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흘러가지 않는 (1)
데브의 빈자리를 감수한 채 처음으로 정보길드를 이용해 보았을까.
패 덕에 출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데브가 지금껏 어떤 싸움을 해 왔던 것인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100% 진심이었다. 그만큼 우리가 겪은 정보길드의 민낯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말 천박한 사람들이군요. 예의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허허…….”
아니, 게임에서도 정보 길드 소속 인물들이 싹퉁머리가 없긴 했거든?
도시마다 개인차가 있긴 했지만 공통적으로 바가지를 씌우려 하거나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엿을 먹이거나 하긴 했단 말이다.
그런데 이게, 여기는, 여기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그래도 얻을 건 얻었지 않습니까.”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는 것이… 말입니까? 아니면 채소를 얻어 오는 곳이 불분명하여 자신들도 모른다는 것?”
하. 말을 말자. 그냥 확실한 건 단 하나, 우리 고기만두가 그저 신이란 사실이다.
“정보가 없는 것도 때론 정보가 되는 법이지요. 아직은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신성력 먹는 짐승들의 표본을 얻고자 보낸 마탑의 조사대도 캄버러에 막 당도했다고 하니, 수색도 갈수록 속도가 붙을 것입니다.”
“…예!”
“그보다 전 그의 기분이 나아졌을지가 궁금…….”
우리 중 가장 앞 열에 있던 아크메이지가 숙소 문을 열었다. 끼익.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건 식탁에 앉아 있는 버서커와 데브다.
그것도 데브 쪽은 이불에 돌돌 말려 수프를 마시고 있기까지 했다.
“왔나?”
나는 그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애가 기운을 차려서 밥 먹는 것에 대한 불만? 그런 건 당연히 아니었다.
아직 음울한 표정과 감시하듯 팔짱 끼고 있는 버서커만 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먹고 있다는 게 보이지 않는가.
다만 내가 말을 잃은 이유는, 그것은.
“잘 왔다, 사제야. 이거 치료 좀 해 줘라.”
“예? 또 무슨… 너, 너 목이?!”
뺨이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목에 또 손자국을 달고 있나 싶어서였다.
“설마 또 테러를…….”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버서커로 인해 강제로 목의 상처를 보이게 된 데브가 시선을 데굴 돌리며 수프를 삼켰다.
피부에 빨간 자국이 남을 만큼 세게 목을 졸려서인가. 수프를 삼킬 때마다 눈이 찡그려지는 게 보였다.
“됐고, 가만히 있어라.”
“안 치료해도 되는데…….”
“치료해라, 사냥꾼아.”
“치료하게.”
결국 인퀴지터가 수프 그릇을 빼앗아 내려놓고, 꿍얼거리던 데브의 목에 손을 얹었다. 타인과 접촉할 일이 별로 없는 부위라 그런가. 데브가 움찔거렸다.
화악.
내게만 꺼려지는 빛이 방 안을 밝혔다. 붉은색이 곧장 가셨다.
“누군가.”
“별거 아니라니까요.”
“누군지 알아야 대응을 할 것 아닌가.”
직후 아크메이지의 취조가 시작되었다.
뭐, 데브가 잘못한 건 아니니 취조는 틀린 단어 선택이라고? 알 바냐. 우리한테 상황을 꽁꽁 숨기는 것이야말로 데브의 죄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니─.”
“본인이 본인 목을 졸랐다. 자다가.”
“나, 나리!”
그러나 우리에겐 버서커라는 든든한 감시자가 있었다.
진실을 알게 된 우리 세 사람이 경악하고, 데브가 실연당한 연인처럼 절절하게 버서커를 보았다.
당연히 그녀는 귀만 후비적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나?”
“목을 스스로 졸랐다고 했다. 베르세르크가 겨우 깨워서 끝났다.”
“아, 아아니거든요?! 이건 그냥…….”
버서커가 이런 걸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결국 이게 진실이란 건데.
미친놈. 나도 자다가 내 목을 조르진 않는다. 대체 우울증이 얼마나 심각한 거야? 아니, 애초에 우울증이란 단어로 해명이 가능한 행동인가, 이게?
