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50화 (150/389)

150화 모든 것이 순리대로 (10)

『괜찮아. 난 괜찮아…….』

비 대신 햇살이 투둑투둑 떨어지는 곳에서.

『네가 살아갈 수 있다면… 난, 죽는 게 무섭지 않아.』

전날 온 비에 웅덩이가 진 진흙이 바닥을 어지럽히던 순간에.

『그러니 절대로 죄책감 갖지 마.』

흰꽃처럼 웃던 이는 그의 뒤통수에 손을 얹고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촤악. 채찍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대기가 울고 가죽이 찢어졌다.

『내 죽음은 너로 인한 것이 아니야.』

어깨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던 세상은 빛으로 희뿌예져 보이는 것이 별로 없다.

제가 신성한 존재라도 되는 양 빛무리를 두른 채 벌을 내리던 인간과, 사방으로 비산하는 핏방울 따위가 다였다.

『절대로,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러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만큼은 참으로 선명했으니.

『그러니… 그러니 살렴. 살아남으렴. 어떤 역경과 고난이 네 앞에 있더라도, 너만은…….』

촤악! 마지막 채찍질에 그를 끌어안고 있던 온기가 기어코 고개를 떨구었다.

시든 꽃처럼 마르지도, 쪼그라들지도 않았으면서. 다만 꽃자루와 꽃이 분리되는 순간처럼.

『살─.』

툭.

.

.

.

“커헉!”

“어린 사냥꾼아!”

데스브링거는 꽉 막혔던 폐가 해방되는 기분을 느끼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목덜미가 얼얼한 듯 타들어 가는 듯 화한 고통을 가져왔다.

“허억, 헉.”

그러나 진정으로 아픈 건 목이 아니다. 그가 정말로 아픈 곳은, 그를 이다지도 괴롭게 하는 건…….

“숨 쉬어라. 쉬어야 한다.”

“으아아…….”

“사냥꾼아.”

차라리, 네가 나를 원망했으면 좋겠어.

내가 널 잊고 살았다고, 네가 말한 대로 살지 않았다고.

“아흑…….”

“사냥꾼아…….”

네 복수라는 이름으로 수십·수백 명의 사람을 죽음까지 내몰았다고.

내가 잘못한 모든 것을 질책하고 비난했으면 좋겠어.

“에밋…….”

그렇지만 넌 영원히 그러지 않겠지.

이미 죽어 버렸으니까.

* * *

“앞서 연락 받았습니다. 미아의 글월을 들고 오셨다고요. 감사합니다.”

내가 비린내란 중얼거림에 충격을 받았든 말든,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별것 아닙니다. 그저 가던 길이 겹치기에 부탁을 들어드린 것뿐이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이것 참 과분한 일에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용사님과 대현자님, 유명한 모험가께서 운송을 맡은 편지를 받아 본 건 제가 최초겠지요?”

내가 인사 안 했다고 시비를 걸었다기엔, 정작 나한테 불쾌한 시선은 안 던졌단 말이지?

그렇다는 건 결국 진짜 비린 냄새가 나서 비린내라고 중얼거렸다는 건데.

샤워했으니 내가 아닐 거야! 하고 여기기엔 아까 거리에서 들은 소리가 있다. 걸리는 구석이 있다 보니 괜히 찜찜해진단 소리다.

“아, 그렇지. 손님을 입구에 세워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톰, 정원의 정자에 차와 다과를 부탁드립니다.”

“예.”

“여러분들은 이쪽으로 오시지요.”

난가? 정말 난가?

진짜로 나야?

“정말 아름다운 화원입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소성주님께서 기르셨다고 들었는데, 정말입니까?”

“부족하지만 예, 그렇습니다. 오롯이 제 힘으로 키운 건 아니니만큼 자랑할 수준은 못 되지만 말입니다.”

이, 이럴 순 없다. 나는 샤워를 더 빡빡하게 해야겠다는 다짐과,─근데 지금도 생채기가 살짝씩 남을 만큼 빡빡 닦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잘 닦지─ 비싸더라도 비누를 더 좋은 걸 쓰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른 건 몰라도 냄새나는 건 양보 못 한다.

