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모든 것이 순리대로 (7)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우리는 별 탈 없이 백묘 능선을 넘었다. 그러니까 안개에 독이 껴 있어서 중독되는 일도 없고, 안개에 숨어 공격을 가해 오는 적도 없었단 소리다. 함정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고. 이상한 접촉도 없었고.
물론 짐승의 습격은 꾸준히 이어지다 못해 폭발적으로 증가하긴 했는데…….
그것도 백묘 능선을 넘으니 서서히 줄어들었다.
짐승이 없는 건 아닌데 다들 우리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두어 번 마주친 맹수들이 우릴 힐끗 보다가 휙 간 것을 토대로 세운 추측이다.
“어린 사냥꾼아, 괜찮나?”
그렇다고 모두가 멀쩡하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건 확실한지, 에드니엄으로 다가갈수록 데브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밤에 자면서 끙끙거린 걸 고려하면 악몽을 꿨을 가능성도 제법 농후하다.
“괘, 괜찮습니다.”
나는 슬슬, 아니 아주 많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표정이 풍부한 듯하면서도 중요할 땐 은근히 포커페이스인 애가 데브인데, 얘 지금 표정 관리를 거의 못하고 있거든.
허옇게 뜬 안색만 봐도 그렇다. 얼굴만 무표정이면 뭐 해? 눈이 거무죽죽한데.
“축복… 은 필요 없나.”
“…됐네요. 신을 모시지도 않는 마당에 축복은 무슨 축복.”
항상 컨셉질 하지 말걸이라며 후회하고 있지만, 지금은 유독 더 후회된다. 컨셉만 아니었어도 우리 고기만두 행복김밥 만들어 줬을 텐데.
“신께선 자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도 관대하시다.”
“됐다니까요.”
“그런가…….”
와중에 인퀴지터도 실패했다. 나 대하던 걸 생각하면 여기서 더 강경하게 나갈까 싶었으나 이후 반응을 보니 그럴 기미는 없다.
해 주기 싫다기보단 해 줘도 되나? 하고 고민하는 느낌이다. 이제 막 친해지려는 사이를 두고 선을 가늠하는 사람처럼.
“축복받으면 기분 좋은데…….”
“아니, 왜 댁이 더 실망하는데요.”
음, 이 상황에 구질만두가 되어 버린 김치만두가 웃기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지. 그렇지만 너무 귀여운데. 김치만두가 시무룩해하니까 당황해서 이번엔 역으로 눈치 보는 고기만두도 그렇고.
“실망 안 했다.”
“뻥치지 마요. 누가 봐도 언짢아 보이는데.”
“안 언짢다니까.”
“구라 즐.”
“이익!!”
그리고 결과는 역시 싸움이구나.
차라리 낫다. 투닥거리다 보면 이상한 생각은 안 하게 되니까.
“이 뺀질이가!”
“샌님이!”
“망종!”
“고집불통!”
“멍청이!”
“허,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요, 교단깡패님?!”
“난 깡패 아니다!!”
근데 너희 정신연령이 10살은 족히 어려진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이냐?
“허허, 오늘도 다들 기운차군요.”
“으하핫. 어린 사냥꾼이 다시 활발해졌다.”
나는 아크메이지나 베르세르크처럼 피식 웃으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러곤 드디어 끝을 보이는 숲을 향해 걸음을 힘차게 내디뎠다. 잘린 것처럼 뚝 끊긴 숲 바깥엔 경사진 평원이 언듯 보인다.
또한 그 평원에 발을 디뎠을 때는 저 멀리 굴곡진 몇 개의 언덕과 희부옇게 보이는 돌산들이 탁 트인 시야를 가득 채우니.
그 가운데 도시 하나가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에드니엄이었다.
“도시가 보이는군요. 생각보다는 일찍 도착할 것 같습니다. 하루는 더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오! 드디어 술을 먹을 수 있나?”
“보기보다 평원이 더 넓으니, 그렇게 일찍 도착하지도 않을 겁니다.”
“…….”
노숙이야 익숙해져 버린 지 오래라 더 늦게 도착해도 상관은 없었겠지만…….