“에잇, 네! 내가 했습니다. 근데 사람이 자다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한데 데브가 차라리 적반하장으로 노선을 틀던 순간, 뒤쪽에서 부들부들 떨던 인퀴지터가 쑤욱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곤 데브의 택도 없는 변명을 끊고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 멍청한 놈이!”
“……?!”
둘이 키가 비슷해서 그런가. 힘에 끌려온 데브의 이마와 인퀴지터의 이마가 꿍, 부딪쳤다.
“자다가 그럴 수 있다고? 허튼 소리!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그 따위 변명을 할 거면 차라리 입을 다물어라!”
“…다, 다물었더니 계속 캐물은 건 댁들이면서…….”
“꼬투리 잡지 마라! 뺀질이 녀석!”
너무 가까운 거리에 데브가 식겁해서 고개를 뒤로 빼었을까.
그것을 인퀴지터가 그대로 따라가 좁혔다. 코가 부딪칠락 말락 했다.
“내가 눈치가 없긴 하지만, 이런 뻔한 구라에까지 당하진 않는다!”
“구, 구라라니…….”
“인퀴지터, 그 단어는…….”
“둘이 뽀뽀하나?”
“배려해 주는 것도 정도껏이다! 네놈이 뭘 숨기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작작 해라!”
“난, 난…….”
인퀴지터가 손을 탁, 놓자 데브가 뒤로 두 발짝 휘청이며 물러났다. 가까스로 균형은 잃지 않았지만 그늘진 눈가는 무언가를 가득 눌러 담고 있다.
“차라리 말을 하든가, 그 외 수단을 취하든가. 아무튼 끙끙대지만 말고 뭘 하란 말이다! 계속해서 숨긴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나 그 가득 눌러 담겼던 것은 곧 한 가지 감정으로 화했다. 분노, 아니면…….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누가 모르는 줄 알아?!”
“……?!”
“댁이 뭘 안다고─!”
“모른다! 모르니까 말하라는 것 아닌가!”
“시발, 말하면 경멸할 거잖아!”
“……!”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범죄자라 경멸하는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데브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것에 인퀴지터의 낯빛이 단숨에 창백해졌다. 하필 꼬집힌 것이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그녀의 잘못이었던 까닭이다.
“그건─.”
“변명 따위 필요 없어요. 안 들을 거니까.”
하여 인퀴지터는 고개를 푹 숙이고, 데브는 씩씩거리며 몸을 틀었다. 목적지는 아마도 숙소를 나가는 문이다.
쾅!
나를 지나쳐 간 데브가 문을 큰 소리 나게 닫고 그 너머로 사라졌다.
남겨진 인퀴지터가 입술을 꾹 물었다. 사회생활 경험 제로에, 또래 관계도 제로처럼 보였던 이인 만큼 이 상황이 퍽 어려운가 보다.
“…이런.”
아크메이지는 이 총체적 난국에 이마를 주물렀다.
요즘 흡사 보육 교사처럼 구는 아크메이지지만, 그런 그녀라도 이런 상황까진 어떻게 할 자신이 없나 보다.
“…어린 사냥꾼 먹으라고 사 온 음식들, 다 식어 버렸다.”
버서커는 버서커 나름의 심란함을 내보였다. 자기 딴에는 데브를 위로하겠다고 사 온 음식들을 시무룩하게 응시한 것이다.
어쩐지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했다.
“…….”
여기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우중충해진 방 분위기와, 힐끗 보고 말았던 데브의 표정을 번갈아 상기하며 꾸물꾸물 움직였다.
또각.
군홧발이 적막을 깨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목표는 나가는 문이 아니라 내게 배정된 방이다.
덜컹.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철컥.
실질적인 역할은 행하지도 못할, 그러나 ‘들어오지 말라’라는 뜻만은 확실히 전할 잠금쇠도 걸어 두었다.
자, 그럼. 다시 나가야겠지.
끼익.
나는 창문을 열고 그 너머로 뛰었다. 1층이라서 별 소음은 일지 않았다.
달칵.
혹시 모르니 창문은 다시 닫아 두었다. 밖에서 안쪽 자물쇠를 잠그는 능력은 없지만, 겉으로는 티가 안 날 거다.
내 걸음이 빠르게 그리고 은밀히 신전을 벗어났다.
* * *
데스브링거는 정처 없이 마을을 걸었다.
