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흘러가지 않는 (2)
있잖아, 에밋.
나는 언젠가 내가 좌절하게 된다면 그건 내 능력의 한계 때문일 거라 생각했어.
아니면 변하지 않는 현실과 그럼에도 생기는 예외가 내 각오를 꺾어 버려서 절망하게 될 거라고.
기사 나리가 꼭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아니더라.
나를 진짜 낙망하게 만드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라…….
“헉!”
데스브링거는 황급히 눈을 떴다. 악마에게 저주받은 직후 곧바로 쓰러져 얼마나 시간을 보낸 걸까.
기울어진 세상 속, 살짝 보이는 하늘은 어두컴컴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시간까지 기절해 있었단 말이야?
그는 그 사실을 두고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스륵.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담요?”
웬 담요?
“……??”
심지어 싸구려 천도 아니었다. 비단 수준까진 못 되어도 제법 보들보들한 게 용사나 메이지가 쓰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단 말이다.
“설마…….”
설마 그가 기절했다고 악마가 덮어 주고 간 건가? 설마? 진짜?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어?
데스브링거는 떨떠름함을 넘어, 벌레 씹은 표정으로 담요를 지긋이 응시했다. 바스락. 땅을 짚고 있던 손에 무언가가 닿은 건 그때였다.
“뭐야 이건 또…….”
그는 주먹만 한 가죽 주머니를 발견해, 그대로 집었다. 입구가 살짝 풀려 있었는지 내용물 몇 개가 후드득 떨어졌다.
“이건…….”
사탕이었다. 귀한 설탕을 녹여 만든 사탕.
“뭔…….”
담요에 이어 사탕까지 두고 갔다고? 악마가? 계약 안 하겠다고 하니까 억지로 가계약을 맺어 버린 개새끼가?
“허.”
이쯤 되면 병 주고 약 주고를 넘어서 어딘가 우습기까지 하다. 아무렴 악마가 이런 걸 배려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담요 없이 누워 있다고 얼어 죽거나 할 기후도 아닌데.
그렇지만 악마가 아니라고 여기기에도 좀 이상하다. 암, 악마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에게 이런 호의를 베푼단 말인가.
심지어 그는 지붕 위에 있어서 거리에선 볼 수도 없는데.
도저히 해명되지 않는 상황에 데스브링거는 물음표만 계속해서 띄웠다.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돌겠네, 진짜.”
그는 정체도 모를 이가 주고 간 사탕을 내버리고자 손을 뻗었다.
경고의 의미든 뭐든 알 바 아니었다. 악마 새끼가, 그것도 저주를 건 새끼가 줬을 수도 있다고 상상하면 치가 떨렸다.
“…….”
그러나 이상하게 손이 주머니를 놓지 않았다. 이것도 저주인가 싶을 정도였다.
“아, 젠장. 두고 갈 거면 쪽지까지 남기라고…….”
하지만, 단것은 귀하다. 너무 귀했다. 사람의 대가 없는 호의만큼이나, 참으로 귀했다.
해서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빌어먹을…….”
데스브링거는 사탕을 쥔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그리고 끝내 떨어트리길 포기했다. 역시 못 버리겠다.
“염병.”
그래. 설마 악마가 줬겠어.
그냥, 그냥 우연히 돈 많은 사람이 우연히 이 지붕 위로 올라와서 우연히 그를 발견하고 우연히 가지고 있던 사탕과 담요를 준 거겠지.
…개소리가 따로 없네.
그는 자신의 합리화가 글러 먹었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사탕을 챙겼다. 이미 저주도 걸린 마당에 따로 독을 줬겠어? 그런 사고도 있었다. 참으로 대책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파티에 합류한 이래, 대책 있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지금만 해도 그렇다. 애초에 대비책 같은 게 있었으면 그가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이제 어쩌나.”
무엇보다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깊이 사유하는 것도 멍청한 행위다.
하여 그는 앞으로 해야 할 것을 떠올려 보았다.
안타깝게도 파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악마가 남긴 말마따나, 가계약을 맺은─이 경우 ‘당한’이 더 어울리겠지만─걸 샌님이 못 알아차릴 리 없던 까닭이다.
더불어 그를 용납할 리도 없고.
변명이라도 해서 목숨을 건지자니, 그는 가계약을 당한 이유를 설명할 수조차 없다. 말하면 죽으니까.
완벽한 사면초가란 소리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는데…….”
하면 뭐 방도가 있나. 용사 파티를 등지고 떠나는 수밖에.
“그래, 차라리 잘됐어.”
가계약을 맺은 것도 그들과 마주치지 않고 도시를 떠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로 번지지 않을 거다.