“일단 서간부터 전해 드리지요.”

어쨌거나 최소한의 격식을 차린 자리를 마련한 상대는 우리에게서 편지를 받아 갔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연인이 보낸 연서를 받은 것치고 그다지 기뻐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더랬다.

화색은커녕 눈빛이 약간 서늘해진 느낌마저 들어서.

“…안 열어 보십니까?”

“하하,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보고 싶습니다만… 부끄러워서요. 여러분의 배려는 감사하지만 공사 구분은 하겠습니다.”

심지어 그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캄버러의 소성주는 ‘그가 서간을 먼저 보려고 해도 무례로 받아들이지 말고 먼저 보게 해 줘라.’라고 했는데 말이다.

우리에게 상황을 알려 주면 된다든가, 우리에게 은어를 알려 주었으니 그걸 써서 말해 주면 된다든가. 그런 내용을 편지에 적었으니 편지를 먼저 보여 줘야만 대화가 될 거란 말도 덧붙였고.

다만 그 말은 에드니엄의 소성주가, 레온이 당연히 내간을 먼저 볼 것을 가정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약속인지 뭔지는 몰라도 그걸 당연하게 기반 삼고 갔단 말이다.

“그러시군요.”

한데 왜 지금 보려 하지 않는 걸까.

상황이 바뀐 건가?

나는 가장 먼저 그가 악마나 그 비슷한 것들에게 협박 및 감시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가설을 세워 보았다.

그러나 악마가 있었다면 인퀴지터가 모를 리 없다. 있는데도 모르는 거라면 그만큼 철저하게 숨겼단 소리니 내가 알 방도는 더더욱 없고.

무엇보다 그가 감시나 협박을 당한다고 생각하기엔, 애초에 그가 보인 태도 자체가 이상해서.

난 아까 보았던 서늘한 눈빛을 결코 잊지 않았다. 기분 탓이라고 넘기기엔 감이 별로였다.

오기 전 생각한 거지만, 성주 일가가 이미 악에 포섭되어 배신하는 건 흔한 클리셰기도 하고 말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단순히 사랑이 식은 것일 수도 있고.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때 시종이 색색의 사탕과 과자, 홍차를 싣은 트롤리와 함께 다가왔다.

“대접에 감사합니다.”

“무얼요. 많이 드시지요.”

“과, 과자들 속에 꽃이…….”

“꽃을 통째로 넣어 굳힌 사탕입니다. 저희 성의 요리사가 자신하는 작품이지요.”

꽃이 들어간 사탕이라. 데브가 왔으면 좋아했을 것 같다.

“향이 굉장히 좋습니다…….”

“하하, 주방장이 들으면 기뻐할 겁니다. 마음에 드시면 좀 싸 드리지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그럼요. 오히려 용사님께서 받아 가실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노라 전해 주면 주방장은 기뻐하다 못해 춤을 출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김치만두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는 레온이 시종을 시켜 사탕 한 움큼을 포장해 오는 것도, 그걸 우리에게 내주는 것도 전부 지켜보았다.

그가 끝내 서간을 보지 않고, 아크메이지가 맹수에 대해 물은 것에도 모른다는 답만 돌려주는 것 역시 끝까지 관찰했다.

특별히 크게 문제되는 구석은 없었으나 한번 의구심을 품으니 모든 게 수상해 보였다.

“아, 그렇지. 캄버러의 소성주님께서 부탁하시길, 레온 소성주님께서 사랑에 빠진 고양이가 궁금하다며 부디 두 눈으로 보고 와 달라 하셨는데…….”

“네?”

그래. 특히 이런 반응.

“자주 놀러 온다는 고양이 말입니다.”

“아아. 그 아이요.”

묘하게… 묘하게 반응이 늦되단 말이지?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물론 기억력이 안 좋은 걸 수도 있긴 한데…….