나는 데브의 숨소리를 살폈다. 호흡이 잠깐 사이에 좀 더 거칠어지고 가쁘게 변했다. 힐끗 돌린 시야에 비친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다.
아무래도, 이번 도시에서 쟨 절대 혼자 두면 안 되겠다.
다각다각.
도시의 위치를 가늠하느라 잠시 멈췄던 말발굽 소리가 다시금 이어지기 시작했다.
* * *
“땅이 메마른다더니, 정말로 건조하군요.”
멀리 있을 땐 녹색 평야처럼 보였던 에드니엄의 평원은 자세히 살펴보면 약간의 노란빛을 띠었다.
추수의 시기가 도래해서 그런 게 아닌, 수분 부족으로 바짝 말라 시든 것이다.
일부 지대는 건조해지다 못해 풀들이 삭아 흙을 드러내기도 했다. 푸스스스. 바람이 불 때마다 모래 섞인 바람이 발목 근처를 쓸었다.
“…그래서.”
“음?”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요. 불씨가 튀면 들불로 번질 수 있으니까.”
“아, 확실히. 불이 번지면 위험하겠군.”
데브가 목멘 소리로 작게 충고하곤 말을 재촉했다. 우리의 위치는 이제 성의 코앞이라, 검문소만 통과하면 된다.
데브가 후드를 잡아당겨 코까지 가려지도록 내렸다.
“우린 캄버러에서 온 모험가들일세. 통행패로는…….”
검문소에서는 그게 더 심했다. 데브는 아크메이지가 도맡아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고개를 푹 숙인 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소리조차 그러했다. 평상시 인퀴지터를 놀리며 시간을 보내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긴장된 분위기다.
“녹색 머리네요?”
“무슨 문제 있는가?”
“아, 아닙니다.”
그나마 운 좋게도 검문은 일찍 끝났다. 경비병의 시선이 기이하리만치 데브에게 자주 향했지만 문제로 불거지진 않았다.
적어도 알아보는 눈치는 아니었으니까.
“베르세르크 배고프다.”
“어서 신전으로 가지요.”
“신전엔 포도주밖에 없어서 싫은데.”
“하면 짐만 풀고 나와서 먹어도 되지 않나.”
단 거라도 먹여서 슈거하이를 노려 본다면… 역시 무리겠지. 젠장. 난 왜 이딴 컨셉을 잡아서!
“그보다 이 도시는 참 조용하군요. 거리도 깨끗하고.”
“이게 깨끗한 건가? 베르세르크 눈에는 더 더러워 보인다.”
“거리 자체는 특별히 깨끗하거나 조용하지 않아서 그런 걸세. 다만 인퀴지터께서 그렇게 느끼는 건… 아마 걸인이나 호객 행위를 하는 아이들이 덜 보여서겠지요.”
“아! 그렇군요!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나는 데브의 눈치를 보다 말고 인퀴지터처럼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타 도시에 비해 뭔가 고요하다 싶었더니만, 정말 아이들이 적다.
보통 도시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게 좋은 여관을 알려 주겠다며 떠드는 아이들인데 말이다.
“왜 적은 걸까요?”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수가 적은 것뿐이니 법으로 금지한 것은 아닐 테고. 아이들 자체가 적은 도시라기엔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이 많으니…….”
아크메이지가 턱을 쓰다듬으며 마지막 문장을 뱉었다.
“보통 호객 행위를 맡는 아이들이 여관 주인의 자식이거나 길거리 고아임을 고려하면 아마 후자가 적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데브가 몸을 눈에 띄게 떨었다. 하필 일행의 뒤쪽─나와 같은 열─에 서 있어서 발언자는 보지 못할 움직임이었다.
“길거리를 나도는 고아가 적다니. 좋은 곳이군요.”
아니야, 그거 아니야. 아마도 높은 확률로 아니야.
“신기하다. 고아가 적은 도시도 있나?”
버서커 너도 스톱, 스톱!