거리를 걸은 건 아니었다. 시비가 걸릴 위험은 둘째 치더라도 저들을 감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에겐 이 도시 사람들을 마주 볼 자격이 없다.
하여 그는 지붕 위를 넘나들며 적당한 그늘을 찾았다. 귀 구멍이 없는 후드는 굉장히 답답했으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가 마땅히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후…….”
그리고 막 괜찮은 그늘을 찾았을 때, 그는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지방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
데스브링거는 문득, 스카일라가 보고 싶어졌다. 가족이라기엔 거리감이 있고, 비지니스 관계라기엔 막역한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그녀가 그를 위로하기보다 야단치고 질책할 것을 알아도 그렇다.
그는 지금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의 죄를 조목조목 따져 분노해 줄, 그렇지만 버리진 않을 사람이 필요한 거지.
아니, 버려지는 것도 사실 상관없어. 정말 바라지 않는 건, 그가 용납할 수 없는 건…….
[특권만을 누려 와 밑바닥 같은 건 볼 일도 없던 자들이 논하는 ‘죄’ 말이야. 정말 짜증나지 않아?]
“……!”
데스브링거는 다급히 자세를 잡았다. 단번에 일으켜세워진 몸이 금방이라도 튀어 갈 수 있을 것처럼 모호한 높이에서 멈춰 섰다.
“넌!”
[왜 그렇게 놀라? 새삼스럽게.]
언제 다가온 걸까. 그는 제 앞에 서 있는 존재를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상대는 그의 초조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슬그머니 은은한 미소를 띤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그저 널 도우려는 것뿐이야.]
죽을까? 이번엔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데스브링거는 무심코 가능성을 재어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살아 돌아갈’이라니. 그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해도 되는 것일까? 감히, 감히 그가.
[세상엔 뭣도 모르고 떠드는 자들이 너무 많잖아.]
생각이 강제로 끊겼다. 어느새 코앞까지 근접해 온 존재가 그의 턱을 붙잡은 까닭이다.
사르륵. 그것이 두른 은색 비단은 수중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
[아무렴, 피해를 입은 자들이나 같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라면 몰라. 같은 부조리를 겪어 본 적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 얹는 건 너무 억울해.]
“뭔 소리를─.”
[그렇잖아. 우리가 뭐, 이게 죄란 걸 모르나? 이걸로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안 가져? 아니잖아. 너는 아니잖아. 그들이 벌을 받아야 한다 외치면 마땅히 받아들일 사람이잖아. 단지, 알면서도 그것밖에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을 뿐이지. 힘이 없으니까.]
“……!”
상대의 목을 감싸고 있던 뱀이 그에게로 건너왔다. 뱀의 몸뚱이가 후드를 밀어낸 덕에 쨍하던 햇빛이 곧장 쏟아졌다.
[그래! 힘이 없어서! 돈도, 권력도 없어서!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그조차 이해 못 할 놈들이 우릴 비난하는 건 정말로 억울하다고!]
그때, 그 과거의 찰나와 같았다. 세상을 빛무리로만 가득 채우는 햇빛이었다.
[너희를 깨끗하고 고결하게 만드는 건 결국 너희가 운 좋게 특권 계층으로 태어나서일 뿐인데!]
사람을 죽이는 순간에도 그놈의 귀족 새끼만큼은 신성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던.
그 빌어먹을 태양이었다.
[죄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야. 벌을 받기 싫은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놈들이 비난하는 것만은 기분 나빠.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 놈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손가락질하는 건 역시 짜증난다고.]
“…뭔, 소리를.”
눈이 너무 부셔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그러할 것이므로.
데스브링거는 꽈 잠긴 목소리를 내었다. 상대가 빙그레 웃었다.
[너도 그렇지?]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아주 길게도 말합니다.”
[그게 내 자랑이거든. 이 검은 혀야말로 내 모든 것이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나보고 배신하라고?”
[배신? 하하, 하하핫!]
그래도 악마에게 넘어가진 않겠다. 데스브링거는 그런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가, 상대의 박장대소를 선물받았다.
[배신도 유대가 있어야 배신인 거지.]
마음 한구석이 쿡, 찔렸다.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건 그들이 네 과거를 모르기 때문이란 걸. 사실 아무도 널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어쩌면 쿡이 아니라 콱, 하고.