“…제가 결혼식 준비로 바빠서 덜 놀아 줬더니 심통이라도 났나 봅니다. 요즘 통 보이질 않네요.”

소성주란 위치의 사람이 기억력 안 좋은 것도 좀 이상하다 싶어서.

“아쉬우신가 봅니다.”

“예에. 귀여운 아이였으니까요.”

“알레르기는 괜찮아지신 겝니까? 캄버러 소성주께서 걱정하셨는데.”

“…미아가 제 걱정을 했습니까? 이것 참… 기쁘네요.”

역시 수상해.

뭐가 수상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수상해. 오랜 짬밥이 저거 이상하다고 외치고 있어.

“알레르기는 여전합니다. 다만 그 고양이가 좀 특별한 건지, 그 아이만큼은 좀 괜찮더군요. 그래서 아끼게 되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렇습니까.”

그러나 감만으로 사람에게 칼을 들이댈 순 없다.

우리는 결국 얻는 것 없이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결국 허탕이군요… 무언가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아, 아예 없는 건 아닌가? 김치만두는 사탕 꾸러미를 받았으니까. 진짜 목적이 정보였음을 고려하면 그 부분은 처참하다만.

“글쎄요… 아직은 좀 더 두고 볼 일이지요.”

그래도 아크메이지는 나와 비슷한 지점에서 의심을 품은 모양이다.

“인퀴지터, 마기는 달리 안 느껴진 게 맞습니까?”

“예? 아, 예. 한데 소성주님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캄버러의 소성주께 들은 것과 태도가 다소 달라서 말입니다. 최소한 뭐가 있을 것 같긴 하군요.”

“그렇다면…….”

“조금 더 조사해 보도록 합시다. 어차피 바로 도시를 떠날 건 아니었으니.”

“예!”

“다만… 아쉽게 되었군요. 이런 일은 그에게 적격인데, 썩 나설 컨디션이 아닌 듯 보이니.”

아. 그러네. 우리 고기만두, 지금은 차마 조사를 부탁할 상황이 아니지.

물론 데브가 없을 뿐, 정보길드 출입패 자체는 내게도 있긴 하다. 데브가 맨 처음에 줬으니까.

그러나 수단이 있으면 뭐 하나? 세상엔 숙련도라는 게 있는데. 직원D/C랄지, 같은 세력이라서 받을 수 있는 보너스 같은 것도 있고.

즉,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데브만큼의 정보를 얻어 올 거란 확신이 들지 않는다. 결국 손해란 셈이다.

“그라면… 뺀질이, 말입니까?”

“조사에 관련된 일은 항상 그가 맡았으니 말입니다. 저희 중 가장 탁월하기도 하고.”

아. 정말이지.

사회성 담당 멤버가 전멸한 시점에서도 제법 타격이다 싶었지만, 정보 조사에 직면하니 이것도 만만치 않게 뼈가 아프네.

이 파티는 은근히 데브가 하는 일이 많다.

“…….”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 조금 더 정진해야겠다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얘는 또 왜 이래.

요즘 제때 마기 탐지를 못한 게 마음에 걸렸나? 방금 기죽은 얼굴을 한 것 같은데.

“인퀴지터께선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단지 사람마다 재능이 다를 뿐이지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예… 그렇지요.”

나는 인퀴지터가 제 뺨을 짝짝 치는 걸 보았다.

“저는 저만의 일이 있지요.”

정말이지, 데브도 그렇고 인퀴지터도 그렇고. 묘하게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 * *

“손님들이 가셨습니다.”

“그래, 고생했네. 나가 보게.”

한편 레온 소성주는 집사의 말을 들은 직후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집사가 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는 손을 들었다.

“아, 비린내.”

자연스럽게 찡그려진 얼굴은 근처 허공을 손으로 저으며 환기라도 하는 양 군다.

“이곳이 바다도 아니건만, 이 몸이 어찌 해산물의 냄새나 맡고 있어야 하는지.”

그래도 완전히 가시지 않는 냄새는 계속 코를 자극하니.