그 후엔 글쎄. 운이 좋다면 악마 쪽에서 계약을 거둬 가 줄 수도 있고, 아니더라도…….
그는 최소한 제대로 된 계약을 맺을 생각이 없다. 그러니 평생 신전을 조심하면서 살아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는다. 가계약에 대한 정보도 조사하다 보면 답이 나올 가능성이 있고.
계약을 종용하러 악마가 찾아올 경우야 뭐. 그땐 죽어 주면 그만이다.
애시당초 가계약을 강제로 맺어 버린 시점에서 죽음은 반쯤 예약된 셈이지 않나. 신전에게 죽냐 악마에게 죽냐가 문제지.
“차라리 잘됐어…….”
그러니, 그러하니 그가 떠나는 게 맞다.
떠나는 게 맞아.
“차라리…….”
이것도 운명이었다고, 자의든 타의든 주제에 맞게 떠나는 것이 숙명이었다고. 그렇게 여기는 게…….
투둑.
“어?”
그게 맞는데.
눈물은 왜 제멋대로 흐르고 마는지.
“시발, 뭘 잘했다고…….”
그로 인해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때문에 이 도시 사람이 몇이나 죽었는데.
그런 주제에 분수에 맞지도 않던 자격 내려놓는 것이 뭐가 서럽다고…….
“시발…….”
데스브링거는 결국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이 죄스럽고 또 슬퍼서 도저히 일어서 있을 수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칼을 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속으로 복수심을 삼키는 거였는데.
왜, 왜 난 너를 위한답시고…….
“미안해…….”
차라리, 네가 살았어야 했어.
“에밋…….”
네가 살았어야 했어…….
* * *
바스락
“에밋…….”
달이 비끄러진 것처럼 건물 저편으로 쏙 숨을 즈음, 데스브링거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혹은 지쳐 혼절했거나.
그래도 어느 쪽이든 간에 최소한 깨어날 일은 없을 거다.
잠꼬대도 잠꼬대지만 내가 어느 정도 다가가도 깨는 기색이 안 보이거든.
“고기만두 주제에 어딜 간다는 건지.”
해서 나는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꼼꼼히 덮어 주었다. 사탕은 챙긴 것 같으므로 굳이 찾지 않았다.
“나 참. 모르는 사람이 두고 간 걸 넙죽 받는 건 안 좋은데…….”
내가 준 선물을 버리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막 기뻐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그도 그럴 게 나중에 나쁜 놈들이 비슷한 수를 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나. 그것들이 무해한 걸 놓을 리는 더더욱 없고.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한 소리 해 주고 싶은데, 차마 해 줄 수도 없다.
나는 퉁퉁 부은 얼굴로 잠든 이를 보며 한숨을 얕게 뱉었다.
저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처음 발견한 순간이 계속 떠올라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남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지붕에 널브러져 있으면 보는 사람 심정은 어떻겠냐고.
전에 악마에게 노려진 것도 있고 하다 보니, 난 처음에 죽은 줄만 알았다. 숨소리가 제때 들려오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패닉 해 있었을걸?
“고기만두가.”
나는 얄미운 청년의 콧잔등을 톡 치곤, 근처 자리에 적당히 앉았다.
옆에 골목이 있어서 뛰어내리기만 하면 몸을 숨길 수 있고, 나는 데브를 볼 수 있지만 데브는 나를 못 보는 각도의 자리였다.
아까 낮에 계속 썼던 자리기도 하다.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고,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차마 혼자 두고 갈 순 없었거든.
꿈틀거릴 때마다 계속 뛰어내렸더니─발각되면 캐붕이니까─이젠 소음 없는 착지에도 요령이 생겼다.
아까 데브가 막 깨어났을 때 안 들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뭐, 지금껏 골목에 숨어 있던 사실이 발각되지 않은 건 아마도 우연이 겹친 요행이겠지만.
“에밋…….”
그보다 아까부터 잠꼬대로 에밋이란 이름만 부르네. 혹시 에밋이 죽은 친구 이름이거나 그에 준하는 사람일까?
나는 몇 가지 추측을 늘어놓다가, 이내 집어치웠다. 아무리 가설이라지만 남의 사정을 마음대로 상상해 보는 건 역시 무례 같았다.
물론 그냥 있기엔 너무 심심하거니와 졸려서, 나는 다른 생각에 잠겼다.
예컨대 데브가 떠나려는 이유라든가, 이번에 정보길드에서 얻은 정보라든가.
특히 정보길드에서 건진 정보 중, 소성주의 부모가 대략 10년 전 사건으로 새롭게 추대된 성주 부부란 건 제법 재밌는 정보였다.
