있는 지금이야말로 기회였다.
추적 외에도 숨는 건 그의 주특기이니, 골목을 통해 따돌린 후 어떻게든 잠적한다. 데스브링거는 그것이야말로 제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다.
마침 그는 이 도시 출생이기까지 했다. 10년은 무언가 변할지언정 모든 게 변하지도 않는 시간이었고.
할 수 있다.
저들을 떠날 수 있다.
데스브링거의 눈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사냥꾼아!”
당연하지만 베르세르크는 곧잘 따라왔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서 어지간한 기척은 다 잡아 내거니와 미친 직감으로 숨은 것도 어느 정도 특정해 내는 탓이다.
“여긴가?”
그러나 그녀는 결국 전사였다, 사냥꾼이 아니라.
“여기 같은데…….”
하니 감이라는 변수가 있을지언정 그녀의 눈을 피해 숨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다. 하물며 그는 악마기사도 속여 넘긴 전적이 있지 않은가.
벽 너머 사람의 위치도 알 수 있는 아이템도 있었고.
하므로 데스브링거는 숨을 더더욱 죽이며, 제 바로 뒤에서 고개를 내민 이를 외면했다.
“흠…….”
그가 찰싹 달라붙은 벽에 붙어 있는 창문이자, 그가 넘어왔던 창틀을 베르세르크가 짚었다.
우드득.
아귀 힘이 얼마나 센지 그냥 손을 얹고 힘 살짝 준 것만으로 창틀이 살짝이나마 으스러졌다.
그러나 끝내 이긴 건 그였다.
베르세르크가 서서히 멀어졌다.
후우. 오랫동안 참다시피 한 숨이 살짝 돌아왔다.
쾅!
“역시 없나?”
한데 그가 아이템을 꺼내려던 찰나, 멀어지는 듯하던 기척이 단숨에 돌아와 창틀을 짚었다. 데스브링거의 움직임이 미세한 털의 흔들림마저 멈출 기세로 완벽히 멎었다.
“푸흐.”
그래도 다행인 건 베르세르크가 절대 고개를 아래로 안 내렸단 점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데스브링거는 그녀가 허술한 것에 안도했다.
“하여간 감은 귀신같지…….”
그러나 허술할지언정 그에 준하는 직감이 그녀에겐 있었다. 비록 떠났으나, 안전하다 싶을 정도로 거리를 내주진 않았단 소리다.
그것도 이 주변을 뱅뱅 도는 식으로.
“후.”
위험을 감수하는 건 취향이 아니나, 세상은 언제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베르세르크가 단시간에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이고, 그를 쫓는 사람이 그녀뿐인 게 아닌 지금은 더욱 그렇다.
때문에 그는 아이템으로 베르세르크의 위치를 파악해 가며 일정한 간격으로 걸었다. 가끔씩 그녀가 방향을 틀거나 달리기 시작할 때 놀라 뛰는 일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상대가 그의 기척을 놓친 상황이라면, 그때부턴 배짱 싸움이었다. 달리는 행위는 걷는 것보다 더한 소음을 가져오고, 저 노련한 전사는 그 소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므로.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가끔 베르세르크가 큰 소리를 내면 그 발소리에 숨어 약간 더 이동.
그 외의 소리는 완벽히 절제하며 발을 내디뎠다. 내뱉는 숨에서 생명마저 느껴지지 않도록, 오롯이 적막과 고요만이 놀러 오도록 움직인 것이다.
턱턱턱.
그리고 그 커다란 덩치가 온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사라졌을 때.
그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바꿨다. 베르세르크의 직감이 드디어 힘을 잃은 것과 별개로 그를 찾으려 드는 사람은 점점 늘고 있었다.
“이런 인기는 죽어도 사양이라고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너스레를 떨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
그는 하루아침에 뒤바뀐 처지를 두고 자조하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베르세르크라는 가장 큰 위협이 사라진 이상 포위망을 벗어나기가 마냥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마기의 잔향을 쫓는 것인지 사제들이 꾸준히 추적해 오는 건 다소 불편해도, 직접적으로 목숨이 위험하진 않았단 말이다.