폭탄을 굽는 장작불에 물을 끼얹기는커녕 땔깜을 추가하는 사람들을 보는 게 이런 심정일까.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안면을 찰싹찰싹 때렸다.
데브를 둘러싼 공기가 실시간으로 수직 낙하 중이라 내 마음은 더 불편했다.
“글쎄요. 꼭 좋은 신호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성주의 치세 덕분일 수도 있지만 아이들을 다른 곳에 데려가는 자가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아. 하면 설마 악마숭배자들이……!”
“모르지요. 도시에 마기가 느껴지진 않노라 하셨으니.”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저희가 이곳에 온 것 아닙니까. 물론 캄버러의 소성주가 부탁한 것도 전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와중에 우리가 이 도시에 와야 했던 이유까지 남아 있다.
어쩌면 이 도시에 암약 중일지 모르는 암 덩어리들로 인해, 우리는 이 사항을 조사할 수밖에 없단 소리다.
벌써부터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배고픕니다요. 어서 가기나 합시다. 안 가요?”
“나 배고프다! 가자!”
그래도 데브가 직접 발언한 덕에 이번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나는 노심초사하며 신전으로 향했다.
구걸하는 거지와 고아 출신 소매치기가 덜 보이는 거리는 치안이 좋다는 느낌보다 어쩐지 을씬한 느낌을 가져온다.
“정말 구걸하는 사람들이 잘 안 보이는군요…….”
“밥 먼저 먹고 가면 안 되나?”
그건 아마, 거리에서 보이는 일정 나이대 사람들이 죄다 상처를 달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것도 보통 상흔이 아닌 것을. 꼭 투쟁한 사람들에게 새겨질 법한 흉터 따위를.
“…저쪽 골목에 맛집 있어요.”
“응?”
“오!”
“없어졌을 수도 있고요. 저도 예전에 들었던 거라.”
그래도 아직 말할 여유는 있나 보다. 데브가 차분히 한쪽을 가리켰다. 버서커는 물론 인퀴지터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김치만두도 은근히 허기졌던 것 같다.
“하면 그쪽을 먼저 들렀다 가지요.”
결국 패배한 건 아크메이지였다. 말과 짐이야 마법으로 때울 수 있으니 내린 결정일 것이다. 의뢰도 엄청나게 급한 건은 아니었고.
“말은 제게 주십쇼.”
“자네에게?”
“거기 마구간 없어요, 골목 식당이라. 전 별로 배 안 고프니까, 대신 신전에 놓고 오겠습니다요.”
아, 말할 여유만 있었군.
“…자네가 가면 우린 식당을 어찌 찾아가나?”
“아.”
진짜 말할 여유만 있었어.
“아이 씨…….”
“일단 가서 보고 결정하게나. 사라졌을 수도 있다고 자네가 직접 말하지 않았나.”
“예에.”
이거 진짜 괜찮나…….
“아, 말이라면 아는 공터가 있습니다. 심부름꾼을 시켜서 지키도록 하지요.”
다행히 데브가 아는 맛집은 남아 있었다. 심지어 말도 보관할 수 있었다.
비록 심부름꾼을 못 미더워한─어쩔 수 없다. 말은 너무 비싼 생물이고 심부름꾼 아이는 너무 작았다. 성인이 마음먹고 덤비면 힘도 못 쓸 것 같은 수준으로─아크메이지가 결계를 추가로 치고 와야 했지만 말이다.
“제가 지켜도 됐는데…….”
“밥을 굳이 굶을 필요 있나. 먼 거리도 아니고 일반인 정도면 충분히 대응이 가능한 결계니 마음 놓게.”
“…….”
“자,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비법으로 만든 수프입니다.”
“오! 비법 수프!”
차라리 내가 버서커처럼 단어 하나에 싱글벙글할 정도로 단순했다면…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었겠지. 젠장.
나는 질투에 가까운 한탄과 함께 스튜를 입에 넣었다. 진한 국물이 혀를 감싸 안았다. 생각지도 못한 진짜 깊은 맛이었다.
“…맛있습니다!”
“재료가 신선하군. 땅이 메마르는 만큼 채소의 질이 떨어질 걸 각오했는데.”