[넌 결국 대체할 수 있는 퍼즐 조각에 불과하니까.]
목 위를 기는 뱀의 온도가 너무도 차가웠다.
[하지만 난 달라. 널 특별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운 좋게 특권 계층으로 태어났을 뿐인 위선자들을 깔아뭉갤 힘도 줄 수 있어. 네가 처단하고자 하는 악인들도 눈치 보지 않고 도륙할 수 있게 될 거야. 네가 바라기만 한다면, 네가 원한다면.]
데스브링거는 고개를 숙여, 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늘에 속하여 보이지 않는 그림자였다.
“그 대가로 댁의 개가 되고요, 나는?”
[난 계약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아. 내게 있어 계약자는 일종의 동지니까.]
“허, 악마긴 했나 보네.”
[그럼, 내가 인간이겠어?]
찌지직.
무언가가 찢기는 소리가 났다.
[잘 생각해. 네 동료들은 나처럼 널 이해해 줄 수 없어. 네게 공감해 줄 수도 없을 테고.]
“…왜요? 왜 못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진심으로 묻는 거야? 태어났을 때부터 용사였던 사제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통해 자연스럽게 특권 계층까지 올랐을 마법사가 널 진정 헤아릴 수 있을 거라고?]
“…….”
[그들이 너를 이해하려 해 봤자 얼마나 이해하겠어. 분명 ‘복수하려는 심정은 알겠지만’으로 시작해서 결국 ‘그건 옳지 않았다’라는 말로 마무리될걸? 그들에게 해를 끼칠 자가 몇이나 되며, 있더라도 합법적으로 상대를 나락에 처박을 수 있는 권력과 힘이 있는 자들이니까.]
함에도 하얀 껍데기 속 까만 혀는 멈추지 않았다.
[오, 물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투사는 네게 뭐라 하지 않을 거야. 잘했다고 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알잖아? 그와 너의 입장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이빨 대신 혀에 독을 바른 것 같았다.
[밑바닥을 기고 진흙 위를 굴러서 겨우 한 놈을 죽인. 복수를 마친 후에는 후련해할 시간도 없이 살기 위해 뛰고 또 뛰어야 했던 너를… 과연 그 강인한 전사가 알아줄까? 너는 그 투사의 이해를 정말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
형체 없이 영혼에 새겨지며.
[악마기사는 말할 것도 없지. 너와 가장 비슷하고, 가장 닮았지만… 그는 결국 힘만큼은 거머쥐었어. 똑같이 발버둥을 치는데도 그는 더 많은 것을, 더 깊은 복수를 이룰 수 있다고.]
해독제조차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런 독을.
[결국 네 마음을 알아줄 두 사람마저 너와 비등하지 않아. 그들은 능력이 있으니까. 너처럼 밑바닥을 전전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될 사람들이니까.]
“…….”
[그래도 될 힘이 있으니까.]
데스브링거의 눈이 질끈 감겼다.
“…지랄하네요. 그렇게 말하는 댁조차 나보다 강하지 않나?”
[하하, 맞아. 난 너보다 더 강하지. 사실, 웬만한 이보다 강해. 나도 결국 위의 존재란 거야.]
“그런 주제에 별소리를─.”
[그런데, 너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것도 나뿐이지 않나?]
“……!”
[대신해서 복수해 준다거나, 네게 권력을 준다거나, 모든 걸 압도할 수 있는 재물을 앞에 쏟아 주거나, 그럴 수 있는 존재는 드물지언정 있어. 하지만 네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잖아?]
상대는 그의 턱을 놓아 주곤 뱀까지 돌려받아 간 채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났다.
물고기 비늘과 닮은 비단이 흐트러지며 그 너머로 경이로운 광경을 내보였다.
[힘. 가장 원초적이고 야만적이며, 세계의 본질인 ‘힘’. 네가 가지고 싶은 건, 바로 이거잖아?]
부우우. 거대한 고래가 상대의 바로 뒤편에서 울었다.
[비록 신은 너를 외면했지만, 나는 너를 똑바로 바라봐 주고 있어.]
솔직히, 마음 한 조각은 혹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니 나와 계약해. 나를 택해. 너를 이해 못 할 머저리들을 버려.]
아, 결국 이마저도 그가 나약한 사람이란 증거겠지만.