폭거를 명분으로 주민들이 원 성주일가를 척살하고 본인들을 그 자리에 올려서 그런가. 정책을 아주 주민들 위주로 펼쳤더라고.
최근에도 태도가 변하지 않은 덕분에 성군이라 불리기도 하는 것 같고.
당연하지만 그게 흑막이 아니란 증거가 되진 않는다. 이런 상황일 때의 반전을 워낙 많이 겪었어야 말이지.
단지… ‘소성주만 때때로 평소 같지 않다’란 평이 있어, 그쪽만 범죄자일 수도 있단 가능성을 좀 더 높게 사고 있다.
어느 쪽이든 아직 안도할 단계는 아니고.
“으음.”
하여 나는 좀 더 사색해 보았다.
“아, 동튼다.”
마침내 아침이 밝았다. 멀리서 버서커가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팔딱팔딱 뛰며 데스브링거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데스브링거는 잠결에 제 몸이 붕 뜨는 감각을 느꼈다. 단단하다 못해 딱딱한 것이 몸을 받치고, 한쪽 면에서 온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불편하지만 포근해, 그는 가물가물한 눈을 껌뻑였다. 자고 싶어. 약간의 욕망이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를 안아서 옮기는 건 대체 누구지?
그 순간 냉수마찰이라도 한 양 정신이 퍼득 들었다. 녹색 눈동자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오, 어린 사냥꾼아. 깼나?”
“와아악!!”
다시 잠들기 전 생각했던 게 일행들과 마주치지 않고 떠나자는 것이었다. 한데 왜 그는 베르세르크에게 들린 상태인가.
“내, 내려 주십쇼!!”
데스브링거는 갓 잡혀 올려진 생선처럼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러나 베르세르크는 유능한 전사였고, 그만큼 반사 신경이 뛰어났다.
그녀는 그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거의 다 왔는데 굳이?”
“예?”
베르세르크의 말에 데스브링거는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베르세르크가 고개 돌린 쪽을 따라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전도 아니고 신전에 마련한 그들 숙소가 고작 30m 남긴 채 존재했다. 심지어 그가 깨어나면서 지른 비명을 들은 건지, 아니면 마기를 감지하기라도 한 건지 인퀴지터가 문을 박차고 나오기까지 한 상태였다.
“바깥에 마기가……!”
인퀴지터와 그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얽혔다.
“너, 너……?”
“와아아아악!!!”
이건 진짜, 진짜진짜진짜 위기다.
데스브링거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평소보다 더 거친 움직임이 나오며 베르세르크의 모든 것을 떨쳐 냈다.
“엇… 어린 사냥꾼아, 너 힘이…….”
탁.
그의 장화가 바닥에 닿았다.
“아니, 왜, 왜, 어째서…….”
“저 이만 갑니다요!!”
“헛!”
튀자. 이렇게 도망치면 의심은 더 짙어지겠지만 어차피 변명 같은 거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러니 이미 들켜 버린 것, 살기 위해서라도 튀자.
“자, 잡으십시오, 베르세르크!”
“엥?”
“인퀴지터, 대체 무슨 일…….”
“아니, 그, 메이지님, 그게, 아! 이, 이, 일단 자, 잡아야……!”
무엇보다 지금은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인퀴지터만 알고 베르세르크는 상황 파악을 아예 못 한 까닭이다.
결정적으로 기사 나리가 자리에 없기도 하고.
반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었다가 나리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간다? 그때야말로 희망을 버려야 했다.
인퀴지터는 그나마 속도가 느리기라도 하지, 악마기사는 그마저도 그를 압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리자님, 신전 내부로 마기가 들어온─! 어엇!!”
한데 어째 상태가 순조롭게 악화─그에게─돼 가는 것 같다?
데스브링거는 우르르 달려오던 사제들을 발견하고, 그들이 자신을 보며 얼굴을 와락 찌푸리는 걸 확인했다. X됐다.
“잡아!!”
“뭐, 뭐냐? 왜 갑자기 어린 사냥꾼을 잡는 거냐?”
“인퀴지터?”
“마, 마기가…….”
그래도 나름 함께하며 쌓인 미운 정이 있다고, 샌님이 주저하는 게 행운이다.
“마기가 느껴집니다, 저치에게서.”
데스브링거는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 동요하는 인퀴지터를 보며 미묘하게 씁쓰름한 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나를 싫어한 건 아니었구나. 사이가 단절되다 못해 악연이 되기 직전인 지금에서야 깨닫는 진실이었다.
“잡아라!”
“어서 쫒아!”
“신전을 나가지 못하게 해!”
그래도 덕분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휘익. 데스브링거는 어쩐지 더 빨라진 몸으로 수월히 담을 넘었다.
“아.”
“……?”
하필이면 악마기사가 그 너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