“하하. 저희 소성주님 수완이 좋아서 말입니다. 그분의 손만 닿는다 싶으면 마르던 식물들이 죄다 생생해져서, 채소가 부족할 걱정은 덜합니다. 아, 그렇지만 고기까진 무리여서 고기는 좀 적습니다.”
“그건 괜찮네.”
토마토가 베이스라 더 좋아. 나는 같이 나온 호밀빵을 국물에 찍어 먹으며 배를 천천히 채웠다.
데브도 맛있는 음식 앞에선 날카로웠던 신경이 누그러들 수밖에 없는지, 한 입 먹고 나서부턴 표정이 좀 풀어졌다.
“주인장, 한 그릇 더!”
“예엡!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아주 마음에 든다!”
“저, 저도 한 그릇 더 부탁드립니다!”
여기 진짜 맛집이네. 데브야 들었다고 말했지만, 아마 본인이 알던 집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 긴 시간 동안 맛이 안 변한 것도 너무 좋다.
여긴 유행이랄 게 없고 업종 바꾸기도 쉽지 않으니─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업을 잇는 걸 제 팔자로 여길 정도로─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복스럽게도 드시네요들.”
“정말 맛있습니다.”
“베르세르크는 여기가 좋아졌다!”
다만 말 보관 비용 겸 식사비를 선불로 어마어마하게 지불한 까닭일까. 아니면 시간대가 애매하여 우리밖에 손님이 없던 탓일까.
주인장은 요리를 내올 때 빼곤 우리 테이블 근처에 서서 우릴 지켜보았다. 종종 사교성 넘치게 말을 걸어온 건 덤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호객 행위를 하는 아이들이나 걸인들이 적던데… 달리 이유가 있습니까?”
“어르신 같으신데 말 편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적은 건… 음. 오래전부터 그랬습니다. 하하.”
“아, 오래전부터.”
“예에. 예전에 일이 좀 있었어서.”
예컨대 이런 정보 교류를 해냈단 소리다.
물론 평소에 이런 것을 도맡던 데브는 나설 상황이 못 되어서, 갈음하듯 아크메이지가 나서야 했지만.
“아, 그렇지. 저… 손님.”
“음?”
“손님들은 모험가… 신 건가요? 이제 막 도시에 들어오신?”
“그렇네만.”
“하면, 그. 이런 말 드리긴 뭐합니다만, 저쪽 일행분께 조심하시란 말을…….”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러나 정보 교류는 좋아도, 이런 말까지 듣게 된 건 정말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이 도시 시민 중 일부… 사람들이 녹색이 도는 머리카락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데브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녹발을… 말입니까?”
“예에.”
“어째서?”
인퀴지터의 질문에 주인장이 살짝 난처한 얼굴을 했다. 머쓱하게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팔에서는 언뜻 굵직한 흉터가 보인다.
“그, 녹색 머리카락을 지닌 분 앞에서 할 말은 아닌데.”
심지어 다리 한쪽을 자세히 살펴보거든, 움직임이 약간 부자연스러운 것을 알 수 있으니.
“저희 도시에선 녹색 머리의 사람이 피를 불러온다는… 그런 소문이 있거든요.”
나는 그 말을 두고 똑같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과거에 있던 사건 때문이라고 못 박은 만큼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니긴 하지만, 데브를 저격하려고 꺼낸 의도도 아마 아니겠지만.
그래도 누구 앞에서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냥 안 했으면 좋겠다.
그게 설사 경고의 의미라도 그래. 당사자에겐 안 들리게 말해 줄 수 있잖아.
“그건 너무 비논리적인 것 같은데…….”
“그 소문도 예전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생긴 건가?”
“그…….”
드르륵!
주인장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나는 의자를 끌며 일어섰다.
데브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걸 눈치채고 한발 빨리 한 행동이었다.
“자네……?”
“손님?”
데브가 여기 남아 있을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쟤가 나간 후 내가 따라 나가면 캐붕이니까…….
“입맛만 버렸군.”
그럴 바에야 내가 먼저 나가고 만다.