“…계약에 앞서,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 물어봐도 됩니까요.”
[인간은 의심이 많지. 그래. 물어보도록 해. 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답해 줄 테니.]
“첫 번째로… 댁은 누굽니까? 악마인 건 알았지만, 정확히 누군지 알고 싶어서요. 내가 계약할 악마가 누군지는 명확히 알아야 하니까.”
[아, 내가 말 안 했나?]
데스브링거는 조심스럽게 상대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상대는 너스레를 떨되 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세상이 나를 부르길, 모비 딕. 왕께서 내게 내린 자리는 시기. 너희가 그토록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7명의 대악마 중 하나다.]
예상은 했지만, 진짜 대악마였다.
데스브링거는 본능적으로 침음을 삼켰다.
“그럼 다음으로… 왜 대악마씩이나 되시는 분이 제 몸을 강제로 빼앗지 않는 겁니까? 악마기사처럼 통째로 빼앗는 게 더 편하잖아요. 거기에 나, 솔직히 약해서 계약자로 삼아도 의미 없는 수준일 거고.”
[어리석긴. 내 입장에선 너나 다른 인간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그리고 계약자로 삼았을 때 의미 있을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 애초에 계약 따위를 할 것 같아?]
“…하긴, 그렇겠네요. 몸을 차지하지 않는 것도 약해서려나.”
[당연하지. 인간같이 잘 으스러지는 몸을 차지해서 얻을 이점은 하나도 없어. 제대로 된 육신이 없거나 육체를 잃어버린 하등한 놈들이라면 모를까.]
“육체를 잃을 수도 있나 보네요, 악마는. 저도 계약하면 육체를 잃을 때 살 수 있습니까?”
[꿈도 큰 인간이구나. 하지만, 그래. 불가능한 건 아니야. 강대한 힘으로 영혼을 지상에 붙들어, 새 육신에 불어넣으면 그게 부활이니.]
“그럼 계약에 그걸 조건으로 넣는 건…….”
[그건 안 돼.]
“아, 안 됩니까.”
데스브링거는 아쉽게 됐노라 혀를 끌끌 찼다. 별개로 상대는 이제 충분히 대답해 줬다는 양, 손을 들어 올리는 중이다.
물방울이 모여드는 듯한 잔상과 함께 그 손에 종이 한 장이 생겨났다. 아주 고급스러운 종이였다.
[이 계약서에 너의 피로 네 이름을 적으면 계약이 성립돼. 글자를 모른다면 이름을 말해. 내가 글자를 알려 줄 테니.]
“…이름 꼭 말해야 합니까?”
[그게 계약의 시작이니까.]
상대는 종이를 받아 가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데스브링거는 그것을 선뜻 받아 가지 못했다.
“조금,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십쇼.”
[이런… 난 네게 충분히 줬다고 생각하는데.]
“조금, 조금이면 되니까는.”
[…그래. 난 관대하니 허용해 주지. 그렇지만 얕은 수를 부릴 생각은 마.]
그러자 갈음하듯 뱀이 날아왔다.
[이름을 안다고 계약을 강제로 진행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쯤 되면 가계약까진 그래도 가능하거든.]
콱. 뱀의 이빨이 그의 목을 뜯었다.
[말이 가계약이지, 저주에 가깝긴 하지만.]
동시에 더없이 차가운, 마치 흐르는 얼음 같은 냉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네 신체를 약간이나마 강화해 주지. 그 대가로 너는 나와 만났다는 이야기나, 우리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타인에게 일러바쳐선 안 돼. 타인이 있는 자리에서 나를 호명해서도 안 되고. 그것이 조건.]
작열통이, 아니 동렬로 인한 고통이 이러한가 싶은 감각이었다.
[참고로 죽을 걸 각오하고 문자로 남기는 것도 안 돼. 너같이 약삭빠르게 군 인간은 한둘이 아니거든.]
아, 제기랄.
[뭐, 가계약이나 맺어 버린 널 신전 놈들이 곱게 봐줄 리도 없지만.]
정보만 슬쩍 빼돌리려 했더니.
[그러니, 잘해 봐. 빨리 불러 주면 좋고.]
역시 그는 안 되나 보다.
데스브링거의 눈꺼풀이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