더불어 저 추적마저도 그가 도시를 빠져나가면 그칠 것에 불과하다. 버틸 수 있었다.
쿵!
“어딜─.”
그렇지만.
“─가려는 거지?”
그토록 피하려던 강대한 마력이 순식간에 다가와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부숴 버릴 기세로 벽을 짚어 가며 길을 막는 자세 또한 마찬가지다. 심장에 너무 안 좋다. 너무 놀라서 비명마저 못 지를 정도로.
“나, 나리…….”
데스브링거는 저보다 위에 위치한 시선을 두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악마기사가 이렇게까지 컸던가? 아군일 땐 미처 느낄 일 없어서 몰랐다. 솔직히, 손발이 달달 떨릴 만큼 무섭다.
“내가 물었을 터다.”
시이이이발. 지금까지 악마기사를 상대한 자들은 이런 공포를 느껴 온 건가?
그는 잘도 심장이 안 멈췄다고 생각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악마기사가 벽을 짚어 가며 길을 막긴 했지만, 가두기까지 한 건 아니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으게…….”
그가 악마와 가계약해 버렸다는 걸 들었을까? 단칼에 베지 않은 걸 고려하면 아직이라고 믿어 봐도 되는 건가?
그렇지만 그가 듣지 않았다면 그를 따라올 리 없는데.
데스브링거는 절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망토 사이로 숨어든 손이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오해라고 해도, 안 믿으시겠죠……?”
그는 약간의 희망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대답이 나오기도 전, 그는 스스로 가능성을 철회했다. 바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하므로, 그는 손바닥 사이에 들어온 것을 꽉 쥐었다.
“……!”
서걱!
악마기사가 그에게 선물했던 부정검이 악마기사의 뺨을 그었다.
“…치잇.”
기습적으로 머리를 노렸는데도 뺨에 혈선을 남기는 게 다인가. 그러나 처음부터 공격이 성공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 앞으로 몸을 박찼다. 호흡이 흐트러질까, 미안하단 말 하나 꺼내지도 않았다.
퍽!
그의 몸이 악마기사가 팔을 드는 바람에 생긴, 악마기사와 벽 사이의 틈에 쏙 들어갔다.
약간 부딪쳤으나 기어코 그의 몸이 악마기사의 뒤로 넘어갔다.
이걸 반응 못 해? 그런 의문은 미뤄 두었다. 악마기사의 대응이 늦된 이유가 무엇이든 그에겐 행운이었다.
죽어도 좋지만, 그래도 죽고 싶지 않은 게 지금 그의 심정이었으니까.
그의 생이 귀하거나 소중해서가 아니라 그가 여기서 죽으면 그로 인해 죽은 사람들은 뭐가 되나 싶어서, 그 이유 하나로.
탁탁탁.
하면 이제 남은 일은 죽어라 달리는 것뿐이다.
그는 악마기사가 뺨에 난 상처를 매만지는 것도 보지 못한 채 대로로 뛰쳐나갔다.
신전의 사람들이 깔려 있을 것이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악마기사에게 원거리의 적도 벨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상, 그는 사람 사이에 섞여야만 했다.
물론 이마저도 악마기사가 민간인의 피해를 감수할 사람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가 민간인의 목숨보다 악마사냥을 우선하는 사람이었다면, 데스브링거는 절대로 거리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저기다!!”
아오. 징글징글하네.
데스브링거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이들을 피해 방향을 꺾었다. 꺾고 보니 성 쪽이란 걸 알았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시야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남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성이든 대로든 골목길이든 간에.
“너!”
“아.”
샌님까지 기어코 나왔나.
그는 아이템으로 확인할 겨를이 없어, 미처 놓치고 만 기척이 제 앞에 나타난 걸 목격했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샌님이 그놈의 막으로 거리 전체를 막는다면 조금 곤란해지겠으나, 그는 그것을 막아 낼 수 있는 치졸하고 비겁한 수법을 아주 많이 알았다.
휘익!