레온 소성주는 손수건으로 코를 감싼 채 다시 정원으로 향했다. 사람을 물린 정원은 꽃과 나무, 풀잎이 무성함에도 묘하게 서늘한 기가 감돈다.

“누가 바다 것의 선택을 받은 놈이 아니랄까 봐, 눈치도 참 없다.”

스르륵. 그가 발을 내딛는 구간 구간마다 새싹들이 잎과 가지를 바짝 뻗었다.

부자연스러운 성장이 아닌, 흘러넘치는 생명과 에너지로 고개를 드는 모습이었다.

“나의 숲에서 난동을 부린 것도 경고로 눈감아 주었고, 이곳에 올 때도 아이들을 보내어 신호를 주었음에도 기어코 이 땅까지 오다니.”

그리고 그가 정원 한편의 미로로 들어섰을 때.

사람의 키보다 높은 식목들이 일제히 꽃을 피워 냈다. 시기에 맞지 않는 꽃 내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물며 더러운 것의 글월을 지닌 채로.”

심지어 그가 어느 구간에 다다랐을 땐, 벽을 형성하던 식목이 양옆으로 가지를 치웠다. 마치 제 속을 내보이려는 형상이었다.

“읍, 으읍.”

그러나 놀라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갈라진 수풀 사이엔 풀과 넝쿨에 온몸이 묶인 또 한 명의 레온 소성주가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느냐? 미안하구나. 하지만 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묶인 상대를 들여다보던 레온 소성주는, 아니 레온 소성주를 가장했던 무언가는 싱긋 웃었다.

“이것을 네가 받는 꼴만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파스슥. 그 손에 들려 있던 연서는 한순간에 말라비틀어지더니 곧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으읍!”

묶여 있는 소성주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왜, 서간 속 내용이 궁금하더냐.”

반면 레온 소성주를 가장한 것은 싱그럽게 웃었다. 하얀 얼굴과 신체는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 상태다.

“사랑스러운 것.”

판판했던 가슴과 직선에 가깝던 허리는 가슴이 부풀고 허리가 오목하게 들어가, 여인의 것에 가깝도록 바뀌었다.

어중간한 길이의 단발은 발끝까지 길어짐과 동시에 백금빛으로 물드는 중이다.

“내가 보게 해 줄 리 없지 않느냐.”

또한 부드럽던 눈매는 예리하게 늘어지며 붉은 꼬릿깃을 펼쳤으니.

옷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부드러울 뿐 흔한 천옷이었던 차림은 하얀 모피 망토를 가장 겉으로 하여, 금과 보석 따위로 장식한 비단 재질로 뒤바뀌었다.

짤랑짤랑.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귀고리와 목걸이, 팔찌 따위가 번쩍번쩍 광채를 흘렸다.

인간이지만, 어딘가 인간 같지 않은 복식과 모습이었다.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 이해하마. 인간은 어리석으니, 진실을 몰라볼 때가 종종 있지 않느냐.]

더욱이 그것을 인간 같지 않도록 만드는 건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울리게 된 목소리라.

[그러나 혼인은 아니 된다.]

그것은 식물들을 물러 레온 소성주의 팔다리를 자유롭게 해 주고, 입을 결박하던 잎사귀들도 치웠다.

“…너!”

그러나 정작 풀려난 소성주는 차마 한 치도 움직이지 못했다.

백과 금으로만 이뤄진 존재가 본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음이 첫 번째 이유요, 그것이 그의 몸을 꽉 끌어안았음이 두 번째 이유였다.

[결코 허하지 않겠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네 곁에 설 수 있는 것은 이 비류호뿐이니라.]

상대의 정체가, 감히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더는 부정하지 말고 순리에 따르거라.]

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비에 젖어 떨고 있던 흰 고양이에게 먹이를 던져 주지 않았을 텐데.

[하면 너에게 가뭄 속에서도 피는 생명과 영원히 지지 않을 풍요를 선물하겠다.]

한 번의 동정으로 인생을 말아먹게 된 레온 소성주는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연인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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