하여 그는 빠르게 무언가를 꺼내, 허공에 흩뿌렸다.
촤악.
“컥, 커흡.”
먼젓번, 세 사람이 악마를 찾겠답시고 막무가내로 숲에 갔을 때 뒷받침을 위해 챙겨 갔던 후추─그때 빻아 두었고, 남았던─였다.
뭐, 그걸 설마 이렇게 쓰게 될 줄은 그때의 그도 몰랐겠지만 말이다.
“커헉, 컥.”
어쨌거나 그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귀한 후추를 허공으로 날리며─그다지 아깝진 않았다. 그의 돈으로 산 게 아니니까─빠르게 몸을 틀었다.
들이켜면 기침이 좀 나올 뿐, 인체에 무해한 향신료인지라 자책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추가로 무언갈 더 뿌렸다. 허공에 색색의 가루가 퍼졌다.
타악!
그는 연이어 꺼내든 부싯돌로 허공에 불티를 튀겼다.
불꽃이 가루에 옮겨붙으며 자잘한 폭발을 일으켰다. 사람에게 닿으면 약간의 따가움을 줄 수준의 폭발이었다.
그러나 이것의 목적은 타인에게 위해를 끼치고자 함이 아니다. 색을 품은 연기를 피워, 혼란을 야기하려는 것뿐이지.
“와악!!”
“뭐, 뭐, 뭐야!”
“콜록, 콜록!”
민간인들이 혼비백산하기 시작했다.
“잠시만, 비켜 주셔야─.”
“여러분 진정하시고……!”
그는 민간인들이 본의 아니게 사제들을 막고 있는 걸 보며 서둘러 왼편의 건물로 붙었다.
청과상이 자리를 펴고 있었으나 그의 다리는 좌판과 천막을 치는 기둥 따위를 밟아 손쉽게 위로 올라선다.
“콜록, 네놈. 정말로!”
대로가 아닌 건물 위를 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저 답답이에겐 원거리 요격 능력이 없되 특유의 막으로 진로를 방해할 힘이 있는 까닭이다. 살상력도 없는 능력이니 민간인 눈치 볼 것도 없고 말이다.
“신이시여!”
그때 머리 위로 금빛 막이 생성되었다. 데스브링거의 다리가 대각선으로 틀어졌다.
펄럭.
그는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면 건물에 막혀 막이 그를 누를 수 없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거리로 내려가서도 안 된다. 그는 점프함과 동시에 몸을 건물 쪽으로 틀었다.
콰직.
대각선 앞으로 날아간 몸이 다음 블록 건물 앞 허공에 다다르고, 그의 손이 그 건물의 지붕을 붙잡았다. 금빛 막의 범위에서 벗어난 지점이었다.
이후 그는 지붕 위로 훌쩍 올라가 다시 뛰었다. 막이 누르는 대신 정면에서 만들어졌을 때도 그러했다.
데스브링거는 샌님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쪽으로 구르며 계속 전진했다.
인퀴지터가 몸이 둔하여 건물 위에 못 오르고 길로만 다닐 수 있는 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어딜 간 건지 보이지도 않는 베르세르크나, 어쩐지 쫓아오지 않는 악마기사도 그렇고.
좋아, 이렇게 되면 예전에 알아내 두었던 성의 개구멍으로 탈출하자.
데스브링거는 빠르게 탈출 경로를 재설정하며 마력사용자들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아까처럼 심장 떨리는 습격을 받는 건 더는 사양이었다.
다행히 인퀴지터 빼곤 대부분 거리가 멀었다. 좀 더 안심하고 달릴 수 있었다.
* * *
신체의 자유를 되찾긴 했으나 그것이 완벽한 해방을 뜻하진 않았다.
때문에 레온 소성주는 심란한 얼굴로 정원과 연결된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얀 고양이의 형태로 변한 존재는 그의 무릎에서 골골거리며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고 있다.
미아 보고 싶어. 그는 눈물을 머금은 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생각을 반복해 떠올렸다. 당차고 굳건한 연인이 정말,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
“하아.”
미아가 보낸 서간엔 뭐가 적혀 있었을까.
간신히 귀에 담았던 손님들의 말소리를 떠올리면 ‘맹수 사태’에 대해 묻지 않았을까? 그가 편지한 것도 있고, 손님들도 고양이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비록 비류호의 방해로 망해 버렸지만.
아, 정말이지 어떻게든 상황을 알려야 하는데. 그는 만악의 근원이라 불러도 좋을 존재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고양이가 마찬가지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털 알레르기를 감수한 채 먹이를 던져 주게 만들었던, 연인을 닮은 분홍빛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
그는 울지는 못하되 웃지도 않는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꼴에 전설로 전해져 오는 짐승이라고, 털 알레르기가 일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봐주기엔 저것이 끼치는 해악이 너무 크다.
암, 미아가 연인인 것을 떠나 사람이 벌써 수십이나 죽어 버렸지 않나. 그의 도시 사람은 아니더라도 무고할 게 분명한 사람들이.
그러나… 문제는 이걸 해결할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정확힌 그가 미아와 이별한 후 저 스스로를 제물 삼아 비류호를 달래는 수밖에는.
“진상을 토해 내라!”
결국 답은 이것뿐인가.
그는 새 편지지를 꺼냈다.
본인의 사랑을 위해 사태를 방치하는 것도 정도껏이다. 지금까지 충분히 이기적으로 굴었던 만큼, 마지막 희망─미아를 통해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끊긴 지금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를 불행에 떨어트리는 한이 있더라도 모두를 위한 결단을.
미아와 미아의 도시를 안전하게 만들 결정을.
“전 성주를 죽게 만든 그놈을 잡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맹수들의 폭발적인 증가가 비류호의 탓임을 깨달은 시점에서 바로 이별을 고할 걸 그랬어. 그랬다면 미아가 조금은 덜 난처해졌을 텐데.
레온은 저도 모르게 눈물 몇 방울을 흘리며 펜대를 움직였다.
서간을 작성하려 하자 감시하려는 양 책상 위로 올라왔던 고양이가 내용물을 보고 흡족한 얼굴을 했다.
“정말 너희가 한 짓이 아니라면 당장─!”
“…아니라고 했는데도!”
그러나 이것이 모두를 위한 선택임을 알고, 연인을 위한 선택임을 알아도 차오르는 울분은 어찌할 수 없다.
그는 괜히 바깥에서 이는 농성을 두고 잉크병을 엎었다. 방울진 낙루가 후드득 추락했다.
[이런…….]
그에 고양이가 책상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사르륵. 자연스럽게 부풀어 오른 형상은 곧 백금빛 인간이 된다.
비류호의 손가락이 레온의 뺨을 훑었다.
[바깥의 저것들이 거슬리느냐. 원한다면 내 저것들을 치워 주마.]
“…그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것들이 너를 곤란케 하지 않느냐.]
여기서 나를 제일 난처하게 만드는 건 당신이다. 레온은 그 말을 꾹 삼킨 채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닙니다.”
아, 미아. 네가 너무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 사실 그것보단 네가 상황을 파악하러 직접 오는 건 아닐지 그게 너무 불안해. 구원 요청과 이별 통보가 잇달아 오면 넌 반드시 의심할 사람이니까.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진실을 파헤치려 들 여자니까…….
[그럼 어찌 우느냐?]
“그건…….”
그런 네가 좋았지만, 지금은 좀 싫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이별 편지를 보냈을 텐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네게 처음부터 고백 같은 건…….
[이런.]
비류호가 갑작스레 혀를 찼다. 레온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들렸다.
[그냥 지나가는 짐승인 줄 알았더니.]
또 무슨 문제가 벌어진 건지. 그는 비류호의 시선을 따라 집무실과 연결된 정원을 보았다.
쿵.
나무 아래로 누군가가 떨어져 내렸다. 후드 사이로 어두운 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나무 그늘로 인해 색은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인간이었구나.]
다만 이게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란 것만은 맹세할 수 있다.
레온의 얼굴이 삽시간에 흙빛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